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8일 월요일

세계 최고 갑부의 반열에 들면서도 필요에 의해 초라하고 남루한 거지의 행색을 하고 있는 의젓하고 당당하고 느긋하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를 누림과 같은가, 아닌가ㅡ자기 점검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니"(전 3:4)

이 때를 분별 못하고 덤벙대는 자는 화가 있다. 

웃을 때가 아닌데도 "지금 웃는 자 애통하며 울 것"(눅 6:25)이요

"지금 배부른 자 장차 영원한 굶주림"의 고통의 때 면치 못할 것.

때가 오지 않았는데도 "지금 부유한 자는 다신 위로 받지 못해"(:24).

때를 가리어 순응함도 법질서 차원에서 다루어지니 각성하라. 

때를 분간 못해 이 위급한 환경에 대처 못하는 자 화가 있다.

아담 범죄로 인생들이 자연계 육체가 됨으로 인해 받는 인간고(人間苦).

이 인간고의 때, 회개하는 때, 새 생명 탄생의 산고(産苦)의 때 무시하면

세상에 사람 남(새 사람의 새 생명)으로 인한 기쁨과는(요 16:21)

영원토록 남남이 될 것이니 모름지기 사람은 때를 분별해 처신해야.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생명의 법칙.

남이 나를 위하고 내 삶이 되어 주는 것이니까

이것보다 이상향적이고 풍성하고 행복한 삶은 없는 것.

그대신 나는 나의 상대(머리이신 하나님을 비롯 몸의 지체된 이웃)를

위해서만 사는 것이니 이것이 주님 가르치신 자기 부인.

한 몸으로 기능(機能)하기 때문에 십자가 지는 사형수의 모습이기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 사형수의 모습이니까. 


이런 불행한 나약한 자연계 육체로는 삶의 "때"가 아닌 것이다. 

오직 새 창조, 다시 출생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때"다.

그런데도 사탄의 간악한 속임수에 말려들어

살겠다고 덤벙대는 자 영원히 정상적인 삶을 맛보지 못하고

한 때 구원받아 정상으로 회복된 자도 그 생명 잃거나

빼앗기게 됨을 주님은 엄중히 경고하셨다(눅 9:15).

생명의 면류관(약 1:12/계 2:10)을 빼앗기지 않도록 (계 3:11)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고 있으라" 경고하신 것이다(:11).


자기 부인이면 즉 하나님의 인자 안에 거하면(롬 11:22)

다시 말해 죽어도 살아도 하나님 영광만 위하고 주님만 위하면

나만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동시에 움직이시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위(severity)만 작용하게 될 것은

항상 <상대성의 동시성>만이 작동되는 까닭이다. 

내가 주님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실(마 10:33)/딤후 2:12)

수밖에 없으니 "나(내 계명)를 존중하는 자를 나도 존중하고

(내 말)를 멸시하는 자를 나도 경멸히 여길 것"(삼상 2:30)이라

하신 그대로이니 이 모두 "상대성의 동시성", "둘의 하나됨"이다. 


사탄은 지금까지 일방적인 하나님 사랑, 은혜만 강조하여 속임으로

많은 영혼들을 멸망에 빠뜨려 온 것이니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영광을 위하지 않고 자기 영생만 관심 있는

모든 자아중심을 회개하지 않는 허다한 무리들의 허물로 비례된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심은 <산 자(구원된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 위해 살게 하려 함"(고후 5:15)

이라고 명명백백히 기록되어 있거늘 어이하여 이 말씀은 버리고,

하나님 아들께서 나 위해 죽으심만 붙들고 편식해 왔으니

영양실조에 걸려 병들어 죽는 것과 아무것도 다를 바가 없다. 

바울 사도는 다시 강조하여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죽는 자도 없다"(롬 14:7)고 명시했음에도

이를 완전 무시했으니 이렇게 무시하는 자를 사탄은 건드린다.

자업자득이니 누구를 탓하랴, 사탄을 탓할 것 없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서 그 생명을 잃었다(빼앗겼다).

굳이 아담의 예를 들 것도 없이 영생하는 영물("천사")들이지만

범죄함으로써 영원 멸망의 악령들이 된 것이다.

우리 역시 영생의 영광의 몸으로 새로이 창조된 현시점이

범죄 즉 생명의 법을 어기고 자아중심을 선호하면 똑같다. 

그와 같이 선악을 구분해내는 지금 이 때이다. 

이 때만 지나면 다시는 그런 시험하는 때, 추려내고 갈라재고

걸러내는 기간이 되풀이되지 않는다. 이 때 완전 결판 난다.

아담이 범죄했든 않았든, "마지막 심판"이 있는 이유다.

이 때가 지나면 영원히 선과 악의 세계로 양분된다. 

전자는 생명의 세계로서 극락, 희열, 평안, 행복한 삶뿐이고 

후자는 심판의 세계로서 고난, 고통의 죽음(생명과 정반대)뿐.


고로 지금은 새 창조와 함께 걸러내고 추려내는 선별 작업 병행의 때.

영물(靈物) 관련해서는 이미 끝났고 인간 세계가 그런 와중에 있는 것.

이런 과도기적 혼란(한창 공사 중 현장에는 기자재들이 쌓여 어수선)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세계는 행복한 삶을 영위할 여건이 아닌데

고집스럽게 살고자 하니 마귀를 추종함 외에 달리 무슨 의미리요.

그래서도 "때"의 철학을 재삼 강조하는 것이다. 

시험의 때를 통과하는 기간이니까 그것이 범죄 전 아담이 누린

"보기 아름답고 먹기 좋은"(창 2:9) 환경이든 아 니든, 별 의미 없다.

범죄하여 그 생명 잃으면 그만이니까. 오직 핵심은 사랑의 충성뿐.

외려 이런 자연계 육체의 서글픈 환경은 "영원 사모"(잠 3:11)의 

동경심 유발에 긍정적 효과를 주건마는 자아중심에만 사로잡혀

남들이야 다 죽든 말든 나만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으니 바로 이런 악인들이 자연 도태되는 것.


"한 지체가 고통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고전 12:26)

우리가 "십자가 지라"고 명령하신 이유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수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 못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란

황당한 거짓말로 지금까지 속여 온 마귀의 농간 때문이니

"영적"인 사형수, "영적"인 죄인, "영적" 사형 기구(器具), "영적" 십자가, 

"영적"인 처형 등 이런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러나 유독 죽음만은 "영적인 죽음"이라니 

세상의 기독교인들을 바보, 멍청이로 만들어도 유분수지 이럴 수가!

우리(조인) 위하신 "마지막 아담"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결과로서의 신체적 죽음의 증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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