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0일 수요일

유일무이 특별 인간 피조물

3위1합(종전의 "3위1체")은  창조주 하나님 계시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서 이를 만유 창조의 기본 원리로 삼으셨다는 점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만유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증거이기도 한 때문입니다. 이 이치를 정확히 기술한 것이 인류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노자인 것입니다. 즉 도덕경 제42장 첫 25어인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為和/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여기서  지금까지도 많은 학자들이 ""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해 앓는 것을 보건대 ""는 필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킴이며  따라서 이런 말울 할 수 있는  지금까지의 생존 인물로는 멜기세덱(히 7:3) 외에는 있을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당시 그와 같이 생존해 활동하였을진대 그 후로도 그리고 오늘날도 그리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이 지구상을 스쳐간 억만 인류 중 유일하게 수천 년을 살아 오고 있는 단 한 사람 멜기세덱 아니, "아담의 변신 멜기세덱". 아담이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었으나 범죄로 930세에 일단 죽었다가 에녹, 엘리야처럼 되어 유일하게 먼저 부활되어 있는 인물. 노자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고 해도 하자는 없습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는"(히 7.3) 인간 피조물은 아담 외 달리 있을 수 없으니까.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 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2026년 5월 19일 화요일

중복 게재입니다("임사체험" 관련)

 



아래 "임사체험" 관련 AI 답변(게시물)에서 난 데 없이 바울 사도와 스데반이  언급되고 있는 바,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결과물로서  본질적으로 차윈이 다른 접근이라 전혀 해당되지도 않는  AI의 착각("임사"의 개념  자체를 제대로 인식 못하는)인즉 전적으로 무시하시고 다른 부분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s://youtu.be/_nDIYMH4cDc?si=Jc3wIyt2aSyGMOwH

"우주, 우연일 수 있는가?."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이러한 의문이
확고부동의 정답으로 시각화/視覺한 것이
21세기 이 "마지막 때"의 역사 무대에 등장한
trinia(3위1합), fashomo(3운법칙)입니다.
그리고 이 둘은 상호 검증의 자체 증명입니다. 


2026년 5월 17일 일요일

참고ㅡ"임사체험" 관련 AI(구글) 상대 질의 및 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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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임사체험" 관련 AI 답변에서 난 데 없이 바울 사도와 스데반이  언급되고 있는 바  이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결과물로서  본질적으로 차윈이 다른 접근으로 전혀 해당되지도 않는  AI의 착각("임사"의 개념  자체를 제대로 인식 못하는)인즉 전적으로 무시하시고 다른 부분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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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임사체험"이란 것이 기독교계에 성행하는데 이 현상이 언제적부터 생겨났나요?
기독교계에서 천국과 지옥을 보고 왔다는 식의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 NDE)"이 하나의 거대한 대중적 현상으로 자리 잡은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입니다. [1, 2]
역사적으로 보면 이 현상은 성경 속 고대 기록에서 출발하여, 1970년대 현대 의학의 발전을 거쳐 대중화되었고, 2010년대 이후 기독교 미디어 시장을 통해 폭발적으로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1, 3, 4]
시기별 구체적인 발생과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대 및 초기 기독교 (서기 1세기~)

임사체험과 유사한 '환상'이나 '영적 체험'의 뿌리는 성경과 초대 교회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3, 5]
  • 바울의 셋째 하늘 체험 (서기 40년대-50년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며 낙원(천국)에 이끌려 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를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임사체험 형태로 해석합니다.
  • 스데반의 순교 (서기 30년대): 돌에 맞아 죽기 직전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기록 역시 임사체험의 영적 현상과 유사합니다.
  •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기록: 중세와 초대 교회 시절에도 성도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천사와 천국을 보았다는 기록들이 간간이 존재했습니다. [3, 4, 6, 7, 8]

2. 현대적 '임사체험' 개념의 탄생 (1975년)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의미의 임사체험은 1975년에 시작되었습니다. [9, 10]
  • 레이먼드 무디 박사: 1975년 미국의 의사이자 철학자인 레이먼드 무디(Raymond Moody)가 심정지 등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사람 150명의 증언을 모아 《삶 이후의 삶(Life After Life)》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 개념 확립: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임사체험(NDE)'이라는 용어가 정립되었으며, 어두운 터널 통과, 빛과의 만남, 유체이탈 등 공통적인 메커니즘이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9, 11, 12, 13, 14]

3. 기독교계의 본격적인 성행 (1980년대~2010년대)

의학 기술(심폐소생술 등)의 발전으로 '죽었다가 살아나는' 사람들이 급증하자, 기독교계는 이를 천국과 사후세계를 증명하는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 11, 14, 15]
  • 1980년대 (내가 본 천국): 한국 기독교계에는 펄시 콜레(Percy Collett) 박사의 《내가 본 천국》 같은 책들이 번역되면서 성도들 사이에서 천국 간증 열풍이 불었습니다.
  • 2010년대 (기독교 미디어의 폭발): 미국과 한국 기독교계에 결정적인 기폭제가 된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 2010년: 4세 소년이 임사체험 후 천국을 보았다는 수험서 《천국은 진짜 있다(Heaven is for Real)》가 출간되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로도 제작되었습니다.
    • 2012년: 하버드 의대 신경외과 의사 에벤 알렉산더(Eben Alexander)가 뇌사 상태에서 천국을 경험했다는 《소프라노 천국(Proof of Heaven)》을 발표하며 교계 안팎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2, 16]

