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31일 토요일

깨어 기도하라(막 13:33) 명령하셨으니 불복종은 죄요 죄는 그 어떤 양상이든 뜻을 행치 않는 불복종이요(마 7:21) 불복종은 멸망의 지름길

 



"내 집은 기도하는 집"(마태 21:13)이라 하셨으니

내 몸이 성령이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일진대

당연히 이는 기도의 집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집이 아니면 강도(자아중심)의 소굴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13





2020년 10월 30일 금요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으니 영광의 "마지막 아담"의 상승군이여 앞으로 전진하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짝의 법칙에서 짝을 이룬 둘은 인과, 대소, 주종, 선후 관계다.

먼저 있는 큰 자가 머리이니까 당연히 솔선 수범하게 돼 있다.

주님께서 머리로서 본을 보여 우리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어 

사랑의 '둘의 하나됨'을 구현해 우리도 자기를 따르게 하셨다. 

생명은 언약 관계이니 "나 너를 위해 살 터이니 

너 또한 나 위해 네 자신을 위하지 않겠지?" 하는 다짐으로서 

쌍방간의 합의이다. 주님과 나는 "피로 세우신 언약"

그 영원한, 거룩한 언약 관계다. 


그래서 "주님"이라 호칭함이니

나를 소유하신 나의 소유주 즉 나의 상전이시란 의미라 

절대적 복종만이 있을 뿐인데 이는 먼저 주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주시어 나를 섬기는 자로 계시기 때문에(눅 22:27

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함"(갈 5:13

이보다 더 이상적인 삶의 구도는 이 우주에 아예 존재하지 않으니 

아름다우신 하나님이 정하신 아름다운 삶이다. 




https://blog.naver.com/trinia







짝의 법칙(3위1체 법칙)과 3운법칙의 예언적 역사적 배경ㅡ다니엘 예언서의 "신속한 내왕과 지식 급증" 및 "한 때, 두 때, 반 때"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역학이라면

거시세계에서는 단연 SBP(DPA) pix입니다.

왜냐면 가시 세계와 불가시적 세계의 대칭성(짝을 이룸)을

누구도 반박 못할 영상물로써 확인해버린 것이니까.

한 장의 사진은 백가지 이론을 한 방에 압도해버립니다. 

불가시적 세계를 "암흑 물질"이니 또는 심지어 "기/氣"라고까지

갖가지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만 이 영상물로써 

모든 의문은 일거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최후 확정적인 증거입니다.

초자연적(불가시적) 존재가 확인됐으니 초자연계는 건재하는 것.

이로써 성경에서 확인하는 대로 짝의 법칙은 난공불락의 진리입니다.


 

"이 모든 것을 자세히 미루어 살펴

차례대로 밝히는 것이 좋은 줄로 아는 것은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아시게 하려 함입니다"(눅 1:3,4)




 

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성경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예고했던 양자역학(미시세계에서의 짝의 법칙의 작용, 거시세계에서는 음양론, 상보성 원리 등으로 그 윤곽이 알려져 있으니까)

 



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이해한다>고 말하기보다 <특정 현상을 발견 혹은 정리해 놓은 것을 알고 있다> 정도로 말해야 옳다". 양자역학의 선구자 닐스 보어도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양자역학을 연구하면서도) 충격 받지 않은(머리가 혼란스럽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다”라는 의미로 말을 했고,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며 양자전기역학의 재규격화 이론을 완성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1965년)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 "지금까지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이 파인만이 "현대 물리학의 유용한 지식 중 겔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극찬한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1929-2019)은 ‘소립자’의 세계를 완벽하게 정리해서 ‘20세기의 멘델레예프’라는 명성과 함께 40살의 젊은 나이에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누린 천재 물리학자인데,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의 차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라 하겠고, 양자역학을 모르면 금붕어와 진배없다"란 말을 했으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분야에서 현실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양자역학을 알아두면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학도는 거의가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왜 "양자역학을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파인만)는 것일까. 

 

이유는 예로부터 한중일 동양 3국에서 음양 이원론을 발전시켜 왔지만 그 뿌리를 이 우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법칙으로는 이제껏 인식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 근저가 되는 짝의 법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미 선언해두고 있는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의 미시세계에서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이 음양론에서, "상반된 성질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데 왜 하나인가 하는 핵심을 구명하지 못한 데에서 그와 같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들어가고 또 들어가면 마지막엔 결국 +,-전기 현상밖에 남는 게 없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으로서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까닭이다.

