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한반도를 관통하신 성령의 생명 강(요 7.39)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조너선 고포스(1859ㅡ1936)
제가 한국교회 부흥('1907년 대부흥'을 말함ㅡ본문 게시자) 관련 글을 쓰는 것은 제가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은 까닭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룩한 모든 희생을 생각하면 제가 주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중국 교회 형제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이 한국에서의 복음의 승리를 듣고 진심 부끄러워 하고 겸비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저는 한국의 주요 선교지 여덟 곳을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중국에 돌아가 묵덴의 중국인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깊이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배대호에 가서 거기 선교사들 상대로 한국 교회에 베푸신 주님의 축복 이야기를 하자 선교사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중국에도 같은 은혜의 축복이 임하시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요양지 치쿵샨에 초청받아 가서 한국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싶어 이내 축복 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를 않아요.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흘렀거던요. 6, 7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청중들 사이에 억눌렸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죄를 고백하며 다툼, 화 낸 것 등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것은 늦은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나흘을 그렇게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에 제가 경험한 중에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중국 교회가 부흥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1908년 초부터 만주 및 다른 데에서도 같은 능력이 크게 번저감을 보았습니다.
부흥의 시작은 1903년 한국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동부 해안 원산의 하디 박사는 선교사들 주최의 소규모 집회에 기도 관련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및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강연 주제를 준비하는 동안 성령의 가르치심을 많이 받아, 기도 관한 강연을 했을 때는 모든 선교사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연속해 한국 형제들에게도 강연을 했는데 역시 대단한 감명을 준 것이었습니다. 하디 박사는 한국 전역 열 곳의 선교 센터에서 같은 강연을 했고, 1904년 한 해 동안 1만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흥은 1906년까지 강력한 영적 결실을 맺으며 지속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이 보다 크신 역사에 대해 평양의 스왈렌 씨는 1907년 6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906년 중반까지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보게 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교 결과는 중국, 일본 등 타 지역의 결과와 비교해 보아도 우리의 헌금 규모가 그 어떤 곳보다 훨씬 컸거던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받은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하나님이 해 주실 리 없다고 나름 생각했지요. 그런데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 박사가 1905년에서 1906년까지의 인도 카시아 지방에 일어난 부흥 운동 관련 얘기를 해 주었을 때, 우리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곳에서는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갈급한 심령이 되어 핑양으로 돌아왔지요. 평양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부 소속 2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므로 카시아 산지에서보다 핑양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실 리 없다고 생각되어 그래서 더 큰 축복이 임하실 때까지 정오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쯤 기도 모임을 가진 후, 한 형제가 '한 달 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처럼 복음전파의 일을 하면서 각자 편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주님께서 카시아에게 허락하신 것을 핑양에게도 허락하실 것이라 믿고 기도 모임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기도 시간을 줄이는 대신 늘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정오에서 오후 4시로 바꾸어 원한다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누군가 격려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기도하는 동안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약 4개월간 기도했고, 그 결과 모두 감리교네 장로교네 하는 차별을 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만 의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교회 연합,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 연합이었고, 영원한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이 무렵 스왈렌 씨는 블레어 씨와 함께 시골 외딴 마을을 방문했는데, 평소처럼 예배를 인도하던 중인데 많은 사람이 울면서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스왈렌 씨는 이런 이상한 광경은 처음 본다며, 이 난데없이 사람들을 휩쓰는 감정적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여러 번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그는 "다른 분"께서 모임을 주관하시고 있음을 깨달아 경외심에 사로잡혀 이제는 최대한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쁨으로 평양에 돌아온 스왈렌 씨와 블레어 씨는 하나님께서 시골 마을에 어떻게 임하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며 핑양에도 은혜를 베푸실 때가 가까왔음을 믿었습니다.
1907년 1월 첫째 주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번 주간 기도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을 내려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여덟째 날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 저녁 예배에 약 1,500명의 사람들이 중앙장로교회에 모였습니다. 하늘은 마치 차가운 놋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하나님이 거두시려는 것일까? 그 때, 교회 기둥처럼 여기는 길선주 장로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아간'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저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약 1년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두고 저를 집으로 불러 ‘장로님, 제가 곧 세상을 떠날 텐데 제 일 좀 처리해 주세요. 아내가 할 수 없어요’ 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지요’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부의 유산을 대신 관리하면서, 그중 000을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뜻을 거스른 자입니다. 내일 아침 그 000을 다 반환하겠습니다."
