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6일 목요일

원상 회복 (3)ㅡ에녹/엘리야/멜기세덱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 즉 움직이신다면 반드시 어떤 일관성을 지닌 원리원칙의 바탕을 따라 진행하심입니다. 그 바탕이 바로 '3위1체'입니다. 이 '3위1체'는 다름아닌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화감동으로 씌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기록된)인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라 함은 다름아니라 성부와 성자로 "하나"(요 10:30)되어 계신다 함이니 파생/派生자와 피/파생자 즉 짝의 관계이십니다. 그러나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 계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이 그 핵심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가리키시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 하신 것이니, 즉 "3위/位"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짝"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의 동양철학에서는 음양론으로서 보편화되었으나 "3위1체"까지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유독 노자/老子만은 독보적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도덕경 42장의 25언/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단 한 번 "음양"이란 말이 나오는 바 그 중 "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이 그야말로 잂품/逸品이고 백미/白眉입니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셨는데,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시작하셨으며, 이같이 짝을 이루시어 '3위1체'가 되시니, 이 '3위1체'야말로 만유의 기본 대원리이다"로 낙착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즉 이 "도/道"의 정체("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마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필자가 이 노자를 "멜기세덱"(히 7:3)의 변신/身이라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멜기세덱이 "성경상 가장 신비한 인물"로 인정되는 것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것을 못먹는 어린 아이" 곧 "장성한 자가 아니라"(:11,14) 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은, 거의 2천년간 아담의 죽음이 "영적"이라고 악마 사탄이 바벨론 신학으로 거짓말만 주입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21세기 바벨론 탈출에 즈음해서관련된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신령한 몸으로 복구 변환된(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아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역사의 인물로 생존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담으로서는, 아담의 이름으로서는 아닙니다.

엘리야/에녹과 다른 것은, 아담은 죽었지만 부활함으로써(멜기세덱 등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다시 살아 활동할 수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으로 또는 노자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던 것입니다. 엘리야/에녹/멜기세덱이 신령한 몸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애초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써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의 이런 동물적 육체로 남아 끝내 죽었다면, 즉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영적 몸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정상 회복"이란 주제로 강력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안목으로는, 인생의 영생 구원이 목적이 아닌 <애초 창조하신 인간의 원래 모습의 회복>이 더 큰 중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범죄로 망가진 최초 형상("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답게 영생 불멸인)을 원래대로 되돌리심에 핵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부차적 결과가 우리로서는 "영생/구원"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일단 죽음의 걸말을 본 아담인데 죄 지음의 형벌 차원에서라도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딤전 2:14("아담을 사탄이 꾄 것이 아니라 여자를 꾀었음")에서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은 여자와 한 몸이었다는 의미에서 운명적으로 여자의 죄에 가담한 셈이나(이는 "마지막 아담"께서 그 몸된 교회의 죄에 동참하심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이므로 부부가 똑같이 동물적 육체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의 성격은, "왜 유독 에녹과 엘리야만이 신령한 몸이 되었느냐"에 대한 답이 됩니다. 다시 말해 둘 다 <아담의 영원성>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됨을 강조하여 나타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 죽은(인간으로서의 최초 죽음) 직후 세상을 하직함으로써(두 번째 세상을 뜸) "첫 사람 아담"을 직접 가리킴이 되고, 반면 엘리야는 "마지막 아담"(:45)을 가리킴이었던 것으로,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직전 세상에 출현했던 것입니다.

단 전자는 실제 실물로서의 에녹이었던 반면 후자의 경우 그 실제(형체)인 엘리야를 대신한 형식(형체) 곧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의 세례 요한이었다는 점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배당(배열)도 뜻 깊은 데가 있으니, 에녹과 직결된 아담은 이미 폐물로서 사라지는 존재이고, 세례요한(엘리야)과 직결된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은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모든 인류의 머리로서 시작하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을 강력한 메시지로 세상에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섭리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물성 육체로 죽는 아담의 그 죽음의 처참함은 결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모습이 아니었음을 에녹의 신령한 몸(육체적 죽음을 보지 않는, 죽음이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으로써 그 현격한 차이를 가시적으로 보이시어 강조하신 반면, 세례요한의 "엘리야"적 성격은 단지 <이름만의> 존재 가치로 끝나(엘리야처럼 능력 과시도 일절 없음과 맞물려) 우리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기적)과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로만 부각되도록 넉넉하게 훌륭하게 대조된 것.

