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30일 수요일

하나님의 일을 하되 자유인으로서의 기쁨으로 해야 구원 받아(주님 내 안에 계셔)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엄마는 아기의 종.

아기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니까.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사랑의 종이신 사실도 마찬가지 이치.

"나는 너희를 섬기는 자리에 있다"(눅 22:27) 하신 그래로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종이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니까.

하기 싫어 울면서도 엄마의 사랑을 본능적으로 아니까

순종하는 것이므로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는 종.

우리 역시 주님이 본을 보이신 대로 종의 역할을 

기쁨으로 수행하는 자유인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노예.

사랑이 있고 없고의 엄청난 차이입니다.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18:3)고 엄중 경고하신 이유입니다.





악령들은 나를 대할 때 그들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고 나와 함께 계시는 주님이 보이는 것이니 중국 석자직 목사의 간증이 그 증거

 


세상 사람들은 그런 안목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러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주님을 멋대로 대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임금들이요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6)

그 신분에 어울리게 언행심사를 할 일입니다










2020년 12월 28일 월요일

세계 최고 갑부의 반열에 들면서도 필요에 의해 초라하고 남루한 거지의 행색을 하고 있는 의젓하고 당당하고 느긋하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누림과 같은가, 아닌가ㅡ자기 점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니"(전 3:4)

이 때를 분별 못하고 덤벙대는 자는 화가 있다. 

웃을 때가 아닌데도 "지금 웃는 자 애통하며 울 것"(눅 6:25)이요

"지금 배부른 자 장차 영원한 굶주림"의 고통의 때 면치 못할 것.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지금 부유한 자는 다신 위로 받지 못해"(:24).

때를 가리어 순응함도 법질서 차원에서 다루어지니 각성하라. 

때를 분간 못해 이 위급한 환경에 대처 못하는 자 화가 있다.

아담 범죄로 인생들이 자연계 육체가 됨으로 인해 받는 인간고(人間苦).

이 인간고의 때, 회개하는 때, 새 생명 탄생의 산고(産苦)의 때 무시하면

세상에 사람 남(새 사람의 새 생명)으로 인한 기쁨과는(요 16:21)

영원토록 남남이 될 것이니 모름지기 사람은 때를 분별해 처신해야.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생명의 법칙.

남이 나를 위하고 내 삶이 되어 주는 것이니까

이것보다 이상향적이고 풍성하고 행복한 삶은 없는 것.

그대신 나는 나의 상대(머리이신 하나님을 비롯 몸의 지체된 이웃)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 가르치신 자기 부인.

한 몸으로 기능(機能)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는 사형수의 모습이기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사형수의 모습이니까. 


이런 불행한 나약한 자연계 육체로는 삶의 "때"가 아닌 것이다. 

오직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때"다.

그런데도 사탄의 간악한 속임수에 말려들어

살겠다고 덤벙대는 자 영원히 정상적인 삶을 맛보지 못하고

한 때 구원받아 정상으로 회복된 자도 그 생명 잃거나

빼앗기게 됨을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셨다(눅 9:15).

생명의 면류관(약 1:12/계 2:10)을 빼앗기지 않도록 (계 3:11)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고 있으라" 경고하신 것이다(:11).


자기 부인이면 즉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면(롬 11:22)

다시 말해 죽어도 살아도 하나님 영광만 위하고 주님만 위하면

나만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동시에 움직이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위(severity)만 작용하게 될 것은

항상 <상대성의 동시성>만이 작동되는 까닭이다. 

내가 주님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실(마 10:33)/딤후 2:12)

수밖에 없으니 "나(내 계명)를 존중하는 자를 나도 존중하고

(내 말)를 멸시하는 자를 나도 경멸히 여길 것"(삼상 2:30)이라

하신 그대로이니 이 모두 "상대성의 동시성", "둘의 하나됨"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일방적인 하나님 사랑, 은혜만 강조하여 속임으로

많은 영혼들을 멸망에 빠뜨려 온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영광을 위하지 않고 자기 영생만 관심 있는

모든 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허다한 무리들의 허물로 비례된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산 자(구원된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 위해 살게 하려 함"(고후 5:15)

이라고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거늘 어이하여 이 말씀은 버리고,

하나님 아들께서 나 위해 죽으심만 붙들고 편식해 왔으니

영양실조에 걸려 병들어 죽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다. 

바울 사도는 다시 강조하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다"(롬 14:7)고 명시했음에도

이를 완전 무시했으니 이렇게 무시하는 자를 사탄은 건드린다.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탓하랴, 사탄을 탓할 것 없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서 그 생명을 잃었다(빼앗겼다).

굳이 아담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영생하는 영물("천사")들이지만

범죄함으로써 영원 멸망의 악령들이 된 것이다.

우리 역시 영생의 영광의 몸으로 새로이 창조된 현시점이

범죄 즉 생명의 법을 어기고 자아중심을 선호하면 똑같다. 

그와 같이 선악을 구분해내는 지금 이 때이다. 

이 때만 지나면 다시는 그런 시험하는 때, 추려내고 갈라재고

걸러내는 기간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이 때 완전 결판 난다.