 

불교에서는 이 양자역학을 두고 자기네 교리의 연기론(緣起論)과 닮았다 하여 "싯달다("부처")"의 "깨달음"이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것이라고 의기양양해 하나 그런 주장의 치명적인 결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인과론이라 하지마는 인과 관계는 짝의 법칙에서 말하는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로서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현상은 독립 ·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것을 "연기"라고 그들은 말하는데 "현상적 사물이 모두 인(因: 직접원인)과 연(緣: 간접원인)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이라 하는데 그런 <인>과 <연>이 진실이라면 그것 역시 일종의 결과일 뿐이요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 최종, 최후 원인, 제1원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상(事象)은 항상 서로 관계되어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적ㆍ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공(空) 사상"이라고 그들은 말하지만, 그렇게 "모두 서로 연계되어 성립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결과일 뿐, 그것이 원인일 수는 없고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을 무슨 명칭으로 부르든 좋다. 그 원인을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바로 "불변적, 고정적 실체"이고 따라서 그 결과도 역시 그러하다.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리 되면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빌려, "지금까지 인과론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가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는 것뿐이다. 진리와 진실에는 영구히 이르지 못한다. 불교의 연기론과 관련해 양자역학 운운하는 것은 아전인수(억지로 자기/己에게 이롭도록 꾀함)격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불교인들이 "불변적, 고정적 실체"라고 강조하듯이 말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킴이다. 인과론을 말하면서 최초 원인인 창조를 부정하는 것은 초등생이라도 알아채릴 수 있는 크나큰 모순이 아닌가. 


상반된 성질로서 서로 대립되어(상대성) 있으면 이것을 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모자 관계 즉 하나는 파생하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질이 다르면서도 하나될 수 있는 터이다. 본시 하나에서 둘로 갈라져 나온 것이니까. 양자역학은, 짝의 법칙이 만유의 법칙임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만 풀어질 수 있는 "현상"임을 알아야. 20세기에 들어 짝의 법칙이 정립되면서(음양론이 역사는 오래되지만 그것을 법칙 측면에서 고찰된 예가 없고 단지 설/說로만 취급되어 왔으므로) 역시 같은 시기에 양자역학이 등장한 것은 때에 맞춘 것이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성경은 이를 다니엘 예언서를 통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로써 예고했던 것이다.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짝의 법칙의 구조 도식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고 또한 짝의 법칙을 모법으로 하는 대표적인 그 자법인 3운법칙이 절묘하게 그림 그리듯그 자체의 구조로써 나타내고 있음으로써 이 사실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짝을 이룬 둘이 본질은 같으나(이 '같음'을 "한 때, 두 때, 반 때"에서는 하나 곧 1로서 나타내고 3운법칙에서는 FS형의 단축형인 JP로써 그려냄) 성질은 정반대인 것을 "한 때, 두 때, 반 때"에서는 "1X2"와 "1X2"로써 묘사하고, 3운법칙에서는 "19"라는 뚱딴지같은 숫자로 표시함이니 곧 "3X19=57", "19X3=57"로서 19와 3을 엇바꿈으로써 절묘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짝의 법칙 구조(構造)(圖式)에서 본질이 같아 하나가 되어 있음을 로, 성질이 정반대임을 ◐, ◑로 나타냄과 용하게 맞아떨어진다고 하겠다. 어린애 장난같은 유치한 설명이라 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이같이 정하심은 자연계 육체의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자 하심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하고자 하심이며  구원의 대상자로는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자연계 속성)를 따라 지혜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출신 성분이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전 1:26) 함과 같이 이런 계층에는 어린 애 정도의 무식자가 대부분이고 실제 어린 아이들도 구원의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유식한 자의 편을 들어주실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전에 게시했던 것입니다)






(이전에 게시했던 것입니다)




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아담 범죄 후 자연계 육체가 되어버린 인생들의 엄청난 비극적 참상을 항상 의식해야

 



아담 범죄 후 자연계 육체로의 전락에 의한 돌발 사태로 비극적인 것은,

초자연계 속성의 것은 일절 오감으로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니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다는 등으로 해서 그 존재마저 부정하게 된다는 것.

