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1일 화요일

자연계 몸이지만 생각은 얼마든 할 수 있다 생각하라 사색의 갈대들이여





거의 2천년간 아담/에덴은 자연계라고 속여 왔던 마귀
이 세상이 마귀의 소굴이 되어 있음을 아는 것부터가
이 세상을 이기는 첫 걸음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
아담의 범죄로 이 지경이 되었은즉
하나님 앞에 회개했은즉 범죄 않는 것이 그 첫째요
예수님 내 생명 되심으로 죽음에 대한 무서움 사라져(히 2:15)
십자가 지고 가는 사형수의 자세를 취함이(눅 14:26-33)
날이면 날마다 얼마든 가능해진 것이 그 둘째이다 
이로써 충분히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그 편지에서 범죄하지 말라고
재삼재사 강조해서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 위해 살지 않는데 욕심이 없고(약 1:15)
오직 주님 위해 사는데(고후 5:15/롬 14:7-9) 죄 지을 틈이 없다
부득불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구조라면 성경이 이를 
절대로 새 "창조"라 이름 붙이지를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다. 죄 짓도록 <약하게> 창조하시겠는가.
이전에 있던 것을 창조라 하지 않는다
내 영혼이 성령과 한 영이 되어 영원히 사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삶의 구조이다

그렇다고 범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 스스로 대칭 아담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때다(히 6:6)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바로 예수님이신 때문 
성부 하나님과 하나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신 때문 
나를 사랑하여 나 위해 죽기까지 하신 분과
함께 사는 것이 그리도 힘든 것이고 못마땅한 것인가
만물의 주인이신 분과 하나됨이 그리도 싫은가

그렇다면 범죄가 성립된다 또 영원 멸망이다
멸망하기를 스스로 바랐으니 그대로 된다
멸망하기를 바라는 자 하나도 없건마는
자아중심을 선호하는 자 부지기수이다
이 자아중심이 마로 멸망의 지름길임을
강력 경고하는 성경 말씀을 우습게 아는 그 결말이다













항상 유의해야 하는 것은 양면성의 동시성

항상 유의해야 하는 것은 양면성의 동시성












2019년 5월 9일 목요일

위기의식 관리에 철저를 기해야

위기의식 관리에 철저를 기해야


절체절명의 위기 의식이 이 세상 특징인데
이런 가운데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애지중지 알뜰살뜰 여기에만 관심을 두어
나의 주인(나의 소유주)이 되신 님만
오매불망 그리워하며 순종하여 
그 뜻대로 하는 것이 도리인즉(마 7:21)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히 2:3)
그러면 어찌 피하리요ㅡ
그 절체절명 위기의식이 현실이 될 것뿐이다
성경에 위로의 말씀보다 경고말씀이 더 많은 이유다

정면으로 맞닥뜨려 죽기 살기로 
한 판을 결정지어야 하는 것이지
포수에게 쫓기던 타조가 머리만 모래 속에 파묻고
엉덩이는 하늘 높이 치켜드는 꼴이 되어서는
될 일이 아니다ㅡ나를 낳아준 부모를 원망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이왕 세상에 났으니 나 자신 구원받은 다음에는
다른 사람 구원하기 위해 일구월심 
노력하는 것 얼마나 마땅하고 떳떳한 일인가





창조주를 무서워하지 않는 세대여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천지 운기임을 아는가

창조주를 무서워하지 않는 세대여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 천지 운기다









2019년 5월 8일 수요일

77억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구원의 희소식







성경을 가까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성경을 가까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







오죽하면 불교의 싯달다가 "인간고/苦"라 이름 붙이고
이 고통에서의 해탈 즉 해방됨을 최종 목표로 정했을까.
믿음의 사람들만 세상에서 모진 고난의 대상이 됨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모든 세상 사람이 동일한 고난 고통이다.
단지 믿는다는 <이유>가  그런 고통 고난(핍박)일 뿐이다.
빌라도 로마 총독이 유대인을 마구 잡아 죽여 흘린 피를
자기 신에게 바치는 제물 위에 뿌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세상에 이런 불의를 하나님이 두고 보십니까 투의
항의라 할 수 있고 또는 억울한 죽음에 대한 회의론격이다.
그런데 주님은 한 마디로 답하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와 같이 망한다".