아담이 범죄했든 않았든, "마지막 심판"이 있는 이유다.

이 때가 지나면 영원히 선과 악의 세계로 양분된다. 

전자는 생명의 세계로서 극락, 희열, 평안, 행복한 삶뿐이고 

후자는 심판의 세계로서 고난, 고통의 죽음(생명과 정반대)뿐.


고로 지금은 새 창조와 함께 걸러내고 추려내는 선별 작업 병행의 때.

영물(靈物) 관련해서는 이미 끝났고 인간 세계가 그런 와중에 있는 것.

이런 과도기적 혼란(한창 공사 중 현장에는 기자재들이 쌓여 어수선)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세계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여건이 아닌데

고집스럽게 살고자 하니 마귀를 추종함 외에 달리 무슨 의미리요.

그래서도 "때"의 철학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시험의 때를 통과하는 기간이니까 그것이 범죄 전 아담이 누린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창 2:9) 환경이든 아 니든, 별 의미 없다.

범죄하여 그 생명 잃으면 그만이니까. 오직 핵심은 사랑의 충성뿐.

외려 이런 자연계 육체의 서글픈 환경은 "영원 사모"(잠 3:11)의 

동경심 유발에 긍정적 효과를 주건마는 자아중심에만 사로잡혀

남들이야 다 죽든 말든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으니 바로 이런 악인들이 자연 도태되는 것.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고전 12:26)

우리가 "십자가 지라"고 명령하신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수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란

황당한 거짓말로 지금까지 속여 온 마귀의 농간 때문이니

"영적"인 사형수, "영적"인 죄인, "영적" 사형 기구(器具), "영적" 십자가, 

"영적"인 처형 등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러나 유독 죽음만은 "영적인 죽음"이라니 

세상의 기독교인들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우리(조인) 위하신 "마지막 아담"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로서의 신체적 죽음의 증거인 것이다.


 



2020년 12월 26일 토요일

내가 사는 것, 내게 사는 것이 메시야 우리 주 예수님 "마지막 아담"이시니까(빌 1:21) 죽음 자체도 내게 <유익>(:29)ㅡ고로 환난 중에도 기뻐 뛰노는 것(눅 6:23)

 









무슨 일을 당하든지

어떤 위기에 직면하든지 

반드시 주님께 여쭙고 볼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사/책사(Counsellor)이시니(사 9:6/고전 1:30).

내게 가장 가까우신, 가까이 계시는 분이 바로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하나로 계시는 아버지 하나님).

성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이시고

성자 하나님의 본체로서 계시는 성부 하나님.


당시 오순절날 성령의 선물로 임하실 때

성령 충만하여 베드로가 지적한 은혜 충만한 사실입니다(행 2:25).

내 영혼처럼(새 창조에서의 새 사람의 영혼으로) 영원히 영원히

위치하시기 때문이니 항상 감사와 찬송의 노랫가락 끊치지 않아.

이는 그림으로 묘사하면, 아기(나)를 안고 있는 엄마(성령).


그러나 사랑과 생명의 법칙 즉 상대성의 동시성에서

자동적으로 주님께서 움직여 주시시는 않는 것이 철칙입니다.

동시에 둘이 함께 움직임이니 다시 말해 나는 반드시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여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움직이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재차 강조하지만 둘의 하나됨, 상대성의 동시성. 

나는 주님을 위하고(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주님께서는 나를, 나만을 위하시고ㅡ. 하나님께 찬송, 영광!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찬송, 영광 돌리는 것으로

모든 내용이 점철되어 있고 바울 사도 서신을 보아도

역시 같은 색깔로 되어 있으니 우리도 같은 색깔이어야. 


시편 42장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애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내 하나님"ㅡ사람마다 "나의 하나님"이시라 불러),

진실,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이니까)(갈 2:20)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시 반복하여 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애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다시 같은 말로 시 43장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애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주님께  매사매건 기도하여 여쭙는 것을 기뻐하시는 확실한 증거:

https://blog.naver.com/trinia/221506500511





2020년 12월 24일 목요일

21세기 아론과 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2020년 12월 21일 월요일

영생은 창조로써 되는 것이고 행복한 이상적 삶은 생명의 법 준수로 되는 이 차이를 알아야ㅡ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한다

 








마치 영생만 하면 행복한 삶이 

절로 이루어지는 줄 착각한다

불교보다 기독교가 더욱 그러하다

마귀의 이 농간에서 벗어남이 시급하다

"생명의 법칙"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상대를 사랑, 기쁘게 해주려는 일체의 힘씀이다

다시 말해 서로 사랑하면 그것이 바로

짝의 법칙에서의 "상대성의 동시성"이다. 

