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8일 화요일

악령들이 성령 세례를 모방하자니까 방언 등을 강조하게 되는 것(국내외 공통)


 





지금은 천사의 복음 전파시대로서 새 성전 건립의 나날임을 마음에 새겨야




구원 받는 첫 요건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알아야 하고 그래서 현재 죄인으로서의 상태가 정상이 아닌 심각한 비정상임을 알아야 즉 영원 멸망으로 들어가는 운명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하여 회개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 구원 받아 영생하게 되는 것이다. 구원은 다름아닌 아담이 범죄 전 누렸던 정상 상태로의 복귀를 말함인 것. 그래서 "새 창조"다. 하나님의 두 벌 창조 또는 재창조가 아닌 것. 처음의 아담 창조의 영광을 아담이 그 범죄로 상실했기에 그 처음 창조의 영광을 이제는 "마지막 아담"을 통해 즉 대칭성 원리를 따라(그러니까 전혀 새롭게 일신/쇄신하여) 다시 아담 범죄 전 상태로 "회복"(행 3.21)하심이다. 빌립보 간수(16.30)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본능적으로 사도들에게 매달린 것이 그 예ㅡ"내가 어찌해야 구원 얻겠는가" 하며. 그 다음 곧 마지막 단계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인데 여기서 분명한 것은 당시 이 빌립보 간수는 로마서 7.24와 같은 영적 고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사실. 그래서 사람들은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은 후 체험이라는 근거를 여기서도 찾으려 할지 모르나 그렇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마땅한 것은 이 로마서 7장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예외 없이 거쳐야 하는 필수 과정이 아니라는 것.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롬 8.1~39)을 <설명함>이지, 이같은 과정을 <누구나 거치게 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좌우지간("설명"으로서 믿든, 안믿든) 분명한 사실은 무릇 그리스도와 "합하여 <이제> 한 영"(고전 6.17)이 되어 있는 이들은 <예외 없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서의 "오호라!"(롬 7.24)의 탄식이 더 다시는 없다는 것. 여기에 이의 없이 일치하는 한, '한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한 형제'요 '한 머리' 아래의 '한 몸'인 것이다. 고의적 범죄의 멸망이 아닌 한, 해방된 후 또다시 얾매이는 법은 없으니까. 성경에 "하니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해져 미련한 마음으로서 어두워진"(롬 1.21) 경우도 명백히 있다고 했으니까, 이 때는 마지막 단계 즉 "믿음"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크나큰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마땅한 반응이 없다는 이야말로, 이런 것이 "영적으로 죽은" 것! 즉 한 마디로 치유 풀능, 구제 불능의 교만이라 보면 될 것. 이런 것이 영적 죽음인 것이고 "첫 사람 아담이 죽은 것"(롬 5.12)을 무식하게 아무렇게나 이름 지어 불러 "영적 죽음"이라 해서는 안되는 것. 백해무익의, 사탄으로부터 난 바벨론 신학(계 18.4)의 "말씀 혼잡"(고후 2.17/ 4.2)일 뿐이니까. 

여기서 바울사도가 말한 것은 말 그대로의 죽음 즉 아담 범죄 전의 "영광의 몸"(빌 3.21) 다시 말해 "육의 몸"(고전 15.44) 곧 현재 우리 모두와 같은 "낮은 몸"(빌 3.21)이 아닌 "신령한 몸"(고전 15.44)"을 말함이다. 이런 신령한  몸이 처음부터 있어, 아담을 보좌하도록 창조된 모든 천사도 다 이러한 신령한 몸이 되어 있는데도 굳이 격이 훨씬 낮은 동물성 육체로 아담만 창조하실 리 만무한 것임을 부디 명심하시기를! 그러므로 이제 우리 구원의 성경적 의미(아담으로 인한 범죄의 비극적 돌발 사고로 인해 인간 창조가 일체 무위/無爲로 돌아가버린 것을 원상태로 "회복"(행 3.21)시키시되 하나님은 철두철미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ㅡ한 번 정하신 것은 영원하시어 "하나님은 그 약속과 그 뜻이 변치 않으시고  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ㅡ히 6.17,18)를 알고 뿐 아니라 뭇천사들이 아담 아래 통일된 일사분란의 체제 아래 있어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상, 우리도 확고하게 주님과 함께 자리잡아 주님의 이름과 그 권위로 범사에 의엿이 언행심사 일체를 할 수 있게 됨이다. 

성경에 설명한 모든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위는 범죄 전 아담이 행사하게 되어 있는 아담 고유의 것이고 이를 행사하심임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어야!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고전 15.27,28).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또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신 것"(엡 1.21 ~23/히 2.8). 이상 모두가 다 그러한 것이다. 성경에서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뜻은 다름아닌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심을 모두 알아야. 아담은 "산 영"이요 "마지막 아담께서는 "살려주시는 영"(:45)"으로서의 차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로서의 엄청난 차이이기는 하나 서로 "상반/相反"이라는 점에서는 여지 없이 듣어맞아 일절 하자가 없다. 즉 아담과는 전혀 별도의 존재로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나는 것을 "육으로 나는"(요 3.6ㅡ태어나는) 것이라 하고 마지막 아담으로 인하여 "새 사람"("옛 사람"이 아닌)되는 것을 서로 구분하는 것도 같은 의미다. 

