2016년 2월 25일 목요일

★★★ 오늘날 세상은 저주의 질서 아래 있어ㅡ생명의 질서 아래 있다고 착각하는 모든 이에게 화가 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해 왔음이니, 거짓말은 그 속성상 듣기에 달콤한 말로 접근해오는 것이지 절대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로 가까이하는 법이 없는데 성경은 쓴 말부터 먼저 하고 쓴 소리로 끝난다.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는 경우는 특별히 적대 감정이 있거나 그런 관계에 있을 때 한하는데 그런 것 전혀 없이 사랑으로 말하고 좋은 감정으로 이야기하면서 쓴 소리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할 때, 거기에는 한 톨의 거짓말도 개입할 여지가 없음은 몇 번이나 강조해도 좋다.

너는 죄인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악인이다, 죄를 회개하라 등의 소리는 결코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뿐인가, 죄를 회개하여 의인이 되면 이 악한 세상에서 당당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세월이 갈수록 정도는 더 심해지고 결코 완화되지 않는다고 미리 경고하시면서 마음을 다잡으라 하셨다. 사탄은 성경의 이 진실된 색깔을 흐리게 하려고 가짜를 만들어놓고 그것이 참된 성경 해석인 양 속여 왔다.

즉 세상에 군림하는 종교를 만들지 않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 받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산다고 속이지를 않나, 그래서 기독교가 세상 최고 유수의 종교가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니, 성경에 그런 쓴 내용이 있지만 괜히 헛소리라고 믿게끔 해놓은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난해하다 해서 성경 자체를 읽으려 하는 마음을 효과 있게 지금까지 차단시켜 오는 데에 성공했었다. 사탄이 간악하기보다 인생이 너무 어리석다고 해야 바른 해석일까, 둘의 합작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해석이라 할 것도 없다. 어렵거나 소견이 분분할 때 해석이라 하는 것이지 그대로 알아들으면 되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말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즉 이 한 가지 사실 즉 쓴 소리로 일관하는 성경이라고 마음 속에 깊이 묻어 두기만 해도 사탄의 온갖 공격을 물리치는 데에 100% 효능을 발휘할 것이다. 예로부터 말하기를 양약(良藥)은 쓰다고 했었다. 적 그리스도의 출현은 달콤한 말로 시작하는 것이 특색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거짓말이요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 당장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좋아진다든가 죽지 않는 초자연계 육체가 된다든가 등등의 너스레를 떨 것이다.

왜 성경 즉 진실과 진리에 속한 것이 쓴 소리를 하고 달콤한 것을 앞세우지 않느냐 그 이유가 있다. 처음부터 세상은 인간(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저주 받은 죽음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애초에는 축복하셨다. 그러나 그 후 범죄함으로써 저주가 임한 것이다. 고로 축복과 저주가 함께 병존하는 것 같게 보일지라도 나중에 온 죽음의 저주가 앞서 있던 축복을 번복시켜버린 형상이라 저주가 주류를 이룸이다.

그러므로 이 엄연한 현실이 되어 있는 저주를 무시하는 그 어떤 것이든 거짓이요 속임수이지 진리 진실일 수 없다. 힌두교의 고행(苦行), 불교의 고해(苦海-세상을 보는 관점), 무상(덧없음) 등의 강조는 그 원인을 무시하고 다시 말해 원인이 있는 결과로는 보지 않고 처음부터 이런 것이 있어 온 양으로 착각하는 미망(迷妄)에 속한다. 아니라면 이 세상 신의 책동으로 만들어진 미신일 뿐이다.

모든 것이 인과 관계라고 말은 하면서도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이 사실을 부정하니 수박 겉 핥기 또는 아전인수 격의 둘러대기, 같다 붙이기에 불과할 뿐이다. 모든 것은 인과(因果), 주종(主從), 대소(大小) 관계에 있다는 3위1체 원리에 비추어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능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억지로 부인하니(현재의 세상 모든 것 즉 죽음과 고난 고통 등이 '원인'이 있는 한 커다란 '결과'라는 사실을) 여기서도 진실과 거짓의 분기점이 드러난다.

고로 이상의 사실로써 성경이 진실 진리의 기록임이 이미 입증되어 있는 것이니, 3위1체 원리니 3운법칙이니 하는 것 모두 이 기본 증명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고 단지 방증(傍證)에 그칠 따름이다. 사실상 성경은 이런 것도 필요 없는 것이다. 다만 "과학, 과학" 하면서 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에게 그런 어리석은 교만을 버리고 진리로 돌아오라는 뜻으로 이런 것까지도 밝히시고 알려주심으로 회개하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온 세상에 전달하시는 것뿐이다.
 

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생명)을 사랑하면 잃고 미워해야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 하셨을까.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따르면 되는 것이니 무슨 토를 다느냐 할 것이 아니라, 이유 없는 말씀을 하실 리 없으니, 시험하기 위한 방편으로만 그렇게 말씀하실 리도 없다. 다시 말해 저주 받아 생명이 아닌 죽음에 속한 세상이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니 생명을 사랑해야지 죽음을 왜 사랑하겠는가.

죽음의 세상이라면 그냥 폐기되면 그뿐이지 왜 지금까지 존속하고(존속하기 때문에 불교와 같은 종교가 위와 같은 이유로 버젓이 행세하고 있지만) 있는가 할 때 생명 누림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음이다. 그 다른 목적이 다름아닌 죽은 사람 다시 살려내는 생명의 일, 하나님의 사업에 진력하라 하심이다. 이 사람 살리는 제사장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만 전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니, 기도가 있어야 하고 이 기도를 뒷받침하는 것이 제물로서의 고난 받음인 것이다(롬 12:1).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신 것처럼 희생 제물로서의 고난 고통 죽음이다.

모세 율법의 희생 제물에 관한 제도(그리스도를 상징하는)가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은 자연계에 속한 양을 죽여 그 피 묻은 가죽으로 아담 부부의 벌거벗은(초자연계 육체의 영광이 사라지고 자연계 육체로만 남는) 몸을 가려주시는 옷으로 해 입히신 것이다. 비록 자연계 생물이지만 일부러 그 생명을 강제로 끊으셨다는 데에 크나큰 중요 의미가 있는 것이니 자기 때문이 아닌 남(인간)을 위해 희생된 첫 사례 곧 제물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나 향유할 생명인데도 강제로 끊기는 비극은 범죄로 죽음(영원히 살고 결코 죽지 않게 창조된 생명이 끊기는)에 이른 인간의 비극에 한 몸 체제(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머리로 하는 몸으로서의 기능인 것)를 기반으로 하는 동참함 즉 하나로 함께 합류(合流)함인 것. 여기서 가인과 아벨의 인식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들은 대로 양의 희생 제물적 성격의 죽음에 대해 남다른 감회가 깊어 양치기 일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하나님은 그러한 의미에서 가인의 예물(첫 농사의 첫 수확)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예물(인간의 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그 첫 희생 양의 선례를 따른)을 받으신 것. 그러면 가인으로서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든 처음부터 알았든 간에 하나님께서 양을 바치는 예물을 기뻐하심을 보았으니 자기도 그 다음부터는 양으로 예물(제물)로 드리면 되는 것뿐인데 쓸데없는 시기심이 발동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부터 인간의 범죄의 대가로서의 저주와 죽음과 결부된 제물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다. 물론 이는 장차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의 희생 양으로서 인간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는 그렇게 함으로써만 인생에게 구원(영생에로의 복귀)이 가능해지는 뜻을 명백히 나타내심이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즉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를 끼치지 않았음에도 자기 손으로 죽게 만드는 살인극의 비극도 비극이지만 이와 같이 죽을 필요가 없는 생명체까지 죽음을 맛보아야 하는 저주(죄로 인한)의 소용돌이 속에 신음하는 세상의 참극이 비롯된 것이다. 이 비극적 저주의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이 사실을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성경에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이 자연계 생물도 처음에는 썩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아담의 범죄로 저주를 받아 이렇게 된 것일까. 왜냐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인들이 들어가는 곳에서는 불도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 하셨기 때문이다(막 9:48). 최소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가 되면 구더기도 불멸이 된다. 이 점 마음에 간직해둘 만하다. 이 정도로써 이 세상이 저주 받은 것이 명백할진대, 이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어디서 생겨나겠는가. 싹 가셔버린다 해도 좋은 것이다. 저주 받은 세상 사랑하여 무엇을 어찌하겠다는 것인가. 전연 이유가 없다. 

이 모두 하나님 지으신 피조물이 한 몸 체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지체라도 고통 당하면 나머지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당한다. 성경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설명하여 강조해놓고 있다(고전 12:26). 피조물과 하나되신 하나님 친히 고통 받으시는 사실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그 명백한 증거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하나이시므로 친히 그 십자가 고통에 동참하심은 물론이다.

다시 역설하지만 지금까지도 이렇게 저주 받은 세상이요 그래서 고통 고난 죽음의 세상인 것이다. 이런데도 이 원인을 알려고는 않고 처음부터 세상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얼마나 황당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인가. 그런 종교는 사탄에게 눈이 감겨져(고후 4:4) 보지 못해서 그러하지만, 성경도 알고 하나님도 믿는다면서 세상에서 축복 받아 살 수 있다고 믿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종교일진대 더욱 가증스럽다고 하지 않겠는가. 사탄에 꺼둘리기는 똑같은 것이다.

고난 받음은 죽음에 속하여 저주 받은 결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이런 것은 애당초 없었다. 아담의 범죄가 유발시킨 자업자득형의 결과물 즉 대칭 관계로서의 비생명(생명과 대립되는 개념) 현상이다. 또 저주이면 저주요 죽음이니까 죽음 일색이지 거기에 생명이 섞일 이유는 없다. 고로 지금 이 세상은 저주, 죽음, 고난 일색이지 원천적으로 생명의 낙이 끼일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때는 죽음의 심판의 때가 아니라 비록 죽음이지만 은혜와 구원의 때로서 생명이 역사하는 때다. 그러나 이는 생명의 환락과는 차원이 다르다. 죽음의 때이지만 생명의 은혜가 있다는 뜻이지 생명의 때로 접어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새 창조(다시 출생케 함)에 의하여 탄생시키는 때이므로 현재 "저주 받아"(창 3:16) 있는 상태를 기준하여 이 구원의 역사를 산통(産痛), 산고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 낳은 기쁨은 차후의 일이고 지금은 그런 고통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아이 낳는 고통은 강제가 아니고, 고통인 줄 알면서도 부부가 서로 교합하여 일어나는 일이므로 "자원(自願)"이라는 원칙이 세워질 수밖에 없다. 이 스스로 택하여 얻는 결과이기 위해서는 즉 강제가 아니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려져 있어야 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원해서 '이루어지는'('당하는' 것이 아닌) 고통의 의미가 된다.

고로 자원해서 받는 저주의 고통이기 위해서는 역시 자유 선택으로 고난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상 설명과 같은 한 몸 체제로서의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뜻에 불복하는, 악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역할로서의)라는 여백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이 세상이 생명과 죽음, 고통과 쾌락이 섞여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까닭이 된다.

때문에 전적으로 고난, 고통, 저주, 죽음으로서의 원칙뿐이지만 그렇지 않은 면도 함께 병존하여 이상의 취지가 수행되도록 하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정상적으로 원칙을 따르는 것이 고난과 저주, 죽음인 것이다. 그래서 순종을 거부하는 악인들이 빠져드는 함정이라 할까 그런 것이 이 세상에서의 "위로"이다. 이 "위로"(눅 6:24/16:25)라는 말은 원칙적으로 이 세상이 그런 위로가 있을 수 없는 고난과 죽음만이 있다는 뜻을 웅변함이다.

그러므로 이 산고, 산통이 정상적인 모습을 띠고 생산적이기 위해서는 자원 자진해서 받는다는 취지이어야 하고, 그렇게 되자면 고통 아닌 위로 비슷한 것이 있어야 하고 그 둘을 양자 택일하는 양상이어야 하기에 생명 아닌 생명 같은 것이 있는 것이니 이는 말할 필요도 없이 이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불복종의 악인들이 스스로 빠지는 함정, 덫, 올가미 역할을 한다고 한 것이다. 즉 한 때의 일시적인 찰나와 같은 생의 쾌락일 뿐이다.