엘리야는 엘리야일 뿐이지 세례요한이 엘리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지는 아담은 원래의 위풍당당한 영광의(범죄하기 전의) 아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대조, 대비되는 두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더 할 수 없는 선명/鮮明성으로써 이 엄청난 역사 무대를 조명하고 계시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 우리입니다.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에 대해 무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마귀는 이를 두고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환생한 것이라 하여 윤회의 확실한 증거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나 그런 "전생"(轉生/前生)은 네피림에게만 해당되며 아담 후손으로서의 인생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런 네피림을 멸절시키시지 않는 것은 아담의 범죄가 사탄의 말(거짓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라는 의미로 통하므로 아담이 세상 통치권을 사탄에게 "넘겨준"(눅 4:6) 꼴이 되어 빚어진 비극적 결말로서 형벌 차원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혹자는 사탄이 주님 앞에서 허세를 부린 거짓말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심은 영원 불변이심을 간과하는 무식의 소치라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일개 피조물이 거짓을 농하다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탄적 지배와 관련해 또 다시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아담은 모든 인간의 머리로서 인간 세계를 주름잡는 지배자이나 그 권한을 원수에게 넘겨 준 결과가 된 것이기에(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의 의미도 있어) 바벨론 신학과 같은 2천년 간의 속임수도 사탄의 새상 통치권 아래 행해지는 터라, 천사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하신 말씀만이 유효했던 암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탈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아래 마침내 천사 군단이 모처럼 실력 행사에 들어가 사탄의 세력을 꺾은(계 12:7-9) 것을 계기로,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3위1체", 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등을 비롯해 대낮처럼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결코 모든 것을 허투로 듣지 말 것입니다. 

2025년 11월 5일 수요일

원상 회복 (2)

우리 구원이 <원상 복구>이기 때문에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거룩하고 의로운 인간으로 죄가 없었으니까.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롬 5:12) 것이므로.


아담 범죄로 인간(아담)이 더 이상 "신령한 몸", 영광의 몸"(고전 15:44/빌 3:21)이 아니고 현재와 같은 "육/肉의 몸", "낮은 몸" 다시 말해 동물적 육체가 되어버렸음을 항상 의식합시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은 <살고자 함>이 아니고 <보내심 받아 주님의 일하기(요 20 21) 위함이니까(4:34ㅡ"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크신 은혜로 모든 것이 이제 원상 복구되었으니, 아담 범죄를 거울 삼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과 '언약'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않을 것을 우리 각자 마음 깊이 다짐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다시 말해 생명의 법칙 을 따르는 행보의 365일 24시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됨의 은혜의 영광을 입었으니 "내 몸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내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19)인 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늘 의식함이 요긴합니다. 세상 사람은 아담 범죄로 정상 상태에서 전락하여 비정상의 험한 꼴에 위치함을 전혀 알지 못하니까, 동물적 욕구(성욕/性慾)에 사로잡혀 또 악령들의 부추김을 받아 음란/淫亂을 극하고 있는 세태이나, 모든 진실을 아는 우리는 휩쓸리지 않아야.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 위하여 흘리신 피 값으로 사신, 나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제 영원히 전적으로 주님의 소유물이 되었으니 그런즉 나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편단심만이 있을 뿐입니다(:20). 그 대신 <주님의 모든 것이 나의 것>이라 그 영광을 누리게 될 "좋은 날"을 앞두고 바라는 우리들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로지 나만> 위하심이니,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사람마다 각자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이 말은, 과장된 표현도 아니고 상징성을 띈 것도 아니고, 진실 그대로의 영광스러운 사실을 말함인 것입니다. 이 나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심이니까!

바로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우리 위해 죽음을 친히 맛보지 아니하시면"의 뜻)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낼 것이다"(요 16:7) 하신 바로 그 "유익"됨인 것입니다.

이제는 영원히 사람되시어 사람으로서의 그 몸으로 1대1 나와 상관하시되, 그러나 그 영은 우리처럼 사람의 영이 아니라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 곧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로 계시는 성령이신 때문에, 모든 구원 받은 자 개개인에게 충준히 그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미가 이러하심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이같은 "하나"되심은, 두 분 모두가 동시에 나타나시는 법이 없고 성자로 나타나시면 성자이시고, 성부로 나타나시면 성부이신 것이니, 이는 주님이 빌립에게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 말씀하신 바로 그대로인 것입니다.

양자역학에서의 2중 슬릿 실험(파동성이 나타나면 입자성이 나타나지 않고 입자성이 나타나면 파동성이 나타나지 않는)에서 증명되는 "3위1체" 바로 그 현상인 것입니다. 이 <3위1체>야말로 오늘날 이 "마지막 때" 필요불가결의 <바벨론 탈출>이라는 일대 격변기에서 이에 대비해 교회 곧 그 "백성"(계 18:4)의 대처 방안을 이같이 구체적으로 마련해 주신 <은혜>로서의 전무후무의 경이/驚異입니다.

