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면 즉 움직이신다면 반드시 어떤 일관성을 지닌 원리원칙의 바탕을 따라 진행하심입니다. 그 바탕이 바로 '3위1체'입니다. 이 '3위1체'는 다름아닌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만이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화감동으로 씌어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기록된)인 것입니다.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라 함은 다름아니라 성부와 성자로 "하나"(요 10:30)되어 계신다 함이니 파생/派生자와 피/被파생자 즉 짝의 관계이십니다. 그러나 둘로서가 아닌 "하나"(요 10:30)로 계시고 움직이신다는 사실이 그 핵심입니다. 바로 이 모습을 가리키시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 하신 것이니, 즉 "3위/位"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짝"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의 동양철학에서는 음양론으로서 보편화되었으나 "3위1체"까지에는 미치지 못했는데 유독 노자/老子만은 독보적 위치에 있었으니, 그의 도덕경 42장의 25언/言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단 한 번 "음양"이란 말이 나오는 바 그 중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이 그야말로 잂품/逸品이고 백미/白眉입니다.
이를 해석하면,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하셨는데, 독생자를 낳으심으로 시작하셨으며, 이같이 짝을 이루시어 '3위1체'가 되시니, 이 '3위1체'야말로 만유의 기본 대원리이다"로 낙착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강력히 뒷받침해 주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즉 이 "도/道"의 정체("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지금까지 중국 학자들마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데 있습니다.
필자가 이 노자를 "멜기세덱"(히 7:3)의 변신/變身이라 확신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멜기세덱이 "성경상 가장 신비한 인물"로 인정되는 것은,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 하고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것을 못먹는 어린 아이" 곧 "장성한 자가 아니라"(:11,14) 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날 수가 없는 것은, 거의 2천년간 아담의 죽음이 "영적"이라고 악마 사탄이 바벨론 신학으로 거짓말만 주입시켜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21세기 바벨론 탈출에 즈음해서야 관련된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은, 신령한 몸으로 복구 변환된(에녹이나 엘리야처럼) 아담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역사의 인물로 생존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담으로서는, 아담의 이름으로서는 아닙니다.
엘리야/에녹과 다른 것은, 아담은 죽었지만 부활함으로써(멜기세덱 등의 이름으로) 이 세상에 다시 살아 활동할 수 있다는 그 차이입니다. 그래서 멜기세덱으로 또는 노자로서의 발자취를 남겼던 것입니다. 엘리야/에녹/멜기세덱이 신령한 몸으로 그렇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애초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써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입니다.
아담이 처음의 이런 동물적 육체로 남아 끝내 죽었다면, 즉 에덴에 들어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런 영적 몸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정상 회복"이란 주제로 강력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안목으로는, 인생의 영생 구원이 목적이 아닌 <애초 창조하신 인간의 원래 모습의 회복>이 더 큰 중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범죄로 망가진 최초 형상("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답게 영생 불멸인)을 원래대로 되돌리심에 핵심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부차적 결과가 우리로서는 "영생/구원"입니다.
그런데 범죄로 일단 죽음의 걸말을 본 아담인데 죄 지음의 형벌 차원에서라도 어찌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딤전 2:14("아담을 사탄이 꾄 것이 아니라 여자를 꾀었음")에서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즉 아담은 여자와 한 몸이었다는 의미에서 운명적으로 여자의 죄에 가담한 셈이나(이는 "마지막 아담"께서 그 몸된 교회의 죄에 동참하심을 상징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사실이므로 부부가 똑같이 동물적 육체로 전락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의 성격은, "왜 유독 에녹과 엘리야만이 신령한 몸이 되었느냐"에 대한 답이 됩니다. 다시 말해 둘 다 <아담의 영원성> 즉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됨을 강조하여 나타냄에 있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아담 죽은(인간으로서의 최초 죽음) 직후 세상을 하직함으로써(두 번째 세상을 뜸) "첫 사람 아담"을 직접 가리킴이 되고, 반면 엘리야는 "마지막 아담"(:45)을 가리킴이었던 것으로, 주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시기 직전 세상에 출현했던 것입니다.
단 전자는 실제 실물로서의 에녹이었던 반면 후자의 경우 그 실제(형체)인 엘리야를 대신한 형식(형체) 곧 단지 <상징적> 의미로서의 세례 요한이었다는 점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건 배당(배열)도 뜻 깊은 데가 있으니, 에녹과 직결된 아담은 이미 폐물로서 사라지는 존재이고, 세례요한(엘리야)과 직결된 메시야 예수 우리 주님은 새 생명의 새 사람으로 탄생하는 모든 인류의 머리로서 시작하심이기 때문에 바로 이 점을 강력한 메시지로 세상에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경륜/섭리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동물성 육체로 죽는 아담의 그 죽음의 처참함은 결코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원래 모습이 아니었음을 에녹의 신령한 몸(육체적 죽음을 보지 않는, 죽음이 아예 존재하지를 않는)으로써 그 현격한 차이를 가시적으로 보이시어 강조하신 반면, 세례요한의 "엘리야"적 성격은 단지 <이름만의> 존재 가치로 끝나(엘리야처럼 능력 과시도 일절 없음과 맞물려) 우리 주님의 초자연적 능력(기적)과 신령한 몸으로서의 부활로만 부각되도록 넉넉하게 훌륭하게 대조된 것.
엘리야는 엘리야일 뿐이지 세례요한이 엘리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죽어 없어지는 아담은 원래의 위풍당당한 영광의(범죄하기 전의) 아담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두 대조, 대비되는 두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더 할 수 없는 선명/鮮明성으로써 이 엄청난 역사 무대를 조명하고 계시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는 21세기 오늘날 우리입니다. 찬탄을 금치 못합니다. 이와 같이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에 대해 무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됩니다.
마귀는 이를 두고 엘리야가 세례 요한으로 환생한 것이라 하여 윤회의 확실한 증거라고 엉뚱하게 둘러대나 그런 "전생"(轉生/前生)은 네피림에게만 해당되며 아담 후손으로서의 인생들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런 네피림을 멸절시키시지 않는 것은 아담의 범죄가 사탄의 말(거짓말)을 하나님 말씀보다 더 믿고 따른 결과라는 의미로 통하므로 아담이 세상 통치권을 사탄에게 "넘겨준"(눅 4:6) 꼴이 되어 빚어진 비극적 결말로서 형벌 차원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혹자는 사탄이 주님 앞에서 허세를 부린 거짓말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이 되셨지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이심은 영원 불변이심을 간과하는 무식의 소치라면 할 수 있는 소리입니다. 감히 하나님 앞에 일개 피조물이 거짓을 농하다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사탄적 지배와 관련해 또 다시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아담은 모든 인간의 머리로서 인간 세계를 주름잡는 지배자이나 그 권한을 원수에게 넘겨 준 결과가 된 것이기에(아담 범죄의 형벌 차원에서의 의미도 있어) 바벨론 신학과 같은 2천년 간의 속임수도 사탄의 새상 통치권 아래 행해지는 터라, 천사들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마 18:3)이라 하신 말씀만이 유효했던 암울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탈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분부 아래 마침내 천사 군단이 모처럼 실력 행사에 들어가 사탄의 세력을 꺾은(계 12:7-9) 것을 계기로, 오늘날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3위1체", 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 등을 비롯해 대낮처럼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결코 모든 것을 허투로 듣지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