4. 현재 기독교계의 시각과 주의점

요즘 들어 이 현상이 더욱 성행하는 이유는 불안한 현대 사회에서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을 시각적·경험적으로 얻고 싶어 하는 대중의 심리와 기독교 유튜버, 간증 프로그램 등의 미디어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12, 17]
그러나 현재 정통 기독교 신학계와 목회자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2, 18]
  • 성경과의 불일치: 임사체험자들의 간증 중 상당수가 성경의 구원관이나 천국관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 조작 및 상업주의: 과거 유명했던 일부 천국 간증(예: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의 알렉스 말라키)이 후일 돈과 관심을 끌기 위한 거짓말이었음이 폭로되기도 했습니다.
  • 결론: 따라서 기독교계 내부에서도 "믿음을 돕는 참고 자료(변증)로만 볼 뿐, 신앙의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성경이어야 한다"는 신중론이 지배적입니다. [2, 12, 17, 18, 19][15, 20]


임사체험 현상과 관련 각 기독교 교단과 신학자들의 구체적 비판 내용을 총체적으로 일람할 수 있나요?
임사체험(NDE)에 대한 기독교 교단과 신학계의 비판은 "체험이 성경의 권위와 계시를 앞설 수 없다"는 점에 집중됩니다. 각 교단과 신학적 관점별 구체적인 비판 내용을 일람표와 세부 항목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 교단 및 신학별 비판 핵심 요약

구분주된 비판 관점핵심 논거
개혁주의 / 장로교계시의 종결성 침해성경 외의 새로운 계시나 천국 증언을 인정하지 않음
복음주의 / 감리교보편구원론의 위험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평안을 느꼈다는 보고를 경계
가톨릭 / 정교회교리적 불일치연옥, 심판 등 전통적 사후세계 교리와 배치됨
자유주의 신학심리적·뇌과학적 현상사후세계가 아닌 임종 직전 뇌의 생리적 반응으로 해석

1. 개혁주의 (장로교) 및 보수 신학의 비판

보수적 개혁주의 신학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원칙을 가장 강조합니다.
  • 오직 성경의 원칙 위배: 성경만이 사후세계에 대한 유일하고 완전한 계시입니다. 임사체험자의 간증을 성경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직통계시'와 같은 이단적 성향으로 봅니다.
  • 거짓 평안과 왜곡: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심판과 형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많은 임사체험자가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빛과 평안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므로, 이는 영적 기만일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 주요 인물: 존 맥아더(John MacArthur) 목사는 저서 《천국은 진짜다?》 등을 통해 천국 간증의 무분별한 상업성과 성경적 왜곡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2. 복음주의 및 일반 개신교의 비판

주로 체험의 '보편구원론(종교다원주의)'적 경향을 경계합니다.
  • 그리스도 중심성의 결여: 임사체험자들은 각자의 종교적 배경(불교, 이슬람 등)에 따라 부처나 마호메트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복음주의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복음의 절대성을 흔드는 이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 체험의 주관성: 영적 경험은 개인의 문화적, 종교적 무의식이 반영된 주관적 환상일 확률이 높으므로 교회의 공적 신앙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3. 가톨릭 및 정교회(전통 교회)의 비판

전통 교회는 '교회 전통과 종말론적 교리'를 기준으로 비판합니다.
  • 심판 및 연옥 교리와의 배치: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인간은 죽음 직후 사심판(Particular Judgment)을 받으며, 죄의 정화가 필요한 영혼은 연옥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임사체험은 이러한 단계 없이 즉각적인 평화나 천국 입성을 묘사하는 경우가 많아 교리적으로 수용하기 어렵습니다.
  • 사탄의 영적 기만 가능성: 사도바울이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후 11:14)고 경고했듯, 영적으로 분별되지 않은 빛의 체험은 인간을 미혹하기 위한 악한 영의 속임수일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4. 현대 신학 및 자유주의 신학의 비판

현대 신학계는 이를 영적 현상보다는 학문적·과학적 영역으로 환원하여 비판합니다.
  • 뇌과학적 설명 수용: 임사체험은 영혼이 육체를 이탈한 것이 아니라, 심정지 상태에서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될 때 발생하는 '환각', '엔도르핀 분비', '측두엽 이상 자극'의 결과라는 과학적 설명에 무게를 둡니다.
  • 텍스트 연구로서의 접근: 임사체험 간증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체험자가 깨어난 후 자신의 종교적 언어로 재구성한 '서사(Narrative)'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합니다.



