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4일 일요일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신학이 성경에 철저히 기반을 두었다면(당연히 그러해야 하겠지만)
되풀이해서 신학의 반/反 성경적 실상을 강조해서 고발할 일이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처음부터 마귀에게 장악되어 온 탓에 
마귀가 성경에 대한 엉뚱한 해석을 꾸며대어 무차별로 퍼먹인 결과 오늘의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 또한 양면성으로서 마귀 일방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니 
우리 자신의 성경 무시와 맞물려 이루어진 결과다. 
아담에 대한 살인 행위도 아담의 동조(범죄)에 따라 이루어진 쌍방간에 이루어진 범죄 행위다. 
바로 그 때문에 마귀가 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는 
범죄자 사탄의 이 인간 세상 지배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담 자신의 범죄로 빚어진 참상인 것이다.

인간 문화의 전통성 또는 전통적 성경 해석이 지금까지 존재해 온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담 이후 모든 것이 사탄의 지배 통치 아래 조성되어 온 비뚤어진 정신 문화인 까닭이다. 
그 단적인 예가 인류의 절대 다수를 지배해 왔던 무신론이다. 
그러나 지금은 악마 자신이 창조주로 가장하는 시기라 점차 유신론으로 제자리로 잡아드는 현상이로되 
<적그리스도를 추종하게 만드는 유신론>이다. 이 세상이 마귀의 관할 아래 있는 한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한결같이 사탄의 입김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니 
유신론 세상이라 해서 좋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로 말의 요점은, 천 수백년간 정착되어 온 성경 해석이라고 해도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서 벗어난다면 그 "천 수백년"의 권위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 하나의 예로 아담의 죽음이 "영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제 더 다시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당치도 않은 성경 해석을 묵인해 오신 것은 그런 지식이 없어도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된"(마 18:3) 자에 한해서 구원은 얼마든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는 마지막 때로서 더 이상 거짓은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면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로서 온통 "창조주 하나님"으로 가장하기 때문에
(지금은 점쟁이도 기독교 하나님 이름을 빙자하는 때다) 
정확한 성경 지식이 필수불가결로 요망되는 때라 그러하다. 

가령 예를 들어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 교회가 전국적으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을 빙자하는 방언파들이 있어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 세를 과시하며 "기도" 운동을 벌인다. 
악령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대강 알므로 그 때에 맞추어 방언파
(이런 현상이 악령으로 났을 때에는 반드시 대세를 이룬다는 것은 상식이니 
오늘날 천주교가 세계 그 어느 종교보다 다수를 점하고 있는 것도 그런 보편적 현상이다)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여 나중에 말하기를,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심으로써 이렇게 국면 전환된 것을 보라, 
고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대대적인 선전에 활용한다. 
세상은 외형적인 힘을 숭상하므로 숫자가 많은 쪽이 대세요 대수라는 착각에서 그런 소리를 일삼는다. 
그러나 사실은 소수라도 그 기도의 능력(응답)으로 하나님은 이루신다는 사실을
성령 안에서의 기도자들은 충분히 알고 있는 터이다. 

그들의 소위 방언 기도를 보면 무슨 기도 말을 해놓고 그 끝에 전혀 무의미한 "아바바바바바바" 식으로 
혀가 돌아가는 대로 밑도 끝도 없는 막무가네식 소리를 해댄다. 
이런 것은 비신자들이 보기에도 듣기가 썩 거북하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인지 미친 짓인지 거룩함이라고는 일절찾아볼 수가 없다. 
초대교회 사도들 당시 성령의 은사로서의 방언을 하던 때에도
즉 자신은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으로 구사하던 때일지라도 
"무식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않겠느냐"(고전 14:23)고 말할 정도였을진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수, 대세가 진리는 아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 하신 그대로다. 
우리의 심성은 거룩함과 그렇지 못함을 구별해 볼 수 있는 지각을 주셨으므로 그대로 작동된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귀신의 망동 망발을 얼마든지 가름해 식별할 수 있음을 명심할 일이다. 
이 마지막 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 복이 있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법, 법칙은 정확무오가 그 속성임을 알 때 성경적 구원의 과학성은 여기서 백프로 보장된다

법, 법칙은 정확무오가 그 속성임을 알 때 성경적 구원의 과학성은 여기서 백프로 보장된다







얼렁뚱땅이 없고 대충대충이 없고 봐주기가 없고 오냐오냐가 없고
기계의 작동처럼 무자비하고 냉혹하고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법(칙)의 속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칙)의 존재 의의가 없으니까.
법칙대로 당연히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결과를 성경에서 포상, 상주심이라 하고
안지키면 당연히 거둘 수밖에 없는 결과를 응보, 멸망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것도 이 법(칙) 차원에서의 단정입니다.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육신으로 심으면 썩어질 육체의 것을 거둡니다(갈 6:8).
단 기계적인 것과 다른 차이는 사랑의 오래 참으심에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계까지이고, 무한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한계를 벗어나면 그 냉혹함은 기계적인 것과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 오래 참고 기다리심의 한계가 언제 닥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고로 이런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 소관사이지 나와는 일절 무관합니다. 
성경은 생명(영생)의 육법전서. 사람마다 생명의 법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피차 가르치기 위함(골 3:16)이며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항상 성경을 가까이하면 성령께서 친히 교수해주십니다. 