태초 창조의 만유 운행의 기본 원리를 최종적으로 세상에 밝히시는 핵폭탄급 "표적과 기사"(요 4:48)로써 21세기 "바벨론 탈출"의 중대성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세계인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이를 주목하여 마땅합니다. 3위1체의 오묘함과 비밀스러움이 인류사 최초로 드러나는 순간이기에 그러합니다.

이 특이한 <'3위1체'적 표현법>은,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15:26)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14:16) 및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하신 말씀에서 완연히 드러납니다.

즉 성령을 보내시는 주격/主格이 성부이심과 동시에 또한 성자이신 것입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10:30)이심을 입증함입니다. 이는 3위1체에서의 제3위를 이루심입니다. 이 "3위"가 짝의 법칙에서 핵심인 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 "하나"로서의 대칭미/對稱때문인 것입니다. 만유는 짝으로 되어 있고ㅡ"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이사야 34:16), 그리고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인 것이니 이것은 우주의 '철칙'입니다.

이 "하나"로서의 구성 요건이 "한 몸"(창 2:24)됨의 '머리'와 '몸' 구조에서 잘 드러나는 바 즉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를 위함으로 쌍방 모두 자기를 위하지 않음이 그 특징입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아내와 남편의 육체의 맞바꿈식 소유권 행사라 할까, 남편의 몸은 아내가 주장·주관하고 아내의 몸은 남편이 그렇게 함으로써 잘 나타납니다(고전 7:4).

갑과 울 "한 영"됨에서는 갑 자신이 을의 것이 되고 을은 갑의 소유가 되는 바 이것이 생명(삶)의 법칙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이는 "언약/言約"이라는 한 마디로 요약됩니다.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이 머리는 몸을 위하고 몸은 머리 위하는 조화로 인식 이해하면 됩니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위함으로써 절대 복종하고 창조주께서는 오직 그 창조물을 위한 일념으로 명령(계명)하시는 구조/체제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의식이 여기서 비롯됩니다.

이 영원한 삶의 원리를 따라 창조주 친히 사람이 되셨고, 우리 모든 인간의 죽음과 부활을 그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셨고,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심으로써 나와 "하나"가 되시니 이것이 영원무궁한 삶의 기본 틀(방법)인 것입니다. 처음부터 자아중심(자기 위주, 본위)은 철저히 배제되는 것입니다.

"죄는 불법/범법"(요일 3:4)이라 한 대로 바로 이 생명의 법칙을 어김을 말합니다. "아담이 언약을 어겼다" (호세아 6:7)함이 바로 이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이 약속을 모든 영적 피조물은 지키게 되어 있는데 즉 자아중심을 일절 대척하게 되어 있는데도 사탄(창세기에 나오는 그 "옛 뱀"ㅡ계 12:9/20:2)은 오만해져 아담을 시기하여 영원히 죄 짓는 자로 타락했고, 아담 부부는 어리석음으로 동일한 비극을 자초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처럼 죄를 그저 막연하게만 말하지 말고("도둑질"이니, "살인"이니 따위로) 요한 사도처럼 명확하게(모든 실상을 알았으니) 인식하고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21세기 개화기/化開期다운 전도를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상은 암흑기였습니다. 인지 개발이 뒤늦어서가 아니라 인류의 원수 사탄의 속임수와 거짓말이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죽음"이라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궤변이 2천년 가까이 세상을 철권 지배해 온 사실이 그 좋은 예입니다. 지금은 <바벨론 탈출>이라는 시대적 절박성에서, 인간을 호위하는 천사 군단이 강압적으로 악마의 세력을 분쇄한 다음(계 12:7-9) 숨통을 열어놓은 결과로 만유의 기본 구도인 3위1체가 알려진 것이니 복음 전파에서 실로 획기적인 것입니다.

