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30일 일요일

"교회"의 사이비성 진단법 그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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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위 "조지아 가이드스톤" (Georgia Guidestone)에
세계 인구를 5억 정도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는데
이것은 바로 살인행위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억지로> 현재 인구(78억)를 감소시킨다는 뜻이기 때문.
아무리 목적이 그럴 듯해도 인위적으로 나가고 하나님 무시하니
악마성을 노정함이요, 이는 이 세계가 악마 관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일체가 다 마귀 사탄으로부터 오는 것.

소위 "성소수자"라는 미명을 붙여주고 "인권 운운"하는
오늘날 이땅의 기독교방송, 이에 동조하는 모든 교회는
성경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배반자 무리임은
성경이 단죄하는 동성간/同性姦(비역)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국가 차원에서 비호하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입을 다물거나
심지어 옹호하는 그 어떤 교회든(대소 불문) 분명 사이비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좋은 기타 내용을 선전해도 위선, 거짓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에 반/反하면서도 성경적인 체하니 더 간악합니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안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규정하시어 단죄하시는데
피조물인 인간이 더군다나 교회로 자처하는 집단이
공공연하게 반역 행위를 하는 것이기에 두 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얼마나 현재의 세상 분위기가 반성경(적그리스도)적이 돼가는지
그 바로메터가 여기에 있습니다. 
변해 간다기보다,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

이러한 못된 짓을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저지르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의 이 세상 심판(주님 재림 전)은 다가오고 있음이 명백한데
마지막 복음 전파만은 약속하신 대로 차질 없이 이루어주시기를
우리가 일구월심 매달려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나 크시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확정되었지만 조금 늦추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작정이 확고부동하심을 알고
마귀는 5억으로 감소시킨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는 것인 바,
하나님의 예정대로 될 것이기에 미리 선수를 쳐서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의 사악한 목적에 활용하고자 마귀가 획책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이전인 주님의 천년 통치 시작 전의 "심판"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말씀하신 대로 마지막 때의 복음 전파가
확실히 이루어지도록 전교회 차원에서 지금은 기도할 때이니,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의 도화선이 된
당시 장감 선교사들의 "정오/正午기도회"의 합심 기도처럼
장장 4개월(그 중 3개월은 매일 한 시간 넘게 또는 개인에 따라
저녁 식사 시간이 되기까지도)에 걸친 기도의 해산의 수고였습니다.
"축복하시지 않는 한 저희는 포기 않겠습니다"(창 32:26)의 결기,
바로 그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절박성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돌보시어 그런 본을 보여주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도 다름 없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돈을 "맘몬"이라 함은 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서는 돈이 신입니다. 그래서 세인은 돈을 사랑합니다.
몇 사람의 세계 최고 갑부가 온 세상을 주물럭거린다는 말이
빈 말일 수 없는 것은 마귀는 얼마든지 그런 갑부를 만들기 때문.
그리하여 그들을 사주해서 자신의 계획을 실천합니다.   
조지 소로스, 빌 게이츠 등이 그런 소수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지라 돈이면 천하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런 소수가 권력자가 아니라 그 배후의 사탄이 실권자입니다.)


  
 
 

2020년 8월 28일 금요일

"교회"의 사이비성 진단법 그 첫째

 






만인 상대의 하나님 구원의 말씀이지만

그 중에도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 위주로 반응이 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고전 1:26-29).

교회에 처음 나오는 이들은 고로 헌금 내라는 소리에 기부터 죽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교회이지 그들로부터 무엇을 거두어들이니

이런 모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분명 위배됩니다.

다시 말해 그런 데는 교회가 아니라는 판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름만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단다고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은 현재의 북한교회, 그 79세 목자의 65명 교회.

모두 예외 없이 순교의 길을 밟았던 성령께서 본으로 나타내신 교회.

모든 일을 하나님께 여쭙고 그 뜻을 따름에 주저하지 않은 모범교회.