그 한 순간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죄의 통회 자복이 터져 나왔습니다. 청중들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일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하여 월요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시간 내내 수십 명이 눈물을 흘리며 죄 고백의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였고, 무쇠를 달구는 정련하는 불처럼 성령께서 임하여 계심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음이 아닌 초월적 권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한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장 정직한 요리사를 고용했다고 자랑했는데(동양에서는 요리사가 모든 식품 구매를 도맡음) 이 요리사가 죄를 깨닫자, "사실은 줄곧 의사를 속였고 집과 땅도 모두 의사를 속여 마련한 것"이라고 자백한 것입니다. 결국 요리사는 집을 팔아 그 모든 빚을 갚았습니다. 또 어떤 교사는 선교회를 위해 땅을 사 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땅의 가격이 000이라고 속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서도 대금을 지불했습니다. 부흥집회에서 교사는 자신이 실제로는 00에 땅을 샀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선교회를 속여 얻은 000을 죄다 갚았습니다. 종군 기자였던 매켄지 씨에게 한 소년이 4달러도 안 되는 돈을 훔쳐갔는데 소년은 죄를 깨닫자 80마일(129km)을 걸어와 선교사를 통해 매켄지 씨에게 그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매켄지 씨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의주에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둔 한 남자는 가정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두었지만 이 때 영혼이 거듭 나는 은혜를 받기에 이르자 여자와 딸들을 부양할 계획을 세워 주고는 의주로 돌아와 본부인과 화해했습니다. 만약 이같은 부흥 운동이 이혼이 만연한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에까지 확산된다면 놀라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거의 완벽해 보이던 교회 한 집사는 부흥 운동이 진행될수록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자선 기금을 횡령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가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더욱 깊은 괴로움에 빠져들더니 마침내 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어겼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여인은 며칠 동안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던 중 어느 날 저녁 공개 모임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를 죽인다면 한국 법에 따라 처벌 대상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아내를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신불신간에 모두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조롱하러 왔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가한 호기심에 찾아온 강도 두목은 죄를 깨닫고는 회개하여 곧장 자수했습니다. 놀란 당국자는 "당신에게는 고소인이 없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고소한 것입니다. 한국에는 당신의 경우에 해당하는 법이 없습니다"라며 풀어 주었습니다. 부흥 운동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한 일본 장교는 서양의 불가지론적 사상을 받아들여 영적인 것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인들만 아니라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까지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변화에 호기심을 느껴 집회에 참석했는데, 결국 그 모든 불신은 사라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스왈렌 씨가 말했듯, "몇 달 동안 기도에 전념한 것은 정말 값진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 동안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단 반나절 만에 이루셨습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으면 언제나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로 자처하면서도 바쁜 일정을 핑계대며,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응락해 주심을 기다리지 않는 대개의 경우 이런 영광은 구경도 못합니다.
1903년에 시작되어 꾸준히 성장해 온 부흥 운동은 이제 평양 중심지를 중심으로 한국 전역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중반에는 평양 중심지와 연결된 회개하는 자의 수가 3만 명에 달했습니다. 도시에는 네다섯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중앙장로교회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으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좌석이 없고, 사람들은 바닥에 깔린 돗자리에 앉습니다. 중앙장로교회에서는 2,000명을 꽉 채우면 다리가 옥죄어져 잠깐 일어섰다 앉으면 다시는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중앙장로교회로 몰려오는 숫자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교인 수가 3,000명에 달했기에 그래서 여성들이 먼저 와서 교회를 가득 채우고, 예배가 끝나면 남성들이 와서 자리를 채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10년이 되어서도 부흥 운동이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해 10월 한 주 동안 4,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 외에도 수천 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이름을 보내왔습니다. 평양 남쪽으로 우리는 옛 한국 수도였던 송도를 지나갔습니다. 1907년 부흥 운동으로 교회에 500명이 합류했지만, 1910년 한 달간 열린 특별 집회에는 2,500명이 모였습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순회 기간 동안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의 예비 신자를 기록했으며, 그가 세운 5개의 선교 기지가 1년 만에 25개로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10년에는 서울에서 13,000명이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서명을 했고, 그해 9월에는 서울의 감리교회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물포에는 1907년 당시 800명의 교인을 가진 감리교 선교회 교회가 있었습니다. 항구 맞은편에는 인구 17,000명의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의 교회에는 세례받은 교인이 4,247명이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그 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섬 전체가 주님의 것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남부 지방의 대구에서 아담스 목사는 부흥을 위해 10일간 기도회를 열었는데, 일곱째 날에 이르러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을 소생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 교회로는 규모가 너무 작아져 전국 각지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1905년에는 1,976명,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교회들이 전국에 있고, 심지어 전도자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교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사나 전도자 없이 교회가 세워진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지역의 한 남자가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가지고 교향으로 돌아와 이웃들에게 읽어주었더니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세례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입교하는 문턱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논 끝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모여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1907년에 방문한 또 다른 선교지는 핑양 북쪽 철길을 따라 위치한 선천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곳에 부임한 지 겨우 8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선교지였기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웠을 것이나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있었을 때, 도시와 시골을 합쳐 15,348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내는 사람만 집계한 것입니다. 그들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막 완공한 상태였습니다. 1년 전에는 교회 좌석이 800석이었지만 교인 수는 870명이었기에 건축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해 중앙 교회는 다섯 개의 지방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완공 후에는 교인 수가 1,44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거리에는 더 이상 이교도 가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가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그 한국 교회 주변에 미구원 가정이 하나도 없었을까? 저는 그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로 인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는 강력한 성경적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1916년, 저는 한국 동부 해안 출신의 선교사 푸트 씨가 최근 그곳에서 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주일 저녁, 그는 확장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2,500명의 성도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교회에는 500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마을의 인구는 겨우 3,000명 정도였으니,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 번역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기회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