생명은 영원한 것이어야 하는데 이런 찰나적인 성격이라는 것은 비정상이라는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것임데도 악인들은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이다. 분간하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일종의 말하자면 자기 꾀에 걸려 든 셈이다. 그래서 함정이라 하는 것. 악인을 걸러내기 위한 이런 함정에 걸려 드는 것은 실로 만고에 없는 어리석음이 된다. 고로 이 세상에서의 고, 낙이 양면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저주 일색이지만 새 창조라는 시기의 특성상 생의 낙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현상일 뿐이니, 이런 신기루(사막의)에 걸려 들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죽음의 사막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오아시스 같은 것이 보이더라도 신기루일 뿐이다. 이런 사막 위에서 이런 신기루에 취해 있는 이들에게 진실로 화가 있다. 재앙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니 극력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힌 대로 사람 살리는 일의 의인들의 고난은 자발적으로 받는 것이므로 이 양자 택일의 성격상 위로처럼 보이는 것이 신기루처럼 비쳐지고 있는 세상인즉 고난 받는 이들은 기쁨으로 당할 것이요 억지로 당해야 하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 그대로다. 멋모르고 웃는 것처럼, 이런 현실 속의 세상인즉 참으로 웃을 일이 없는 것이다. 있다면 울 일밖에 없는 것이니 이런 비참한 실상을 아는 자로서 어찌 그렇지 않다 하리요. 실상을 제대로 눈 뜨고 보는 일이 중요하다. 몰라서 그렇지 알고 있는 다음에야 과거 모르고 지내던 일이 반복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죽음과 저주의 세상이 단 하루도 지탱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오직 이것이 산고, 산통 즉 새 생명 탄생의 시기인 고로 그래서 잠시 지체하는 것뿐이니 이 해산의 시기가 끝나면 세상도 즉시 끝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 탄생한 생명은 그 생명을 누리는 때로 영원히 이어지고 그 반대 방향으로 취사 선택한 경우이면 그 반대의 것을 스스로 택한 그대로 영속되어져 나가는 것뿐이다. 이로 보건대 어찌 아니 두려워하리요. 어찌 떨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 시대를 정확히 알라는 것이 우리가 온 세상에 알려야 할 유일한 메시지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부를 축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이 되는지 알 수 있는 일이다(막 10:25).

오직 그 부를 나누어주기 위한 잠시 맡은 것으로 여길 때 즉 실상을 바로 보았을 때 그런 위험에서 벗어난다(딤전 6:17). 잠시 맡은 것일 뿐이니 마치 자기 것인 양 축내서도 안된다. 이렇게 남의 것을 잠깐 맡아 있음을 자각할 경우에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되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막 10:27)라는 말씀이 적용될 뿐이다. 이 세상은 죄인이 된 인간의 세상, 죄인으로서 형벌 받는 형벌밖에 받을 것이 없다고 선언이 된 세계다(창 3:15-19). 이것이 말씀을 더 이상 거역하지 않고 따르는 정상적인 자세다.

주님께서 "이제 웃는 자는 애통하며 울게 될 것"(눅 6:25)이라 하신 것은 "위로"(:24)나 "부유함"(:24)과 같은 맥락으로서, 이 세상을 이상 설명과 같은 저주 받은 상태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창조 당시의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을 지적하여 경고하심이다. 무조건 부유한 자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니, 바울 사도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다"(딤전 6:17) 한 그대로다. 사람이 웃는다고 해서 "저 사람은  경건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사람이라" 하고 저울질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식으로 잣대를 들이다는 일이 많으니, 형식이야 물론 중요하지만 그와 같이 겉모양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많은데 실속은 외면하고 그 대신 형식에 치우치는 것은 자아중심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인즉 주의를 요한다. 교회에만 무조건 충성되게 나가면 믿음이 좋은 것으로 분류하는 것도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런 저주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고 아담은 여자의 이름을 즉시 지어버렸다. 전에는 이름을 지을 수가 없었으니 자기의 닮은꼴이므로 그냥 아담으로만 통했던 것이니 둘이지만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과거 인격적으로 대하여 여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관념이 사라지고, 마치 단순히 사람 제조기처럼 인식되어 전에 영물들 이름 짓던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게" 되어 있는 저주대로 된 것이다.

이는 여자가 당연히 먼저 남자와 의논하고 선악과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함에도 독단적으로 행동을 취한 후 남자에게는 자기 의사를 따르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 화근이 되어 빚어진 결말이므로 여자로서도 할 말이 없었다. 하나님 친히 여자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면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전자는 후자의 자식 벌로서  위계 질서가 분명했고 따라서 여자의 행동은 손아래가 손위를 넘보는 식이 되었은즉 남자가 여자를 강압으로 다스림은 불가피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이 모두 죄의 결과이니 죄는 질서의 유린, 파괴 행위인 것. 여자의 그런 행동은 선례를 남기는 것인즉 지속적으로 행해질 개연성이 충분하여 남자는 또한 이를 제지함의 악순환이다. 남자(아담)는 남자대로 머리이신 하나님의 뜻, 명령,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 어겼으니 질서 유린 행위라는 의미에서는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성경에서 남자를 주로 하는 것은 이러한 여자를 비하해서가 아니라 (남자도 똑같은 범죄를 한 마당에) 남녀 한 몸 즉 둘이 하나됨에서 남자의 대표성을 따른 것일 뿐이다. 왜냐면 아담이 맨 처음 창조되었고 그 아담을 소재(즉 아담의 갈빗대)로 하여 여자가 지으심 받아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으므로 처음부터 '하나'의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하나이므로 머리가 그 대표성을 띠는 것이다. 우리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함과 같은 이치다.

영원한 세계에서는 이런 성별이 사라짐은 당연하다. 지금이라도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만약 부활하게 된다면 이런 구분이 없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마지막 아담께서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의 짝으로서 마치 육체에 대한 영혼처럼 각 사람과 이중 구조로 되어 존재하시는데, 그리스도께서 남자시라면 그러면 내가 남자라야 하는가, 여자라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남자로 세상에 오신 것도 위에서 말한 그런 대표성을 따라 되신 것뿐이다.

여전히 남자로 계시면 남자 선호 또는 우월성을 나타내는 의미일 것인즉 여자가 원망하게 될 것이요 여자이시라면 여자 우대 또는 편애가 되어 남자가 원망할 것이니 수시로 성을 바꾸시겠는가 어쩌겠는가. 고로 그런 성별은 다시는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애당초 인간(아담)이 창조될 때 성별이 없었다. 천사들과 같은 몸으로 될 것이기에 이는 당연했다. 처음부터 남자였다면 의당히 그 짝으로서 여자부터 창조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에덴낙원을 창설하신 다음에야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나서도 여자 창조가 아니라 영물(靈物)들 곧 천사 즉 초자연계 존재 창조였고 그 중에 아담의 마음에 드는 자가 없으므로 그제서야 여자가 생긴 것이다. 영원 생명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여자처럼 아름답고 남자처럼 늠름하여 양쪽이 조화된 절묘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평등하게 모두가 그런 훌륭한 모습들로서 절세 미인, 절세 가인으로서 미와 추의 구별이 없어진다. 그럼 모두가 거의 똑같으니 그 많은 사람이 어떻게 서로 식별이 되어 알아보느냐 하겠는데 그야 초자연계 몸이 초능력이니까 지금 우리가 아는 컴퓨터 이상으로 뛰어난 식별력이 있을 것이야 불문가지. 자꾸만 현재의 이 자연계 몸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를 불식시켜야(고후 5:16,17).

말을 맺으면, 오늘의 이 세상은 오직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데에만 소용되는 것으로서 삶을 향락하는 즉 사는 때가 아니라는 것이니 저주 받은 주제에 무슨 삶의 누림과 즐김을 감히 상상할 수 있으리요. 무리요 억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제는 불을 보듯 훤하게 알았으니 불나방인 양 불 속으로 뛰어드는 만고에 없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 일이다.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영원 멸망 속으로 영문도 모르는 채 쾅쾅 넘어가고 있는 현실인데도 이를 외면하여 이 위급함을 경고해줄 마음은 없이 안일 속에 묻혀 세월이 가는 줄도 모르게 세상 술에 취해 있다면 그 결말은 불문가지이다. 똑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여부를 시험해보시기 위한 단지 그것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설혹 그런 의미로 되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기꺼이 그 말씀에 응할 것이 아닌가. 하물며 이와 같이 이치가 맞아 명약관화의 사실임을 성경을 통해 알면서도 이를 거역한다면 이 경우 이미 희망은 거의 끊어진 것이다. 이런 것이 고범죄 즉 알면서도 짓는 죄에 속함이다. 모든 인간에게 양식(良識)을 주신 하나님이 상식을 벗어난 것을 지시하시거나 명령하시는 일은 없으니 안심할 일이다.

따라서 왜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하느냐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게 아니냐 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핑계로 대는 이가 많은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까닭이다.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시 7:11)이라 한 대로 이미 하나님의 저주는 꽉 차게 내려져 있는 터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는 사람의 판단과 달라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줄 모르는 까닭이다. 죄의 경중이 없이 자아중심은 본질적으로 모두가 다 살인자로(롬 3:15)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즉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요 3:35) 것이다. 이 진노를 벗어나는 것이 인생으로서 화급하지 달리 다른 것이 있을 수 없다. 실상을 몰라서 이것저것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이런 실상을 설혹 안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으니 피하려 해도 피하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물치 않으셨다 했는데 즉 심판 자체가 불가능했음이니 모두가 다 똑같은 죄인이므로 심판을 하나마나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구원의 길이 만인 중에 개방됨에 이르러서야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회개하라 하신 것이다(행 17:30). 그런즉 이 하나님의 저주, 진노의 사실부터 알아야 하는 것이니, 이 곧 모세 율법이 그리스도 오시기 전 사전(事前) 교육을 시킨 기본 내용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음을 자각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구원이 발동될 수가 없음이다. 그래서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왔다"(눅 5:32) 하셨다.

때문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를 먼저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그냥 믿기만 하면 영생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일절 무의미한 시간 낭비만 된다. 빌립보 간수처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내가 어찌 할꼬 하는 비명이 나와야(행 16:30/2:37) 그리스도께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고로 이런 참담한 현실을 자각하여 떨고 있는 자에 한해서 복음(희소식)이지 그렇지 않고는 병 없는 자에게 의사가 필요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오시기 전 모세 율법이 충분히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유다.


"하나님의 저주 내리심"에 대해 반문하기를 노아 홍수 이후에도 "하나님이 복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신 대목이 있지 않으냐 한다면, "그렇다고 이미 내려진 저주가 철회되었던가, 여전히 남자는 이마에 땀 흘려야 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하게 된다. 저주는 그대로 있으면서 단지 홍수 때처럼 멸종하다시피 하는 것은 없이 말 그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에만 그치도록 제한된 범위 내의 "축복"인 것이다. 즉 이 축복은 앞선 저주(대홍수에 의한 멸절)에 상대되는 의미로만 한정되는 것이었다. 

성경의 진실성(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


요한 사도가 그 복음서 말미에 유별난 것으로 들릴 수 있는 한 에피소드를 삽입해 놓았다. 왜 이런 특이한 대목이 끼워져 있을까 의아해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간략하게 거두절미해서 요점만 기술하는 성경 기록의 특성으로 보아 필요없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것이야말로 이 복음서의 최종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성경이 모두 진실 그 자체라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다.

요한이 의식적으로 이것을 썼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해 성령의 감동으로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 볼 수밖에 없으니 따라서 이는 성경이 진실 그대로의 기록임을 자체 증명하는 또 한가지 사례가 됨을 우리는 주목한다. 즉 그런 뜻으로 이와 같은 내용이 삽입되었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이 요한복음서가 인위적으로 지어낸 이야기로서 처음부터 거짓말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다는 의식이 항상 작용하는 관계로 그렇게 속이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서 감히 더 이상의 군소리를 보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법이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다시 말해 요한 복음서의 말미에 적힌 바와 같은 그런 잣단 말은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끼어 든 것은 요한이 처음부터 기록한 모든 것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확인했던 사실뿐이었음을 강력히 방증하는 것이다.