교회당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따라서 "목사"라는 직분도 없이 

오직 성령을 모셔 각자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만한 놀라운 믿음의 결과를 과시한 가히 사도적 교회라 할 만한

20세기 교회가 한반도에 있었다는 것은 무척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한반도 교회를 주목하고 계시다는 의미일 수도 있기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 로마제국으로 번져나간 

당시 교회 토양은 로마인의 사회적 구조가 노예가 2/3에 해당되는

약한 자, 천한 자, 없는 자가 주된 기반을 이루어 있어 

바로 그런 이들에게 영광의 자유를 선포한 교회였기에

그런 모진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야초/野草처럼 번창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기뻐하시는데 반하여 소위 "교회"는

이에 역행해 왔으니 바로 이런 것이 "배도"(살후 2:3)요 "베벨론"으로

지금까지의 거의 2천년 역사를 휩쓸어 왔는데 이제 더 이상으로는

용납되지도 않고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심판이 박두했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그 죄에 참여하지 말라. 진노를 면하라"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오늘날 "바벨론"에서 나오는 방법

 









 




외부인 전도도 열심히 해서 사람들을 끌어들이세요.

단 그들을 개인적으로 보살펴주는 일(following up)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소홀히 하면 아니함만 못합니다.   

내 기도와 전도로 이룬 열매라 내 자녀와 같다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진정 믿음의 형제가 되면 나의 신실한 동역자가 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세요. 교역자를 대하든 일반교인 상대든.

나의 주의 주장과 맞지 않다고 적대시하면 나는 마귀편입니다.

내 편하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세상에 오신 것처럼 죽음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 일하기 위함이니까. 오직 그 목적뿐이니까. 



 



2020년 8월 27일 목요일

영생 가약/佳約

 



남녀가 결혼을 하면 서로에게 얽매이는 삶의 시작입니다.

얽매이는데 왜 그것을 좋아할까요ㅡ더 나은 완전한 삶의

지향이기 때문입니다. 얽매였다고 불평하지 않는 이유죠.

우리가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 인해 구원되는 것

역시 이런 행복한 "얽매임"인 것이니 위의 경우 "한 몸",

이 경우는 "한 영"(6:17)됨입니다. 둘이 하나가 될 때에는

이와 같이 서로간 얽매이지 않고는 애당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니 이 특성을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 의한 한 몸됨에서는 말 그대로 육체로서의

하나됨이라 아내의 몸은 남편의 것, 남편의 몸은 아내의 것

으로 되지만 그 대칭적 현상인 마지막 아담과의 한 영에선

나의 삶이 그렇게 '상호 교환' 식이 됩니다. 고로 나는 주님

위해 살고 주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시어 나를 위하십니다.

몸과 머리 관계이므로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데 이

를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며,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 까 

닭은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므로  내가 나를 위함보다 무한

대로 낫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하시는데 내가 또

나를 위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 대신 주님 위해 사는 거죠.

※1   고전 7:4

※2   "자기 부인"은 현재 인간이 새로 창조되지 않는 한

       속절없이 자아중심이므로 이와 상대적인 의미의 말.


남녀가 결혼할 때 "백년 가약"이라 합니다. 우리는 구원에

들어갈 때 영생 가약입니다. 말 그대로 영원토록 변함없는

약속으로 들어갑니다. 주님은 내 것이요 나는 주님의 피로

사신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의 경우에는

그 육체를 물려받는  남녀 개개인으로서의  혼인 관계이나

마지막 아담(대칭/對稱 아담)과는 그 영 곧 성령으로 한 영

을 이룸이니까 주님께서 신랑이시요 우리 모두는 집합적인

신부에  해당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는  그러한 

표현은  쓰지 않습니다. 우리가  초자연계 몸으로 환원되면 

천사들처럼  성별이  없어집니다. 또한 "한 몸"됨으로 인한 

열락보다 "한 영"됨으로서의 환락이 더 고차원적이라는 것

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고로 서운해 할 필요는 없어요.

※3   남녀 사랑은, 애초 아담 하나였다가 둘(남녀)로 

       갈라져 생긴 것이므로 그 본디 하나였던 관계를 

       계속 유지하려는  일종의 귀소 본능으로서 무슨

       대단한 것처럼 오해할 일이 아닙니다. 생식기능

       이 멈추면 그 본능도 눈 녹듯 사라져버립니다.  