당장 눈에 보이고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이 전부인 양 착각에 빠져.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능력을 대하면서도 그런 고질(痼疾),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능력을 접하는 그 한 때만 끝나면 여전히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마음에 두고 차분히 생각할 줄 모르고 거짓과 속임수에 그냥 넘어가.

마리아가 믿음이 좋다는 것은 보고 들은 것을 "마음에 두었다"(눅 2:51)는데 있어.

지금이라도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초능력을 나타내면 불문곡직하고 엎드려 경배.

눈 앞에 드러나는 가시적(可視的) 초능력에 압복(壓服/壓伏)되어 몸둘 바를 모르니까ㅡ. 

그러므로 "생각하는"(히 3:1/시 64:9/77:12) 자, 마음에 두는 자가 복이 있다 할 것이다. 


악인들은 육감(肉感)적이고 충동적이고 즉흥(卽興)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적그리스도의 "천지가 진동할 만한 초능력"에 무조건 빨려들 것이다.

아무쪼록 "기록된 말씀 외에 넘어가지 않는"(고전 4:6) 지혜가 긴요하다. 

바로 이를 위하여 3운법칙, 짝의 법칙, DPS(SBP) pix 등을 나타내신 것이다. 


아담 범죄 후 자연계 존재가 된 처참함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계 12:9)

악마 사탄이 "온 천하를 속이는" 실상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창조주 하나님도 모르고 내세도 모른다. 주님 말씀대로(행 26:18)

완전한 무식무지의 어두움, 완전히 악마에게 매여 있어 옴쭉달싹도 못한다.

마귀가 끌고 가는 대로 맥없이 끌려가는 것뿐이다(고전 12:2).

사탄이 무신론을 모두가 무신론이 똑똑한 지식인의 표징이나 되는 것처럼 한다.

장차 임할 마지막 심판과 그 이후의 필설로 형용 못할 멸망의 공포에 대해서는

완전히 "나몰라"이다. 죽으면 끝이다, 하늘나라 간다, 윤회/전생(轉生)으로 돌고돈다 등

온갖 사탄의 거짓말에 놀아나 태평세월이다. 믿는다는 이들도 이 분위기에 젖는다.


들리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니까 

단지 눈에 보이는 것대로만 산다고 산다. "내 가족, 내 자손 만대, 운운" 하며ㅡ.

오늘 밤 홀연히 어느 새 죽은 자가 될 수 있음을 알고도 그런 것은 의식에 없다.

마귀의 장단에 춤 추며 놀아나고 있을 뿐이다.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세상(전 9:3).

"기독교인"들도 매마찬가지다. 사탄이 퍼먹이는 세상 독주에 취해 인사불성이다.  










2020년 10월 27일 화요일

이세상은 사탄의 소유ㅡ사탄의 것을 사랑함은 사탄과 한 패거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화를 자초

 







시험자가 나타나 다짜고짜로 붙들어서는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은 내게 넘겨진 것이므로 내가 얼마든지 너에게 줄 수 있다 

이런 말을 할 때는 악한 자가 어떻게 되어 그러한 것을 차지할 수 있었던가 하고

생각이라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사람의 아들이신즉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6일" 창조를 하셨고 지금도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만유를 유지 보전하고 계시나 지금은 우리 위해 사람이시므로)

초능력 보유자인 사탄이 자연계 육신의 우리 주님 "마지막 아담"을 맘대로 할 수

있어 마태는 지극히 높은 산에 올랐다고 했으나 의사인 누가는 그냥 "올랐다"고

마무리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고 사탄의 이 말에는 위협이 스며 있음이니

이세상의 지배자인 나를 따르지 않으면 모진 고초와 죽음(파멸)뿐이란 협박인즉

하나님 형상과 모양인 인간에 대한 이런 지배력을 어떻게 해서 획득했느냐 하는

의문 정도는 최소한 있어야 성경을 읽는 이로서 마땅한 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문을 가질 때  그 해답이 될 만한 직접적 단서가 창세기나 다른 데에 는 

것이 아니니 창세기에 이미 동물들은 다 창조돼 있는데도 "각종 짐승"들을 아담

위해 지으셨다 했으니(창 2:19) 특수한 동물, 또 에덴도 특수한 성격인 것입니다.

