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31일 화요일

무엇이든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가 있다




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단지 십계명을 어기면 죄인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
여기서 주님은 삶(생명)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살면 음욕을 품는다.
즉 음욕 채우는 것을 마음에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삶, 의식, 자유 선택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것이 머리에 파고 들어 올 여지가 없다.
마음에 눈길에 잠시라도 머물 공간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죄 짓지 못한다"(요일 3:9) 한 것이다.
나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서 산 자라 인식한다면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이다(고후 5:15).
(롬 14:7-9, 갈 2:20, 빌 1:21).
때문에 나의 언행 일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임을
성경은 아주 못박아버리고 있다(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가 하나님 영광 위주이다(고전 10:31).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으면 절대로 마시지도 먹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죄는 "생명의 법(칙) 위반"이다. 이것이 그 정의/定義다.
다시 말해 "불법/不法"(the transgression of the law__요일 3:4)을 말함이다.
자연법칙을 어기면 자연계가 존속 불가능이듯이
법칙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명확히 지적하는 것이다.
생명 가동/稼動의 법칙, 따라서 이 법칙대로 않으면 생명은 없다.
움직이느냐, 정지하느냐, 있느냐, 없느냐의 양단간의 결과뿐이다.
그러면 어떤 원리로서의 법칙이냐.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 위함의 '몸과 머리의 한 몸됨'이 그 원리다.
만유는 다 짝의 원리로 움직이는데 생명의 법칙도 예외가 아니다.
고로 말하는 요지는 내가 회개하는 것도 이 법칙 어김을 통렬히 뉘우침이요
향후로는 사생결단으로 이 법대로 하고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는 다짐이니
구원받은 증거도 바로 이 법칙 준수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

하면 하고 말면 말고─이것이 <법칙> 사고방식이다.
준수하느냐, 어기느냐 둘 중 하나이지 달리 무엇이 개재 않는다.
어기든 지키든 당연한 그 결과를 거둘 것이다.
이렇게 바로 알고 행동해야 영생에 들어가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 속일 뿐 나중에 가서 후회해보아야 엎지른 물이다.
그냥 그저 믿는다는 표시로 교회에나 나가고 그래서 나는 믿으니까 영생한다고
자신하는 그런 것은 종교일 뿐이다. 사실에 근거한 확신일 수가 없다.
주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그 본을(머리께서 보이신) 따라
주님 위해 목숨을 버림이, 주님께 나 자신을 바침이,
(주님께서 그 자신을 송두리째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까), 이상의 법 준수인 것이다.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당연히 그 순서가
보이는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기에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한 것(요일 3:16).
주님께서 목숨 버려 사랑하신 형제이니 내가 주님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함은(요일 5:1) 당연 사리/事理이고 도리/道理다.

따라서 내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면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법칙을 따름이기에 <죄가 없다>.
이렇게 중심 가닥만 잡으면 소소하고 세세한 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지혜도 주시고 적절히 이끌어 가시며
때로는 회초리를 드시고 징계 등을 하시지만
그런 경우를 죄 짓는 것과는 결부시키지 않으니 차원이 다르기 때문.
나는 어찌하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일념뿐이면(고전 7:32/고후 5:9)
죄 없는 것이니, 우리의 의롭다 하심은 죄인임에도 그렇게 봐주심이 아니라,
이와 같이 실제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사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 위해 사는 것을 의미) 바로 그것이 의인의 모습인 것.
딴에는 겸손인지 아니면 무식인지 "죄인, 죄인"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그 목적지가 영생이 아니라 자기 말대로 멸망인 줄 알아야 하는 것.