또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웅변으로 나타내는 자체 증명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령께서는 이런 식으로써, 요한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서에서 기술한 내용이 진실 그대로임을 서명 날인하시는 그런 형태인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 복음서만 서명 날인해놓으시면 요한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다른 복음서 그리고 기타 사도들의 서신들 모두가 같은 내용이므로 모두가 진실됨을 인(印)치시는[날인하시는] 것이 됨이다. 즉 요한이 거짓말하는 자가 되어 의식적으로 그런 거짓말을 꾸며대어 기록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 기억력이 비상했던 것 같다. 30세쯤 되셨던 예수님의 품에 가끔 기댈 수 있을 정도로 12 제자 중 가장 어린 아마 20세도 채 되지 못한 십대였을 수도 있다. 예수님과 이종간이었다고 말들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아주 젊어서 그런지 또는 남달리 기억력이 좋아 그런지는 모르나 다른 어느 복음서보다 그 행하신 일보다는 주님의 말씀들을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특점이 있다. 물론 모두가 다 요한 자신의 기억력에서 나온 것이라고 굳이 말할 필요는 없다.

기록한 후 나중에 다른 제자들에게 들려 주면 그 다른 제자들이 듣고 나서 "그것만이 아니고 이런 말씀도 그 때 하셨다" 하고 지적해 주면 요한 역시 그 말씀을 다시 기억해내어 끼워 넣는 그런 과정도 거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 친히 약속하시기를 "[성령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기억 나게 하실 것이라" 하셨으니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만은 분명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성령 충만한 설교도 그렇다. 상당한 장문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요한 이하 모든 사도들이 들었을 것이요 그런 사도들의 기억들을 살려내어 그렇게 스데반의 명설교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는 것이다. 요한이 듣고 기억한 것을 누가가 직접 전해 듣고 그렇게 기록한 것이 아닐까. 아니면 누가 역시 듣고 그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그 내용대로 옮긴 것일까. 물론 성령께서 친히 그 기억을 되살려 주시는 등 역사하신 것이야 언제나 변함없는 진실 그대로다.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기록해두고 있는 "잣단" 내용이라 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그 부분이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라 했으니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려고 이런 기록을 덧붙이지 않았나 할 정도다. 이 "제자"는 바로 요한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도들을 두고 그런 "자기 과시[자기중심으로서의] 운운" 하는 것은 넌센스다. 그만큼 이 말미의 기록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만세반석과 같은 중요한 의미가 스며 있으니 곧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성령의 서명 날인[signature]이다. 당시 사정으로 보면, 베드로가 수일 전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일이 있고 난 다음의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으므로 베드로는 주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그런 순간이었다 하겠다.

주님만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고로 주님 역시 그런 질문을 던지신 것이리라. 그러면 내가 주님만을 사랑하는데 그런 나의 사랑을 받는 상대방이신 주님도 역시 같은 사랑으로 나만을 사랑해 주시기를 바라는 감정은 자연스럽다 하겠다. 다시 말해 자기에게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데 요한 역시 듣고는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고 약간의 질시(嫉視)하는 감정이 일어났다고 말하면 지나친 망상일까. 또한 평소 요한은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표현될 만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제자이기 때문에, 그런 감정은 아니더라도 그 순간의 베드로에게는 요한에 대하여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해도 옳다.

질투란 것은 '나만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니 왜냐면 내가 '그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속성이 그러하다 하면 너무 억단일까. "성령께서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을 헛된 말(빈 말)인 줄로 아느냐"(약 4:5) 하고 성령의 사랑을 가리켜 야고보가 말한 바와 같다. 물론 이런 데에서까지 굳이 "질투"라는 말을 쓸 필요가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바꾸어놓고 생각해보면 이 "질투"라는 말을 쓰는 것이야말로 주님과 나와의 사랑이 그저 막연하고 모호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그와는 아주 반대로 실질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 혹은 남녀끼리의 사랑보다 더[삼하 1:26] 진한 개인적 감정이란 사실임을 이런 용어를 통해 강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는 못하리라.

이미 이에 대해서는 주님 친히 말씀하신 바가 있다. 곧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셨다. 내가 어떤 이를 나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사랑했다면 나 역시 그에게서 같은 정도의 사랑을 기대함은 인지상정이니 왜냐면 그럴 충분한 사유가 되는 까닭에 그렇게 기대함은 무리가 아니요 이것은 자기중심과는 별개의 의미이다. 이기적인 측면에서도 이 시기나 질투라는 것을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런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속성으로도 이와 같은 해석은 충분히 그 타당성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친히 성령으로 각자에게 임하여 계심으로써 각 육체에게 영혼처럼 위치하시어 불가분의 관계가 이루어져 있으니 그런 유(類)의 욕구에 대해서는 이의 없는 100퍼센트 만족도다. 고로 그런 점에서는 더 다시 그런 감정이 믿는 형제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누구는 더 여기시고 누구는 덜 여기시고 하는 것 없이 전부가 완전한 사랑의 평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베드로의 물음을 받으시고 주님께서 대답하신 것은 역시 언뜻 보기에도 동문서답처럼 비쳐질 수 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할지라도 네게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어떻게 하라 하든 그런 것은 그와 나와의 관계(사랑 즉 개별적인 사랑-요한과 주님과의)이고 너는 네 나름대로의 너만이 가진 너와 나만의 관계(사랑 즉 '또 하나'의 별개의 사랑-베드로와 주님과의)가 중요하고 그것만이 네게 중요하고 한도 없이 충분하고 다른 것은 네가 상관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하시는 뜻이라 하겠고, 그래서 다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하시는 베드로에게만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여기서 이 글을 통하여 성령께서 강조하시는 사실은, 개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각자 개개인에게 지극히 만족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도록 사적(私的)이고 개별적인 사랑이시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셔도 그러하시다는 것이다. 사람은 물론 이렇게 할 수 없다. 당장 삼각관계가 되어 버리고 질투와 시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한 면으로만 바라보는 얼굴을 지니고 있음과 같다. 그 쪽을 보면 다른 쪽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는 가운데에서의 일대일의 사랑이다. 그 둘의 사랑에는 다른 제삼자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다.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다르시다. 그렇게 일대일의 사랑을 하실 수 있으면서도 그런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동시적으로 동일하게 베푸실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이 대목은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다른 차이 혹은 하나님의 특성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처럼 그런 완벽한 일대일의 사랑이심과 동시에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그러하시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이런 극히 핵심적인 사실을 이 간단한 에피소드로써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는 주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심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것으로 가능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처음부터 이것은 하나님의 특성인 것이다. 단지 이 경우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시고 강조하신 것이다.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그저 담담하게,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시는 의미뿐이었다고 일반적으로 그 복음서 내용에서 좀처럼 설명을 가하지 않았던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을 정도다. 왜냐면 쓸데없는 오해를 사람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오해 풀기라면 그것 하나만 가지고 이 복음서 기록에 일부러 기재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 오해는 지내놓고 보면 다 사라지고 말 한낱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 일개인에 관한 오해를 풀어주는 차원의 해명이 아니기 때문에 즉 성령으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장면이 이렇게 기록되었다고 하는 이 점이 중요하다. 고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은, "너만을 사랑하는 내 사랑은 내가 너 외의 그 누구를 너처럼 사랑하든 상관없이 '한 사람'으로서 너만을 사랑하는 그 의미 그대로이니, 이 점에 관해서만은 네가 백 번 믿어도 좋고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에 우리 믿음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곧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이다. 너만 사랑하고 나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심을 다시 강조한다. 그러므로 나와 하나님과의 사랑 관계는 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때문에 나의 삶 자체가 되는 것이다. 단지 구원만 얻는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순간순간의 삶으로 융화되어 나타나는 그런 사랑이니 곧 내 생명의 핵이 됨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가 없는 나의 존재 자체를 의미함이다. 이렇게 둘(주님과 나는 엄연히 둘이 아닌가)이면서도 하나요 하나로 보이면서도(나 혼자만 있는 것처럼 보이나 또는 주님 혼자만 계시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둘[주님은 나와 함께, 나는 주님과 함께 존재하는]로서 존재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 존재이기에 성경은 "새 피조물"이라 하고 "성령으로 다시 출생한다"고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내린 결론에 좀 더 설명을 덧붙이면, 그 요한복음 21:18-25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니,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

이 대목이 우리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순전히 베드와 요한에게만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인데도 수록되어 있다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키고 이 대목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왜 요한이 따랐을까. 그러면 또 베드로는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 것이지 왜 주님께 "이 사람은 어찌 되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던가. 또 주님의 대답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언정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는 것이었으니 왜 그럴까.

나중에 요한도 이를 설명하기를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단순히 주님 하신 말씀 그대로의 의미뿐이었다고 했다. 물론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을 인해 당시 자기에 관해 떠돌던 말들을 여기서 단박에 해명하여 해소하고자 이 대목을 일부러 삽입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베드로가 어떤 심경에서 그런 질문을 했고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마음을 어떻게 간파하시고 그런 대답을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게 된 당시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과연 무엇이었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필자는 그 초점을 베드로의 질투 같은 감정에다 두었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필자 개인의 상상 즉 편견으로 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도 당시 베드로의 마음을 환하게 들여다보고 계셨던 주님의 대답에서 그 실상이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 앞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셔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점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든 하지 않든 요한과의 관계는 요한과의 관계로서 요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너는 너와 나와의 관계 이상으로 네가 관심을 둘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또 베드로대로 요한이 주님을 따르니까 [베드로 자기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도] 그렇게 여쭌 것이다. 요한이 따르지 않았다면 그렇게 여쭐 필요가 없다. 그러면 그렇게 여쭐 정도의 그 관심이 요한을 위함이었던가, 주님을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자기를 위함이었던가. 아니면 그저 부지중에 튀어나온 소리였던가. 그 어떤 심리 상태였을까.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그런 것에 관심 두지 말라는 책망과 비슷하신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주님과의 관계만 강조하신 것이다. 베드로의 부질없는 관심이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요한이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당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요한과의 사이에 대한 베드로의 관심이다. 그토록 요한을 사랑하시는데 그리고 현재 요한이 어린 아이처럼 주님을 따르고 있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一여기에 베드로의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요한과 무슨 엄청난 일을 해 주고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말을 해 주든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너는 오직 나와만 상관 있다" 하시는 것이 주님의 대답이시다.

필자는 이 베드로의 "관심"을 질투에다 관점을 두었다. 그럴까? 암암리에 그런 질투 섞인 감정에서 그렇게 말이 나왔을까. 다시 말하지만, 베드로더러 따르라고 하셨는데 요한도 따라 나서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즉 베드로 자기 혼자에게 주신 개별적인 분부이신데 요한이 말하자면 옆에서 끼어 든 셈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것을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라 판단해보았을 뿐이다. 이제 베드로는 요한 못지 않게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위치와 시각에서 그렇게 요한을 보았으니 말하자면 경쟁의식 같은 것을 느낀 것이라 하면 역시 망상일까.

질투가 원래 그런 성질이 아닌가. 독점 의역이다. 그런 독점욕을 "질투"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요한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더러 "따르라" 하셨지만 이미 요한의 발걸음은 주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 간의 묘한 감정의 교차다. 필자의 판단을 유치한 생각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사랑은 원래 독점이다. 남녀 부부간의 육체의 사랑 곧 둘이 한 몸이 됨에서도 상대에 대한 독점이다. 제3자의 개입은 전혀 용납 않는다.

다시 말해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이지 더 다시 아내 자신의 것이 아니다[고전 7:4]. 남편 외의 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편의 몸 역시 똑같이 아내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완벽한 의미에서의 독점(獨占)임과 동시에 완벽한 의미에서의 공유(共有)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 인간사에는 이런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역이다. 앞에서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특성이시다.