※4   가령 과부와 홀아비가 서로 좋아하니까 관계를 

       맺는데 무슨 하자가 있느냐 하겠지만 그렇다면 

       정식 혼인 신고하여 법대로 결합하라는 것이니,

       성경에서의 "사랑"은  생명과 사랑의 법칙대로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한 번 짝을 이루면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지

       피조물 마음대로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두가 이같이 법질서 확립 차원이므로

       성경은 진실된 진리이고 사람이 감히 마음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확증이 되고도 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는  예수님 날 위해 죽으신 것 믿으면 자

동적으로 구원 영생이 되는 줄  잘못 알았지만 이제는 분명

하고도 엄숙한 약속, 법칙으로서의  언약 관계에  완벽하게

얽매이는 것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한 몸 관계에서 어느 한

쪽이 그 약속을 어기고 부정/不貞한 짓을 하게 되면 간음죄

가 성립되어 약속 파기라 둘은 더 이상 하나가 아님과 같이

한 영에서도 마찬가지. 내 시간도 주님의 것이라 내 마음대

로 쓰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랑은  자율/自律

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가 나를 편달하고 닦달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이는 고의적인 범죄가

되어 주님과는 결별이 되는데  이를 성경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히 6:6)는 엄청난 말로써 표현합니다. 


모든 시험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판가름나므로 영원한

천국에서는 다시는 이런 시험이 없어  오직 이 세상에 있을

때만 한해서 우리가 크게 조심을 해야 함이니 그래서 "두렵

고 떨림으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빌 2:12) 것인데,

아담이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겠는가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했겠지만  어느날 어느 순간 바로

그 선악과를 입에 넣고  태연히 씹는 광경을 연출했으니 이

때문에 "두렵고 떨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어느 순간  이 내

손으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광경을 연출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장담 못하는 일이니까  그런 것입니다. 범죄자는 아

끼시지 않습니다."너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다(롬 11:21).


악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너무나 미끄러지기 쉽고 넘어지기

쉬운  한겨울 추운  얼음 빙판길이  마귀가 조직 폭력배 두목

노릇하는 이 세상 실상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자연계 육체

로 전락하는 순간 인간 세상이 그런 모습으로 바뀐 것입니다.

아담 스스로 만든 것이므로  범죄의 결과라 하나님이 간섭하

실 일이 아닙니다. 인생들을 구원하시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이 상태대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범죄자에 대해서  질서 확

립 차원에서 이렇게 보응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0년 8월 26일 수요일

하나님 창조의 만물의 아름다움은 대칭의 조화(과학/수학적 뿌리) 속에 이루어져 있다 구원의 말씀은 이 짝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하나님 친히 증언하셨다(사 34:16)

 






도교/道敎와 노자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노자는 단 한 사람의 제자도 두어본 적이 없다.

장자가 노자의 제자라 하나 후대인들이 그렇게 보았을 뿐.

노자의 평소 행적에서 초능력의 일면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신선 사상을 도입 노자를 빙자했을 것.

노자의 유일한 저술로 알려진 것은 도덕경 81장뿐인데

"노자 사상"이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돼 있는 것도 기이하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신을 감추신 것은 생전의 그 능력에 여파로

모세를 신으로 추앙, 영적인 음란을 할까 염려하심이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다면 종교가 하나 생겼을지도.

자연계 육체가 돼버린 인생들은 초능력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매우 취약한 근성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앞으로 적그리스도가 무제한적인 게다가 거짓까지 보태어

초능력을 남발하기 시작할 때 과연 몇이나 배겨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노자를 창조주 하나님과 연관시켜 굳이 해석할 것은 없다.

다만 그의 도덕경 한복판에(42장) "도생일/道生一, 운운" 했으므로

바로 그 구절을 남기기 위해 나머지 80장을 들러리 세운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후 아무도 이 구절을 제대로 해석한 사람이 없었기에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과 관련해 추론해보는 것뿐이다. 

 




 




자기 부인 이상으로 최고 도덕률/道德律은 없다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태산같아 보이나 자기부인 앞에서는 평지일 뿐 이같이 격차가 심해 보이나 오직 사랑 유무다






 

2020년 8월 25일 화요일

만유의 대법칙(찍의 법칙)에 의한 21세기의 하나님 말씀 선포

 





그동안 사탄의 거짓의 운무에 가려져 

성경의 윤곽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면

이제는 '짝의 법칙'을 통하여 그 웅장한 모습이

일목 요연 드러낸 태산의 위용처럼 나타났으니

좌고우면 말고 돌진, 맹진하여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룸을 양식 삼아야(요 4:34)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 바로 그 양식을 말씀하심이다