마귀는 죄를 막연한 알쏭달쏭 개념으로 뒤범벅을 만들어 죄짓게 획책한다.
무엇이 죄이고, 죄가 아닌지를 확연하게 구별해 보는 눈이 죄를 이기는 지름길의 하나다.
마귀의 농락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자아중심으로는 이 세상에서든 오는 세상에서든 일절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 증거가 ① 가인이 아베을 죽인 예이고 그리고 ② 3운법칙이다.
사람 나자마자 죽이기부터 먼저 하는 판이니 그래서 3운법칙으로 제동을  거신 것이다.
이 3운법칙이 인생들을 관장하지 않았다면 서로 죽이고 하여 세상을 벌써 끝났을 것.
모든 인간을 자기 죽을 때 죽도록 울타리를 쳐주시는 것이 3운법칙이라면
코흘리개로 죽고 10, 20대에 죽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사산/死産돼 나오는 인생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네피림 같은 반/半 사람도 있어서다.
그런 자들은 구원과는 무관하므로 태에서부터 죽어 나옴으로써
인생의 자연계 육체의 허무함을 일깨우시는데 활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태에서부터 죽어 나오는 것을 모두 네피림족이라 단정할 것은 없다.
우리 피조물된 자들이 이것저것 따지는 것 자체가 합당한 자세는 아니다.
알 만한 것은 알아야 하겠지만 성경도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을 보라.
창세기 초두에 하나님의 "6일 창조" 시작 전 물부터 나온다.
땅은 또 물 속에 풀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연유에 대해 성경은 일절 함구다.
알아서 득보다 해가 될 소지가 있으므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 것이다.
성경이 지어낸 인간의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반드시 물은 어떻게 되어 생겼고 땅은 왜 물 속에 풀어 있는지 설명을 지어내게 돼 있다.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네피림의 생성은 하나님의 정하신 유전 법칙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아담계/係의 남자와 아담계의 여자가 낳은 자식은 남자계 일색이지만
악령계의 남자와 아담계의 여자로 인한 자식들 중에
여자의 아담계가 작용할 수도 있어 개중에는 네피림이 아닌 사람(아담 혈통)도
있을 수 있다고 할 때 누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고로 이런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그냥 넘어가버려도 무방한 것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 구원의 진리에 손상/차질이 오는 것도 아니니까.
네피림이라고 일찍 죽게 하시는 것은 또 물론 아니고
기타 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로는 역시 우리의 이해 한계 밖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생략>의 의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연법칙이 짝의 원리로 말미암아 운용되듯이
삶의 법칙도 같은 원리를 따라 어김 없이 진행되니까
여기서 낙오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감이 현명할 것이다.



죄는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
생명의 법칙은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법칙으로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의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한 몸됨이 그 원리이므로
이제 내가 주님과 하나되어 구원되었은즉
내가 주님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한
나는 의인의 자리에 있지 죄인의 위치가 아니다.
이것을 새 창조 또는 다시 출생함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시는데
죄 짓는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또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나는데
성령으로 났으니 성령으로 살고 행령으로 행하는 것.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한 영됨으로서
한 몸됨은 남자 몸은 여자 것, 여자 몸은 남자 것임과 같이
나의 삶은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주님의 삶은 나 위한 것임을
주님은 이미 그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증하신 것이다.



이제까지 구원받았다면서 자기 위해 살았다면
그 구원의 확신은 말짱 물거품이니, 나를 위해 산 것을 
회개하여 죽든지 살든지 오직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 위해
살기로 결심하면 당신도 얼마든지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을 떠나서는 인간일 수조차도 없는 사실을 명심해야. 
인간으로 창조되었는데 인간이 아니라면 그 존재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말 그대로 멸망 덩어리 고통과 비애의 화신/化身으로만 전락한다. 
이를 갊과 슬피 욺의 화신. 영원한 화신. 영원성을 되새기시라. 

"아담"ㅡ마지막 아담과 함께 하나가 되어 있는 나의 실상을 나는 알고 있는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한 번에 (제물로) 바쳐지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다"(히 9:28)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딤후 4:8)

짝의 원리에서 죽음과 생명이 정반대로 나눠져 있으니
세상에서 죽음을 기피하고 삶에 영합하면
주님 오실 때 생명이 나를 기피하고
죽음이 대신 쌍수를 들어 영합할 것이다. 



2019년 12월 30일 월요일

하나님의 처지(위치)에서 좀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ㅡ만날 어린아이 행동거지만 보이려는가

인간은 멋모르고 좋아하지만 
하나님은 범죄로 인한 인간의 자연계 육체의 
흉물스러움에 얼마나 상심하시랴
그 상심에 동참하는 것이 사랑이다
함께 상심한다면서 이런 세상 삶 사랑하고 자랑하랴
(요일 2:16)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하신다
나는 세상 삶을 사랑하고 싶은데 왜 그러시나?
역지사지[ 易地思之 ]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뜻의 한자성어.