아담이 만일 범죄 않고 자식들을 낳았다면 그 자식들은 모두 성별 구별이 없는 신령한 몸의 존재들을 초자연적 방법으로 낳았을 터(단 자식들은 생산 활동을 않고 아담 부부만의 독자적 수단에 의해ㅡ물론 짐승과 같은 성적 접촉과는 무관하게ㅡ여자 창조는 생식이 목적 아닌 단순한 도우미-helper-역할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ㅡ생식이었다면 아담 창조 즉시 여자도 창조하셨을 것). 성욕(쾌락)이란 것은 종족 보존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소라 동물에게 장치하신 것. 아담에게 처음 여자를 붙여주신 것은 자기와 똑같은 모양새가 아니면 아담이 만족치 않음이 드러났으므로 부득불 암수컷 원리를 적용하심에 불과(창 2.20). 범죄하여 동물 육체가 되다보니 생식작용메 쓰인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아담 범죄와 동시 여자도 곧장 만드섰을 것. 그런즉 결론은 이제 우리도 하나님의 막중하신 은혜로 "마지막 아담" 곧 새 아담 아래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돠어 있은즉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여" "함께 하늘에 앉히신 바된"(엡 2.6) 이 엄청나고 놀라운 새 사실에 눈 떠야 함이니 바꾸어 말하면 우리도 이 아담의 권위와 권세를 곧이곧대로 100% 햄사할 수 있게 됨이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신령한 몸으로서의 그 초자연적 권세를 그 아들들된 이들이 얼마든 행세할 수 있었을 바로 그대로의 이치인 것이다. 우리도 주님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3) 호령하신 것처럼 할 수 있으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도주(flee from youㅡKJV, NIV)하리라"(약 4.7) 함과 같다. 이 21세기 바벨론 신학(계 18.4)을 대적하는 천사의 복음(14.6)시대에서는 더욱 남다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으시라 하리라 하셨고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성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벽돌을 쌓거나 기둥을 세울 때 벽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똑바로 수직이 되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데 사용되니 성전 건축의 시작됨을 강력 암시)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스가랴 4장 7~10). 다시 말해, "태산(마귀의 각종 방해 작업)아! 무너져 평지가 되라!" 명령하게 되는 날이 이제 이른 것이다.



2026년 7월 24일 금요일

그대의 영적 바로미터는 어떤 수준인가?

 성경의 핵심 가르침이라 하여 "구원은 믿음으로"는 등의 주장은 그 말 자체에 어폐가 있다. 바을 사도의 구원론에서 "참고 선을 행함"을 "영생"(롬 2.7)과 직결시켜 놓고 또한 그 앞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6)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13절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못박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로마서 2장 전체가 이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3장에 와서는 20절에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였다. 말을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을 밝힘이다. 즉 하나님이 만인간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어 오직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영원불변의 원칙이나, 그래서 아담 범죄 전에는 이 원칙이 적용되었으나 아담 자신부터 범죄자가 되어버리는 통에 "모든 사람이 죄인"(3.23)이라 "선을 행하는 자가 없어 하나도 없으니"(3.12) 어이하랴! 바로 그래서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본디 원칙은 일단 유보하고 당장 급한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라는 <원상태 회복>이다. 


그러나 만인간이 "죄 아래 있어"(:9)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으니"(:20) 이제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 수단이 아닌 "죄를 깨닫게"(:20) 하는 역할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담 범죄로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알아야 죄인으로서의 "옛 사람"(롬 6.6)을 벗어나 새로 창조된 "새 사람"(엡 2.15/4.24 )이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새 창조는 즉 새 피조물됨은 필연적으로 의인됨이니 하나님이 죄인을 창조하시는 법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하나님의 계명에 복종)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는 결론. 따라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행위의 법으로써가 아닌 오직 믿음의 법으로"(:27)써다. 창조는 하나님의 단독 영역이라, 선물이지 그래서 우리는 감사히(은혜이시니까) 받는 것뿐이다. "고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것"(:28).  

단 여기서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이것이 이 글의 요점) 그것은 다름아니라 그렇다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31) 것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새 창조를 위해서는 믿음만이 필요하나 창조된 다음에는 당연히 우리의 순종이 요구되는 것이야 당연 상식이 아닌가. 행함이 없이 무슨 순종이 있으며 사랑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사탄의 바벨론 신학의 거짓에 넘어가 하나님의 계명 지킴(순종) 즉 <행함> 자체를 아예 폐기해버리는 망동을 저지르고 있다. "도리어 율법(하나님의 계명)을 굳게 세우는 것이라고 한 바울 사도의 추상 같은 경고를 어찌하여 감히 무시하려드는가! 멸망을 자초하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수차례 같은 내용으로 게시물을 올리는 것은 워낙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이 "은혜(믿음)"와 "복종(행함)"("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ㅡyour own salvationㅡ을 <이루라>ㅡwork outㅡ빌 2.12)을 잘 구분하여 이해를 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나는 성경을 안다"고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바로미터(barometer)'임을 모두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6).

2026년 7월 23일 목요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쇠사슬을 완전히 끊어내지 않는 한 구원되지 못한 것

아담의 죄가 인류에게 전가/轉嫁(imputation)된 것은 아니고 그 범죄의 결과가 "죽은 자"(마 8.22)됨 즉 신령한 몸을 빼앗기고 동물성 육체가 됨이었으니까, 동물은 자기 본능에 의한 자기 중심(기계적 작용에 의해 생존하므로 이는 필수 사항)의 그 동물적 특성은 자유의지의 인간에게는 "죄의 몸"(롬 6.6)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나(이를 사람들은 "원죄"라고도 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나 위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다시 말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대로 내 안에 친히 오시어(성령으로) 나와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되심을 인하여, 그 죽으심과 부활이 "교차 소유(mutual posession)"로 내 죽음 및 부활이 되는 막중하신 은혜로 완전히 "멸해져"(:6) 파괴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 받음 즉 정상 회복입니다. 반복하지만 우리 구원은 애당초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셨던 신령한 몸(아담 범죄로 상실했었던)으로의 완전 복귀인 것입니다(현재의 몸의 실상은 비록 그렇지 않아도 그 실황을 믿음으로 보고 기뻐하는 차이는 명백한 것). 