헌데 그 에덴동산 중앙의 나무가 먹으면 영생하고 선악을 아는 등 조화를 부리니

그 곳의 식물과 동물이 다 이 자연계 생물이 아닌 초자연계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자연계 육체인 우리 주님은  바로 범죄한 직후의 아담의 모습을 드러내심이었고

이제 범죄한 "아담"으로서의 죄의 대가를 치러 사형 당하신 후에는  부활하시어

범죄 전 아담의 초자연계 몸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증명해 보이신 것이고 그 후는

범죄 전 아담의 모든 영광과 위의를 회복하시어 사탄 이하 모든 영물 위에 군림,

지금까지 그 불변의 위치에 계시는 것임을 아는 것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며

세상에 다시 오시자마자 사탄 이하 그 모든 종자들을 즉결처분해 버리시게 되고

첫 사람 아담이 이루지 못했던 그 고유의 지배권을 "마지막 아담"께서 행사하셔

천년간 통치하시는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짜맞추어져 이루어갑니다.


지금 하늘에만 계시는 것은 그 몸된 교회가 남은 자들 구원 위한 "남으신 고난"을

채워야 하므로 머리께서 약하심으로 그 구속 사업 마치신 것처럼 약해야 고난을

받음이 가능해져 몸으로서의 교회 과업이 완수되므로  일부러 이러는 것입니다.  

조금도 허술한 데 없이  하나님 예정표의 시침, 분침 시계는  정확히 돌아갑니다.


다만 사탄이 노리는 것은  구원 받는 자의 일종의 "정족수(定足數)" 미달을 목표해

일정한 수효가 채워지지 않으면 현재의 상태가 무한대로 지속될 가능성도 있어

그렇게 되면 시간이 벌어지므로 그동안이라도 무슨 묘수가 생기지 않으랴 하는

기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마지막 때" 차질없이 진행됨을  선포하신

것인데, 이는 절대 강제로 구원 얻는 자의 숫자를 채우시는 것이 아니고 순수히

자기 자유 의지로 하나님 사랑함을  "미리 보시고 아신다"는 것(이는 오직  성부 

하나님만 가능하심-막 13:32)인데 모든 영물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있는 바로서 

피조물에게서 무엇을 감추거나 숨기고서 하시는 일이 없이  공명정대하십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광야 시험은 우리의 대표로서 즉 "마지막 아담"으로서 받으신

것이니  이는 다시 말해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이요  그 시험의 성격을 보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절하라(경배하라)" 함은 유인책이자 위협이요 실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딤후 3:12)만 있습니다. 

   

2020년 10월 26일 월요일

지금은 바야흐로 적그리스도가 출현하는 때로서 이전 자세는 용납이 되지 않는 때("동심하든 두려워하든"ㅡ살후 2:2)

 






사탄의 이 세상 사랑과 관련된 시험은

특별히 부귀영화를 탐하는 자들에게 한정된 시험이 아닙니다. 

세상 삶을 즐기고자 하는 즉 세상을 삶의 무대로 착각하는

모든 사람을 상대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이에 해당됩니다.

세상 삶에 관심을 두니까 원수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세상 삶에 관심이 없으니까 주 예수님처럼 스데반처럼 기도하기를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눅 23:34/행 7:60)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삶에 관심 없고 영혼들 구원에 관심을 두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망가뜨린 원수로 생각치 않고 영원 멸망에서 아우성치는

저들의 영혼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진리를 알면

얼마든지 새 사람, 새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세상 삶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전 7장에서

"동정(남녀 불문 동정(童貞)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처녀"는 오역/誤譯)애

관해서는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5,26) 했습니다.

"아내(/남편)에게서 놓였으면 아내(/남편)를 구하지 말라"(:27),

"아내(/남편) 있는 자들은 없는 것같이 하며"(:29)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기쁜 자는 기뻐하지 않는 것같이,

물건을 매입하는 이들은 그 물건이 없는 것같이,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함같이 하라"(:29,30) 했으니,

바울이 시대를 잘못 짚은 것도 아니고 이 세상 자체가 그러합니다.

오늘날만 핍박(적그리스도가 가할)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가  죽임 당하던 때부터 오늘날까지

사탄이 장악한 이세상 기류/氣流 는 변한 적이 없습니다. 

사탄에게 무던히도 속아 왔습니다. 이제는 때가 찼고 다릅니다.