2019년 12월 29일 일요일

좌우명




불변의 이치이건만 망각하는 수가 많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죽어 없어졌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바치신, 영원히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갈 2:20)

그러므로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이니 주님 위해서 죽기 때문이다(빌 1:21)
주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인즉
따라서 주님 위해 죽음은 많은 사람 살리는 
다시 말해 많은 낟알을 맺기 위한 한 알의 밀알로서의
지극히 생산적인 자기 희생이기 때문이다
고로 내 자랑을 두고 단언하니
나는 기꺼이 날마다 죽는다(고전 15:31)
노래하며 찬송하며 죽는다
이 한많은 죽음과 고통의 세상에서 
보람되게 나를 소생시킬 수 있는 천하의 비결이 아니랴 
우렁찬 승리의 개가가 아니랴

기도와 말씀 전파는 복음의 열차가 달리는 두 가닥 레일이건만 한 쪽이 절단되어 오도가도 못하고 있다









다니엘 네쉬ㅡDaniel Nash(1763-1837)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절대로 열어주시는 법이 없다


스스로 구원받은 줄로 아는 사람도
대화해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습니다.
또 성경에 말하는 대로 "거짓 형제"도 있습니다.
말씀 전도자는 기도 중에 온유한 마음으로(벧전 3:15) 해야 
어른이 어린 아이 이끌 듯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근에 믿음에 들어 온 사람이 아니라면 
천주교(로마 카톨릭)가 어떤 종교인지 압니다.
천주교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리아입니다.
천주교 교당에 세워진 것이 그 상징입니다.
마리아를 중시하는 이유가 "예수님은 너무 거룩해
감히 가까이 나가기 어렵고 그 중간에
예수님의 모친이니까 중보자 역할로 개입하면 된다"는
설명인데 이런 천주교 실태에 대해 사람들과 말을 통해보면 
그들(구원받았다고 하는)의 실상을 진단할 수 있게 됩니다. 
꼭 천주교를 통해서만 그렇다는 것은 아니나
같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집단이므로
예를 들기에는 가장 적합한 면이 있어 그렇다는 것뿐입니다. 

이 마리아 "중보자 역할"이라는 것이 바로 사이비 증거인데
마치 바울 사도 당시 유대 율법주의자들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되고 모세 율법도 지켜야 한다는
바로 그런 소리가 되는데 바울이 그래서 얼마나
이런 복음의 원수를 논박하기에 힘썼는지
그의 편지가 거의 전부 여기에 집중되어 있다시피 합니다.

천주교가 말하는 마리아의 <위치>가 바로 그러합니다. 
때문에 누구든 이 천주교 교리 문제에 대해
말을 해보면 개신교 교회에 다닌다는 그 사람의 
그 "구원받음"에 대한 진실 여부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리아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다른 문제
가령 "오직 믿음"이 개신교이고 천주교는 여기에 
"행위"를 첨가시킨다는 등의 말을 한다면 그는
신학박사일지라도 구원의 "구"자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행위"는 선(또는 의)을 행함입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그 의미하는 것이 교회 순종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모든 것에 따라야 선한 행위입니다.
개신교도 교회 지도를 따를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구원과 결부시키지는 않는데 비해
천주교는 구원과 직결시킵니다.

성경은 행위를 구원과 직결시키되
선과 악을 명명백백히 규정해놓고 그렇게 합니다.
즉 악, 죄, 불의, 불법은 자아중심, 자기를 위함이고,
선과 의는 머리이신 하나님 위함이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웃 위함입니다. 
이를 생명과 직결시킴으로써, 악을 행할 때 죽음(멸망),
선을 행하면 영생입니다(롬 2:7-10)

천주교나 개신교는 여기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합니다.
이 또한 "말씀 혼잡"(고후 4:2)의 일종입니다.  
마귀는 말씀 혼잡으로써 마귀 짓을 잘 합니다. 
즉 속이고 거짓말을 능난하게 합니다. 