그래서 "심판의 부활"(요 5.29)이라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멸망자는 <신령한 몸>으로 변환된 다음 불 못으로 들어간다는 뜻. 즉 "생명의 부활"(:29)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심판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심판 받아 멸망에 들어가는데 구태여 부활해야만 하느냐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이유가 분명히 있으니 <처음부터 모든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 또한 성경이 하나님 친히 하신 말씀이시지 인간이 지어내고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라는 훌륭한 그 막강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은(거짓말에 통달/通한 사탄 마귀라 할지라도) 이런 거짓말은 못합니다. 주님은 진실이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말씀하심입니다. 이렇게 동물성 육체가 아닌 신령한 몸으로 인간을 지으셨지만 사탄이나 그룹(cherub) 등 영물이나 아담의 범죄처럼 자기 중심의 악심을 품을 수 있어 범죄가 성립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성경의 하나님 계명이 성문율이고, 불문율이 또한 있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양심입니다(롬 2.15 /요 8.9). 따라서 성경은 몰랐더라도 양심의 가책은 받을 수 있기에, 범죄는 그마저 외면했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경외심이 있는 사람들은 백부장 고넬료(행 10.35 )처럼 구원 받도록 하나님이 권고하여 인도하시기에, "나는 몰랐노라" 핑계대지 못하는 법입니다.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로 팽팽히 맞섰을 정도로 이상 두 가지 인간 심성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구원의 길은 만인간에게 명백히 개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무조건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일방적 압박감에만 내쫓기는 것이 아니고 양심상 가책도 동시에 받는지라(가룟 유다의 예에서도 보듯ㅡ마 27.3~5), 하나님을 선택할 수도 있는 완전한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은 죄의 본성(아담 범죄로 인한)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자발적 행위'의 양면성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서 "죄의 몸"(롬 6.6) 및 "죄와 사망의 법"(8.2)을 말함과 동시, "오호라!"(7.24) 하는 장탄식이 있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사람 평생 그렇게 갈등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 종식되어 성령으로 말미암는 최종 승리로 끝나 막을 내리게 되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바벨론 신학의 거짓에 놀아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니 그러므로...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고전 15.57, 58)이라 함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음으로써(성령의 세례) 그리스도 친히 내게 임하시어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다시(거듭) 남"(요 3.3,5,8)입니다. 아담의 육신으로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고 "마지막 아담"으로는 그 영 곧 하나님의 영을 받아 모심으로써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나는(출생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히지 않았다면 신령한 방법에 의해 그 신령한 몸을 물려받아 영생했겠지만 아담 범죄로 그 영광의 몸을 상실하였기에 하나님 친히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사람이 되신 후 그 영(사람의 영이 아닌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로서의 신령한 영광의 몸이 되도록 조처하신 것이 우리 구원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주님 친히 내 안에 내 영혼처럼 오시어 완전히 나와 "합하시어 한 영"(고전 6.17)이 되어 계시기에 그리하여 "교차 소유",  "교차 삶"에 따라 더 다시는 과거처럼 죄지을 자기 중심의 바탕이 아니므로 "거룩하고"(벧전 1.16) "완전해진"(마 5.43) 것으로서, 다시는 과거와 같은 죄의 바탕이 아니니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고의적으도 불순종하지 않는 한 그러합니다. 이 "고의적인" 불순종에는 세상(삶)을 사랑하는 것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경고하신 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눅 13.24) 않고 세상에 휩쓸리는 경우를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믿음의 헝제들을 위하여, 복음 전도자 등 하나님의 일에 매진하는 일꾼들을 위해, 그리고 바울 사도가 당부했던 대로ㅡ "내가 첫째로 권하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심이다"(딤전 2.1~4) 함과 같습니다. 이같이 기도하는 기도자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영적으로 "깨어 있다"(마 26.41/막 14.38/눅 21.36/엡 6.18) 할 것입니다.


2026년 7월 22일 수요일

바벨론을 탈출하라는 천사가 전하는 복음의 골자 (4)

기도를 부탁 드리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리는 것입니다. 

일의 성취 여부는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의 움직이심 여부는 오로지

여러 성도의 합심 기도로 좌우됨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우주 철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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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자기를 부인하라 하신 것은 "교차 소유에 의한 삶"을 말씀하심입니다. 미국 MRA(도덕재무장) 같은 데서 "철저한 자기 부인"을 표방하며 한 때 '자기 말살'과 같은 것처럼 이해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고 오직 내 상대만을 위하니 자기 부인이지만 그대신 남이 나를 위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니("서로 사랑하니") 내가 더욱 더 위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더 풍성한 생명"(요 10.10)이 이런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에서(앞선 글) 설명한 대로 "너를 위하는 것은 나이니 너는 나만 위하라" 분부하심과 같습니다. 이것이 '교차 소유'의 '교차 삶'의 근원 그리고 기본입니다. "3위1합"에서의 "하나"(:30)됨이니 육체의 "한 몸"(마 19.5)에서는 아내의 몸이 남편 소유가 되고 남편의 몸이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이며(고전 7.4), 주님과의 "한 영"(고전 6.17)에서는 삶 자체가 그러하여 주님은 나의 삶을 사시고(나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그 중거) 나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빌 1.21)가 됩니다. 각 사람의 상대는 같은 사람으로서의 자기 이웃이 아니라 첫째가 그러므로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이 하나님 친히 사랑하시는 같은 사람으로서의 내 이웃으로서의 순서가 됩니다. 고로 우리가 구원 받기 전 "회개해야" 하는 것이 이렇게 하나님 위하지 않고 이웃 위함 없이 나 자신만 위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니 사망인 것입니다"(약 1.15). 언제 어디서나 가장 이상향적으로 사람 사는 방법은 이러한 교차 삶에 있음을 우리 모두 마땅히 마음에 새겨야. 