고로 위의 설명에서 "질투"라는 용어에 대해 거북해할 이유도 실상 없겠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여기서 나타내려는 것은 베드로도 그런 감정[질투와 같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를 지적하려 함이 아니니, 앞에서 밝힌 대로 오직 주님과 나와의 가장 가까운 사이로서의 사랑을 밝히려 하고 강조하려 함이다. 하나님과의 개별적이고 사적(私的)인 사랑의 관계이니, 이는 한 몸된 아내 남편 사이보다 훨씬 월등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보이려 함이다.

이는 바울이 그 편지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내용이다. 즉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뉘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2-34] 한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자식이라 하면 우리를 낳은 부모의 체질 그 육신을 그대로 물려받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즉 하나님 자신을 나의 것으로 모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베드로는 "신성"(神性-신의 성품)이라 했다. 육신의 부모는 육체이기 때문에 그 육체를 내 것으로 하여 내가 태어나 그 자식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영 곧 성령을 나 자신의 일부로써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선물로서 영원히 나와 함께 계셔 불가분의 관계에 계시니까) 영원토록 모시기 때문이다.

"요한에게는 요한의 하나님으로서 요한만의 세계로써 만족하고 너 베드로는 나와 너 베드로만의 사랑의 세계로서 너와 나만의 세계인즉 내가 요한에게 어찌하든 너는 신경 쓸 것 없고 오직 너는 나와의 사랑의 관계만 진척시키고 발전시키고 향상시키는 것만이 너와 나의 유일한 소관사로서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일이 또 있느냐" 하시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는 최고, 최선, 최상, 최신(最新)의 사랑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사랑의 특성은 항상 새롭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생명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새롭다는 감격 가운데에 있으므로 싫증이 없다. 그렇지 않은가一오늘이 어제가 아니었듯이 내일은 오늘이 아닌 것이다. 똑같은 판에 박은 듯한 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렇다. 사랑이 생명에서 배어 나오고 우러나오고 생명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지 않다"[창 2:18] 하신 대로 혼자서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요 혼자가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이니, 사랑이 삶의 중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창세기 남녀 창조에서와 같은 우리말의 오역(誤譯) "배필"은 남녀개념이 아니라, 단지 돕는 자["helper"]라는 단어이다. 이제 요한의 그 복음서 말미의 수수께끼 같은 구절의 모든 의미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이렇게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분을 가리켜 요한복음에 보혜사(保惠師-흠정영역의 Comforter)라 하고 있는데 그런 '보혜사'란 거창한 이름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는 역시 똑같은[창세기 기록과 같은] 의미의 그런 "조력자"(helper)로 표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서로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구조(構造)에서의 그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상대방' 즉 짝의 개념으로서의 의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할 때 그 '영'이시라는 의미는 우리의 '육체'와는 그런 현격한 차이의 의미로서 앞에서의 설명대로 전체를 상대하시면서도 지극히 사적(私的)이고 개인적인 의미로 통하시는 각 피조물과의 관계다. 이것을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즉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 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이다.

"내가 요한에게 무슨 말을 하든 내가 요한에게 무슨 일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 아무 상관도 없다. 사람이 그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림보다 더 큰 사랑은 없고 나는 너를 위해 목숨을 버렸으니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한시도 떠날 수 없어 너와 영원히 하나되어 함께 살지 않느냐. 사람인 나로서 너를 위해 이 이상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것이 내가 사람이 되어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내가 동시에 하나님인 줄을 알라. 하나님으로서 나는 요한이나 기타 모든 사람 그 어느 누구든지 너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사랑을 베풀 수 있다. 육체인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불가능하되 육체가 아니라 영인 하나님에게는 이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그러므로 네가 언제나 명심할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를 가까이 하시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네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너를 부인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나는 너와 영원히 함께 있고 또한 요한을 비롯해서 모든 다른 사람들 곧 너희들과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다. 요한에게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무엇을 해 주든 그것이 네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네게 내가 한 말이다. 네게 다시 말하거니와, 너는 나를 따르라".

사랑하는 이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섬기고 사랑하는 이의 뜻대로 해 주는 것 자체가 무한한 삶의 낙을 누리게 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체가 마시고 먹을 때에 느끼는 낙만큼이나 큰 낙인 것이니 생명의 근원적인 낙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먹고 마시는 것은 육체에 관해서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므로 우리가 능히 측량할 수 없는 굉장한 낙일 수도 있다. 사랑은 이런 모든 육체의 낙을 능가하고 초월하는 것이고, 또한 영계에서의 사랑은 이런 자연계에서의 사랑보다 훨씬 뛰어넘는 쾌락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해할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이든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육체가 누리고 느끼는 그 쾌락과는 비교도 안되는 전혀 다른 차원의 낙을 느끼게 됨이니 이는 너무나 자명하다. 이 사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신 말씀과 "나의 먹을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분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 하신 데에서 잘 드러난다.

단지 이 세계는 그런 정상적인 생명의 낙이 통할 수 있는 생명의 세계가 아니라 오직 육체적인 낙 그런 흙으로 돌아가는 육체의 생명에서 느끼는 낙만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정작 영적인 생명의 낙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의를 행함으로 인한 보람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 정도이나 이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극대화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그 사람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느냐 하는 그것으로써 결정되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아니다. 오직 각자의 믿음 나름이요 사랑 나름이다.

"나를 먹고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요 6:48-58] 하실 때 바로 이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낙이 되면서 또한 삶의 법칙을 준수함[먹지 않으면 죽으므로]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는 것 자체가 낙이기 때문에 먹고 마셔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해 낙이기 때문에 먹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는 낙으로 나타나지 않아도 오직 그 일이 옳기 때문에 즉 사는 법이요 원리이기 때문에 비록 그런 자연스러운 낙을 현재 이 시간은 느끼지 못해도 의지력으로 (이것이 자연계의 법칙을 따르는 육체의 낙만을 따르는 동물 같지가 않고 지, 정, 의로 행동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할 일을 하게 됨으로써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요 13:34]이요 율법[고전 9:21]인 것이다.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의 또 다른 면의 색다른 낙을 느끼고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통하여 배우는 순종"[히 5:8,9]인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록 낙이 아닌 낙과는 정반대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나님께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요 그래서 이 사실을 가리켜 성경은 명시하기를, 주님께서 "아들이시라도 그 받으신 고난으로 말미암아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케 되셨다" 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왕들이요 제사장들이다.

하나님의 상속자들, 그리스도와 함께 된 만유의 주인들이다. 주인답게 격조 높은 품위를 갖춘 말하자면 검증된 자들임을 우리 스스로 입증해야 함은 당연하다. 왕으로서 겁약(怯弱)해서는 안된다, 어떤 경우에서든 스스로의 왕다운 품격, 왕으로서의 품성, 체통에 흠이 있어서는 안된다. 이런 검증을 받는 것은 자주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딱 한번의 삶 뿐이다. 약한 가운데서 강함을 스스로 지키는 것, 역경 가운데서 그런 품성을 검증받는 것인데 주님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선례를 따르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의 한번으로 끝난다.

베드로는 이것을 정금(正金)이 시뻘건 불에 연단되어 나오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 인생사에서도 이런 일은 항다반사로 일어남을 본다. 하물며 하나님의 일에서 이런 일이 없으랴. 하나님이시라도 사람되신 후에는 이런 사람의 과정[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는]을 통과하셔만 했던 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개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네 활개 펴고 마땅히 나타낼 우리이다.

지금까지 요한이 기록한 대로의 베드로와 주님 사이에 오간 문답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작 핵심은 그런 설명에 있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베드로를 "질투"니 하는 따위의 말로 설명하는 것을 아주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도 좋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도마에 올려 놓고 요리해본 것은 다음의 가장 핵심적인 것 즉 왜 성령께서 요한으로 하여금 이런 "잣단" 기록을 남겨 놓게 하셨는가 하는 그 근본 핵심 의미이다.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에 대한 자체 증명인 것이다. 요한 복음서의 이와 같은 특이한 끝 마무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아주 확정적으로 인(印)쳐 주는 것이다. 왜냐면 이상의 그리스도와 베드로와의 대화가 부활하신 직후의 시점(時點)에서 일어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이다. 부활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꾸며서 만든 것이라면 절대로 이런 대목이 기록될 수가 없다는 이 한 마디 결론으로써 충분한 것이다.

진실 그대로의 가감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고 요한은 이렇게 기술한 후에도 '필요 없고 객쩍은 사사로운 소리'라고 하여 나중에 삭제하려는 생각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다. 요한 자기 딴에는 자기에 관한 주님의 언급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가 퍼져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고자 하는 의도였기 때문이다. 만일 거짓말쟁이가 이런 말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 삼아 지어내려 했다면 왜 이것 하나만 만들어내겠는가. 내친 김에 비슷한 이야기를 더 만들어 냄 직하지 않은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는 베드로의 질문 자체가 어찌 보면 싱겁기 짝이 없는 것이다. 또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으로서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위의 설명과 같이 자세하게 분석해보지 않고 언뜻 들으면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요령 부득이 된다. 최소한 이 요한의 복음서를 읽게 될 수많은 독자 개개인에게는 전연 상관도 유익도 없는 대목임은 분명한 것이다.

요한은 참으로 사사(私私)로운 필요 없는 멋적은 이야기를 중요한 복음서 기록에다 덧붙여 놓은 것인가.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했으니, 우리에게는 당연히 멋적기만 당시의 한 에피소드이지만 그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기록하도록 요한을 감동시키신 것은 분명하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대화이었으므로 주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이 대목의 핵심이다. 즉 그리스도 부활의 증명이다.

다시 말해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이와 같은 거짓말을 지어낼 경우 이상과 같은 일견 무의미하기만 한 장면을 지어내야 한다는 고충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아무리 천재와 같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라도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까지 이야기를 꾸며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실성과 역사성을 후세 사람들에게 확고부동하게 증명하여 각인시켜 주시기 위해, 요한으로 하여금[요한 자신은 자기에 관해 쓸데없이 나도는 낭설을 불식시키려는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이런 무의미한[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시답잖은 내용을 기록해놓게 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나눈 베드로의 대화였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후의 다른 모든 기록은 그 부활이 진실이었음을 알리기 위해 기록된 것인 만큼 그런 의도하에서라면 아무 특이한 점이 없으나 이 대목만은 순전히 요한 사도의 개인적인 해명(解明) 차원에서의 사사로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다른 모든 기록보다 독보적이고 그런 만큼 비중은 크고 엄청난 의미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무리하기는 하지만' 그 대목이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고 "질투 운운" 하면서까지 억지로 해설을 시도해볼 정도였었다.

그리고 또한 부활하신 후의 일에 대해서도 다름 복음서 기자는 아주 간단히 기술해  버리고 있으니, 이는 너무나 명백한 기정 사실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여러 가지로 그 부활의 사실을 입증해서 드러내기 위해 이런 저런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그 증거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써 모든 답은 이루어져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독 요한만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자기가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해 두고 있을 뿐이다.

만일 그 때의 그런 '시시껄렁한' 대화가 죽으시기 전의 그리스도와의 대화였다면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이와 같이 아주 시답잖은 것으로써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우리 모두에게 확증해 주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로서 이 대목을 모든 이들에게 알려 줄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만 아니라 "성경의 진실성을 보증하는 성령의 서명 날인"이라 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것도 이제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이런 효과를 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씀을 하심으로써 제자들간에 말이 퍼지게 하시고 그 해명 차원에서 요한이 그 복음서 말미에 이런 내용을 갖다 붙이도록 하셨다는 설명도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후대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설득력 있게 신빙성 있게 나타내 주는 증거인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각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의 그 정도라면[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각종 서술] 거짓말하는 이들도[성경이 만일 지어낸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조작해낸 것이라 가정한다면] 얼마든지 지어내어 끼워 넣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소한 무의미한 내용을 끼워 넣을 거짓말쟁이는 아담 이래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천하에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그 말씀으로서의 성경[신구약]을 그 어느 인간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도록[내용을 가감하거나 가필(加筆)하는 등] 엄정히 간수하실 것은 말하나 마나이다.
  