개신교도 이렇게 생명과 직결된 행위 곧 선을 행함을
무시하고 인위적인 교리를 만들어 이것을 믿게 하는데
전부는 아닐지라도 거의 전부가 그러합니다. 
천주교는 마리아로써 속이고 개신교는 엉뚱한 "믿음"으로
속이고 있으니 속이는 것은 매일반입니다.

주님께서 오심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하심이지(눅 5:32)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닌데도 마치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처럼 각색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중보자로 여기는 것과 똑같은 마귀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는 것이지 믿으라가 아닌데도(행 17:30)
마치 믿으라는 것처럼 변색시켜 놓은 게 오늘의 교회입니다.
성경은 "참고 선을 행함"이 영생이라 가르칩니다(롬 2:7-10).
다시 말해 "참고 선을 행하기"로 결단을 내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과거에는 이렇게 "돌이켜 악함을 버림"(행 3;26)이 
불가능할 뿐아니라 철저히 무의미했습니다. 
이 죄의 육신이 죽어야 가능한데 시퍼렇게 살았으니 그렇고
따라서 일단 내 죄의 벌로 죽은 다음이 아니고는 
모든 선행을 했다손쳐도 그것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나를 멸망으로 몰아가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이유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고집스럽게 이를 외면했습니다.
믿음으로 난 새로운 의가 메시야 예수님으로 이루어져서
누구든지 이를 믿으면 의롭게 되건만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를 수용하면 예수님처럼 이 세상에서는 십자가 지는 죄인의
모습이어야 함이 필지이므로 이에 대한 반발이라 하겠습니다.
위풍당당하지 못하고 죄인 행색의 주님을 멸시한 것이 바로
그 증거라 할 것인데 자아중심의 본색은 결국 드러납니다. 
세상 사랑이 그들에게 함정, 덫, 올무가 된 것입니다. 

결국 세상 사랑할 것도 말 것도 없는 "없는" 사람이
즉 지혜가 없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강함이 없는 약자들,
부유함이 없는 가난한 자들, 천한 자들, 멸시 받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고전 1:26-28).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시들어 썩음)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갑니다"(사 64:6) 했는데도,
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남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것만
앞세워 "없는" 자임을 인정 않고 소위 "있는" 자 행세를 한
영적 교만이 결국 저들을 파멸로 몰고 간 것입니다.

과거에는 온 세상에게 그런 명령을 내리신 일이 없는데
<이제는>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 이유가 심판자가 오신 데에 있음을 또한 명백히 했습니다. 
심판은 선악에 의한 분류, 판정, 상벌입니다. 
따라서 선악에 대한 기준이 뚜렷해야 합니다. 
만인이 납득할 수 있어야 그 만인이 심판 대상이 됩니다. 
고로 "회개하라"는 것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는 이 명령이 없었고 지금은 있다는 것은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뜻이고 
그런즉 악을 버림이 각자 자유의지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에 일제히 경도되어 있어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태여서 모두가 다 죄인이므로
모두가 멸망 대상이라 심판의 필요성,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우리 각자의 취사선택의 의지에 달려
그렇기 때문에 심판자가 확고히 세워진 것입니다(행 17:31).
메시야 예수님은 구원자이심과 동시 심판자이십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애쓸 필요 없이
하나님 은혜로 구원이 이미 완성됐으니 믿기만 하면 되므로
선을 행함고 가능해졌고 악을 버림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전 "죄와 사망의 법" 아래 포로되었을 때처럼
불가항력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져버렸습니다.
"마지막 아담"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이룩하신 공로입니다.  

바로 이 중요 대목에 와서 마귀는 함정을 파놓은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말씀 혼잡"의 결정판입니다.
인간은 원천적으로 의와 선을 행할 능력이 없으므로
(그렇다면 성경은 왜 우리 구원을 "새" "창조"라 하는지,
하나님의 창조는 이전 것을 완전히 폐기하고 새롭게 함인데 
옛 창조의 흔적, 자국, 바탕이 그대로라면 "창조"란 말 불가)
아예 선행 요구를 포기하시고 예수님 죽으심으로써 대체하셨다,
(그렇다면 오직 믿음을 강조한 바울이 왜 "참고 선을 행함"을
말하고 여기에 믿음이란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인지 등등)
이런 가당치도 않은 억지 논리를 펴고 지금까지 아무 이의 없이 
수용해 왔다는 것이야말로 사탄의 이 세상 지배를 확증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내어버려두심"을 세 번이나 강조하니(롬 1:24,26,28)
"나를 부인하는 자는 나도 그를 버린다" 하심과 같은 맥락이라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의 가감없는 실상입니다.