EVERYBODY IN PROMISE(EIP/아이피) move-ment 곧 "너,우리,나"(또는 "너우나" 또는 "너우리나") 운동을 그러한 교차 삶의 맛보기로서의 범세계 사회운동으로 세계 전도 차원에서 보급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 슬로건(영문)은 "FIRST for you, for ALL, ABUNDANCE for me."입니다. 즉 " 먼저, 우리 모두, 풍요 번영"입니다. 영문에서 밝혔듯이 사람마다 자기가 대하는 상대를 먼저 생각해주고(당장 내 눈 앞에 니타나 직접 보여져 인식하게 되는 대상이기에) 이렇게 자의식보다 타인 의식이 먼저라 제1차 관심 대상으로 모두가 약속이나 하듯 마음이 일치하게 되면(그렇게 하기로 각자 마음에 품어ㅡ가벼운 약속처럼 이 운동을 확산/확대시켜 나가면) 결국 내게도 그 감화력이 영향을 끼쳐 그런 <사회 분위기>를 체감하게 되니 종국적으로는 나도 그 훌륭한 수혜자가 된다는 논리로 안착하게 됩니다. 거대한 약속으로서의 어떤 부담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마음 속의 <동감> <의식> 정도로 자진자발적으로 확장해 가는 데에 이 운동의 생명 또는 강점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기초 작업이 세계적으로 보편화되면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목표도 그리 어려운 과제로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만드시고 통할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에 그 첫걸음이라는 데에서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오늘날 나만 구원 받으면 그만이라는 팽배한 자기 중심적 비뚤어짐에서 자기 교화/敎化의 기대 효과도 어느 정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유가 3위1합의 원리로 돌아가고 있고 1합이 그 핵심으로서 교차 소유가 그 생명일진대 자아중심은 우리 뇌리에서 아주 도태시켜야 마땅합니다. 위의 슬로건에서 상대 곧 <너>를 가장 앞세우고 <나>를 맨나중에 위치시킴에서도 이는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불신자 상대의 사회운동 및 전도운동(복음 활동) 차원일 뿐이지 구원 받은 사람들의 "계명 지키는"(요 15.10) 것과는 전적으로 별개입니다. 구원된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자기 구원을 자기 스스로 자기 손으로 없애 치우는 망동이 되니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your own salvation,KJV)을 이루어"(빌 2.12) 갈 일입니다. 하나님 아들들로서의 마땅한 순종을 바울 사도는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순종은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지 남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니니까. 무화과나무에 무화과 외에 달리 다른 것이 달려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열매와는 아랑곳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만 끼고 앉아 있록 속인 것이 바벨론 신학입니다. 


자기 중심은 온갖 죄악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하는 원흉이기도 합니다. 교만해져 타인을 멸시하게 되니까 그 타인이 비록 진리를 말한들 귀기울여 들을 마음이 없는 것이 자기 중심입니다. 그래서도 자멸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롬 12.13).

눈 어두운데다 세상까지 어두운 2충3중고의 처량한 인생들이여

 






2026년 7월 16일 목요일

'회개'와 '믿음'과 '세례 받음'ㅡ모두 구원됨의 필수 요건





'믿음'과 '세례 받음'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함이니 "세례받았다"는 것은 "믿는다"는 증거요 "믿는다"는 것은 "이미 세례를 받았거나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막 16:16)이라고 주님 친히 말씀하셨고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행 2:38) 것이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면 세례는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나 다만 중요한 순종의 행위로 본다"는 등의 주장은 심각한 어폐가 있다. 세례 요한의 '회개 세례'는 처음부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의 성령 세례를 전제하는 것이기에. 베드로(베드로 개인의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말씀하신 것)가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 받으면 죄 사함 받는다"고 한 사실에 마땅히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회개→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죄 사함 받음성령 세례 받음의 순서다. 

'죄 사함 받음'이 '성령 받아 모심'에 앞선다(앞당겨져 있다). 본디는 성령 세례 받음으로 죄 사함 받음인데도. 이유는, 죄 있는 더러운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는 까닭. 이렇게 성령 세례와 "물로 주는 세례" 가 직결되는 만큼 믿음, 세례, 회개를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 얻음", "회개함으로 구원 받음", "세례 받음으로 구원됨"이다. 세례 받음은 방금 설명처럼 <회개>의 세례임과 동시 <성령 세례> 받음의 표상화/表象化이기 때문. 세례 받지 않으면 죄 용서가 안되고 죄 용서가 안된 자리에는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고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게 무의미가 되어버려 구원과는 영원 남남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사도행전 2.38의 취지다. "믿음으로 구원 받음"이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듯 보이는 것>은 사도 당시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할례 등 모세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이 옳다"는 식의 논조로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함에서 나온 당시 교회 사정이라, 오늘날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마치 바울의 모든 서신 내용이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영구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는 양 몰지각한 일부 무리들의 무의미한 갑론을박일 뿐인즉 일절 휘말려들 일이 아니다. 

단 "내가 어떻게 구원 얻겠는가" 했을 때 "주님으로 예수님을 모시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30) 했듯이 대표적으로 하는 말이 "믿으라"인 것. 믿으니까 회개도 세례 받음도 가능하기에. 우리 각자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나)와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영(성령)으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합해"(고전 6.17) "한 영"(:17)으"하나"(요 10.30)되시어 "교차/交叉 소유"에 의해 그 죽음과 부활이 문자 그대로 나의 죽음, 내 부활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 된 <실질적인> 나의 구원이지 "대신 죽음" 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 받아 모심이 곧 주님을 영접해 모심이요 성령 세례 이전에는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주님과 합해 한 영"(:17)됨이 구원이니까. 