성경은 아주 평범한 사실을 평범하게 말한다

어렵게 말할 하등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어렵도록 헷갈리게 만든 사탄의 속임수

때문에 "돌이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 들어가는 것은 요원하다" 경고하신 이유다.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생뚱맞게(아주 생소하고 엉뚱하게) 

죽음에 처했으니까 구원이 필요한 것뿐이다

그래서 짝의 법칙대로 다시 나게 하시어 새로 창조하심인데

따라서 여전히 숙제는 하나님 사랑을 알고 하나님 사랑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나만을 위하시는) 순종하는지의 여부다

영원히 산들 무엇하리요 자기도 죽이고 남까지 해치는데ㅡ

그래서 아담은 죽었고 악령들은 영원 멸망이고

그래서 회개하라 명령하시는(행 17:30) 것이고 

구원된 사람들을 일컬어 "계명을 지키는 자"라 한 것이다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계 12:17)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구원된 자가 아니면서 구원 받았다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거짓말만 하니까)"(요일 2:4)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3)

"할례 받음도 아무것도 아니고 받지 않음도 아무것도 아니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고전 7:19)

("오직 예수님만 믿을 따름"이라 하지 않았음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이 둘의 하나됨에서 순종을 뜻하므로)

"내가 아버지의 계명(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상대성의 동시성에 의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이다"(요 15:10)

(너는 나를 보고 위하고, 나는 너를 보고 위하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우리 위한 "십자가" 사랑을 수용하여) 

나의 계명(위에 지적한 대로의)을 지킬 것"(14:15)




2020년 12월 20일 일요일

눈으로 보는 것만 인정하는 세상을 대상으로 21세기 전도에 활용할 결정적 자료



 




이것이 현실입니다

현실을 외면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아담 범죄 후 이렇게 되었습니다

자연계 몸으로 전락, 상대적 열세에 놓여

맥도 못추는 연약한 상태에 허우적거리는 인생들.

깜깜한 무지의 암흑 속에 갇혀 천지를 모릅니다.

포로되어 있건만 아무것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 결과 만물이(롬 8:22)

고/해산의 신음 중에 있다고 명백히 했습니다.

죽은 자가 되어 있어 

새 생명, 새 사람으로 다시 나기 위한 진통입니다

아래가 그 적나라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현재의 만물, 이세상의 묘사입니다

영원 세계에서는 더 참혹한 그림이 됩니다

이세상은 이외 아무런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참혹하고 황당합니다

이제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그 차이뿐입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시니(히 5:7)

온기 없이 찬 바람만 일고 메마르다는 것은

에스겔 해골 골짜기의 우리 실상을 드러내(겔 37:1-10)

"이 모든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할 것이니 너희가 살 것이다"







오늘도 어제처럼 눈물 내리고

이안삼 곡




www.youtube.com/watch?v=Tb-Do3az5Z0



https://www.youtube.com/watch?v=nkKU-LsIuDs






빈약하기 짝이 없는 자연계 육체에 포로되어 있는 현재 우리는 삶의 진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단지 수박 겉 핥기 식의 처참한 환경에 처하여

 



앉은뱅이나 반신불수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음을 조금씩이나마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자연계와 자연계로 양분되어 있는 세계.

우선 초자연계의 육체가 얼마나 빈약한지는

주님의 부활하신 몸을 언뜻 살펴 보아도 

대강 짐작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들의 꽃 한 송이가 발산시키고 있는 것 하나에도(눅 12:27)

인간의 모든 부귀영화로 입은 옷이 미치지를 못한다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도 그 정도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하신 몸으로 구름을 타고 

종횡무진으로 움직이시고 또한 다시 오실 때에

번개와 같이 나타나신다는 것만 상상해도

이 자연계 몸을 입은 현재의 상태는 굼벵이 꿈틀거림과 같은

굼뜨기 짝이 없는 불편하고 답답하기 그지없음이 명백합니다.


초자연계 육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당연히 초자연계적 생활 환경이야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기에 아름답다", "먹기에 좋다"(창 2:9) 등.

영생은 접어두고라도, 한 마디로 우리는 지금 상태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 부부는 일단 맛을 보았겠고 영물(靈物)들은 알겠지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다 해도 자연계에 예속된 것일 뿐.

그 이상의 것, 그 밖의 것은 전연 아는 바가 없고

차원이 다르며 수준이 낮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이런 "낮은 몸"(빌 3:21)과 "영광의 몸"의 대비입니다.

이런 몸을 가지고 이세상 모쪼록 살아보겠다는 

미련한 생각은 한 시도 담아두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구원받아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바쳤는데

그리고 그와 같이 사는 것이 "상대성의 동시성"의 삶의 진리.

주님의 것을 내것인 양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망상이

영물이나 인간이나를 막론하고 멸망에 함몰시키는 자아중심

다시 말해 생명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경계해야 합니다.


사탄은 구원의 희소식(복음/福音) 전파의 

제1장 제1절을 그동안 숨기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는지라

그럼에도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된" 이는 누구나 다

구원 얻기에 하자가 없었으니 하나님의 은혜 찬송할진저.

그러나 영악해질 대로 영악해진 21세기에 들어

종전과 같은 <체계를 갖추지 못한> 구원론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마귀가 초능력을 사력을 다해 동원시키므로 더욱 그렇습니다.

고로 이 감추어졌던 제1장 제1절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개진할 수 있도록 다시 은혜를 베푸심이니

즉 인간이 이런 나약한 자연계 몸으로 운명지워진 연유가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임을 

초대교회처럼 광포(廣布)하게 하심이니

하나님의 이 뜻에 우리는 전폭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