원래부터 인간은 영생하는 자로서 영생하도록 창조된 것이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죽음이 왔다는 것이 그 뜻이다[롬 5:12].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배우는 것이다[요 6:45]. 이렇게 배우지 않고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께 올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는 당연히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눅 13:1-9] 과정에 있는 "죽은 자"[마 8:22]의 몸부림일 뿐이다. 우리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그대로, 현재 우리가 산다고 착각하는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처음부터 영원히 사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아 세상에 났기 때문에, 태어나는 인간마다 그런 삶[영원히 사는]의 안목으로 만물 만사를 대하는 데에 비극이 있다. 무슨 말이냐, 오늘 이 시간 어찌 될 줄도 모르고 내일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마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그런 마음이 되어 그런 자기 분위기에 휩쓸려 일종의 도취 감에서 사는 것이다. 자기만은 마치 안죽을 듯이 모두들 그런 기분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이다.

그리고 병이나 들고 죽을 사고라도 만나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는 듯이 그래서 그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 양으로 우선 그 위기만을 모면하고자 기를 쓰고 덤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영원히 살기 위해 "회개를 해야"[눅 13:1-9] 하는 것인데, 회개할 생각은 일절 없다. 그렇게 스스로 영원히 살 것처럼 한다고 해서 죽음이 안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이는 갓나서 죽기도 하고 10, 20, 30대에 짬도 없이 귀천(貴賤)도 없이 정직하게 바로 떠나 버린다.

이런 것이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음)의 우리 인생의 참담한 자화상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망하는 것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잊어 버린다. 언제 무엇이 일어났느냐는 듯이 태평으로 다시 머리를 싸매고 박이 터져라 초로(草露, 풀잎에 맺힌 이슬)같은 인생 삶, 내일도 기약 못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정신을 팔고 난 다음에 나 역시 그렇게 불시에 불의에 죽음을 만나면, "어이쿠" 하기가 무섭게 사정없이 죽음에게 끌려간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끌려가는 것이다.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것'의 인생 진상(眞相)이다. 이 진실을 놓치지 않고 붙잡는 것이 지혜다. 쉬이 잊어 버리지 않고 항상 마음에 두는 것이 슬기다. 인생이 사는 것은 천국 곧 이 자연계가 아닌 영계(靈界)에서 사는 것이다. 속으면서 살아가는 지금의 모든 인생들이다. 자연계는 자연계에 속한 동식물의 서식처일 따름이다. 만물의 영장(靈長, 영묘 불가사의한 힘을 가진 우두머리)으로서의 인간이 거처할 곳은 영원한 세계 곧 신령한 몸으로서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하 만인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은 "회개하라"[행 17:30]는 것이다. 인생으로서의 최대 과제다. 올바르게 사람 사는 도리를 따라 살라는 것이니 그렇게 사는 방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성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한 지식임을 성경은 똑바로 가르치고 있다[빌 3:8]. 그래서 그 외의 것은 배설물로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돋아나고 광명의 세계가 비취는 것이다.


2016년 2월 24일 수요일

★소년 다윗이 천하 장사 골리앗을 쳐 이긴 비결

소년 다윗이 천하 장사 골리앗을 쳐 이긴 비결




(어른은 아무도 골리앗을 이길 수 없고 소년의 단순한 믿음이 이긴 것.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는 것"ㅡ사탄을 이기는 변함 없는 요결이니 반드시 명심해야)


우리의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소식을 전달하는 예언을 하면서도 이사야 선지자는(사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하는 탄식(아니면 경고)부터 먼저 합니다. 생명의 구원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영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인기가 없다는 뜻입니다. 영생을 준다는데 왜 그러냐 하겠지만, 당장 오늘 누리는 영생의 환락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인내를 거쳐야 얻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성경의 진실성은 역설같지만 이와같이 "영합되지 못하는"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상식에서 벗어나고 말도 되지 않는 미치광이의 소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그 반대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 데에 있음이니, 다름아니라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에 대한 반발 심리 때문입니다. 이 역시 "말씀을 믿지 않음"에 속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은 탓입니다.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해 있어"(요일 5:19) 그 장중에 놓여 있다는 실상을 밝히는 성경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당시 홍수가 나서 모두 망하게 된다는 노아의 경고를 믿지 않음이나, 소돔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의 사위들이 장인의 경고를 믿지 않음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 이사야서의 그 대목은 탄식이기도 하고 경고이기도 합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려는 교묘한 말의 아첨과 보기 좋은 모양새로 얼굴을 꾸미는 것)이란 말이 있듯이, 거짓말하고 속이는 자치고 달콤한 말을 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듣기 싫은 말로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농하는 자는 없습니다.

거짓말의 원조로서 사탄이 여자를 속인 경우에도 듣기 좋은 말만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경고 말씀은 듣기 거북한 것이었습니다. "죽는다"고 하셨으니까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한 것이니 듣기에도 솔깃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진실성은 바로 이런 듣기 거북한 경고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다 듣기 싫어하는 내용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양약은 입에 쓰다는 말과 통합니다. 영생 자체야 물론 듣기 싫은 것이 아니지만 당장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경고의 내용이니까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제자들이 예수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 사실도 곧이곧대로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쉬쉬하거나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 감추는 것도 일종의 거짓입니다. 진실을 감추려 하니 거짓일 수밖에. 성경에 말씀하신 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이라 하심은 지금은 한 때 부끄러워하게 되나 장차는 온 세상에서 창대하게 되어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이 소수가 됨으로써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세상이 된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 반대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존속하는 한에는 그렇다 따라서 너희 평생에 세상이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게 만들 것이다 즉 믿는 이들이 소수로서의 학대와 서러움을 당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죽고 나서는 죽어보아야 알 수 있는 일이고 확실한 것은 살아 생전의 이 세상뿐이니 거짓말의 속성은 내 말을 들으면 지금 당장 또는 이 세상에서 좋은 효과를 보게 된다는 데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또 설혹 죽은 다음에야 빛을 보게 된다고 속일 경우에도 정작 그런 거짓말하는 본인은 결코 이 세상 삶을 부정적으로 살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호의호식하고 잘 살지, 고생하면서 살지 않는 특점이 있습니다. 이 경우 사이비 종교로써 착취하는 경우가 되는데, 이런 사이비는 웬만하면 그 사이비성이 간파되므로 다수가 미혹되지는 않지만 엄연한 실재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도 그렇게 부정적으로 세상을 일관되게 지내면서 또한 부정적으로 세상을 지내라고 남들에게 역점을 두고 가르치되 그 내용이 결코 황당무계가 될 수 없는 경우 거기에는 거짓이 없고 진실뿐이라는 증명이 됩니다.

성경의 사도들은 그렇게 일관되게 지냈습니다. 또한 일관되게 세상 삶을 사랑하지 말라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이 세상은 악마 용이 관장하기 때문이요 또 그런 사실보다도 복음 전함이 급선무인데 이 복음 전파를 악마가 방해하여 갖은 탄압의 수단으로 맞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심으로써 이 상황이 해제되는데, 다시 오시기 전에도 그리스도(구세주)를 가장한 악한 자(사탄의 하수인)가 나타나 온 세상을 호령하게 된다고 했으니, 이 세상에서의 삶의 (낙의) 누림은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어 사람 살리는 일이 끝나면 지체 없이 세상(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전세계적으로 방해하는)도 끝난다 하셨으므로 이 세상 존속의 목적이 오직 구원의 말씀 전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 전파를 한사코 저지하려는 용이 이 세상 신(神)으로 있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자연계 육체는 살라고 있는 또는 살기에 적합한 육체가 아닙니다. 내일도 보장 받지 못하는 극도의 불확실성의 육체라는 사실에서도 이는 명백합니다.

정작 살 수 있는 살 수 있을 만한 육체는 초자연계에 속하여 죽지(썩지) 않는 육체입니다. 이 자연계 육체는 인간(아담)이 범죄함으로써 파생된 비극적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어찌하든지 그 원래의 생명 상태로 복원됨이 급선무이지, 이런 생명도 아닌 죽음의 육체에 매달려 살려고만 한다면 웃기는 일이 아닙니까. 아무 것도 실상을 몰라서 그런 것도 아니고 성경을 통해 실상이 알려져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살려고만 고집을 피운다는 것은 이 세상 신의 책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밤낮 휘둘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은 이러한 성경의 내용 즉 의인들(그리스도를 믿는)이 이 세상에서 끝까지 약자로서 탄압의 대상이 된다고 미리 경고해두신 말씀을 희석시키는 의미에서도 가짜 복음, 바울의 말대로 "다른 예수", "다른 복음"인 간판만의 "기독교"인 강력한 세상 종교를 만들어 이를 활용, 세상에 군림하게 한 것도 이상의 성경적 사실을 왜곡, 희석시키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진실성을 방증하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보라, 기독교가 이렇게 세상을 장악하여 창대해지고 욱일승천하고 있지 않느냐, 성경에 그런 말씀은 틀린 것이 아니냐, 틀린 말을 하는데 신뢰할 수 있느냐" 하여 넌지시 성경을 무기력화하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성경이 그래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아무나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어려운 대목들을 학문적으로 많이 연구하는 이들에게 맡겨야 한다" 해놓고는 그런 신학자들의 생각을 비틀어놓은 다음 그런 그릇된 신학자의 말을 듣게 만듦으로써 숱한 생명들을 파멸시킨 것입니다. 사탄이 속임수는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므로 역설 같지만 이런 변화무쌍 천차만별 능수능란의 속임수를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어린 아이 같은 단순함에 있으므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않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신 것이고, "진리를 지혜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글줄이나 읽을 줄 안다고 여러 사람의 여러 연구 자료에 몰입하는 것을 자랑처럼 여겨 거기 탐닉하는 경우 사탄의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가 십중팔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성경밖에 모르고 그 이상으로는 더 생각할 줄 모르는 이들은 오히려 그것이 강점이 되어 여러 간교한 오도된 신학적 견해들을 멀리할 수 있기에 그러합니다. 필자의 사형되는 이는 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신학원에 들어가 졸업을 앞두고는 "믿음이 무엇이냐" 하고 학우들에게 물었다는데 그 길로 그만 변을 당해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절대적 진실성을 확고하게 믿어야 장차 어지럽게 나타날 적 그리스도의 모든 흉계를 이길 수 있어 각종 소위 "과학적 논거"를 대면서 성경을 공격하는 것에 넉넉히 대비할 것인데, 그러한 성경의 진실성은 이상과 같은 자체 증명에 있으니 이를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증명은 그 "외부적" 증거를 다른 그럴싸한(그러나 진실은 아니고 진리도 아닌) 논리가 공격해 와 와해시킬 정도가 되면 그 자체 권위가 크게 흔들릴 수도 있지만, 이 자체 증명만은 여하한 경우에도 흔들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있는 한 그 증명도 함께 존속되어 그야말로 난공불락입니다.

세상(삶)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그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의 남은 생애를 허송세월하지 않고 오직아버지의 뜻을 행함으로써(마 7:21) 다른 사람들 구원해내기에만 골몰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인데 다른 데에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복음 전파가 끝나면 세상도 끝난다는 말씀이 바로 이 해석이 정확하다는 것을 아주 못박아버리고 있습니다.

안락한 세상 삶을 꿈꾸며 어떤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하고 자청해 왔을 때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하심으로써 인간이 살 보금자리가 결코 이 세상 자연계가 아님(요 18:36)을 명시하신 것도, 이 세상이 죽은 자의 세상으로서 생명을 누릴 산 자의 세계가 아닌즉 "너는 세상에 나가서 오직 하나님 나라의 복음 즉 산 자가 되는 방법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일생의 소임을 다하라 하신 것도, 손에 일단 쟁기를 잡았으면 일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른 일에 한눈팔고 관심 두고 신경 쓰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신 것도(눅 9:57-62) 이런 사실을 두고 경고하신 것이니 마땅히 마음에 아로새길 일입니다.

★돈을 보고 결혼하려 하므로 신문왕 히쓰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돈을 보고 결혼하려 하므로 신문왕 히쓰가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도...


(미국의 신문왕(新聞王) 히쓰는 부자이므로 돈을 보고 결혼하려는 고로 평생 독신으로 지내다가 외롭게 죽었다는 것처럼 영생 하나만 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많으나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으면 영생도 구원도 없다는 것......)