따라서 이는 '교차 소유'가 그 핵심이기 때문에 "우리 중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이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였다. 이같은 은혜의 <교차 소유>는 자기 중심과는 영원 단절이니 과거의 동물적(아담 범죄로 인한) 속성의 본능 작용(자기 중심)은 그치고 비로소 이성적 판단의 인격성("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이 정상적으로 자리잡음이다. 

그러므로 단언하거니와 앞에서 인용한(롬 14.7~9) 바와 같이 무한 기쁨으로(왜냐면 이제 비로소 생명 가운데 있음이 입증되었으니까) 로마서 14.7~9을 말하지 못하는 이마다 아직 구원되지 못함을 스스로 고백함이니 지금 이 시간도 늦지는 않으니까 복음을 깨닫고 성령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니까! 진리에 서지 못했던(몰랐던 관계로) 과거를 회개하고 복된 "교차 소유"로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초창기라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성령 받은 증거로서 "방언(외국어)" 과 "예언"(행 19.6)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초기가 아니라 이미 기정사실화한 까닭에 그런 증거가 필요치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다. 그저 받은 줄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악령들이나, 모방이 아닌 진실처럼 속이기 위해 각종 초자연적 현상으로 그 "증거"랍시고 오늘날 나타내 려 조바심을 치지만. 성령 받은 중거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교차 삶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마련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교차 삶'의 본보기가 되시던 주님 친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9~11) 하신 대로 우리도 그와 같이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면 되는 것. 이것이 '3위1합(종전의 "삼위일체")'에서의 "1합"의 특색인 것이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언동일진대(골 3.17) 이는 주님 친히 그와 같이 하신다(움직이신다)는 의미. 이와 같이 본을 보이신 대로 우리도 그와 같이 함이니, "<무엇을 하든>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것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고전 10.31)이다. 

이것이 진정 사람 사는 길이다. 이 길을 보이셨으니 그대여, 이 길읃 따라 걸으라. 좁든 험하든 길만 따르라. 그러면 모든 것은 보장된다. 길을 두고 뫼(산)로 가랴. 사람 따라 세상 따라 가지를 말고 오직 이 길만 따라 갈 것이다. "3위1합"의 길, "교차 소유"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우리 위해 본이 되시어 걸어가신 길, 그 유일의 길이다. "바벨론 탈출"(계 18.4)의 "천사의 복음" (14.6)의 영원 생명과 무한 영광의 길이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다"(사 34.16).




2026년 7월 15일 수요일

아직도 온 세계(기독교계를 포함해)가 "죄" 관련 정확한 정의를 못내리고 있다

아직도 온 세계(기독교계를 포함해)가 
"죄"가 도대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못내린 채 어두움 속에 방치되고 있다



2026년 7월 10일 금요일

2026년 7월 9일 목요일

21세기 세기적 선언





3운법칙은 인간 생애를 철통 같이 관장 주관하는 원리다. 그 위에 또 더 있다. 인간 생애가 이같이 통제되는 것이 무엇 또는 누구 때문인지를 완연히 드러내는 그 증거까지 구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 언제 그것이 정해졌고 또 왜 정해졌는지 그 '때'와 '이유' 등을 정확히 알리고 있음이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육하원칙에서 벗어남이 없이. 여기서 '누가', '어디서'가 아주 중요한데 다름아닌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 주인공이시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과학적 사실'로서의 "하나님"이 만천하에 이로써 증명되셨다는 사실이다. "과학적"이라고 특별히 강조하는 까닭은 이 시대에 돌연히 혜성처럼 나타난 양자역학에 기초함이다. 오늘날 물리학에서 두각을 드러낸 미시세계에서의 현상을 말함인데 이 똑같은 원리의 거시세계 현상이 바로 3운법칙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아담 이래 노아까지의 2천년간, 사람 수명이 예외 없이 천년에 가까웠던 당시 세상에  처음으로 2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아예 인간의 죽는 때를 정해버리시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3운법칙이 작동되기 시작한 것이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증명되신 21세기"라고 칭해도 무방하다. 하나님으로 자처하는 적그리스도 출현이 임박했다는 시대적 징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가 나와서 세상을 요동시킬 때 휩쓸리지 말고 지금 이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일향 매진할 일이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올 것이니 때 늦기 전 총력을 기울여 주님의 일에 참여 합류하고 3운법칙을 널리 세상에 선전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나님 구원의 은혜를 알려야. 복음 전도 사업이 과학적으로 강력히 뒷받침되기는 유사이래 최초다.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지라 필연적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3운법칙만 아니다. 3운법칙의 절대적 기반이 되어 있는 3위1합(삼위일체) 또한 드러났으니, 이 또한 하나님 계시는 <모습>이시기에 의미는 엄청나다. 다름아닌 "성부, 성자, 성령"이시라는 수수께끼가 드디어 풀려진 것이다. 