2026년 5월 16일 토요일

성령 충만의 뜻



 




우리 구원의 정확한 의미


 


하나님의 손길이 연속적으로 가 닿으시는 3운법칙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믿음 그리고 그 계명에 대한 우리의 순증(행함/행위), 이 둘은 철로 레일처럼 영원한 평행선으로서 불가분이고  언제나 함께 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중심을 일절 용납하지 않으며  일편단심 상대 중심으로 직진/直進해 나갈 뿐이니 전자는 죄와 악으로서의 사망이요, 후자는 의와 선  그리고 사랑으로서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양자 택일에서 모든 인생의 영원 운명이 결정되는 바, 이와 관련된 모든 시험과 단련 차원에서의 과정은 이 세상만으로 족한 것이며 이 세상 끝남과 동시 영원히 종료됨니다. 악인 걸러내는 작업은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세계 및 고통/고난의 죽음의 세계로만  양극화되어  영원히 진행되니다. 우리 인간은 현재 "죽은 자"로서 비극적 파탄의 최정점에 와 있어 죽음의 고통을 어느 정도 실감하는 위치에 있은즉, 하나님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 자신을 학습시킴에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3운법칙/짝의 법칙(fashomo/trinia)을  주신 것을 믿읍시다. 불신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논의해 적극 활용합시다. 관련해 제의 등이 있으시면, 이 페이지  댓글로 보내주시면 좋겠고 본 블로그를  찾아 오시는 모든 분에게도 소개해 드리고 다방면으로 숙고함은 물론 반드시 답장을 드리겠습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4)는 것이 오늘날 "천사의 복음"(14.6)의 요지입니다. 거의 2천년 해 묵은 사탄의 거짓말이라 세상이 다 진실/진리라고 의심 없이 속고 있는 판인데  난 데 없는 무명인/無名人 튀어 나와 "그건 그렇지 않다"고 백날 외쳐본들  꿈쩍이나 하겠나요? 해서 "21세기 표적과 기사"(요 44.8)라는 팻말을 내다걸고 있는 것입니다. 좌우지간  주의를 끌고보아야  하니까. 이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할 것"이라 하시며 "보라! 내가 미리 말하였다"(마 24.24,25) 하셨습니다. 그들의 "큰 표적과 기사"라는 것은  말하자면 지금은  용도 폐기된 것입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한다"(계 13.13,14) 함과 같습니다. 전지 전능/무소 불위 창조주 하나님은 한 번 쓰신 것을 또다시 꺼내어 쓰는 법이 없으십니다. 새로운 것을 얼마든 사용하시면 되니까. 지금의 소위 "방언 은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았다는 증거 중 하나입니다. "방언"은 초대교회 때 이미 쓰셨던 것입니다. 사탄의 짓거리는 모방에 불과하다보니  과거 하나님의 일을 흉내 내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새로운" 형태의 "표적과 기사"가 무엇이냐 하면  "trinia(트리니아)", "fashomo(파쇼모)"와 같은 것이니 "표적과 기사"란 것은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음이 입증되느냐 여부로 좌우됨이라 그렇습니다. 트리니아/파쇼모의  <하나님 증거는  이미 지적한 대로 3운법칙에서의 하나님의 '동선'과 '동기'로 규정 짓게 됩니다. "동선"이란, 공간 내 이동 경로(movement path), 통행선(traffic line) 등의 의미이고, "동기"라 함은 동기 부여(motivation)로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3운법칙을 <무엇 때문에> <언제> 그렇게 정하셨는지 '육하원칙(5W1H 또는 Six Ws)' 즉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의 핵심 요소를 죄다 갖추고 밌는 것이니, 이것이 3운법칙입니다. 언제(When) 그리고 왜(Why)? 아담이, 가장 먼져 세상에 나왔으니까 가장 먼져 죽어야 할 아담이 아직 기운이 펄펄하게 살아 있는데도 그 두 번째 아들 아벨이 형 가인에게 살해 당하고 가인의 후대 라멕이  부득이한 사정으로 새파란 나이의 한 젊은이의 숨통을  끊어놓던 때로부터(창 4.23) 시작된 어느 시점 즉 <라멕 이후 노아 이전> 시대에  3운법칙은 정해졌고 그 전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노아 이전 라멕 이후부터  가동된 3운법칙이란 증거입니다. 방치해 두시면  인간 자체가 멸종되겠기에 손을 쓰셨다는 것이 한 폭의 그림처럼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없었기 때문에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일 수 있었던(당시의 모든사람들 이 누렸던 8~9백년 수명임에도) 것이니, 아벨이  그 생애를 다 채우도록 기다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벨의 갸륵한  신심/信心은 여린 나이에서부터였음이 분명하고 따라서 가인의 시기심도  그 무렵이었을진대  시기심은 곧장 살의로 지체 없이 진행되게 마련이니까  아벨의 죽음은 청소년기였음이  분명합니다. 라멕 역시 죽인 상대가   "소년"이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연령대에 타의에 의해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은  3운법칙을 그 때는 아직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3운법칙은 사람 수명에 따라  하나님께서  조절/조정하셨음이 확인됩니다. 아담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노아 당시까지 천년 가까운 장수를 하던 시기에는  거기에 적합하도록 수명에 맞추어 이 인간 생애의 법칙을 정하셨고, 노아 이후  급격히 감소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역시 거기에 따라 조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몇 백년 단위로 정해진 LP, DP, JP 따라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천년 세월을 살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래의 [참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3운법칙은 시대별로 연속으로  조정해 오신 것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운법칙을 그렇게 변경하시니까 그에 따라 세상이 변하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 따라 3운법칙도 거기에 맞도록 조절하시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참고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질문]
인류가 한 때 평균 수명이 30대까지 낮아진 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답변]
인류 역사 전체의 대부분 기간 동안 인류의 평균 수명은 20~30대 수준이었다. 역사통계 전문기관 Our World in Data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로마 시기부터 근대 초기인 1800년대까지도 전 세계 평균 수명은 30대 안팎(30~40세 미만)에 머물렀다. 인류가 평균 수명 40세를 완전히 넘어선 것은 19~20세기 산업혁명과 의학 발전 이후로서, 인류 역사 전체를 보면 오히려 지금처럼 70~80대를 사는 것이 극히 최근의 예외적 현상. 다만, 이 기록을 해석할 때는 흔히 발생하는 통계적 오해인 '평균의 함정'을 주의해야.
■  30대 평균 수명의 진짜 의미: 영유아 사망률의 영향
• 30대에 늙어 죽은 것이 아니니 평균 수명이 30세라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오늘날의 70~80대처럼 노화되어 30대에 자연사했다는 뜻이 아님.
• 영유아 사망률의 착시: 근대 이전에는 위생 환경이 나쁘고 감염병에 취약하여 출생아의 약 25%가 1년 이내에, 절반 가까이가 사춘기 이전에 사망했음.
• 극단적인 평균값의 계산: 예를 들어 태어나자마자 0세에 사망한 아기 한 명과 70세까지 천수를 누린 어른 한 명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의 평균 수명은 (0+70) ÷ 2 = 35세가 되는 것.
• 성인 생존자의 실제 수명: 어린 시절의 고비(영유아기, 사춘기)를 무사히 넘기고 성인이 된 사람들은 고대나 중세에도 50대, 60대, 혹은 그 이상까지 건강하게 장수하는 경우가 많았음.
■  역사적 시기별 평균 수명 추이
국제 학계와 역사 인구학에서 추정하는 시기별 전 세계 평균 기대 수명(출생 시 기준)은 다음과 같다.