내가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두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신)을 알았고 그 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정상적인 생명 곧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고 해야 제대로 된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비슷한 의미 같으나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자아중심이고 후자는 그 반대인 사랑으로 말미암은 자기 부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나의 관심사(생각)가 나 자신으로부터 내가 상대하는 나의 사랑에게 완전히 옮아 가 있게 됩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사랑 관계는 둘이 하나됨이므로 서로 마주 보고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보아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천적으로 자기를 보지 못한다는 이 평범한 사실에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항상 나의 상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상대에게 가 있지 나 자신에게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생각하게 되는 것ㅡ 자연히 그렇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항상 자기 자신에게 있으니까. 원래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지으실 때 이렇게 하나님과 그 피조물 개체와 둘이 하나되는 관계로 지으신 것입니다. 왜냐면 피조물은 각각이므로 여럿이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여러 피조물과 개별적으로 한꺼번에 일일이 대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처럼 영이 아닌 피조물은(비록 천사와 같은 영물로서 성경에서 "영"이라 하는 존재일지라도) 이런 일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관계가 '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우리 각자에게 복원된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의 정상적인 모습은 혼자 계심이 아니라 항상 아버지와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모습 즉 애초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 하나하나와 일일이 개별적으로 대하시던 바로 그 모습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육체로 계시던 모습 역시 바로 그런 모습이시되, 육체로 계심을 인하여 육체적인 제약을 받으심으로써(내가 현재 육체의 제약을 받고 있음과 같이 되시려고) 우리 위해 죽으시는 고난을 받으시는 일을 이루셨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온전히 그 본연의 모습 그대로이시니(비록 육체로 계시지만) 다시 말해 만약 천국에서 A지점에서 갑이라는 사람과 육체로 함께 계셔도 멀리 떨어진 B지점에서 을이라는 사람과 똑같이 육체로 계실 수 있다는(지금은 영으로만 그러하시지만) 의미입니다. 물론 이런 일은 아무리 초자연계("신령한"-성경의 표현) 몸이 되어 있어도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마지막 아담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육체로 있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으신 '한 사람', 이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앞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되어 항상 서로 마주 보며 나는 그를 보아주고 그는 나를 보아주는 그런 양면성과 동시성의 영원한 관계로 서로 사랑 가운데에서 사는 이것이 구원 받은 확실한 상태입니다. 주님의 몸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늘에만 계심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사십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삶, 일상생활이 구원 받음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다르게 인식해왔습니다.

즉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에만 머물고 있어 여전히 생활은 자아중심이요 기껏해야 특정일 특정 장소에 가서 특정 의례대로 종교 행위를 함으로써 "나는 믿음이 있다, 그러니 나는 구원 받았다, 왜냐 하면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했으니까ㅡ" 이런 수준에서만 항상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구원 받은 것으로 세뇌시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한 영이 되는 것"(고후 6:17)이 구원임을 간과하였고 배제한 것입니다.

때문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 그렇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의 모든 기록은 한 특정인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입니다. 즉 믿음의 본질이 사랑에 있음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임을 재차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항상 이 초점에서 벗어나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랑 곧 생각 즉 생활입니다. 일상적인 삶에 있습니다. 주님과 내가 마주 보는 것 즉 주님을 의식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주님의 일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물론 주님은 나의 일을 영원히 하고 게시는 것ㅡ자신을 내게 영원불변의 선물로 주셨으니까) 우리가 성령 받아 모심을 "내가 너희를 (세상에) 보낸다"(요 20:21,22)는 말씀으로 명백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령 받음을 가리켜 베드로 사도는 성령 충만하여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음이여"(행 2:25)라는 다윗의 예언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아기는 엄마 품처럼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품 안에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품 안에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나는 함께 아버지의 품 안에ㅡ이것이 "그 날에는(성령이 너희 안에 있게 되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요 14:20) 하신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요 17:21)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항상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아들이 있는 자에게만 영생이 있는"(요일 5:12) 것입니다. 즉 구원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함과 같습니다. "스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느냐ㅡ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살아도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는지"(롬 14:7,8/고후 5:15) 여부를 스스로 알 수 있고 확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확신, 단언하지 못하면) 너희가 버림 받은 자"(고후 13:5)라고 아주 못을 박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5) 했으니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로서, 부단히 부절히 시험하고 확증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의 "오늘, 이 시간"의 특성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사랑의 특성을 무시하고 과거(선지자가 되어 있었고, 귀신을 쫓아내었고, 큰 능력을 나타내었고 등)에만 안주하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음으로 천국에서 탈락되고 불법을 행하는 자로서 영원히 낙인 찍히게" 됩니다(마 7:21-23). 그래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앚어버리고(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오늘 이 시간)"(빌 3:13,14) 한 것입니다. 










우승하는 자는 하나뿐인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달려가라(고전 9:24)
우승하겠다는 일념밖에 없어ㅡ








2016년 2월 23일 화요일

★세계 각급 학교에서 아니 가르치는 데가 없는 진화론의 그 멸종을 알리는 조종 소리

 세계 각급 학교에서 아니 가르치는 데가 없는 진화론의 그 멸종을 알리는 조종 소리


3운(三運)법칙(trini homo, 또는 fashomo, 또는 homorhythm)은 초등학생이라도 분석해볼 수 있는 산술 수준의 셈법으로 누구나 검증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전문가의 영역에서 벗어나 완전히 대중화로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자료 축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왈가왈부할 것도 갑론을박할 것도 없는 것은 스스로 검증해보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은 인간이 점진적으로 진보 발전해 가는 것이라고 즉 점차 나아져 가는 것이라고 가정하여 주장하는 것이지만 3운법칙은 아래 그림이 보이는 것처럼 인간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 그 행동 반경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실제적 사례는 인간이 생기자마자 아무 이유도 없이 단지 자신보다 더 낫다는 점 하나만으로 그 아우를 시기하여 죽인 형 가인의 행위로 나타나 입증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죽는 때를 정하여 그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죽지 않도록 조처한 것이 3운법칙의 운용되는 그 실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 생애(한평생)를 이같이 철저히 동여매고 있는 이 법칙도 그 상위 법칙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고 있는 양상임이 그 특이한 구조로써 입증되어 있는 것이니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바대로 짝으로 되어 있는(정반대되는 성질로서의) 갑과 을이 병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음이다. 

즉 하나(병)로 있던 것이 둘(갑과 을)로 나누어져 있음으로써 갑이 을보다 크다고 주장한 (동양 철학의 주류인 음양론에서) 이유가 갑이 을을 파생시킨 주종, 대소, 인과, 선후 관계 때문임을 가리키는 3위1체의 도식 그대로를 아주 훌륭하게 상징하고 있음이다. 

3위1체의 법칙이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로 계심으로써 아버지라고도 아들이라고도 않고 오직 "성령"이라는 제3인칭으로 호칭되는 "이름"으로서의)을 따라 된 것이므로, 이렇게 계심을 기반으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또한 만물을 유지 존속시키는 원리로 삼으신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터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 구원의 원리가 되어 있음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 즉 그리스도와의 둘이 하나됨의 이치이다. 3위1체 원리는 "둘로서의 하나, 하나로서의 둘"로서 요약되기 때문이다. 죽은 자로서의 우리의 죽음과 하나되심으로써 산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생명과 하나되게 하심인 것.  

파생시킨 자와 파생된 자와의 양면 구조를 극명하게 나타내어 이와 같이 갑과 을이 상호간 그 성질이 전혀 상반된 것을 19와 3이라는 숫자로 그 도치성을 드러내는 것이 3운법칙의 특이 구조이다. 이를 가리켜 3운법칙과 3위1체 원리의 상호검증이라 하는 것이다.

3운법칙이 운용되는 숫자는 모두 우리에게 친숙한 것으로서 1, (2), 3, 4, 5, 7뿐인데도 난데없는 19라는 숫자를 나타내는 아주 유별난 특징을 보이는 것은 19를 크게 부각시켜 그것이 드러내는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가 크다. 

이와 같이 주도면밀하게 인간이 생애를 계측하고 있으니 만물이 또는 인간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하는 썩 이성답지 못하고 지성답지 못한 막말을 영원히 틀어막은 것이다. 무신론이 반(反)이성적인 미친 생각이지만 진화론은 그 "미친 마음"(전 9:3)의 도수가 절정에 달한 양상이었던 셈이다.

인생들은 사탄의 이러한 반이성적인 것으로 휘둘려대도 이 세상 살겠다는 욕심에만 온갖 정신이 팔려 있어 더 생각하려 하지 않은 탓에 지금까지 무신론, 진화론에 속아 온 것이다. 

세상 삶의 몰(沒)지혜는 모두가 다 잘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고생하는 것이 인생의 거의 전부이고 잘 산다면 극히 소소에 불과한데도 그 소수에 억지로 끼이겠다는 악착스러움에 있는 것이니, 이것부터가 정상의 궤도를 벗어난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공명한 것이 아니고 나만 잘되겠다는 지독한 자기 중심의 발로일 뿐이라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인생들의 비극이면 비극이다.   

고로 이제는 이런 150년간의(진화론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데에 속은) 학습 효과를 얻었으니 성경에 반하는 그 어떤 소위 과학적 검증에도 "성경에 반(反)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무조건 배척할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고 있어야 지혜다. 

앞으로 사탄은 스스로 창조신으로 가장하여 최후 발악을 할 터이므로 갖은 속임수로 소위 과학적 증거를 들이댈 태세이기에 이에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상식으로 읽지 않으니 성경을 난해하다 하는 것

성경을 상식으로 읽지 않으니 성경을 난해하다 하는 것



① 자식은 부모에게서 나서 결과가 있으니 원인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은 결과이니 그 원인이 필시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조물주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한다. 보이지 않으니 없는 것이 아니냐 한다. 요즘 천문학이 발달하여 이 우주만 해도 이렇게 너른 것을 아는데 이 모든 세계를 지은 하나님은 하물며 얼마나 크시겠는가. 그런데 어찌 이 먼지만도 못한 인간의 눈으로 확인하려 드는가. 조물주가 이런 미세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눈에 확인될 정도의 작은 모습이라면 그런 조물주가 어떻게 이런 광대한 우주를 만드셨는가 하고 더더욱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보이면 보인다고 못믿겠다, 안보이면 안보인다고 못믿겠다, 참 범의 장단에 춤 추기도 어렵다.

조물주는 영[靈]이라고 해야 가장 합리적인 대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성경에 "하나님은 영"이시라 하셨다. 영은 당연히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다. 그리고 이 자연계의 지배를 받을 리 없으니 이 자연계를 지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온갖 기적이 가능하다는 것쯤은 인정할 수 있지 않은가. 이 우주 만물을 보라, 그 능력을 알 만하지 않은가. 자연계의 지배를 벗어날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기적 가지고는 논하지 말라.  

② 인간을 만든 조물주이므로 우리 이상의 지성과 이성과 그리고 인격성을 지닌 것 역시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인간을 만들지 않았거나 만들지 못할 것이 아닌가. 고로 이런 인간에게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 어떤 말씀 또는 메시지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세상에서 그런 말씀으로 자처하는 것이 성경이다. 성경이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가장 합리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합리성을 우리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라 한다.

왜냐면 이 성경이 과연 진실 그대로의 조물주의 말씀이요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인가를 알려면 이 성경이 과연 진실인가 여부부터 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먼저 읽어보아야 한다. 읽지도 않는데 그런 확실한 자체 증명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이든 비판하려면 그 자신 그 방면에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상식. 각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고 널리 보급되어 있는 성경이라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읽어보면 성경은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 자체 증명의 대목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 읽는 것만 못하다.

성경을 직접 읽은 한 사람으로서 여기 밝힐 수 있는 것은, 성경을 거짓말이라고 가정할 때 거짓말로 지어내었다면 성경을 그런 식으로 절대로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거짓말로 꾸며 쓴 이야기라면 절대로 그렇게 성경을 기록할 리가 없다는 점만은 대목대목에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언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반 세기 넘게 읽어온 사람으로서 증언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이 합리적이지 못한 데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내용 가운데는 예언도 있는데 그런 예언으로서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으므로 물론 예외다.