성경상의 무지무식은 더 이상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 18:4)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살려면 부귀영화 가운데 살아야 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일부만이 향유하고 나머지는 빈한한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창조 당시부터 뜻하신 바가 아닙니다. 

악령이든 거룩한 천사든 영물들은 그런 차별이 없습이다.

원래 창조된 그대로 이상적 삶의 체제로서의 초자연계 몸이기 때문. 

자연계 육체인 짐승들마저도 그런 구별이 없습니다. 

오직 비정상적 자연계 육체(원래는 초자연계 몸이었던)의 인간만이

이런 불합리 속에서 갖가지 인간고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 마귀에게 꺼둘릴 대로 꺼둘리고 휘둘릴 대로 휘둘렸습니다.

철벽같이 깜깜한 무지 속에서 천지를 모르고 지내 온 것입니다. 

이제는 "천사가 가진 복음"(:14:6,7)이 전파되는 때가 당도했습니다. 




 

역설 아닌 역설의 무궁무진한 진미/眞味ㅡ"약한 것이 강한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고 자기를 0% 위함이 100% 위함이고"

 







나는 아무도 눈여겨 보아주지 않는 냄새나는 밑거름(퇴비)

얼마든지 짓밟히고 분뇨처럼 여겨지고(사실상 분뇨이니까)

맨구석에 항상 처박혀 겉돌기만 하는 존재이지만

오직 농부이신 주님께는 귀하디 귀한 존재임을 자랑하노라

"내 자랑을 두고 담대히 말하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농작물 수확(새 생명 창조)에 필요불가결한 것이 비료이니까.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는 극한 영광이니까ㅡ


  



2020년 10월 24일 토요일

세상 삶을 미워하는 것은 세상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구원하고자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공을 죄로 얽어맨 정유년 왜장 가등청정(加藤清正, 카토오 교마사)건도

왜군이 함정을 파놓고 우리 수군이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음인데

적군의 전략을 알 리 없는 조정은 호기로만 알고 출동 명령만 내리나

이공이 선뜻 이에 응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란 중에는 장수의 재량에 맡겨야 하는데 민간인들이 권세만 부리고

앉아서는 명령 불복종죄로 다스리려고 한 것입니다.

무식했다기보다 이를 이공 제거의 절호의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인식도 없는 자들이 "이공이 원균과 전공을 다투었다" 하지만

원균은 애당초 자기 병력 모두 없애버리고(적에게 넘어간다고 해서)

단지 자기 한 몸 실어 피신시킬 배 하나만 끌고 나온 터라

전투도 제대로 치를 생각조차 없었고 오직 자기가 탄 그 한 척 병선은

이공이 격파한 왜선들에서 떨어져 나간 적병들의 머리만 베는데 활용,

"내가 이렇게 싸워 이만큼 전과를 거두었다"는 허위 보고 작성에만 

번번이 열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군사도 배도 없으니 하는 짓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음은 당연합니다. 

이공은 이러한 원균의 행위를 그 난중일기에서 한탄하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악마의 세상이라 이기주의만이 세력을 피우는 때라 마귀가(눅 4:7)

"내게 절하면 이 부귀영화가 다 네것이다" 한 것이 허언이 아닙니다.


사람의 양심은 작동되기에 "정의, 정의"를 외치지만

그것도 악인들에게 악용 당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니

이런 세상을 사랑하여 살고자 하는 자들은 한 통속이라는 단죄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주님은 엄중히 경고를 내리신 것입니다(요 12:25).




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죄와 그 파멸의 속성과 의와 선의 생명에 이르는 특성을 알려면 임진란의 이순신, 원균의 행적이 그 교과서다

 





사람들은 "나 하나쯤 그런다고 해서"의 타성에 젖어 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당치도 않은 과소평가입니다.

나 하나쯤 달라진다고 해서 국가, 사회가 달라지겠느냐 

또는 나 하나쯤 잘못되었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겠느냐 어쩌겠느냐ㅡ.


"나 하나만이라도!"야말로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고귀함입니다.

이공 순신 한 사람이 홀로 나라를 지탱했음은 청사에 빛납니다.

그가 들어 원균 한 사람 때문에 박살이 나는 국가 운명을 건졌고

그 틈에 의병들이 처처에서 일어날 수 있었고 권율의 관군도 그러했고

명나라 군대도 왜의 칩입을 겨우 면하자 원병이랍시고 설친 것입니다.