1). 역사적 시기 
2). 추정 평균 수명
3). 주요 사망 원인 및 특징

청동기~철기 시대
20 ~ 30세
영유아 감염병, 영양실조, 부족 간의 전쟁

고대 그리스 & 로마
20 ~ 35세
도시화로 인한 전염병 확산, 열악한 하수 위생 중세 및

근세 유럽
30 ~ 40세
페스트(흑사병) 등 대규모 팬데믹, 만성적 기근

1900년 전 세계
평균 32세
항생제 개발 전 폐렴, 결핵, 설사병으로 인한 대량 사망

현대 (2020년대)
70세 이상
백신·항생제 보급, 상하수도 정비, 의학 기술의 비약적 발전

결론적으로 19세기 후반 전까지는 줄곧 30대 이하였다. 깨끗한 식수(상하수도 시설 개선)와 백신 및 항생제(페니실린)의 발명이 유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낮추면서 지금의 기대 수명을 완성하게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끝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더욱이 3운법칙이야말로 짝의 법칙이 적용된  대표적 실례입니다. 때문에 이것이 아담 이하 모든 인간 생애를 낱낱이 검수해보지 않아도  당당히 "법칙"이라 명명할 수 있게 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3운법칙이나 짝의 법칙으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자체 증명(그 진실성 관련)의  막강한 수단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심오한 의미를 지니므로 둘은 하나님께로서 난 강력한 메시지이고도 남습니다. "짝의 법칙"은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  즉 만유 주재의 기본 원리인 '3위1합(종전의 "3위1체")'의 별칭/통칭이니, 만유는  대칭성(짝)으로 되어 있음입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하나"(요 10.30) 곧 <"상반/(相反)"의 "상보/相補">로 하나님 친히 계심에서 비롯됩니다. 이 계시는 모습을 기반으로 만유의 대법칙(원리)을 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인지하고 수긍하여  더 이상 반박할 여지가 없게 되면 그것이 "표적과 기사"인 것. 더구나 과학시대인 오늘날 모든 사람이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 가능한 만인간의 생애 도표(fashomo diagram)>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모습 '3위1합'으로서의 trinia("3위1체"란 의미의 라틴어 trinitas의 변형), 만유의 기본 대원리(법칙)로서의 trinia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21세기 천사의복음 전파에 양날개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하라"는 하나님 명령이 전달되는 곳곳마다 "trinia/fashomo", "fashomo/trinia"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라틴어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모든 국가 국민이 외래어로서 부담 없이 공용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2026년 5월 11일 월요일