사탄이 이 세상 왕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이제까지 명념치 않고

방귀 소리 정도로 취급했기 때문에 새삼스레 놀라는 것뿐이다

즉 상대적인 열악성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영물을 신/神이라 한다

인생의 유일의 관심사는 이 자연계 몸에서 탈출하는 것뿐이건만

사탄이 눈을 가려서 일절 보지를 못하고 알지를 못하니 통탄할 일이다







2020년 8월 23일 일요일

짝의 법칙대로가 아니면 성경 자체가 성립 불가능함을 아는 것이 이 21세기인들에게 해당되는 필수 지식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

 







기도하지 않는, 기도가 없는 교회를 왜 "바벨론" 교회라 하느냐,

기도는 제사장의 기도인데 제사장과 더불어 3대요소인 성전, 제물

이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결격 사유를 지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성령)께서 계셔야 하나님 성전인데 성전이 아니며,

제물은 곧 제사장된 자 자신을 가리킴인데 하나님의 희생 제물이신

메시야 우리 주님을 머리로 모신 몸이라야 그 닮은꼴이 되는데

자기 부인도 없고 십자가 짐도 없기 때문이다. 전혀 제물이 아니다.

"산 제물"이 아니니(롬 12:1) 기도가 제대로 나올 리가 없다. 

열심을 내어보아야 소위 "권능"에만 욕심 내는 자아중심일 뿐.

그래서 기도원도 많고 부흥회도 많으나 자기 부인, 십자가 짐 없는

마신/魔神의 전당만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실상이다. 

소위 "방언"은 소리 높여 외치고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지만

그들의 입에서 "자기 부인하라, 십자가 지라"는 말이 나왔던가?

대개 이런 마신만 발호하는 오늘날 교회(당)이니 성전/聖殿 부재다. 

성전 없고 제물 없고 따라서 제사장 없는 교회.

명색만이 교회이지 세상 종교의 집회소일 따름이다. 

마땅히 이 모든 것과 오늘날 21세기에는 등져야 하눈 것이다. 




2020년 8월 17일 월요일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

 



계시록에 나오는 "두 증인"(계 11:3-13)은

이 땅의 주인되신 이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역사/役事되는 모든 것을 총칭함이다.

스가랴서에 이미 소개되어 있는 것을(슥 4:1-14)

요한 계시록에 인용된 것뿐인데 스가랴는 이를 설명하여 

"이는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나의 신(성령)으로 되는 것"(슥 4:6)이라 하신 말씀을

소개한 것을 보아, 성령의 역사하심을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

계시록에 "저희 주"(11:8)로 우리말 번역이 되어 있는데

이렇게 되면 그 두 증인(선지자)을 <두 명의 사람>으로 보기 쉽다.

"땅의 주인이신 이 옆에 모시고 서 있는" 인간이란 있을 수 없는 것.

Biblegateway에 보니 "저희"가 43, "우리 주" 또는 그냥 "주"가 16.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the Lord of them"의 이 "them"의 관점이다.

"their Lord"이라 하지 않고 왜 "the Lord of them"이라 했는가.

그 둘만 아닌 비특정 다수를 말함이라고 판단한 것이 후자이고

비특정 다수(모든 구원 받은 자)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전자이다. 


이 "두 증인"은 그렇게 "예언"하다가 "적그리스도에게 죽임 당한" 후

"부활하는" 것으로 장면이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판가름 난다.

즉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써만 구원 받은 자들이 부활하므로

(주님 부활 때 많은 사람이 부활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승을 떠난 이들)

이 세상에 생존할 수 있는 특정 개인을 지칭함일 수가 없다는 결론이다.

네피림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아담("마지막 아담")의 지배하에 있어

예외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인데 처음 세상에 오신 후부터 그러하다

(에녹이나 엘리야 같은 경우는 메시야 오시기 전의 일인 것). 


두 증인에 대해 굳이 사족/蛇足을 달자면 왜 "둘"이냐 하겠는데,

이 대목과 관련된 스가랴서의 내용(4장)이 마지막 때를 겨냥한 예언임을

요한 계시록에 그대로 인용되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시 "마지막 때" 관련 예언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

곧 "한 때, 두 때, 반 때"로 이 역시 계시록에서 인용되고 있으니까

다름아닌 성경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짝의 법칙의 등장을 나타냄이 아닐까. 



계시록에 기록된 대로의 "천사가 가진 복음"(14:6) 전파자로서의

우리도 초대교회처럼 갖가지 핍박과 환란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특징을 갖추게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로서의 상식이다. 