그 동안은 사탄의 인간 지배가 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이었기에 섣불리 손댈 수가 없었으나 이제는 "바벨론 탈출"이라는 대전제가 걸려 있어 그 명목 아래 하나님 은혜로 간신히 돌파구가 열리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3위1체", 알고 보면 21세기 일대 "사건"이라 불러도 됩니다. 노자/老子까지 다니엘 예언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       (계속)

2025년 11월 3일 월요일

원상 복구 (1)

샘 솟듯 하는 우리의 왕성한 기력/氣力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함> 자체에 있어(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느헤미야 8:10)

영생을 못하니까 영생만 하면 된다는 그런 단순한 사고방식에 모두 사로잡혀 있는데 여기서 탈피하는 것이 화급합니다. 나부터 탈출했으면 다른 사람 탈출시키는 것이 시급합니다. 몸이 탈나면 병원부터 가는 것이 급하고 달리던 차가 고장 나면 차부터 손보는 것이 급선무이지 다른 데 신경 쓸 여지가 없습니다. 정상이 아니라 비정상이니까 우선 정상으로 돌려놓고 볼 일입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차후의 일, 차차후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상황이 그러합니다. 급한 일부터 서둘러야지 왜 엉뚱한 데에다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것입니까! 불이 났어요! 불부터 끄야지요! 물에 빠졌으니 사람부터 건져 올립시다. 달리 무엇을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 사람부터 구해 냅시다! 사람부터! 사고가 났으니 사고부터 수습합시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는 대로 세상을 보는 눈입니다. 제대로 사태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목 말라 물! 물! 하고 소리 치는데 왜 엉뚱한 것을 들이대어 주려는가요! 물을 주세요.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즉 다시 나는(출생하는) 일입니다. 새로 창조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애초 창조가 망가졌어요! 망가졌으니까 원상태로 회복되는 것부터 가 급합니다. 다시(거듭) 나고 새로 창조됨은, 단순한 <영생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말 자체가 이 경우 자아중심의 욕심으로 통합니다. 아주 잘못 알고 있어요. <원상 복구>입니다. 인식부터 바꾸어야 해요. 이 점 아주 중요합니다.

이 둘이 같은 뜻이 아닙니다. 이 둘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근본적인 것으로서, "세상 사랑"(요일 2:15) 즉 <세상 삶에 대한 애착>과,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는"(눅 14:26) 것 즉 <동물성 육체로서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의 엄청난 격차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애초 창조가 망가진 실상이 이 <동물적 육체>인 것입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망가져 영생 못하게 됐으니 "영생·구원"이라 하는 것이지요. 거듭 강조하지만, 망가졌으니까 현재의 인간 상태와 세상 삶을 정상이 아닌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당연하고, 반면 "현재는 애초 창조된 과거의 모습 그대로다" 하고 믿는 이들은 그 생활 자세가 전자와 180도로 다를 것은 물론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하나님 말씀은 전자에 속하고 후자는 옛 에덴에서 아담 부부가 속은 그래서 죽음의 재앙을 자초한 바와 같은 사탄의 거짓말인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바벨론 탈출은(계 18:4) 이 거짓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아담과 에덴이 원래 초자연계의 영적 속성이었다는 사실이 이래서 중요하고, "영적 죽음"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이 얼마나 악랄한 것인지 오늘날 뒤늦게나마 까발려지는 의미가 큽니다.

인간이 그 원래의 창조된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무참히 <망가진 형태>가 현재의 이 동물성 육체인 것입니다. 인간고 즉 모든 고통·고난이 이 동물적 육체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망가진 것이면, 원상 복구가 시급하지요. 그래서 부득불 기초 교육부터 실시하는 구약시대를 거쳐 마침내 창조주 하나님 친히 인간 피조물이 되시기까지에 이르는 전무후무의 대사건으로 이 복구 작업이 이루어졌고 지금도 진행 중인데 이제 곧 끝날 시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때를 통하여 하나님의 무한 자비하심은 <바벨론 탈출>까지 명령하시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절박한 "시대 분별"(눅 12:56)입니다. 너도 나도 이 마지막 때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위급한 순간임을 피부로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모든 세상이 세상 술에 취하여 곯아떨어져 인사불성이 되어 있습니다. 저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흔들어 깨워 위험을 알려야 하는 긴박함을 우리 스스로부터 절감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부터 "사망의 잠"(시편 13:3)에서 깨어남이 화급/火急합니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명령하십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하신 당시는 주님의 고난 받으심 이전이기 때문이나 지금은 "성령으로 살아(주님 친히 각 사람 앞앞이 와 주시어 그 안에서 친히 그 삶을 살아 주시는) 성령으로 행하는"(갈 5:25) 때이므로 시대가 다릅니다. "성령으로 행함"이란, 주님과 이같이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됨으로써 곧바로 주님 친히 "권능"(행 1:8)이 되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동물적 육체로 있는 나에게 과연 주님께서 계시느냐 여부는 앞서 여러 번 설명한 대로 "회개" 유무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처음부터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됨"(롬 1:20)을 인하여 입증된 것이고 오늘날 3운법칙, 3위1체 법칙 등으로 이 21세기에 훌륭히 확인되신 바입니다. 곧바로 믿음으로 좌우되는 문제일 뿐입니다.