죽음이 죄와 연계되지 않고는 "회개"란 단어가 
나오실 수가 없다. 한 술 더 뜨셨다. 망대에 치어 죽은 죽음.
똑같은 평을 달아주신 것이니, "회개"와의 연결이다.
다시 말해 모든 죽음을 회개와 연결 지으실 때에는
오직 열쇠는 하나다. 아담의 죽음이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 앞에서는 사람이 장수하든 단명하든 무의미다.
억을한 죽음이든 불의의 사고사든 또는 아니든 의미 없다.
노아시대처럼 천년 가까이 살든 사산아로 죽어 나오든
전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새가 날아 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비통해 한 싯달다.
인간의 죽음과 일반 생물의 죽음을 동일시한 잘못된 해석.
그런 생물은 이성이 없다. 이성은 영혼과 결부된다.
영혼의 이성적 판단으로 사는 사람에게 죽음이라니!
아직 죄도 짓지 않은 아담에게 죽음과 썩음의 육체라니!
그래서 죄를 짓고 나니 "영적 죽음"이라는 해석을 붙이는가!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라 하는데 하나님이 어찌 사랑이냐
이런 세상을 만들어놓고 즐기는 것인가ㅡ그래서 무신론이다.
그대들 신학자들이여, 무신론을 키운 것은 당신네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두고도 설왕설래 왈가왈부만 무성 뿐
변죽만 울렸다ㅡ전혀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신학자들이 만든 것이라고는 WCC, WEA 따위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령께서 친히 가르치시는 
성경만이 만세반석이다. 성령께서 가르치시면
동일한 대목을 두고도 오늘 어제 가르치심이 다르다. 
새로운 맛의 별미다. 눈이 뜨이는 정도가 다르다. 
내용을 다 안다고 덮어두는 성경이 절대로 아니다. 






2019년 5월 7일 화요일

사탄의 이 세상 지배ㅡ아담의 범죄 결과

악령들의 이 세상 지배 증거 중 하나가 DPA(SBP) pix다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 전에는
아직 하늘에서 추방당하지 않았으므로
무대 반경이 넓었으나 지금은 이 지구를 중심으로
오갈 데 없는 처지라 카메라에도 쉽게 잡힌 것
이런 물증을 보고서도 확인 불가라면
말 그대로 구제 불능이다

네피림이 들어 분위기를 잡는다고 했거니와
이들이 소위 "절대 다수"의 환경 조성에서 주축을 이룬다
천국 인구도 모아놓고 보면 어마어마하지만
한 세대를 중심하여 그 시기 그 지역별로 살피면
주님 말씀대로 멸망 길은 너르고 탄탄대로라
항상 인산인해를 이루어 흥청대나
생명 길은 찾는 이가 적다는 것이 실감나게 마련

네피림은 환생, 전/轉생, 윤회 같은 것을 통해
그 수가 한정되었더라도 계속 재탕, 3탕, 4탕, 수백탕/湯으로
연속해서 인간 세상에 출현하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분위기" 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고로 군중 심리 같은 것에 좌지우지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절대 다수 편에 있다고 다 네피림은 아니니
차별하여 사람을 대하지(전도할 때) 말 것이다
고집스럽게 무신론 등으로 성경에 대적해도
아담의  자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기 때문


[참고]
http://blog.daum.net/trinia
https://blog.naver.com/trinia
위 네이버, 다음 블로그의 카테고리 SBP(DPA) pix
구글 블로그
https://trinitrinia.blogspot.com/







"율법"과 "은혜"/"행함"과 "믿음"의 명확한 구별

"율법"과 "은혜"/"행함"과 "믿음"의 명확한 구별






2019년 5월 5일 일요일

구원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해야ㅡ

구원에 대한 개념 정리부터 해야ㅡ
사탄 악마는 구원 받으면 전부가 다 해결인 양 속여
각종 사이비가 생겨나게 한 것이다
일단 구원받았으니 안심 태평이라 속여
범죄케 함으로써 모든 것이 도로무공이 되게 한 것.