뿐 아니라 이렇게 계시는 모습의 원리를 만유 창조와 운영의 기본 법칙으로 정하셨다는 놀라운 진실도 입증되었으니 그 대표적 예가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이요 거시세계에서는 3운법칙이다. 다시 말해 '3위1합'이 무엇이냐 하면 닐스 보어가 상보성 원리에서 확언한 바 "상반은 상보"인 것이니 '상반'은 짝을 이룸(성부 하나님과 독생자 하나님)이고 '상보'는 그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하나"("나와 아버지는 하나다"ㅡ요 10.30)로 반드시 "합하고"("합하여 한 영"ㅡ고전 6.17; "합하여 한 몸"ㅡ마 19.5) 있음을 가리키기에 "3위1체"가 아닌 "3위1합"이라 함이 마땅한 것이다. 이 "3위1합"은 오늘날 이미 이 21세기를 지목해 예언한되었던 다니엘서 7.25/12.7에서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문구(역시 21세기를 예고한 계시록에서도 이를 인용함ㅡ계 12.14)로써 "3위1합" 도식/圖式(아래 그림에서 세잎클로바 형태)을 통해 또한 예고하고 있음이라 더욱 놀라움을 자아내는 것. 

"도식"이라 단언하는 이유는 3운법칙의 구도/얼개(structure)가 바로 이 도식을 빼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일련의 사실들 자체가 "표적과 기사" 되기에 충분하니 "객관적 실험" 따위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뮤례 없는 규모의 자체 증명의 파노라마의 장관을 이루기에 그러하다. 실로 경탄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되었다고 믿어 하나님 은혜를 찬미하는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은 모름지기 하나 같이 이 실상을 온세계에 알림으로써 이 세상 마지막 때 복음 전파에 박차를 가할 일이다. 다만 유의할 것은 "바벨론"(계 18.4) 신학이 아닌 "천사의 복음"(14.6 ) 전파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의 이 전도 활동에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거대한 독수리 날개를 달아주심이라 이 하나님의 실존 증명의 막강함은 어디에도 비할 바 없다는 차원에서의 그야말로 독야청청이니 우리는  이로써 5대양 6대주를 휩쓸어야! 가나안 복지 정복의 요단강 도하처럼(여호수아 3장) 발만 내디디면 물은 갈라지게 마련이다. 머뭇거리다보면 평생 가야 물은 갈라지지 않는다. "하나님 실존 증명"이라는 '3운법칙'과 그 바탕인 '3위1합'의 양발을 내어딛고 보무당당 앞으로 전진이다. 하나님의 손길이심이 분명한 '3운법칙'과 '3위1합'이라는 21세기 "표적과 기사"(이 모두 인위적으로는 세상에 나타나짐이 불가능할진대 분명코 하나님의 역사이니)의 좌우 포진이 철옹성 같은 위력을 발휘하고 밌으니까! 옛시대 모세의 기적과 같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왕상 19.12)로서의 "하나님 나타나심"이니 이로써 천사의 복음을 전하라 하시는 21세기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시랴! 

3운법칙은 초등생 정도의 셈법만 알면 누구나 검증 가능하여 만인에게 공개 개방되어 있다. 누구든 그 누구의 생애든 분석해보고 예외임이 입증되면 그래서 세상에 알리면 일은 간단히 끝난다. 3운법칙은 그 시로부터 영구히 매장/폐기되어버린다. 법칙으로서의 존립 자체가 와해되는 것. 따라서 '3운법칙'과 '3위1합' 관련해 부인도 시인도 않는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비겁하다는 소리 외 더 들을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 팔아 수작을 부리는 확신이 들 경우 사이비 이단 척결 차원에서 즉각 대응하든가 둘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부로 필자는 세계를 상대로 중요 발표를 하려고 하는 바 그것은 다름아니라 세상에 상보성 원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3위1합의 원리라는 만유의 기본 대법칙만이 운용된다는 사실을 최종 공표함이다. 닐스 보어는 "삼위일체"란 말을 평생에 들어보았는지 모르나(기독교인이 아니기에 듣지 못했을 수도) 이것이 바로 '상보성원리'의 정체인 것이다. 오늘날 '3위1합'이 완연히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냄에 즈음하여 혹시 사람들이 불필요한 혼돈을 느끼면 안되겠기에 미리 선언해 두는 바이다. 그 확실한 중거가 보어의 가문 휘장에 그려 넣은 태극 도안과 "상반은 상보"란 뜻의 라틴어 문구 "CONTRARIA SUNT COMPLEMENTA"이다. 이 모두 '3위1합'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 "상반은 상보" 대신 "상반은 상합/相合"이라 하고 라틴어 문구도 "contraria sunt coincidentia"(콘트라리아 순트 코인키덴티아)로 바꿀 일이다.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대립되는 둘을 ‘합쳐 하나로서의 새로운 합(合)’을 만드는 정반합(正反合)적 합일이라는 뜻을 나타냄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면서 배타적 상태로 공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짝을 이룬 둘이 하나로 합해지는”(coincidentia oppositorum) '3위1합'(종전의 "삼위일체")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상을 말하면 contrariacomplementa(상반이 상보)가 아닌 "상반은 상합"(coincidentia oppositorum)인 것이다. 상보성 원리 자체도 “짝이 하나로 합해지는” 관점에서는 '3위1합'과 유사한 구조(대립이 보완적이며 궁극적으로 하나)이기는 하나 직설적 표현으로서 일치· 합일(coincidentia)한다"는 말을 두고 빙 둘러서 말할 필요는 없는 것.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지 말고 고삐를 늦추지 말고 채찍질하여 말 달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 "천사의 복음"(계 14.6)으로써 사탄의 모든 거짓과 속임수의 "바벨론"(18.4)을 궤멸시킬 일이다. 현대물리학의 총아로 여겨져 왔던 상보성 원리 즉 영자역학의 모태(母胎, birthplace, cradle)인 상보성원리를 제대로 다잡아주는 성경이니 모든 과학적 진실의 "모태" 역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라 해도 이제는 누구도 입을 가볍게 놀릴 자가 멊을 것이다. 만유 창조자께서는 과학적 법칙의 창조자이시니까! 다시 강조하거니와 '3위1합'은 하나님 계시는 모습 그 대표적 표현인 것이다.