"죄"란 무엇이냐ㅡ"자기 중심"을 가리킴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행한 대로 보응"(롬 2:6) 하여 심판하십니다. "믿음으로 구윈 받으니까" 믿음 유무를 따져 심판하실 줄로  많은 사람이 오해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였는지"(:7) 아니면 "자기 중심으로 나갔는지"(:8)의여부를 따지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지만 최종 심판만은 "행한 대로의 보응"이심을  이같이 바울 사도는  명백히 밝힌 것이라 우리로서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이 8절을 우리말은 "자기 중심" 대신 "당을 지어"(KJV도 마찬가지ㅡ여기서는 KJV도 오역)라고 번역했지만 Biblegateway의 아래 링크를 누르면, 각 영역본의 다양한 내용이 나오는데 "자기 중심"("selfish" 등)으로 풀이한 데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필자의판단에도 이 경우 "자기 중심"이라 해야 번역이 완벽하다고 확신합니다(링크를 누르면 <열기>가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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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따라 행하는 자에게  노와 분으로  보응하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거듭 강조하기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고...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편애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시다는 뜻. 사회적 지위, 부, 신분, 외모 등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하시거나 적용하신다는 의미)이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계명)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계명)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7~11)고도 했습니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 대목은 "믿음으로 구원 받음"과는 별개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심판 또는 "마지막 심판"이  "각 사람의 그 행한 대로의 보응됨"이란 뜻인 바, 그리스도 오시기 전에는 모든 인류가 다 죄인이라 심판 자체가 무의미하여 불가능했지만 구원 받아 의인될 길이 열리면서  비로소  우리의 구원자께서는  심판자의 자리도 겸하시게 되었다는(행 17.31) 이 의미가  중요한 것입니다. 고로 이 심판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유무를 따지심이 아니라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의인이 되었으니 의인답게 행했는지 여부를 가리신다는 이 엄중한 사실에 주목해야. 이와 같이 정상으로 완전 회복되면서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30) 구원자이시면서  동시에 심판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 받아 의인이 되었으나 다시 아담처럼 범죄할 경우 그 당연한 대가를 치러야 하므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하기를 '일단 구뭔되었으니 다시는 멸망하지 않는다'고 맹신/信하고 있으나 아담으로 인한 범죄자로서의 <죽음>에서만 살아남이 현재의 우리 구원임을 어찌하여 모른다는 말인가요. 모든 인생이  현재 "죽은 자" (마 8.22)입니다. 성경적 "죽음"의 뜻이 동물적 육체가 되었다는 의미이기에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죽었다"(골 3.3) 한 것이니  따라서 이런 동물의 육체로는  사는 것이 아닌지라(뿐 아니라 생명에는 죽음이 섞일 수도 없어) "우리 생명이 감추어져"(:3) 있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헷갈릴 일이 없습니다.  



2026년 5월 9일 토요일

내 비록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바늘 한 개라 여겨져도


 

성령으로 계시고 일하시는 예수님


 


하나님 정하신 인간 <운명>의 법칙

3운법칙. "운명"의 법칙이란 뜻인데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애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신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이른바 "산다"는 것이 운명적이다 즉 이미 짜여진 각본 따라 기계적으로 진행되는 것뿐이니까 저 짐승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나의 의지대로가 아니다. 운명적으로 정해져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다는 그 증거물이 3운법칙이다. 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가 일절 무의미, 무가치하다는 뜻이다. 이런 비정상적 철저한 무의미는 우리가 구원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다시 정상이 된다.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는 무의미 그대로이나(현재의 동물적 육체로 인하여ㅡ그래서 골로새 3장3절에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한 것) 내면적으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갱생하여 영생에 들어가리라는 굳건한 약속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로 창조주께서 3운법칙을 통해 인간을 강제하실진대 곡절이 있으시게 마련이다. 창조주께서 사람과 관계하실 때 그 뜻을 인생들에게 알리시는 방법의 하나가 성경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다. 이 성경에 3운법칙이 처음 정해진 내력이 나온다. 창세기에 모든 동식물이 창조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인간을 창조하시어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 "6일" 창조의 모든 생물을 관리하게 하시는데, 그 전에 이미 하나님은 다른 창조물들을 만드신 다음이었고 이를 운영하시던 중 그 피조물 중 하나가 교만해져 소동을 일으키자 이를 처벌하시고 2차로 창조하신 것이 현재의 세상이며 인간은 2차에 속하는 것이다. 1차 창조에서 <자연 물질계>와 <초자연 영계/靈界>의 짝으로서의 양면 대칭으로 만드셨으니, "상반/相反은 상보/補"라는 3위1합(종전의 '3위1체')의 원리로써의 만유 창조이신 것이다. 2차 창조에 임하셨지만 1차 창조의 영계는 영원성을 띄므로 "에덴"이라는 이름으로 존속해 있었던 것이고 자연계물로써 파멸에 이른 것이다. 2차 창조 역시 종국에는 파멸을 맞는데 그 때는 '물'이 아닌 '불'이다(벧후 3.6,7). 이렇게 대칭성(짝)으로 물과 불로 망하는 두 시대가 끝난 다음에, 다시는 파멸이 없는 생명 세계로 영원히 정착하는 것이다.

1차 창조에서 만드신 영계의 피조물이 스랍과 그룹. 당시의 자연계 동식물은 오늘날 화석으로 그 흔적을 볼 수 있고 석탄/석유로 남아 있다. 2차 창조에서 역시 세상은 영계와 자연계로 나뉘는 바, 영계는 에덴으로 존속되어 오는 그대로이고 자연계 생물만 창조됨이었으며 그 중 최고 절정을 이루는 것이 인간 창조. 단 동물과는 달리 암수컷으로 처음부터 만드시지 않음에 유의해야. 그 이유인즉 동물적 육체의 인간을 영계인 에덴에 거처하게 하심으로써 영적 존재로 명실상부한 하나님의 대리자로 삼으실 의향이셨으니까. 영계에 두셨다는 것은 아담의 몸이 그 즉시 신령한 몸으로 변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 다시 말해 죽지 않는 영생하는 자가 된 것이었다. 아담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자식 생산은 동물적 육체와는 방법이 전연 달랐기에 인간을 성별로 창조하시지 않은 것.