2025년 11월 2일 일요일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하는"(갈 5:25) "성령 충만"의 삶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갈 5:25).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각자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나는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 시간부터 반드시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으로 사는> 것과 일치하게 또한 <성령으로 행하기>로 
지금 내 앞에 계시는 나의 주님 앞에 약속을 해 드립시다.

이와 같이 주(인 곧 나의 소유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나 일할 때나
마실 때나 먹을 때나 의식하는
그 "품속"(요 1:18)에서의 "성령 충만하심"을 사모하는
365일 24시간이 되게 "힘씁시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으니
이는 내가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만 위하고
주님 친히 또한 내게 속해 주시어
나의 소유가 되어 주심으로써
문자 그대로 나릂 24시간 위하심을
있는 그대로의 증명으로 보이심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보다 아름다우시고
가장 매력적인 흡인력의 영롱하심으로
내게 임하여 계시는 내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이 모습은 또한 아버님의 자태이십니다(요 14:9-17).
그 날에 강림하시어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실 것이다"(살후 1:10).
그 모습의 아름다우심이 너무나 황홀하여
보는 자마다가 찬탄의 숨막힘을 금치 못한다
바로 이 뜻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을 호호백발 노인으로
표현하여 나타낸 모든 그림은
바벨론 신학의 성경 무지 탓.)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할 것이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로 온 것이다"(:1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18,19).


믿음에 들어올 때의 "회개"가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가름한다 (2)

"회개"로써 하나님 앞에 "언약" 관계에 들어가면 죄 사하심이 되는 회개의 세례를 받게"(행 2:38ㅡ"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 함은 세례 요한이 예고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마 3:11)는 바로 그 의미입니다.


나 위하신 죽음과 부활을 이루어 주신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심(이것이 "주님을 내 마음에 영접해 모심"임ㅡ"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ㅡ계 3:20)으로써 <나의 죽음과 부활>, <나의 죄 용서하심> 등 모든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건>으로서 성령의 선물을 받는 한 순간 내 안에 모두 성취/완성됩니다.

내가 회개를 하고 그 회개의 세례를 받는 것은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단계를 거치지만, 성령 받음과 그 실제적인 의미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례 받음으로 죄 용서된 바탕에 성령 임하심이 아니라, 죄 용서 받음과 깨끗이 됨, 성령 임하심이 동시 한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고로 회개가 진지하고 진실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데, 이렇듯이 중요한 회개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기를 속이는 경우가 지금까지 거의 전부였던 비극적 현실이었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 하나로 이같이 끔찍하게 사탄에게 당해만 왔던 이 장장/長長 2천년 세월의 비극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절대로ㅡ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엄중 경고하신 대로. 지금 와서 생각하면 너무나도 <떨리는> 현실입니다.

'구원 받음'과 '성령 받음'을 나누어 생각하는 위험한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 받음이 "거듭(다시) 남"이고 "성령으로 남"(요 3:3,5)입니다. '나 위한' 죽음과 부활을 이루신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하나"(요 10:30)되시고  "한 영"(고전 6:17)되심이 "성령의 선물 받음", "성령 세례", "성령으로 남"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제2위)이 창조주(제1위) 하나님과 짝을 이루어, "하나"됨(제3위)이 곧 생명(영생)인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는 "자기 부인" 이상 가는 도덕률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중심이 아니고 상대방 중심은 "선을 행함"이 나타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구원 받은 이들을 까닭 없이 성인/聖人(saints)이라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 세상의 성인이기에 가감 없이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김)>과 <거룩함(자기 부인)>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이다"(히 12:14), 이 경고를 무시하는 그 누구든 천국 꿈을 미련 없이 접기를.

이런 <생명의 법칙> 하나만 보아도 후하시고 넉넉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신데 인간을 일부러 고통을 주려고 현재와 같은 나약한 육체를 주실 리가 만무합니다. 앞서의 설명대로 생명의 법칙 따라 하면 여간해서는 죄를 지을 즉 자아중심으로 빗나갈 틈도 생기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모두가 다 현재의 삶에 100% 만족하게 될 것인즉 아쉬워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일부러 시험해보실 작정으로 이런 동물성 육체를 아담에게 처음부터 주시지 않았다는 단정인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시 결론 내려, 아담은 영생하는 자로 창조되어 신령한 몸으로 삶을 누리게 하셨으나 범죄함으로 이런 꼴이 된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해봅시다. 이 지구상을 통틀어 "영적 죽음"이란 말을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있나요? <거짓말을 설명>하려는 부질없는 짓과 같지 않나요? 거짓말은 거짓말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어른들도 입을 다무는데 초중고생 정도의 나이 아이들이야 오죽 하겠나요?