2026년 7월 6일 월요일

세상에서 가장 미련함의 극치는 성경 대신 신학서적을 뒤적이는 것

다시 강조하거니와

세상에서 가장 미련함의 극치는 

성경 대신 신학서적을 뒤적이는 것




우리 하나님 창조의 삶의 본질을 그대 이해하는가?




 

우리 구원은 범죄 후 아담 상태에서 범죄 전 아담 상태로의 회귀일 뿐이니 다시 또 아담처럼 되면 일사부재리/구제불능

"아담 이후 오늘날 인간은 정상이 아닌 비정상 즉 '죽은 자'('산 자'가 아닌)임을 깨달아("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죽은 자"ㅡ골 3.3) '영생(아담의 범죄 전 상태)'에 들어가는 날만 학수고대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마 7.21) 하루 24시간이 되도록 주님의 경고 말씀대로 "힘써야" 하는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눅 13.24) 하셨기 때문이다. 당장 여러분은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 받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고. 답은 아주 간단하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은 세상 불신자 상대가 아니라 교회 상대다. 우리의 '구원 받음'은 그러한 '교회'의 일원/一員 즉 "하나님 백성"(계 18.4)이 되고자 함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어 그 "몸"된 교회의 구성원 개개인은 지금 당장 목숨이 끊어져도 세상 사람들처럼 멸망의 대상이 아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기"(요 5.24) 때문이다. 단 여기서 유의할 것은 이 말씀을 소개한 요한 사도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다"(요일 3.14)고 명백히 부연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머물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머물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5)고도 잘라 말한 것이다. "형제"라 했으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다시 말해 성령 받은 자이나 그 자유의지를 따라 순종하지 않는 위치에 있어 회개 않는 한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9)는 삼엄하기 짝이 없는 경고의 대상이다. 이와 같이 당면한 현실적 문제이지 단순한 가상 이론이 아닌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 바벨론 신학은 우리의 "구원 받음"을 마치 무슨 <회수/말소 불능의 천국 입국사증(비자)>인 양 착각하게 만든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다. 무릇 창조는 모름지기 "언약"과 "계명"이다.

아담은 이 "언약을 어겼으니"(호세아 6.7) 용을 비롯한 영물들도 동일하게 어김으로써 악령들로 풀린 것이다. 언약(약속)을 어김은 필연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음 즉 자기 증심으로 끝나고 이것이 범죄 행각인 것이다. 우리의 경우도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눅 22.20)이라 하셨고 또한 "새 계명을 준다"(요 13.34) 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15.10) 것이라 약속하신 것이다. 우리 하나님도 부자/父子지간으로서 동일한 언약과 계명이시니 "독생자"(1.14/3.16,18/요일 4.9) 예수님이시기 때문.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고 분명히 하셨으므로(14.28) 파생자(낳으신 분)와 피파생자(낳아지신 분)로서 그리고 "크심"과 "작으심", "아버지" 와 "아들"로서의 "짝"(이사야 34.16)이신 것이다. 

2026년 7월 5일 일요일

사람이 드러나는 데에는 하나님의 역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세계 어디서나 계시는 성령이신데 유학 신학이 웬 말이냐ㅡ예로부터 말이 있었으니ㅡ"빛은 동방에서"




 

봄 하늘 저 높이에 종다리(종달새) 노래하듯









지금까지가 '총론'이었다면 그 '본론 및 결론'



fashomo(3운법칙)와 trinia(3위1합)를 하나님이 우리 모든 인류에게 나타내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잎증해주려 하심이 물론 아니니, 이미 그런 차원의 일은 그 "만드신 만물"(롬 1.20)로 충분하기 때문. 오늘날 이렇게 덤으로 다시 나타내어주심은 보다 큰 차원에서이니 "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4) 하시는 "천사의 복음"(14.6) 전파가 시급하여 이를 명령하심이다. 지금까지의 복음 전파에 하자가 없었다면 새삼스럽게 이런 말씀을 내리실 리 없다. 그럼 왜 이전에는 명하시지 않았느냐 묻게 되는데 이전부터 사실은 경고해 오셨던 것으로서 새삼스러운 내용이 아니며, 사람들이 무엄하게 무시해 왔음을 알아야.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을 통해서도 재확인해주셨던 것이니 일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에서 아담의 신령한 몸(죽지 않는) 창조가 명백히 밝혀졌건만 이를 믿지 않고 사탄의 지어낸(인위적인) 거짓말(바벨론 신학)을 여전히 더 따랐던 것. 고로 세상 끝에 재삼 재사 마지막으로 특별한(trinia, fashomo 등) 방법으로 일깨워주심이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요 곧 "천사의 복음"이다. 이미 주셨던 말씀의 되풀이이신 것이다. 이 최후 기회도 무시하면 말 그대로 끝. 

고로 다시 반복하거니와 아담의 범죄로 신령한 몸을 잃어 "죽은 자"되어 자기 중심 동물적 본능의 "죄의 몸"이 되었은즉 절대로 죄짓지 말아 자기 중심을 철저히 배격하지 않으면 영생은 꿈도 꾸지 말라는 엄중 경고이신 것이다. 바벨론 신학의 대표적 사례 및 특징이 바로 로마서 7.24를 믿은 후의 바울 사도 자신의 직접 체험이라는 사악하기 짝이 없는 살인적 거짓말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의 개신교 모든 교파가 예외 없이 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있는 것이다.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극소수 개인 차원일 뿐이다. 기 막힐 일이 아닌가! 어거스틴, 루터, 깗벵 모조리 말 그대로 전멸이다.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세윌이 흐르자 처음 주장을 바꿔버렸고 어거스틴이 그렇게 되자 나머지는 그 본을 따라 도미노식으로 모조리 엎어지니 애닳다! 성한 자가 없이 천국 들어갈 자는 아무도 없을 정도의 만신창이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참담함을 극한 기독교계 실태다. 바로 이 때문에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신 것이다. 