자연계 몸이었다가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이러한 아담만이 갖춘 특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먹으면 "영생하는 나무"와, 먹으면 "좋고(선) 나쁨(악)을 알게 하는" 과일 나무를 에덴 안 동쪽의 "동산"(아담을 위해 특별히 조성해 주신) 중앙에 두 그루 세워 놓으신 후 아담에게 선악과 나무 열매를 먹지 말도록 엄중한 주의를 주셨건만, 아담을 시기해 몰락시키려 했던 뱀의 거짓말 계략에 어리석게 넘어가 선악과를 먹은 결과 경고하신 대로 그 즉시 신령한 몸의 초자연성은 사라지고 이전의 동물성 육체의 자연계 특성으로 환원되어버린 현재의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에덴에 들어감으로써 영생하는 자가 되어 있었기에,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오늘날도 사탄은 그 당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똑같은 거짓말로 아담의 죽음을 "영적 죽음"이라 하건마는 우둔한 민생들은 말로는 하나님 믿는다면서 이 사악한 사탄에게 맞장구치고 장단 맞춰 주고 있다. 동물성 육체를 "선악(좋고 나쁨)을 아는 것"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동식물의 삶은 기계적인 것이라 하나님의 지혜/지식이 고스란히 그대로 발현되어 작동되는 구조이기 때문. 그와 동일한 작용인 인체의 구조와 작동을 보아도 충분히 알 만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기계적, 본능적 생명력은 자기 중심 일색이어야 함은 당연하니 자기 종/種을 보전해야 하기에 스스로 즉 기계적/자동적으로 작동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반면에 인간은 영적 존재라 자유 의지를 구사하므로 그런 것과는 전연 별개다. 그러나 아담 범죄로 동물적 육체로 전락해버리자 기계적인 자기 중심으로 급락/급변한 것이다. 이것이 "죄의 몸"(롬 6.6). 우리 "구원"은 이 짐승의 몸이 죽어 파괴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와 "한 영"(고전 6.17)을 이루어 창조 당시의 원형 그대로의 '교차 소유/교차 삶'으로 회귀/복귀함이다. 

영원 생명은 이 상호 교차 교류의 "하나"(요 10.30)됨에 있는 것이다. "한 몸"됨에서는 아내 몸이 남편 소유가 되고 남편 몸이 아내의 소유가 됨이고(고전 7.4), "한 영"(고전 6.17)에서는 나와 주님 사이에서 주님은 나의 삶을 사시고(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미 확증하심), 나는 "우리 중에 누구든 자기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롬14.7~9) 한 대로 주님의 소유로서 주님만 위함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성경적 의미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고귀한 의미대로 따르는 자 과연 몇일런가! 교차 소유이니까 당연히 교차 소유주. 나는 주님의 삶의 소유주, 주님은 나의 삶의 소유주. 주님은 그래서 나를 위해 사시고 나는 당연히 주님을 위해서만 살고.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심이 그 뜻이다. 만유에 충만하신 주님이시니까 믿는 각 사람과 365일 24시간 1대1로 넉넉히 상대하시기 때문이다.

애초 이와 같이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창조되어 있던 인간(아담)이 졸지에 동물성 육체로 전락하여 짐승처럼 되어 동물의 자기 중심 그대로를 물려받으니 어찌 되겠는가. 겉모양은 인간이나 속인즉 말 그대로의 짐승이다. 그 실제 상황이 가인의 아벨 살해에서 당장 드러났다. 아담 범죄 전의 영생하던 인간이 별안간 동물의 육체가 되었지만 그 초자연적 기운이 남아 서서히 사그러짐에 따라 한동안은 즉 노아 당시까지 1천5백년간은 인간이 천년 가까운 수명이었다. 이런 장수 시대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으니 살인자는 가인 그리고 라멕(셋이 아닌 가인 계통)이다. "이러다가는 인종 자체가 끊어지겠구나" 심려하신 하나님이 취하신 응급 조처가 3운법칙인 것이다. 즉 죽는 때가 아니면 인간이 함부로 죽어나가지 않도록 정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 강제력 발동이 3운법칙인 것이다. 이래서 운명의 법칙이라 하는 것. 세 가지 유형으로만 나타나는 것은 만물을 하나님이 3위1합의 원리로 창조하셨다는 증거다. 이 '3위1합'은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모습이신 것이다. 노자/老子의 "三生萬物/삼생만물"(도덕경 42장 첫 25언) 그대로다. 멜기세덱이 성경이 밝히는 현존 인물일진대 노자로도 얼마든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즉 노자는 이 대목만 세상에 발표할 수는 없기에 "도덕경"이라는 옷을 입혀 주었다는 변함 없는 주장이다.