소위 "성소수자" 보호라는 인류역사 이래 가장 기괴망측한 명분 아래

차별금지법(평등법)을 만들어 남색하는 자들을 비방 못하게 법을 만들어

기독교 물을 먼저 맛본 서방 "기독교국가"들이 앞장 서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것이 무슨 선진국의 개화된 문화인 양 착각하니

이 땅에서도 자칫하면 이런 주제를 가지고 말하다가는 옥살이할 판이다.


주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음"과 같이

영생 구원은 죄를 모르던 이들에게 죄됨을 지적하고 깨우쳐주어

회개하도록 함에 있는데 성경에 "남색"을 분명 죄라고 규정 명시했으므로

그런 행위를 바로 일러주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전도자로서의 우리에게 닥치는 것은 전보다 더 기막힌 핍박/탄압이다.

일례로 영국에서는 지금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고로 초대교회 때 교회 기둥 같은 야고보, 성령 충만한 스데반 등이

순교를 당한 것과 같이 오늘날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고 변함이 없다.

바울 사도처럼 온갖 수모와 고난 고통을 무릅쓰고서야 

제대로 된 전도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의 세상이다. 

사망(및 이에 수반되는 모든 인간고)의 권세를 쥔 자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 고통이 메시야 우리 주(인)님의 십자가와 연계되어

남은 사람들 구원에 필요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내 몸에 채움"(골 1:24)이 아닌가. 


이것은 아담의 범죄로 인해 초래된 피할 수 없는 상황으로서

주님께서 다시 오심으로써만 종식될 것이다.






성부 하나님으로 보면 성부이시고 성자 하나님으로 보면 성자 하나님 곧 마지막 아담이신 사람이시고 고로 성부도 아니시고 성자도 아니시므로 성령이시다(성령의 정의/定義)





 





2020년 8월 16일 일요일

교회 상징인 이스라엘 역사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훼파됨(범죄로 인한)과 다시 세워진 의미 그대로 오늘날 성전 재건은 3운법칙, 3위1체 법칙 등장으로 재현되고 있다

 



아담의 범죄로 비롯된 사탄의 이 인간 세상의 장악과 지배는

"말씀 혼잡"(고후 2:17/4:2)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격하로 이어져

따라서 전체가 붕괴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이 마지막 때 "예루살렘 성전"("성령의 전"-고전 6:19)이 중건되는 시점이니

이는 3운법칙과 상호관계에 의해 스스로 난공불락의 아성을 이루어 있는

3위1체 법칙(짝의 법칙)의 두 법칙의 등장과 때맞추어 된 일이다.


그러나 이 두 법칙은 어디까지나 그 본질상 성경과 함께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는 곳에서만 그 위용을 나타내는 제한성이 있다.

성경을 높이는 자리에서는 높여질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아는 자가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법칙 자체가 인생들을 구원하는 것은 아니니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같은 것이 온 지구상 인류에게 알려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인 것이니 이로 인해 실족하지 않는 자 복이 있다.

이런 새로운 첨단 지식이 <온 세상>에 알려질 필요가 처음부터 없음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믿는 자에 한해 나타나는 은혜일 뿐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악인들에게는 한낱 그림의 떡이었음과 같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 오심을 알리는 "엘리야" 역할이었지만

유대 전체를 통해 이 사실을 믿는 자에 한해서한 알려졌고

그렇지 못한 나머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과 같다.

세례 요한은커녕 메시야도 몰라보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으니 말 다한 것.

그 이후 구원의 복음 전파도 같은 양상이었다.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 능력이지

그 외 절대 다수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 아니면 "거치는 것"일 뿐이었다.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이 인간에게 특정 지식을 제공하기 위해

뒤늦게 이 20세기에 비로소 등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단 하나의 목적이다.

받을 자는 받으라, 누구에게나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나 악인은 굳이 차단시켜버리시는 것처럼(행 28:27) 지금도 마찬가지다.

깨달을 자만 깨달을 것이다. 이는 각자 자기 운명을 정하는 이치와 같다.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릴 것이요 그렇지 못한 자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체 없이 "마지막 아담"께서는 오실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은 끝이다.


그가 오시기 전에 준비하라는 나팔 소리가 이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특성으로서

오늘날 3운법칙과 짝의 법칙 및 그에 수반하여 전달되는 모든 성경 풀이이다. 

귀 있는 자는 듣고 받을 만한 자는 받을 것이니 하나님 뜻은 차질없이 이룰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