이해를 못해 설명을 못하는데 그것을 믿을 마음이 생기겠나요? "영적 죽음"이란 말을 알아먹어야 그 상대적인 의미의 생명을 음미하여 주님께 달려 나올 절박한 마음을 먹을 것인데? 결국 "회개" 없이 영생 하나만 욕심 내는 것 밖에 더 되잖아요. 아니, 어른이 되어서야 구원 받도록 성경에 무슨 정해진 바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하나님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나요? 죽음이면 죽음이지 왜 "영적"이란 말을 덧붙여야 의미가 통하도록 애당초 하나님이 죽음을 정하셨다고 죽음이 생겨나게 하셨다고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더란 말인가요?

어린 아이라도 듣고 말씀을 이해하여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만인간 구원>이 아닌가요. "영적 죽음"이라는 무식한 소리를 더 이상 꺼내지 말아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복음을 욕되게 하지 맙시다. 더 이상 사탄에게 휘둘리지 맙시다. 우리 하나님의 복음을 아름다움 그대로 진솔하게 세상에 전달하지 않음으로써 미칠 악과 재앙은 내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라 결단코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 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 12). 우리의 "거룩함"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작업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 받아 모시는 순간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새 창조"에 속합니다.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 함은 은혜로 일단 이루어져 시작된 거룩한 삶을 중도에 그치지 말아서 유야무야로 끝내는 일이 없도록 즉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을 것인즉, 거하든지 떠나든지(죽든지 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라"(고후 5:9,10)는 뜻입니다.



2025년 10월 30일 목요일

믿음에 들어올 때의 "회개"가 구원 받았는지 여부를 가름한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호세아 6:7).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니"(행 2:38).

회개는 "언약/言約"입니다. 생명은 언약입니다. 사랑은 <약속>입니다. "너만을 사랑할 테니 너도 나만을 사랑하겠지?"입니다. 즉 "우리의 하나됨을 너도 나도 깨뜨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영생도 물론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이 쌍방간의 약속을 가리켜, "계명(명령)" 그리고 "순종"이라 합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의 계명"(요 15:10)을 지키심으로써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다" 하신 것이니 계약 관계이십니다. 홀로 살지 않고 함께 사는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이 모두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니 부모의 자식 사랑은 자기를 다 바치는 사랑인 것입니다. 어버이가 자기 "눈동자처럼 위하는"(시 17:8) 자식이니, 자식이 자기 자신을 위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자식도 그 어버이를 그렇게 위함으로써 순종하면 즉 어버이의 "뜻대로 행하면"(마 7:21ㅡ"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되는 것이라 전연 이상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이 생명의 영원한 법칙으로 정해진 것이니, 하나님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가 만유 존립의 기본 대법칙이 되어 있음과 같습니다. 회개가 약속이 됨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다짐이니까 그렇게 회개한 후에는 반드시 그 약속 이행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 받기 전의 회개도 당연히 그렇습니다. 세례 받음으로써 죄 용서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무조건 세례만 받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회개"가 성경대로 진지하게 되어졌느냐로 좌우됩니다. 이 회개가 부실/不實함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구원을 확신한다"지만 실제는 헛된 아니, 치명적인 자기기만으로 끝나게 됨이니, <엄중 경고>입니다. "회개"가 최대 관건(열쇠)입니다.

회개가 정상적으로 되지 아니하면 죄 용서도 없고 죄가 용서 안되면 죄 많은 추잡한 곳에 성령 임하심이 이루어질 리 만무합니다. 그러면 평생 구원된 줄로만 착각하다가 그 영혼은 영원히 불 못 밖에 갈 데가 없으니, 크게 각성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라도 이것부터 바로잡는 것이 화급하고 생명이니,
 이 경고에 주목하시기를!

생명의 법칙대로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스스로를 가책함이 회개이니 즉 자기만을 위했던 언행심사를 뉘우침입니다. 삶의 법칙은 그 누구든 자아중심을 버리고 상대방 중심 즉 하나님만 위하고("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ㅡ마 22:37) 이웃을 위함("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ㅡ22:39)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인 것입니다(:40).