2026년 5월 1일 금요일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




 1907년 한반도를 관통하신 성령의 생명 강(요 7.39)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

조너선 고포스(1859ㅡ1936)

제가 한국교회 부흥('1907년 대부흥'을 말함ㅡ본문 게시자) 관련 글을 쓰는 것은 제가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은 까닭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룩한 모든 희생을 생각하면 제가 주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중국 교회 형제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이 한국에서의 복음의 승리를 듣고 진심 부끄러워 하고 겸비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저는 한국의 주요 선교지 여덟 곳을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중국에 돌아가 묵덴의 중국인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깊이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배대호에 가서 거기 선교사들 상대로 한국 교회에 베푸신 주님의 축복 이야기를 하자 선교사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중국에도 같은 은혜의 축복이 임하시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요양지 치쿵샨에 초청받아 가서 한국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싶어 이내 축복 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를 않아요.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흘렀거던요. 6, 7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청중들 사이에 억눌렸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죄를 고백하며 다툼, 화 낸 것 등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것은 늦은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나흘을 그렇게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에 제가 경험한 중에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중국 교회가 부흥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1908년 초부터 만주 및 다른 데에서도 같은 능력이 크게 번저감을 보았습니다.

부흥의 시작은 1903년 한국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동부 해안 원산의 하디 박사는 선교사들 주최의 소규모 집회에 기도 관련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및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강연 주제를 준비하는 동안 성령의 가르치심을 많이 받아, 기도 관한 강연을 했을 때는 모든 선교사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연속해 한국 형제들에게도 강연을 했는데 역시 대단한 감명을 준 것이었습니다. 하디 박사는 한국 전역 열 곳의 선교 센터에서 같은 강연을 했고, 1904년 한 해 동안 1만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흥은 1906년까지 강력한 영적 결실을 맺으며 지속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이 보다 크신 역사에 대해 평양의 스왈렌 씨는 1907년 6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906년 중반까지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보게 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교 결과는 중국, 일본 등 타 지역의 결과와 비교해 보아도 우리의 헌금 규모가 그 어떤 곳보다 훨씬 컸거던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받은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하나님이 해 주실 리 없다고 나름 생각했지요. 그런데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 박사가 1905년에서 1906년까지의 인도 카시아 지방에 일어난 부흥 운동 관련 얘기를 해 주었을 때, 우리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곳에서는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갈급한 심령이 되어 핑양으로 돌아왔지요. 평양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부 소속 2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므로 카시아 산지에서보다 핑양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실 리 없다고 생각되어 그래서 더 큰 축복이 임하실 때까지 정오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쯤 기도 모임을 가진 후, 한 형제가 '한 달 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처럼 복음전파의 일을 하면서 각자 편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주님께서 카시아에게 허락하신 것을 핑양에게도 허락하실 것이라 믿고 기도 모임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기도 시간을 줄이는 대신 늘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정오에서 오후 4시로 바꾸어 원한다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누군가 격려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기도하는 동안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약 4개월간 기도했고, 그 결과 모두 감리교네 장로교네 하는 차별을 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만 의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교회 연합,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 연합이었고, 영원한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이 무렵 스왈렌 씨는 블레어 씨와 함께 시골 외딴 마을을 방문했는데, 평소처럼 예배를 인도하던 중인데 많은 사람이 울면서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스왈렌 씨는 이런 이상한 광경은 처음 본다며, 이 난데없이 사람들을 휩쓰는 감정적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여러 번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그는 "다른 분"께서 모임을 주관하시고 있음을 깨달아 경외심에 사로잡혀 이제는 최대한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쁨으로 평양에 돌아온 스왈렌 씨와 블레어 씨는 하나님께서 시골 마을에 어떻게 임하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며 핑양에도 은혜를 베푸실 때가 가까왔음을 믿었습니다.

1907년 1월 첫째 주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번 주간 기도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을 내려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여덟째 날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 저녁 예배에 약 1,500명의 사람들이 중앙장로교회에 모였습니다. 하늘은 마치 차가운 놋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하나님이 거두시려는 것일까? 그 때, 교회 기둥처럼 여기는 길선주 장로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아간'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저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약 1년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두고 저를 집으로 불러 ‘장로님, 제가 곧 세상을 떠날 텐데 제 일 좀 처리해 주세요. 아내가 할 수 없어요’ 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지요’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부의 유산을 대신 관리하면서, 그중 000을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뜻을 거스른 자입니다. 내일 아침 그 000을 다 반환하겠습니다."