우리 주님의 나 위하신 죽음은 "대신 죽음"이 아니다. "함께 죽음"이다. 성령이 누구신가. 다름아닌 부활하시어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어 계시는 주 예수님이시다. 성령의 세례는 바로 이 주님을 내 영혼처럼 영원히 내 안에 모심이다. 고로 나는 나 자신 관련해서는 영원히 죽은 자로 있다. "하나"의 개념은 '3위1합'의 '1합'을 말함이다. '1합'에서는 교차/交叉 소유(고전 7.4)가 그 핵심이다. 한 몸에서는 남편 몸이 아내 것이 되어 아내가 주장하고 아내 몸은 남편이 그렇게 한다. "한 영"(고전 6.17)에서는 주님 말씀대로 "아버지의 것은 저의 것, 저의 것은 아버지의 것" 그리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저는 아버지 안에 있음"(요 17.10, 21)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교차 삶>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즉 갑과 을로서 짝을 이를 때 갑의 삶은 을이 살아주고 즉 을은 갑을 위하고 갑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주님 친히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다"(요 15.10)고 하신 바로 그 교차 소유ㆍ교차 삶의 계명이신 것이니 최대한으로 행복하게 사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바탕이다. 즉 나 자신을 위하치 않음이 모두를 위함이며 이는 중국적으로 나를 위함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이 삶의 근본이요 그 기초다. 성경에서 강조되는 "거룩함"이다. 때문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바벨론 신학의 거짓과 속임수에 넘어가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구제불능의 죄인이라 죄인으로 살다가 죄인으로 죽으나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는 새 질서를 세우신 덕분으로 영생에 들어간다는 식의 자기 최면으로 급급했으나 천만의 말씀! 신령한 몸일 때는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처럼 또는 아담처럼 불가항력이 아니라 고의적 양자 선택에 의한 범죄인 것임을 명심해야.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 "죄의 몸"이 되어버렸은즉 이 극명한 차이를 알아야. 때문에 <신령한 몸으로서의 아담 창조>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구원은 다름아니라 이 "죄의 몸의 궤멸"(롬 6.6)에 있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 영" 됨의 상호 교차에 있는 것. 무턱대고 죄를 눈감아주시어 멀쩡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천국 가게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다. 내 이름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내 안에 성령으로 오시어 나와 한 영이 되심을 인해 과거 지은 죄가 용서되고(세례 받음으로써의 죄 용서는 내 안에 오심을 전제로 하는 것 ㅡ행 2.38) 주님과 "하나"되어 "새 사람"으로 다시 나게 하셨으니 아것이 "은혜"이고, 그 후로는 당연히 나의 순종이 철저히 요구되는 것인데 왜 이를 간과하고 무시하는가. 

"값 없이" 구원됨은 새 사람으로 창조되기까지다. 창조는 하나님 단독 역사이시기 때문. 이 창조로 내가 다시 난 후로는 의당히 나의 순종이 필수인 것이다. 때문에 "참고 선을 행하면(순종하면) 영생"(롬 2.6~11)이라 못박은 것.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은 "그 행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보응되는"(:6) 것이다. 바울 사도는 다시 쐐기를 박는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계명)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13).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마땅한 순종(마 21.31)이 곧 "율법/계명 행함"이요, "참고 선을 행함"(:7)이다. 다시 반복하지만 '믿음'으로 구원된 것은 죄로 죽었던 자가 새 창조하심 받아 새 사람으로 출발함이요 이는 아담 창조와 똑같은 것이다. 다만 차이는 아담은 신령한 몸이었고 우리는 아니라는 것뿐. 우리는 신령한 몸 대신 성령 세례 받아 주님을 직접 모심이라 실질적으로 아담에 비해 못할 것도 없다. 다시 말해 더 다시는 <불가항력으로 죄지을 수밖에 없는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안에 막강하신 사람 예수님을 직접 모셨으니까! 오직 단 한가지, "한 영"으로서의 <교차 소유>의 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 이는 아담의 범죄 또는 악령들의  범죄와 똑같은 범주에 들고 차이가 없기 때문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서슬푸른 엄중 경고가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경고는 아담에게도 천사들에게도 똑같이 내려졌었던 동일한 내용이다. 단지 우리에게 특별히 더 엄중한 것으로 비쳐지는 이유는 우리 구원이 너무나 지극하신 사랑과 은혜의 결실이었기에 그 반동에 의함이라는 것뿐이다.  

간결하기 둘도 없는 구원의 진리를 마귀의 얼토당토않은 "말씀 혼잡"(고후 2.17/4.2)에 넘어가 유야무야로 뒤바꾼 어리석음에서 세계의 모든 교회는 한시바삐 벗어나야. 불순종이 죄이다. 로마서 7장이 믿은 후의 바울 체험이라면 하나님은 불순종의 아들만 두신다는 망상이 아닌가?


                                                                                                    닐스 보어가 직접 도안해 그려 넣은 가문 휘장
















하나님의 극진하신 은혜에 대한 우리의 불변의 화답송

  어느날 꿈결에서 이 곡 조가  흘러나왔다.  너무나 듣기에 아름다웠다. 나이 지긋한 연배로서 모든 찬송가를 이 곡에 맞추어 부르면 좀 좋으랴 싶은 생각에 한동안 사로잡혀 있었다. 몇 장인지 몰라 헤매다가 오늘 마침내 찾아 올리고나니 흐뭇하다. 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