즉 구원된 다음의 '약속 이행'입니다. 다시는 자아중심이 아니라 이웃을 위함으로서 나타나게 마련이니 "참고 선을 행함"(롬 2:7)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나타나지게 마련이므로 이 필연적인 것이 보이지 않음은 오직 하나의 결론, 거짓 없는 진단은, "믿음이 없다"는 쪽으로 나오게 되어 있기에, 여고보는 확정적으로 아래와 같이 단언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20).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6). 너무나 옳은 지적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 각 대목은 보는 관점 따라 크게 요동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성령의 계시, 친히 가르쳐 주심>으로 성경을 읽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2025년 10월 29일 수요일

21세기는 전무후무의 입증과 확증의 시대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이사야 9:2)ㅡ메시야 송가

https://youtube.com/playlist?list=RD3V_ZZ6ENu-E&playnext=1&si=REM-j1FDmEIqvpQK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1-33).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소유/所有)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계 18:4) "바벨론을 벗어나라" 하심은 <바벨론 교회>의 모든 거짓말을 떨쳐버리고 그 거짓말을 믿음으로써 천연덕스럽게 멸망의 죄를 짓고도 영생 구원이라 믿는 미신(주님 경고하신 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 하신 대로의 모든 인위적 교리ㅡ마 15:8,9)에서 화급히 탈출해 나오라 하심입니다. 

사탄의 이 세상 통치는, 에덴에서 아담을 죽였던 그 동일한 거짓말을 퍼뜨림을 주무기로 삼는 데 있습니다. 온갖 핍박의 환란을 일으킴은 일시적 위협으로 냉탕 온탕울 번갈아 쓰는 악마의 수법입니다. 박해는 외려 견딜만 하다 해도, 거짓말에 걸려 넘어지게 하면 그것은 필살/必殺로 끝나기에 더욱 여기에 마귀 사탄은 집중합니다. 세상 시작되자마자 지금까지 그러했고 특별히 주님 오신 후의 이 2천년 기간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미 누차 설명하여 강조했재만 "믿음"과 "행함"의 주제에서 마귀는 그 맹렬한 독아/毒牙를 번뜩이고 있습니다. "구원 빋았음을 확신한다"는 표방 아래 자행되는 이 사탄의 교리에 극소수의 택하심 받은 자 외에는 거의 전부 휩쓸려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원 운명의 생사/生死가 지금 이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 따르느냐 아니면 "넓은 대로와 큰 문"의 사탄의 인기 높은 거짓말을 아담 부부처럼 더 순종해서 끌려가느냐 그 분깃점에 놓여 있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을 행하라 명령하심은, 우리 인간이 그렇게 행할 수 없음을 스스로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다"라고 지금까지 바벨론 신학자들은 일률적으로 일관되게 속여 온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는 대목을 사탄은 악용하는 것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밝혔지만 왜 <율법 아래> 있을 때(메시야 주님 오시기 전)와 <은혜의 믿음 아래> 있을 때(주님 오신 후)를 혼동하고 구별을 못하는 것인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지금 이 대목은 후자가 아닌 전자 관련인 것을 왜 모르나요.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믿음으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 받음>은 새 창조를 말함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실 리 없잖아요? 다 의인이고 다 거룩한 자들인 것입니다. 인간이든 영물(천사)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그러한 상태로 우리도 복귀하니까 즉 새로 창조하심이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의롭고 거룩한 자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무엇이 요구되겠나요?

당연히 우리로서는 순종이 필연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향후의 삶에서 필수이기에 그렇습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에 불복하고 제멋대로 놀아나는 꼴을 감히 상상할 수 있나요? 기계적 작용인 동물과 달리 사람이나 천사는 영적 존재이기에 자유의지로 스스로 알아서 그렇게 한다는 그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장치하신 양심이나 지성적 판단에 의해 충분히 관련된 선악(좋고 나쁨을 구별해 인식하는)의 지식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의지로 생명의 법칙에 불복하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며, 반면 동물들은 기계적인지라 불복종하는 일도 없거니와 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아담도, 사탄 등 악령들도, 이 자기 판단 따라 스스로 행동하여 죄를 지은 것이며 그 당연한 보응을 받은 실례인 것.

그러므로 인간의 새 창조는, 아담 이후 모든 후대가 다 영생이 불가능한 동물적 육체가 되었은즉, 영생하는 자로 먼저 창조됨이 최우선이고, 그래서 은혜로 그렇게 창조됨을 가리켜 "구원"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구원되었다"고 무조건 영생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창조나 아담 때의 창조나 창조는 같은 것이니까, 검증하는 절차로서의 <시험>이 불가결인 것입니다.