천국이 차단되는 사람

천국이 차단되는 사람








사랑과 삶의 법칙에서 내가 주님 찾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보아야






사람도 인생을 볼 때 벌레요 구데기다(욥 25:6).





사람도 인생을 볼 때 벌레요 구데기다(욥 25:6).
하나님도 지렁이라 하셨다(사 41:14).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인데
더군다나 성경에서 인간을 그렇게 비유할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벌레 구데기 지렁이 등식이 성립된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자연계 육체로 전락한 것을 
가리킴이시지 않고는 이럴 수가 없는 일이다.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그 들어갈 굴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고 강조하셨으니
"마지막 아담"으로서 하신 말씀이시니까
전체 인간을 대표하신 발언이시다
하나님 친히 온갖 부귀영화로 다듬으신 솔로몬
그 솔로몬이 지어 입은 옷도 들의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 명시하신 다음에야(눅 12:27)ㅡ.














2019년 5월 4일 토요일

하나님 주신 지혜의 눈으로 솔로몬은 세상 사람을 가리켜 "미친 마음"이라 했다(전 9:3)




하나님 주신 지혜의 눈으로
솔로몬은 세상 사람을 가리켜
"미친 마음"이라 했다(전 9:3)










이는 곧 첫 사람 아담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현재의 질서를 따라야 구원이 보인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
현재는 미안하지만 이 십자가 질서이므로
이에 순응하지 않을 때 오히려 비정상이다

마귀는 이 죽음과 저주의 질서를 감추고
거짓으로 속여 "삶"이니 "축복"이니 했으니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역겨운가ㅡ어이가 없다
잘 믿어 하나님 축복받아 잘 산다는 넋두리
이잰 벗어나야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이 보인다
영혼 구원도 되고, 건강도 누리고세상에서도 만사 형통 따위의
소위 3박자 구원의기독교 종교의 중독에서 하루빨리 
벗어남이 구원 얻는 제일 첫 단계임을 알라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십자가 행렬
죽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 죄인들의 행렬로
이 세상을 똑바로 보지 않는 한 구원은 없다
빌립보 간수(행 16:30)는 이 십자가 죽음의 질서에
직면했던 것이다ㅡ비로소 알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이 실상을 파악하는 자 복이 있다

구원을 받아도 다른 이들 구원시키기 위해
이 동일한 질서를 따르지 않으면 헛일이다
십자가 지신 주님을 시종일관 따라야 함이다



 

사탄의 장악 또는 수중/手中으로부터 탈출(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처럼)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사탄의 장악 또는 수중/手中으로부터
탈출(이스라엘의 이집트 탈출처럼)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
탈출한 다음부터는 곧장 전투에 돌입(딤후 2:3)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눅 14:26-33) 하신 것은
다름아닌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해 
살게 하려 함(고후 5:15), 그리고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니(갈2:20, 빌1:21, 벧전4:2)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主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와
같은 의미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족이야 죽든 말든
네 혼자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뜻이 물론 아니고
우리 각자가 구원됨이 주님과 하나되어
주님을 위해서만 사는데 있는 고로
먼저 내가 그러한 생명 관계에 들어간 다음
식구들을 역시 그와 같은 생명 속으로
이끌어 들이면 되니 그런 순서를 따르라 하심입니다.
먼저 나부터 생명 가운데 들어가야
식구들을 동일한 생명 속으로 인도해낼 수 있음입니다. 

수 천년 묵은 생로병사의 수수께끼 풀리다


수 천년 묵은 생로병사의 수수께끼 풀리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