이공이 있었기에 한반도만 아니라 중원 천지를 전화에서 막았습니다.


바다의 길목을 지켰다는 특수 환경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람'입니다.

나라 관문의 수문장이었다는 위치가 원균으로 하여금 

한반도 전체를 말아먹을 뻔했던 경우와 대조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공의 의/義로움은 <한 몸>으로서의 국가 유기체에서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역할 수행에 충성으로 임했다는데 있습니다.

반면 원균의 경우 사사로운 승패 여부에만 매달린 이기적 판단에서

승산 없는 전투는 일찌감치 포기함이 좋다는 막된 생각의 화신(化身)이라

때문에 그 많은 병선(兵船)을 다 자침 (自沈)시키고 병력을 자진 해산시키고

몸만 빼어 뭍으로 오르다가 이공의 승전 소식에 도주를 멈춘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그런 이기주의는 득커녕 해만 끼쳐 이공을 축출

자기가 그 자리에 대신 들어앉아 필경에는 조선수군이 전멸됩니다.


한 몸에서의 각 지체 각 부분으로서의 충실한 역할 수행이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의와 선입니다. 어느 지체도 자기를 위하지 않아

이것을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자기 위함이 자아중심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도 이기적인 욕심을 비난합니다. 

그 폐해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아중심이 미증유의 전란에서

그 본색을 드러내고 또한 자기 역할 충실이 그 진가를 발휘하되

그 가시적 교훈이 너무나 또렷하기에 원균, 이순신을 논함뿐입니다.


죄는 한 마디로 이런 사사로운 자기 의식, 의/선은 공공(公共) 의식이니

죄는 자타 공멸의 지름길이고 의와 선은 그 반대라 건설적입니다.

죄 그리고 의와 선 모두 그 결말이 뻔하여 이해함에 혼동이 없습니다.

고로 이런 자아중심(모든 죄과의 뿌리)을 "회개하라"(행 17:30)

명령하심이요 이는 너무나 당연하고도 당연한 분부이십니다. 

죄란 것은 나 하나의 파멸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전체 파멸입니다.

암세포는 그 자체로만 끝남이 아니고 전이를 통해 전체 파괴입니다.


그 한 편 드라마의 영상(映像)을 임진란의 이공과 원균을 통해 

본다는 것은 후세의 우리로서는 크나큰 축복입니다.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이만한 충실한 내용의 시청각 교육이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경의 교훈이 이에서 더 지나지 않습니다. 

마귀는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겨 옴으로써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왔고

아담 한 사람의 암적인 죄로 전체 인류가 암환자가 되어 옴을 감추고

죄는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안지을 수 없고 때문에 그런 죄 가운데서도

용서받고 영생에 이른다는 가당치도 않은 거짓의 허무맹랑한 교리를

만들어 퍼뜨려 거의 모든 교회를 파멸로 몰아부친 것입니다. 

 


2020년 10월 20일 화요일

이 세상 삶을 사랑함은 하나님께서 버리신 것을 도로 거두어들이는 배반 행위이니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움밖에는 더 되지 않아

 

하나님께서 세상을 즉 세상의 인생들은 사랑하시어(요 3;16)  위하여 사람되심으로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하셨으나  지금도 그 은혜와 사랑은 불변이시나 이 세상 삶의 

구조는 아담 범죄로 버리심을 받아  오늘날도 역시 불변이시라는  성경적인 근거를  

설명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살인자인 악령(요 8:44)이 "이 세상 신"

(고후 4:4)이 되어 있는 것도  하나님이 이세상을 버리셨기 때문이라는 증거입니다.

범죄가 악마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인간들의 세상에서 왕 노릇한다는

(요 14:30) 것은 어불성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인생들이 모두 죄인되어 버리심

받았기 때문에, 그보다도 아담 자신이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믿어 

그 앞에서 스스로 무릎 꿇어 자기의 상전/上典으로 모신 격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 모든 세상 부귀영화가 내게 <넘겨진> 것"(눅 4:6)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것이고

이는 사실 그대로입니다. 버리셨기 때문에 또한 악마가 자기 왕국으로 지금껏 유지

해온 것입니다. 이미 저주 받은 세상이고(창 3:17)  세상 죄인들을 대하여 하나님은 

날마다 분노하십니다(시 7:11). 고로 이 세상의 한 가지 유일의 의미는  우리 위하여 

사람되시고 사형수의 죽음을 당하신 은혜를 입어  성령(아담의 육신과 대칭/對稱의

위치에 계신)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는 것뿐입니다. 이 이상으로 나간다면

범죄가 구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버리신 세상 삶을 말씀 무시하고서(아담처럼) 사랑