그러면 새 창조로서 영생하는 자로 복귀되었으면 왜 지금 첫사람 아담처럼 신령한 영광의 몸이 아니냐 하겠는데, 아담도 처음부터 신령한 몸으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즉 아담도 동물성 육체로서 하나님 형상과 모양으로 처음 창조된후 다음 단계로 영원성의 영혼이 조성된 것이며, 그 결과로 신령한 몸이 될 필요성 내지 필연성에서 에덴에다 아담 위해 한 동산을 창설하시고 거기 아담을 두심으로 아담이 신령한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아 모심은, 아담에게 영(혼)이 처음 조성되었음(창 2:7)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 난다" (요 3:3,5,6) 하신 것입니다. 이 "성령"은, 나의 죽음과 부활을 그 몸으로 이루시고 나와 하나되심을 위하여 예수님 친히 내 안에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을 가리킵니다. <몸>은 사람이시나 <영>은 하나님이시므로 또 영으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로 계시는 까닭에 넉넉히 이러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되신 것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이 성령으로 나는 것은 아담이 처음 영이 조성되었던 당시 상황을 반복하는 의미와 같기에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각 사람마다 마치 아담 창조를 되풀이함과 같아), 이제는 육체로 나는 것(이미 첫사람 아담으로 인해 동물적 육체는 받아 있으므로)이 아닌 "성령으로 다시 나는"(3:3,5,6) 것입니다.

이는 맨처음 아담이 동물적 육체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애초 창조되어 있었던 모습 그대로이고, 이후 아담 속에 하나님이 숨을 불어 내쉬심으로 아담에게 영(혼)이 생겨나고 이로써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는 순서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같이 성경의 기록 하나하나가 빈 틈 없이 짜여진 진실 그대로임이 입증되고 있음은 놀라운 일입니다.

때문에 주님 부활 후 제자들을 "향하시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20:21) 하셨으니, 이는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를 재연/再燃해 보이신 것으로서, 부득불 새 창조로 우리를 다시 나게 하심을 극적으로 증명해 보이심이라, 이 역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니 때때로 음미하여 우리 믿음을 새롭게 활성화할 일입니다.

재삼/再三 강조하지만, 이는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에서 단연 압권입니다. 창세기 아담 창조의 광경에서의 극적인 순간을 창조주 친히 그것도 부활이라는 극적인 순간에 극적으로 친히 묘사해 나타내어 주셨으니까! 그것도 단 한 마디 설명도 없으신 채! 성경이 꾸며낸 것이라면, 천하의 거짓말쟁이 사탄이라도 감히 흉내내지 못할 일입니다. 진실이 뚝뚝 묻어나는 성경의 명장면의 이 최고봉을 우리는 수시로 기억하고 수시로 입 밖에 내어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기리고 찬양할 일입니다.

반복하거니와, 아담의 그 영의 조성에 해당되는 것이 우리의 성령 받아 모심입니다. 또 아담의 육체에 영이라는 새 존재가 들어찼어도 금방 신령한 몸이 되지 않고 별도로 에덴에다 한 동산을 창설하셨던 것과 똑같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하신 것입니다. 즉 주님 재림 때 우리도 신령한 몸으로 즉각 변형됩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후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일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우리 각자도 새 창조를 받아 구원된 즉시 "보내심을 받은"(20:21) 터이므로, 주님처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라"(4:34)고 말할 수 있는 꼭 그 위치에 지금 있다는 이 엄숙한 사실 앞에 마음을 가다듬읍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주님을 위하는, 주님의 사랑의 종으로 섬기는 것으로서, 머리되신 주님 친히 머리로서 우리를 위하시고 종으로 선기심과 영원히 맞물리는 생명의 법칙 준수인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는 것이다"(눅 22:27).

그러므로 진정한 사람 삶은 머리되시는 우리 주님을 위시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으로 섬기고 동시에 똑같이 섬김을 받는 가장 이상향적 삶의 향유임을 알았으니, 항상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내것으로 삼고 그 생명수가 흘러 넘치는 넘쳐 흐르는 강들("rivers")이 되게 합시다. 그 환희와 희열의 풍성함을 이 지구상의 현재 죽음의 때일망정 만판으로 누리고 주변을 흥건히 적시는 우리 각자의 심령이 되어 있기를!


원상 회복 (3)ㅡ에녹/엘리야/멜기세덱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 즉 움직이신다면 반드시 어떤 일관성을 지닌 원리원칙의 바탕을 따라 진행하심입니다. 그 바탕이 바로 '3위1체'입니다. 이 '3위1체'는 다름아닌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