그 한 순간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죄의 통회 자복이 터져 나왔습니다. 청중들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일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하여 월요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시간 내내 수십 명이 눈물을 흘리며 죄 고백의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였고, 무쇠를 달구는 정련하는 불처럼 성령께서 임하여 계심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음이 아닌 초월적 권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한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장 정직한 요리사를 고용했다고 자랑했는데(동양에서는 요리사가 모든 식품 구매를 도맡음) 이 요리사가 죄를 깨닫자, "사실은 줄곧 의사를 속였고 집과 땅도 모두 의사를 속여 마련한 것"이라고 자백한 것입니다. 결국 요리사는 집을 팔아 그 모든 빚을 갚았습니다. 또 어떤 교사는 선교회를 위해 땅을 사 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땅의 가격이 000이라고 속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서도 대금을 지불했습니다. 부흥집회에서 교사는 자신이 실제로는 00에 땅을 샀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선교회를 속여 얻은 000을 죄다 갚았습니다. 종군 기자였던 매켄지 씨에게 한 소년이 4달러도 안 되는 돈을 훔쳐갔는데 소년은 죄를 깨닫자 80마일(129km)을 걸어와 선교사를 통해 매켄지 씨에게 그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매켄지 씨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의주에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둔 한 남자는 가정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두었지만 이 때 영혼이 거듭 나는 은혜를 받기에 이르자 여자와 딸들을 부양할 계획을 세워 주고는 의주로 돌아와 본부인과 화해했습니다. 만약 이같은 부흥 운동이 이혼이 만연한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에까지 확산된다면 놀라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거의 완벽해 보이던 교회 한 집사는 부흥 운동이 진행될수록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자선 기금을 횡령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가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더욱 깊은 괴로움에 빠져들더니 마침내 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어겼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여인은 며칠 동안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던 중 어느 날 저녁 공개 모임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를 죽인다면 한국 법에 따라 처벌 대상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아내를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신불신간에  모두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조롱하러 왔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가한 호기심에 찾아온 강도 두목은 죄를 깨닫고는 회개하여 곧장 자수했습니다. 놀란 당국자는 "당신에게는 고소인이 없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고소한 것입니다. 한국에는 당신의 경우에 해당하는 법이 없습니다"라며 풀어 주었습니다. 부흥 운동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한 일본 장교는 서양의 불가지론적 사상을 받아들여 영적인 것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인들만 아니라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까지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변화에 호기심을 느껴 집회에 참석했는데, 결국 그 모든 불신은 사라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스왈렌 씨가 말했듯, "몇 달 동안 기도에 전념한 것은 정말 값진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 동안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단 반나절 만에 이루셨습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으면 언제나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로 자처하면서도 바쁜 일정을 핑계대며,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응락해 주심을 기다리지 않는 대개의 경우 이런 영광은 구경도 못합니다.

1903년에 시작되어 꾸준히 성장해 온 부흥 운동은 이제 평양 중심지를 중심으로 한국 전역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중반에는 평양 중심지와 연결된 회개하는 자의 수가 3만 명에 달했습니다. 도시에는 네다섯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중앙장로교회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으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좌석이 없고, 사람들은 바닥에 깔린 돗자리에 앉습니다. 중앙장로교회에서는 2,000명을 꽉 채우면 다리가 옥죄어져 잠깐 일어섰다 앉으면 다시는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중앙장로교회로 몰려오는 숫자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교인 수가 3,000명에 달했기에 그래서 여성들이 먼저 와서 교회를 가득 채우고, 예배가 끝나면 남성들이 와서 자리를 채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10년이 되어서도 부흥 운동이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해 10월 한 주 동안 4,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 외에도 수천 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이름을 보내왔습니다. 평양 남쪽으로 우리는 옛 한국 수도였던 송도를 지나갔습니다. 1907년 부흥 운동으로 교회에 500명이 합류했지만, 1910년 한 달간 열린 특별 집회에는 2,500명이 모였습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순회 기간 동안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의 예비 신자를 기록했으며, 그가 세운 5개의 선교 기지가 1년 만에 25개로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10년에는 서울에서 13,000명이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서명을 했고, 그해 9월에는 서울의 감리교회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물포에는 1907년 당시 800명의 교인을 가진 감리교 선교회 교회가 있었습니다. 항구 맞은편에는 인구 17,000명의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의 교회에는 세례받은 교인이 4,247명이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그 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섬 전체가 주님의 것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남부 지방의 대구에서 아담스 목사는 부흥을 위해 10일간 기도회를 열었는데, 일곱째 날에 이르러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을 소생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 교회로는 규모가 너무 작아져 전국 각지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1905년에는 1,976명,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교회들이 전국에 있고, 심지어 전도자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교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사나 전도자 없이 교회가 세워진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지역의 한 남자가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가지고 교향으로 돌아와 이웃들에게 읽어주었더니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세례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입교하는 문턱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논 끝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모여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1907년에 방문한 또 다른 선교지는 핑양 북쪽 철길을 따라 위치한 선천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곳에 부임한 지 겨우 8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선교지였기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웠을 것이나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있었을 때, 도시와 시골을 합쳐 15,348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내는 사람만 집계한 것입니다. 그들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막 완공한 상태였습니다. 1년 전에는 교회 좌석이 800석이었지만 교인 수는 870명이었기에 건축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해 중앙 교회는 다섯 개의 지방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완공 후에는 교인 수가 1,44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거리에는 더 이상 이교도 가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가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그 한국 교회 주변에 미구원 가정이 하나도 없었을까? 저는 그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로 인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는 강력한 성경적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1916년, 저는 한국 동부 해안 출신의 선교사 푸트 씨가 최근 그곳에서 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주일 저녁, 그는 확장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2,500명의 성도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교회에는 500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마을의 인구는 겨우 3,000명 정도였으니,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 번역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기회에 )


 https://www.gospeltruth.net/koreafire.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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