선을 행함과 악을 행함의 양자 택일은 산 자에게만 해당이지
죽은 자는 아무 의미도 쓸모도 없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
고로 구원은 선악간의 자의적, 임의적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본 바탕을 깔아주는 데 있습니다.
이 기본 바탕 위에서 천사들은 거룩한 천사로 남기도 하고 
악령으로 타락 스스로를 파멸시켜 불행한 사태로도 나아갔고
이 기본 바탕 위에서 아담은 순종을 버리고 불순종을 택하여 
전체 인류를 비운에 빠뜨리는 장본인도 된 것입니다. 

이 "기본 바탕"이라는 말은 각자의 운명 각자 정하기라 그렇지
실질적으로는 바로 영생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 이지적 존재들은 다 영생하는 자로 창조하셨다는 
바로 그 뜻이니 영생하지 못하는 자들을 만드실 이유가
만고에 없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자로 만들어주셨더니 스스로
범죄하여 이웃에게까지 해를 입히는 암적 존재가 되므로
암덩어리를 도려내듯 멸망으로 완전 격리시켰다고 해야 
앞뒤가 맞는 말이 되고 이치에 합당한 것입니다. 

과연 영물/靈物들 중 악령들이 드러나 영원 멸망에 처해졌고
거룩한 천사들은 그대로 남았으니 더 손볼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와 같이 영생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범죄하지만 않았다면 지금까지 건재할 터이고
영생하는 자로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니 애당초
영생하는 자로서의 "하나님 형상과 모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간단한 이치로서 헷갈릴 것도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 "구원"을 확대해석시켜 마치 
천국 가는 프리패스(free pass)처럼 오인하게 만든 것입니다. 
"메시야 예수님의 죽으심을 담보로 하는 무비자 천국 입국".
그것이 담보라면 아담도 이를 기화로 다시 살아나 지금이라도
우리 곁으로 와 아담 노릇하여 마귀를 쫓아내면 끝날 일이고
마귀를 비롯 악령들까지도 메시야께서는 하나님이시니까
그 죽으심을 담보로 멸망의 운명을 벗어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는 천사들(범죄한 영물 즉 악령들)을
붙들어주려 하심이 아니라"(히 2:16)고 단언을 했습니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고 
그 이상으로는 달리 생각할 아무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은 "회개하라"입니다. 
"믿고 구원받으라(또는, 영생하라)"가 아닙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이제 다시는 악을 범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 "참고 선을 행하라"(롬 2:7)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히 12:14).
거룩함을 알고 있기에 "거룩하라"(벧전 1:16)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어떤 "성결(거룩함)"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은 "따로 떼어놓은 것" 즉 내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행위로 나타나니 곧 "선을 행함"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죽지 않도록 하라" 명령하실 때, 
아담이 죽음을 모른다면 그 경고가 실효가 없음과 같습니다.
동물들이 죽는 것을 보고 아담은 자기도 그런 몸이 되어
죽는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기에 그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가령 죽는 것이 "영적으로 죽음"을 의미한다면
아담이 그것을 이해할 리 만무합니다. 
"영적으로 죽은' 선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악령이 영적으로 죽었다고 그 징후를 알/볼 수 있나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 13:5)
이 역시 내 안에 계신 줄 내 스스로 아는 방법을 모른다면 
"시험하고 확증하는" 작업이 불가합니다. 
그 방법이야 명약관화이니, 내가 주님을 위해 살고 있음이
확실하다면(고후 5:15/롬 14:7-9) 확증이고 그렇지 못하면 아닙니다.
순종이 선을 행함이요 그 반대가 불순종으로서 악행입니다.
"선행"은 사랑의 "계명" 준수를 말합니다(롬 13:8,10/요 13:34)
남을 사랑하는데 그것이 선을 행함이지 악을 행함인가요? 

