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6일 금요일

우리의 자랑은 세상과는 180도 거꾸로임을 아는 자 진실로 복이 있다ㅡ모든 가치관에서 그러하다 거꾸로 해서 생긴 세상인즉 이런 세상은 당연히 단명/短命하다

 




길을 두고 뫼로 가랴.

대개 일이란 것은 장소와 때를 가려서 한다.

지금은 사람 사는 때도 아니고 이세상은 사람 사는 데도 아니다.

이세상은 자연계 물질이 위주이므로 소유가 많으면 풍족한 삶,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소유욕을 드러내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다름아닌 세상 사랑, 이세상 살고파 하는 마음의 발로이다.

소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니 우리는 만유를 상속 받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만유가 내 것, 우리 것이다. 

"우리"일 수밖에 없는 것이 너는 나를, 나는 너를 위하기 때문.

너와 내가 하나되어 우리를 이루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사람 살 수 없는 곳에서 왜 "소유"를 찾는단 말인가. 

그리고 사형장으로 나가는 사형수에게 무슨 삶이 있나?

그런 사람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번민, 고뇌다.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으니까 고통만 가중되기 때문.

또 삶이란 것은 머리와 몸 하나됨인 고로

한 지체가 고통이면 모든 다른 지체 역시 덩달아 고통이니

이는 하나됨에서 오는 당연 결과다. 

그런즉 지금은 한 몸을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에서

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 죄(사형) 중에 있어

사형수의 위치에 있은즉 나 역시 한 몸 이치 따라(고전 12:26)  

사형수로서의 동일한 사형장에 위치하는 고로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를 진 나를 따르라" 하심이다.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하심은 "나와 무관하다" 하심이니

"마지막 아담"을 떠나면 죽은 아담과의 관계뿐이다. 

고로 이 사실을 부정하면 여타 모든 것도 부정하는 것이다.

고로 구원(영생)과는 연/緣이 없다는 결론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 이 모든 작업의 종결이므로

그 때 비로소 생명의 환희를 맛보기 시작하여 세세무궁토록

다함이 없는 것이니 그래서 골로새 3장 1-4절이다. 

주님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의 양면성이셨던 것처럼

나 역시 주님 안에서 그러하니 하나는 주님과 함께 앉아 있고(엡 2:6)

다른 하나는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사형틀(십자가)을 메고 가니

전자로 보아서는 기쁨과 평안과 자신만만함이 넘쳐나고

(살전 5:16/요 14:27/15:11/17:13)

후자의 위치에서는 "눈물과 심한 통곡"(히 5:7)과 고통, 고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 오래참음을 늘 강조하는 것이다. 









사탄은 이 세상 지배자로서 합법적인(비록 불의하기는 하나)

권리를 갖고 있다. 아담도 똑같은 범죄인인데 인간만을

편드실 수 없는 것이니 형평 차원에서 인생에게 혜택을 주시면(구원)

똑같이 악령 사탄에게도 혜택을 베푸셔야 하는 것으로서

그런 혜택 중의 하나가 이세상 지배자로서의 독재 통치다. 

사탄의 이세상 지배는 아담 스스로가 사탄의 말을 더 따름으로써

사탄에게 이세상 통치권을 넘겨주었기에(눅 4:6) 합법이라 하는 것.  

이와 같은 사유로 마귀가 죽음의 권세도 행사하는 것이다(히 2:14).


고로 합법적으로 사탄은 우리가 인생들을 구원하려고 전도할 때

초주검이 되도록 핍박하고도 남는다. 바울이 그 단적인 예다.

단 항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유화책이 강경책보다 효과가 있어

다시 말해 교회를 파괴시키는 힘이 강하기에 때때로 선호하는 것.

그래서 강온 양면으로 적절히 교회를 공격함인데

멋모르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마치 사탄이 미소를 보내는 양

또는 낮잠 자는 양, 죽어 지내는 양으로 착각하니 개탄할 일이다.

핍박을 하다가 콘스탄틴 황제 때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것이 그런 예. 

사탄은 그 때부터 핍박하던 때보다 착실히 교회를 고사(枯死)시키기 시작

오늘날의 "바벨론(계시록에서 지적하고 있는)"이 창성해 왔던 것이고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종교의 힘에 의해(정치 권력에 의한 것보다)

더 악랄한 탄압을 받았으니 그간의 로마카톨릭의 행적이 증명한다. 


언제나 강조하지만 감히 하나님의 아들들을 손끝 하나라도 

건드릴 자가 없다. 천하무적인데, 필요에 의해 자진해 받는 고통이다.

사람들을 건시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다. 

즉 하나님 친히 고난 받도록 하시니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들어간다"(마 7:21)고 경고하신 것. 

아버지(양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양자는 파양되는 것밖에 없다.  

고로 천국은 군인정신으로 침입해서 빼앗아 차지하는 것(마 11:12).

"군인정신"이란 "생즉사, 사즉생", 곧 주님의 요 12:25 말씀이시다.

                             생즉사/生即死(살고자 하는 자 죽고) 사즉생/生(죽고자 하는 자 산다)

주님의 말씀은 물론 "사즉생, 생즉사"의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지만 세상 이치는 두루 통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을 곧잘 "군인"에 비유했다. 

비록 무적의 강자이나 사탄(의 악령들)과의 전쟁 양상이기 때문이다. 

이런 전쟁에서는(상대가 안되는 자들끼리의) 공평해야 하는 것이니

그 공평이란 우리 강자는 세상에서 "약자"가 되어(고후 13:4)

오직 그 신조, 신념을 죽더라도 꺾지 않는 여기에 강점, 승/勝점이 있어

때문에 "내 능력(강함)이 약한 데서 완전해진다"(12:9) 하셨고

고로 바울은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9) 외쳤으니 할 말이 무엇이랴. 

역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자랑했으니 이만하면 충분한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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