그런 예언은 그 때가 되어 그 예언이 이루어져야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서책 중에 이렇게 그 진실성을 자체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내용을 얼마든지 안심하고 최대 관심을 기울여 살펴볼 만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오늘도 보장 받지 못하는 무상한 인생 목숨이라 죽어도 다시 사는 방법이 있는가, 다시 살아도 행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인데, 이 중대한 일에 관해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런 조물주의 메시지로 자처하는 것이 있으니 당연히 관심을 기울이고도 남을 일. 그럼에도 관심을 기울일 시간 여유가 없다는 등 변명한다면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탓이지 남 탓이 아닐 것이다. 그 때는 후회해도 소용 없다. 

③ 성경의 중심 내용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역사상의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으로 일관하는데 이 점 특이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구약은 그를 상징하고 또 그에 대한 예언과 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조물주의 모든 계획이 미리 그려져 있다. 그리고 신약은 이미 역사상의 인물로 나타난 그 인물에 대하여 설명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조물주의 메시지라 하면서 왜 한 인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내용이 되어 있는가 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영으로서의 조물주의 형상화 즉 사람으로 형상화하여 나타나신 모습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보이시지 않는 조물주의 형상화,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가장 바람직한 아주 이상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공통된 욕구가 조물주가 계시면 그 조물주를 몸 가까이 확인할 수 있기를 원하는데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니 여간 흥미 있는 일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원래 조물주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신 것으로 설명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으로서의 조물주 하나님의 형상화는 당연히 사람일 수밖에 없다. 다른 모습으로는 조물주의 형상화가 이루어질 수 없음이다. 
이렇게 사람으로서의 조물주의 형상화의 직접적인 목적은 우리의 '구원'에 있다. 즉 죽지 않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자는 것이다. 따라서 흥미 정도가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비상한 관심으로 대해야 하는 내용이 성경이다.

④ 자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나는 어떤 관계가 있고 어떤 구원의 길이 있는지를 성경이 설명하는지 살펴볼 일이다. 형상화한 하나님으로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조물주는 오직 한 분으로 즉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로 둘이 사랑으로 하나되어 계신다는 사실에 먼저 눈 떠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형상화하신 것은 아들이시다. 만일 홀로 계시고 이렇게 둘이 하나로 계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되실 수도 없고 인간의 구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둘이 하나되어 계시는 풍성함이라 할까 여유라 할까 이 점은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있는 사실로 적응시켜 볼 때 얼마나 은혜스럽고 든든한지 모른다.

그리고 사랑이 주제다. 세상에서 누구나 사랑의 좋은 점은 말하는데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가 성경만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의하면,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고 강조하여 내거는 모든 자비, 인애, 사랑 등은 모두 위선이라는 데에 있다. 내가 나를 위하는 일체의 것은 자아중심(selfishness)으로서 이것이 악(죄)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목표하는 바 구원만 성취되면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랑, 자비, 인애는 모두 헌신짝처럼 여겨져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일절 그런 구원 얻기 위한 선행으로서의 사랑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직 순수하게 그 사랑이 생명의 법질서니까 그 원리를 사랑하여 지키고 행하는 그런 사랑이다. 이것이 위선 없는 진정한 사랑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자기 힘으로 자기가 노력하여 얻는 구원이 아니라 이미 조물주의 새 창조에 의해 이루어져 있는 구원을 믿으면 누구나 얻게 되는 것이기에 자기 구원을 위하는 그런 자아중심이 티끌만큼도 개재될 소지가 없음이다. 그래서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결론이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를 중심하는 것으로서 이미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 불행의 씨앗이다. 선악 개념도 이에 따른다. 조물주 하나님께 순종하고 않고 하는 것도 이에 준한다.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를 따라 말씀하시는 것이므로 이 법질서 준수가 선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악이요 불법이다. 로마서 첫머리에, "참고 선을 행하면 영광과 영생을 얻게 되고 악을 행하면 멸망"(롬 2:7-10)뿐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로 이런 관점에서 악과 선의 의미를 명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

가령 세상 종교에서 자기 구원을 위하여 선을 행하되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나머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더라도 그래서 철들면서부터 죽기까지 선행만을 하고 악은 조금이라도 행한 역사가 없더라도, 종국적으로는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이상 그 모든 선행은 불법이요 악이다. 무조건 세상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또 더욱 적극적으로는 남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는 것을 선이라 하고 해를 끼치는 것을 악이라 하는데, 가령 어려서부터 산 속에 가만히 앉아 수도나 하고 평생에 남에게 나쁜 행동은 물론 싫은 소리 한 마디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이상 그 모든 것이 다 악이요 죄이며 불의, 불법인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한 선행이기 때문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아 구원 얻어 영생하고 악을 행하면 저주 받아 멸망한다고 말해도 바로 그런 자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바울도 예의 로마서 첫머리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할 것이나,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고 내용도 미처 알기 전에 판단부터 먼저 하는 섣부르고 서투르고 성급한 판단이다. 성경은 "의인 즉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 하지 않았던가. 모순되게 말할 리가 없다.

의인이 없는데 무슨 선을 행한단 말인가. 그럼 로마서 내용은 결국 인간은 아무도 구원 얻지 못한다는 말인가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편견을 따라 읽고 선입견에 치우쳐 공평하게 부지런히 읽지 않는 것이 성경을 읽을 줄 모름이다. 그래서 조급하게 결론 내려 성경은 일견 모순된 말이 많고 그래서 난해하다 한다. 천만의 말씀. 성경처럼 단순명료한 내용도 또 그렇게 기술한 책도 없다. 단지 예언만 예외다.

예언이야 그 속성상 일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어 있음이다. 성경이 체계적으로 기록되지 않아 그렇다고 할 필요도 없다. 체계를 갖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너무나 간결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인"이니 "자기 중심"이니 하는 것도 그렇게 간결한 내용을 다시 요약해주고 있는 단어일 뿐이다. 사람은 아무도 의인이 없고 다 죄인들뿐이니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에 의해 분발해서 영생에 들어가는 자는 없다. 그러나 로마서 서두에 그렇게 선을 행하면 영생한다 했으니, 이는 이미 죄인의 영역을 벗어나 의인이 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 의인이 악을 행하면 멸망이고 당연히 의를 행하면 자연스럽게 영생한다는 그 뜻이다.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심판이 적용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죄인밖에 없는 인생으로서 의인이 된다는 말인가. 인간 스스로 된 것은 분명 아니니 그러므로 조물주 하나님께서 그렇게 새로 창조하신 때문이다. 그러면 너는 무조건 오늘부터 의인이다 해서 만들어진 의인인가. 말씀 한마디로 급조된 의인인가. 아니다. 새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된 의인이다. 의인으로 새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의인으로 만드셨으니 그 만드신 뜻을 따라 의의 행동 즉 선을 행하면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을 따라 그것을 준수하면 당연히 영생을 보전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연 짓는 것은 죄요 악이요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이니 자기 스스로를 다시 죄인, 불법자로 만드는 것이요 이런 못된 행동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당연히 멸망밖에 더 있는가. 로마서가 모두에서 밝히고 있는 총론적인 설명이 바로 이 의미이다.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믿지 않는 사람이 악인으로 심판 받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그런 사람은 아무리 자기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선행[세상에서 말하는 세상 기준의 '선']을 하고 그 최고봉에 달했다고 자타 공인하더라도 여전히 죄인이요 그 모든 선행이라고 하는 하나하나가 모두 죄요 악이다. 왜냐면 그 선행의 동기가 자기 구원 즉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에서 발단된 것이기에 그렇다.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한 거기에 선은 없다. 악뿐이다. 선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중심인 한에는 영원토록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무조건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면 선이요 사랑인 줄 알지만 그 마음, 그 동기가 항상 문제이니 반대 급부를 기대하고 행하는 모든 "선"은 위선으로서, 즉 선으로 가장한 악인 것이다. 자기 중심 즉 이기심이 그 뿌리가 되어 있음이다. 그래서 모든 선은 그 동기,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 한 것이다.

다시 말해 구원 즉 새 창조는 현재 죽어 있는 인생을 산 자로 만드심이다. 원래 창조하실 때는 산 자 즉 영원히 사는 자로 만드셨으나(따라서 육체도 이런 자연계 몸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인 영물 즉 천사들과 같은 초자연계 몸이었으나) 먹으면 원래의 자연계 몸으로 변화되어버리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는데도 경고를 무시하고 먹은 결과 이런 본능 위주의 "죄의 몸"(롬 6:6) 속에 갇혀 원천적으로 자아중심이 된 데다가 육체도 자연법칙을 따라 썩음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니 산 자일 수 없고 죽은 자이다. 

썩는 육체인데다 죄인이므로 죄의 결과는 또한 죽음인 것이다. 애초 아담에게 경고하실 때 "죽을 것이다(이 죽음은 초자연계 몸의 영원한 생명에서 벗어나 자연계 몸이 되어 한정된 목숨으로 끝남을 의미)" 하신 대로 죽은 자가 되어 있는 것이니, 자연계 몸은 죽는다면 당장 쓰러져 숨 넘어가는 것을 말하지만 영원히 살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아담 시대 인물들이 비록 천년 가까이 살았어도 죽은 자임에는 변함 없는 사실이었으니 정확히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런 자연계 몸의 죽음을 벗어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 환원됨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구원이라 하는 것이다. 이 둘이 하나됨은 내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심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령 받음을 구원이라 하기도 한다.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내가 지금은 자연계 몸이 되어 있지만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께서 초자연계 몸으로 계시니(초자연계 몸으로서 부활하신 의미가 여기에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몸으로서 나의 머리로서 계시니, 자연스럽게 주종 대소 관계를 이루어 작은 자는 큰 자를 따르는 법이요 그래서 이미 나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초자연계 몸이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둘이 하나됨의 의미이다. 

나와 하나되신 그리스도와 주종, 대소, 인과 관계를 이루어 있다는 사실이 핵심. 다시 말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을 위하는 관계로써만 이 둘이 하나됨이 이루어지고 지속되는 것인즉 내가 만일 이 사랑의 마음이 변하여 자아중심이 되어 당시 아담이나 또는 악령들처럼 이 한 몸 관계에서 이탈해 나간다면 '자유 의지'라는 말 그대로 하나님도 이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시다. 이 속수 무책은 방관, 방치가 아니라 불가능을 말하니 이유는 한 번 정하신 것을 번복하실 수 없음에 있다. 만일 사정과 경우에 따라 번복하신다면 어찌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법칙으로 만유가 존재하는데 만유가 유지되겠는가. 피조물을 모두 없애치우시지 않는 한에는. 

그러므로 죽은 자를 산 자로 만드셨으니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냐 하는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것이다. 왜냐면 생명에는 사랑이 핵심이요 사랑에는 자유 의지가 핵심인데 이 자유는 변함이 없을 것인즉 이 자유 선택으로 나는 과거 아담처럼 악령들처럼 얼마든지 자아중심으로 도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 그래서 그런 시험대(우리 각자가 과연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는"지를 다루어보고 저울질해보는-히 1:9)로서의 의미도 엄연히 있는 것이 이 세상의 의미인지라 악령 사탄도 그렇지 않으면 벌써 무저갱으로 들어가 있겠지만 이 세상에서 시험하는 자로서(즉 이 세상의 왕이요 신으로서) 버젓이 지금까지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당분간 필요악인 것. 

그러나 이 시험은 이 세상에 한한다. 다루어볼 것은 다 다루어본 다음이니까 되풀이할 필요가 없음이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우리를 다루어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는 하나님과 피조물이 둘이 하나된 이중 구조이므로 무엇이든 하나님 일방적으로 하시는 것이 없고 피조물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으로서야 미리 내다보시는 터라 다루어보고 말고 하실 것도 없으나 피조물은 그렇지 않으므로 피조물 모두가 하나님의 모든 하시는 일에 100% 수긍할 수 있도록 하시려고 이런 시험하는 일도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 

고로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가 부인된, 자기 중심이 아닌, 자기를 위하지 않는 즉 자기 구원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이 (참된) 선이다. 단지 선이 좋기 때문에, 사랑의 법칙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자체의 가치를 인식하고 이를 준수하는 이런 사랑의 법칙에 의한 선이 진정한 선이요, 로마서에서 밝히는 "영생에 이르는 선"인 것이다. 그런 선을 하려면 자기 구원에 대한 일체를 의식하지 말아야 함이니 이를 위해서는 이미 자기의 구원이 이루어져 있어, 자기로서는 눈곱만큼이라도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는 신경쓸 필요가 없는 상태라야 하는 것.