구원은 나라는 인격과 예수님의 인격과의 "사귐"(요일 1:3,6,7)이라
사랑은 해본 사람이 안다고 말하듯이
주님과의 인격 대 인격의 사귐이 있는 사람이라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시므로(요일 2:20,27) 
마리아를 그런 식으로 중시하는 것을 보는 즉시 
본성적으로 그 거짓됨을 간파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성령으로 계시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므로 "성령"이시라 합니다.
고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또한 성령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독생자 하나님께서 형상/형체이시므로
성령이시라면 예수님을 가리킨다고 일단 정해 둔 것입니다.

교회당 건물을 하나님 성전이라고 믿어도 
자기 마음에 성령을 모시지(고후 1:22)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인 줄 아는 사람은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성령으로부터 그렇게 배워 알기 때문입니다(요일 2;20,27).

적그리스도는 초능력 과시만 아니라 
예수님만 제외하고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성현군자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은 상식 차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선과 악의 개념을 분명히 할 것을 성경은 요구합니다.
사람들의 기준과 하나님의 표준이 다릅니다. 
세상에서 아는 대로의 선한 말, 선한 행동한다고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름(순종)이 선과 의, 
그렇지 않은 일체가 죄악, 거짓, 위선입니다.

이미 사탄은 살인자로서 낙인 찍혔으므로 호칭이 "악한 자",
따라서 일체의 겉모양 좋은 "선"은 위선입니다.
고로 이 성경적 사실을 지금 이 시간 확신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어정쩡하게 내버려두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반드시 때가 오는데 그 때 다 휩쓸려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 에덴의 초자연계 속성을 의심 없이 확신하고, 
용이 에덴의 그 "옛 뱀"(계 12:9)임을 확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외에는 선한 자가 없다"
하신 것은 모든 인간이 다 죄인임을 말씀하심입니다.
주님은 사람이시나 동시에 하나님이신즉 제외되십니다.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심은 그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 리가 없는 까닭입니다. 짝의 법칙에서
예수님을 사람으로 보면 사람이시고
하나님으로 보면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예수님은 선하십니다.
그러나 청년은 사람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짝의 법칙대로 사람(아담)이 되셨으니까
짝의 원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릇 인간은 죽은 자로서
죄인이며 죽을 죄인인 줄 알아야 청년이 구한 영생에
해당되기 때문에 구원의 방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인됨을 더 구체적으로 짚어주셔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네 모든 소유를 버려라"(눅 14:33) 하심은
본디의 생명의 법칙(사는 법)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을 위하는 나의 것이란 것이 없고
모든 사람의 것이 바로 나의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나 자신의 것을 인정하는 순간 모두의 것이 내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순간 그 "내 것"은 빼앗길 수 있고
도둑맞을 수 있고 유사시 물거품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내 것을 탐내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손대면 즉각 혼내주어야 하고 그러자면 악감정으로
사람들은 너나없이 원수 사이가 되고 으르렁거립니다. 
전쟁이 나고 엎치락뒤치락 야단지랄발광이 납니다.
욕설이 아니고 행티를 정확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3운법칙 때문에 겨우 유지되고 있지 아니하다면
가인 아벨 꼴이 나서 벌써 오래 전에 세상은 끝났습니다. 

영원히 여럿이 행복하게 살려면 자기 모든 소유 버리고 
필요한 사람에게 주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의 것이 내게로 다시 돌아오되
백배가 되어 돌아옵니다(막 10:30).  
뒤늦게나마 사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냥 멋대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도록 하실 리 없습니다.
사는 법칙을 정하셨는데 하나님 친히 그 법이십니다.
말씀대로만 따르면 그 이상 가는 이상향이 없습니다. 
시건방지게 구는 자로서 사탄(용/) 등이 생겨났고
아담까지 거기 물들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절대로 열어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삶의 법대로 사는 것이 선을 행함, 의를 행함이고
그렇지 못한 경우가 죄, 악, 불법, 불의입니다. 
이제 다시 "마지막 아담"께서 법이 되어주셨으니(고전 9:21) 
법질서 확립을 위해 확실하게 충성하고 함께 노력하는 자만이
범죄 전 아담이 누렸던 원상태로 회복, 환원되며
나머지는 가차 없이 탈락됩니다. 


이 세상은 이를 가름하기 위해 잠깐 부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