한다는 것은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회개"(행

17:30)에는  이 세상 삶을 사랑하는 범죄도 함께 포함됨을  마땅히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이세상은 아담에게 선악과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020년 10월 17일 토요일

모든 인류의 삶이 가시적으로 요리/料理되는 장관/壯觀을 우리는 구경한 적이 없는데 인류 역사가 뚜껑을 연 이후로 오늘날 최초로 3운법칙을 통해 목도하고 있으니 때는 비상 시국이다

 







21세기 복음 전파의 최고 정상

웅장한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준봉(峻峯)이

다름아닌 3운법칙이다. 인간 생애를 주장, 주관하는 법칙.

창조주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누가 이런 작업이 가능하랴.

모든 인간 생애를 단 3가지 규격에 맞추어 마름질하는 

그 누가 있으리요,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외에. 

느닷없이 이 21세기,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 바로 직전에

이런 깜짝 선물을 내리신 이유는 하나님 말씀의 올바른 해석,

오늘날까지 마귀가 온갖 먼지를 날려 덮어씌워 

그 형체마저 분간 못하게 해놓은 청명한 말씀의 거울(鏡, mirror)을

본연의 찬란한 모습 그대로 깨끗이 씻어 나타내시기 위함이다. 


3운법칙과 더불어 당연히 함께 나타나게 된 것이 3위1체의 법칙

곧 짝의 법칙으로서 이야말로 성경을 제대로 풀어 나가는 열쇠이다.

보라! 에베레스트의 웅장한 봉우리를 보라! 오직 하나뿐으로서

그 누구든 잘못 볼 이유가 없으니 보고 깨달으라, 하나님 말씀을.

짝의 법칙에 의해 현세가 있으니 내세가 있고

현세가 불완전하고 시한부인즉 내세는 그 짝으로서 영원, 완결이다.

메시야의 유일한 성격은 죽은 아담 대신의 "마지막 아담"되심에 있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으로서만 이해하는 것이 오직 지름길이다.

여기에 모든 성경의 내용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짝의 법칙으로써가 아니면 어떤 일도 하시지 않는 까닭이다.

"마지막 아담"은 대칭/對稱 아담 즉 "아담과 짝"이라는 성경적 표현이다.

"본질은 같되 성질은 정반대로서의 둘의 하나됨"이 짝의 개념이다. 

곧 만유의 법칙이니 누구도 범접 못할 위엄과 위세이다. 

저 세계의 최고 정상 에베레스트가 오늘날 상징하는 바라고 여겨

하자가 없다. 논란의 여지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 친히 주신 것이니까. 


이 "에베레스트"를 손으로 가리켜라.

그러면 끝나는 일이다. 

일찍이 인류에게 이런 웅장한 선물을 주신 일이 없다. 곧 3운법칙.

모든 인류를 한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실체가 이제 나타난 것이다.

3운법칙과 상호 검증되는 3위1체의 법칙이니 짝의 법칙(Pairs' Principle).

이들 법칙으로써 모든 산과 들과 바다로 비유되는 만민을 정복하라.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으로써 정복하라. "마지막 때" 천사의 복음(계 14:6).

20세기 이후를 겨냥한 다니엘서 12:4와 함께 이 때를 가리켜 천사가 말한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를 맞받아친 요한의 계시록(12:14).

바로 이 때이다. 그래서 우뚝 솟은 에베레스트에 비유한 것이다. 


질풍노도와 같이 내달려라, 메시야 예수님의 군병들이여.

바울 사도는 믿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곧잘 비유했다.

사탄을 위시한 모든 악령들과의 전쟁, 아담 때부터의 치열한 전투다. 

무적의 군대이므로 오직 지금은 "약함"으로써만 승리의 종결이다(고후 12:9).

 고난, 고통을 자청, 자원하는 여기에 우리의 개선문이 놓여 있는 것이다.

"마지막 때" 누구든지 이 문을 통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기도의 군대. 말씀의 군대. 

"약함"을 "강함"으로 전환시키는 역전/逆轉의 군대이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