그러므로 자기 노력이나 수양이나 공덕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이어야 함은 필연. 성경이 바로 이와 같은 구원을 전파하는 것이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새롭게 의인으로 만드심이다. 의인으로 만드셨으니 의인이지 죄인이 아니다. 죄인일 수가 없다. 죄인이 아니니, 죄의 뿌리인 자아중심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일체의 것이 아예 사라져버린 상태이다. 그리고 죄의 온상으로서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하여 내("옛 사람")가 죽어 있는 상태다. 의인이므로 당연히 자기 부인 일색으로 시종일관해야 하는 것이며, 자기 중심으로 나가면 의인의 위치를 상실하고 다시금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위의 설명으로 충분히 밝혀진 것이다.

그런즉 하나님이 의인으로 만드셨다고 기계적으로 언제나 의인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겔 18:24]. 인격성을 지닌 존재로서 자유 의지를 주제로 삼아야 사랑을 논할 수 있지 않는가ㅡ이미 이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다. 고로 사랑을 논할 수 있는 반면 타락도 논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자유 의지 때문이니, 그래서 아담은 처음부터 죄인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건마는 죄인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의인이 죄인되기란 간단하다. 너무나 간단하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유일한 방비책, 해결책은 "처음 사랑을 잃지"(계 2:4) 않기 위해 부단히 자신을 편달하는 것이다. 

구원[salvation]은 구속[救贖-redemption]이라고도 하듯이 원상태대로 회복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인 현재의 위치를 범죄하기 전 의인으로 있던 첫 사람 아담의 상태로, 죽음의 상태에 놓인 현재 위치를 생명 가운데 있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심이다. 영원한 멸망 가운데서 건져지는 것은 그렇게 되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함에서 오는 필연적이면서도 또한 부수적인 것이다. 왜냐면 당연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니까.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이 멸망으로 곧장 이어지기 때문에 그런 멸망의 순간적 고통까지 담당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자신 그런 멸망의 위험으로부터 건져졌다 하여 멸망 자체를 면제받는 것은 아닌 것. 멸망으로부터 면제 받으려면 우리의 자유 의지까지도 그 작용이 정지되어야 하는데, 자유 의지가 보장되는 한 언제나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 가능성이 이 세상에서는 남아 있는 것이다. 십자가 상의 회개한 강도는 하나님이 미리 아심을 따라 되는 한 사례로서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의 구원을 이룬다고 해서(빌 2:12) 하나님의 구원 자체에 미비점이 있거나 우리 스스로가 보충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 소지를 완전히 불식시키시는 차원에서 우리 구원의 완결성을 입증하신 것 뿐이다. 

더구나 우리 몸이 구원 받았다 하여 하늘에 있지 않고 여전히 이 땅에 있는 다음에야 말할 필요도 없다.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가능성을 두고 시험하는 것이지 그라고 하여 헛발질만 하라는 법이 없다. 그 역시 자기 자유의지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시킨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가 기회를 노리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을 계속 믿지 못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우리 각 사람을 범죄로 유도, 멸망에 이르게 함인 것이다.

자유 의지의 절대적인 보장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항상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기정사실화하시면서도 정작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는 "할 수만 있으면 이 때가 지나가게 해주시기"를 원하여 구하신 것이다. 땀을 피 방울처럼 흘리시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으면 안된 것은,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 없이 주님 스스로 한번 자기 뜻대로 하겠다 마음만 먹으면 지체없이 즉각 그대로 될 것이므로 그만큼 유혹과 시험이 컸기 때문이다. 우리들과 달리 그 결정 여하에 따라 즉각적 반응이 나타날 것인즉, "저의 원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십시오" 하시기까지의 싸움이 치열한 것이었고 이런 기도를 세 번이나 거푸 하실 정도였었다. 매시간 우리의 자유의지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새로 창조되지 않고 재차 출생하지 않는 한,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다. 의인이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이미 선언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이 주님께 나아와 "선한 선생님" 하고 불렀을 때 "네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시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죄인된 나의 형상으로 오신 것이다. 이는 내 대신이 아니라 나와 하나되시기 위함이다. 즉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신 것"[사 53:12]이므로, 비록 그리스도시더라도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이 죄와 관련되어 있지 초월해 있지는 않다는 말씀이 된다. 의인은 죄 가운데 있지는 않지만 죄인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째서 무슨 이유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심은 주니 자신이 선이신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이 아니라 "네가 나를 하나님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으로 보느냐 사람으로 볼진대 네 물음 자체가 틀린 것이다"라는 지적이 되신다.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보고 자기도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자 청년은 자기도 잘만 하면 그 "선한 선생님"처럼 될 수 있다고 즉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그렇게 찾아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결국 자기 중심을 버린 자기 부인에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이 있다는 말씀으로서,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자기 중심, 즉 자기가 자신을 위하는 것과 대응되는 것은 자기 부인이니, 자기 자신이건 자기의 소유이건 막론하고 자기에 관한 일체의 것을 인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하나님만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이니 즉 그리스도 인식이다. 그리스도 인식은 아버지 인식인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해도 과거처럼 나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여 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서 인식하니 하늘과 땅 차이다. 과거 나 자신의 것으로서 인식할 때에는 내가 주인이니 내가 나를 위함에서 좀 덜하고 미흡해도 여유가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나의 소유가 아니라 주인님의 소유이니 이전보다 더 꼼꼼하게 나를 보살피게 됨은 당연하다. 그런즉 나의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전에 비해 방만하게 하고 신경을 덜 쓴다는 것은 용납이 안된다. 이는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에서 나의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이니 곡해할 필요는 없다.  

선과 악, 구원과 멸망, 생명과 죽음의 줄거리가 자기 부인과 자기 중심에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 중심과 그리스도 부인에 있다. 조물주 하나님 중심과 조물주 하나님의 부인, 그 여하에 달린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여 미워하면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을 버겁게 생각하고 달가워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 중심이다. 모든 것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고 끝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나중 곧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해왔다. 이천 년의 관록이 있는 자다. 그러나, 그렇게 혼잡하게 만든 것을 가지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 말씀의 해석"이라 한다는 것일 뿐 하나님의 말씀 자체는 그 무엇에 의해서도 더럽혀질 리가 없음은 물론이다. 언제나 맑고 밝은 빛 그 자체이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分辨-辨別]할"[딤후 2:15]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상 설명에서 분명히 해야 할 요점은 성경에서 구원을 이루라(빌 2:12), 선을 행하여 영생에 이르라[롬 2:6-13]는 것은, 자기 구원을 의식하면서 영원한 자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은혜로 받아놓고 있는 상태에서 그 구원된 상태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악을 행하면 이에서 벗어나는 상태요 선을 행하면 자기 구원을 유지 보전하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의인되어 있으므로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언뜻 보기는 엇비슷해 보이나 실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명과 죽음의 차이요 산 자와 죽은 자와의 간격이다.

자기 영원한 운명을 개척한다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자기를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의식하여 그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려는 일념에서(고전 7:34) 우러나는 모든 것으로써 미래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되는 결과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해간다는 뜻이다. 처음부터의 동기도 목적도 될 수 없으니 이미 구원은 은혜로 받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담의 범죄나 악령들의 범죄를 염두에 두면 되는 일이다. 그들은 그렇게 되었지만 거룩한 천사들은 정반대되는 결과이지 않은가. 우리도 천사들처럼 하고 악령들처럼 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다. 

죽은 자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라, 죄 짓지 말라 일러도 그것이 통할 수가 없다. 이미 죽은 터에 그런 말이 소용에 닿을 턱이 없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죄 짓지 말라는 경고가 경고 그대로의 효력을 지닌다. 선을 행하라는 명령이 선을 행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를 함축하고 있음도 그 때문이다. 왜냐면 이미 그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서 당연히 그런 선을 행할 능력과 동기와 명분을 원도 한도 없이 당당히 충분히 갖추어 있는 다음이기 때문이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선임을 다시 강조한다. 사랑과 생명의 법질서가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준수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어 지키는 것이 생명의 법질서 준수 곧 하나님의 계명 지킴이다. "계명"이라 하면 무슨 비상이라도 대하듯 질겁을 하지만 성경을 잘못 배워도 한참 잘못 배운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율법"(고전 9:21) 아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 육신에 있는 자에게는 모세의 윱법 정도는 따라 오지도 못할 정도로 더 엄격한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라고 자기 부인을 역설하심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외형적인 것으로 따지지 않고 가장 근본인 마음 자세를 다룸이기 때문. 

그러나 이 "계명을 지킴"(요 14:15/21/15:10/고전 7:19/요일 2:3,4/3:22,24/5:2,3/요이 1:6/계 12:17/14:12)에서 여기에 그 어떤 사사로운 동기도 목적도 개입되지 않아야 하는 것. 즉 나 자신의 구원이라든가 내가 받을 상급이라든가 하는 것 등이다. 개입되는 순간 그것은 벌써 불순한 것이 되어버려 본래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것을 상급받음을 두고 말함이라는 당치도 않은 해석을 소위 신학자들은 하고 있으나 세상 천지 상급을 두렵고 떨면서 받으려 한다는 이런 해괴망측한 말이 어디 있으며 이런 내용이 담긴 성경이라고 세상에다 선전하는 꼴이니 어찌 무사하리요. "두렵고 떤다"고 할 때는 생사문제가 결부되어 있을 때에만 사용하는 언어다. 

의인으로 만드시는 이러한 새 창조의 방법 외에는 인간 구원이 전혀 불가능한 것이니, 구원의 의미는 그냥 살려주는 데에만 있지 않고 또다시 이전과 같은 범죄행위를 고집함으로써 계속 이런 비극적 현실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함에도 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의지는 확고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전과 같이 여전히 자기 중심으로 벗나갈 때는 그 어떤 구원도 무효화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이 되어 있으면 순종을 할 수가 없다(롬 8:4-9).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복종은 생명의 법질서에 대한 이탈이다. 정상 궤도를 달려야 모든 것이 조화롭게 정상 가동되는데 그 중에 하나라도 부조화를 일으키면 전체가 망가지고 정지된다. 모두가 하나로 망라되어 움직이는 조직이요 체제가 한 몸됨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죄와 악은 암세포와 같은 존재다. 

우리에게 분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생명의 법칙에서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모두가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든 피조물들 자신을 위함이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조처와 배려를 우리 스스로 배척하게 되면 그것은 도리 없는 자살행위이다[롬 8:7,8]. 남이 아무리 자기에게 생명을 퍼부어주더라도 자기 스스로가 구멍을 내어 "새어 나가게"(히 2:1) 하는 데에서야 도리 없지 않은가. 

그러면 참고 선을 행하는 자가 영생으로 보답된다고 했는데(롬 2:7-10) 그 선행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사회를 혁파하는 것인가. 아니다. 악마 사탄이 이 세상 왕이 되어 지배하고 있는데 그런 지엽적인 것에 매달림은 주님의 것인 나의 시간 낭비이다. 근본적인 것을 다룸이니 즉 새 창조와 다시 출생하는 길을 전파하고 이를 위해 먼저 제사장의 기도를 쉬지 않으며 구제를 해도 이 구원 사업의 차원에서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 몸이 된 형제 사랑은 당연하고 필연이다. 성경에 그 방법을 예시한 대로다(약 2:16요일 3:17). 내가 모두 주님의 소유가 됨은 주님 친히 주님 자신을 나의 소유로 선물로서 영원히 안겨 주신 때문이다. 하나됨으로 인한 결과이니 이 하나됨을 내 스스로 깨는 경우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음이 됨은(히 6:6) 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