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질문과 답변


질문:
노아의 대홍수로 지구상 인간을 모두 수장 시켰는데 인간이 타락해서라면
15세 이하 어린 아이들, 특히 영유아들은 부모가 타락해서 부모 탓에 죽은 것이 아닌가?


​답변: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개략적 기록만 남겨두고 있으니까 아래의 사실들을 유념해볼 수 있는 바
1. 당시 네피림의 후예들이 인간 중에 많이 섞여 있어 주류를 형성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고,
2. 인간(아담의 후예)의 구원은 미리 아심(인간의 자유 의지는 일절 간섭함이 없이)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억울하게" 영유아로 죽는 경우가 없도록 만반 조처를 취하셨을 것이며(가령 아예 태어나지 않도록 하신다든가노아 홍수가 일어났을 특정 시기를 전후로 잠시 한 때만 인간(네피림이 아닌 아담의 후예)이 생산되지 못하도록 주선하신다는 것은 창조주로서는 가능하신 일이니까),
3. 영유아만 아니라 성인이라도 그렇게 당시는 노아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을지라도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될 여지를 남기신 것(벧전 3:19,20).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노아 당시 사람(망자/亡者)들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었듯이
공자, 싯달다(불교의 부처),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사람들이 현세에서는 구원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어
믿음 없이 저승에 가더라도 구원 받을 기회는 있다고 하여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의 말씀 전달하는 일을 등한히 할 수 없으니, 평생에 단 한 번도 구원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어
비록 죽고 나서야 다행히 회개해서구원받을지라도 나는 내 임무(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전도의 일에 전념해야 하는)를
다하지 못한 악함 즉 불순종을 인하여 멸망하기 때문입니다(고전 9;16).

우리가 구원받아도 즉각 주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영화로운 초자연계의 자유 분방한 육체로 변환되지 않고
여전히 초라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죽음과 썩음의 몸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이 세상(믿기 전에는 실상을 몰라서 사는 데인 줄 알고 살기에만 열중했던 것) 여전히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실상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되었으므로 주님의 보내심 받아
(주님 친히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똑같은 양상으로-요 20:21,22)
사람 구원하시는(재출생, 새 창조)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그 아들된 새로운 신분으로서
동참(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니까-고후 6:1)함으로써 <일하기> 위함, 오직 일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수고로이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감히 천하태평으로 삶의 낙을 즐기며 놀 수 있나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새 생명 탄생시키는 일, 해산의 수고, 진통, 산통, 산고를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죽음, 저주, 진노의 질서를 따름이어서 이런 해산의 고통은 불가피, 필수입니다.
달리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스스로 우리 몸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골 1:24).
예수님 죽인 것을 항상(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은) 짊어지는 이유입니다(고후 4:10-12).
왜 주님께서, 사형수가 사형 형구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듯이 하라, 따라서 부모형제 아내남편 자식들을 모두 버리고
죽음 길로 떠나는 자들처럼 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내 스스로 죽는 길로 나가니까 자연 그들을 미워함이 되고 나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함이 되고
(왜냐면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길을 따름이니까 내 목숨도 미워하고
내 가족도 미워함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인즉)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림이 되는 것인즉
단단히 각오를 하고 그와 같이 우리 앞서 나아가신 주님을 따라오라는 경고가 눅 14:26-33입니다.
주님과 내가 한 몸(머리와 몸)되는 관계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머리께 대한 몸의 순종의 의미가 되므로
절대로 생략될 수도 없고 소홀히 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생명보다 더 진귀한 관계가 이 머리와 몸의 하나, 한 영됨입니다.
아니,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이 '머리와 몸 관계'를 떠나서는 향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한 때 고난을 기피하여 싫어하여(그래서 사랑이 모든 것의 핵심 열쇠라고 합니다ㅡ
사랑만 있고 보면 물이라고 불이라도 뛰어드는 법이니까) 몸을 사린다면, 모든 것은 법칙 즉 원리원칙대로
어김없이 되고 마는 것이니까, 실로 무자비하게 생명에서 탈락하고 낙오되어 영원 멸망만 자초하게 되는 것은
필연 중의 필연입니다.

죄 많은 세상이라 법을 어기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니까 이런 법의 삼엄함을 몰랐지만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법의 엄정함을 배웠으므로(생명의 법칙을 따라
하나님 친히 우리 중 하나 곧 인간이 되시어 친히 고통과 치욕 속에 죽으시지 않고는 안되는 법의 엄정성)
모름지기 법(하나님의 모든 말씀, 계명 등) 준수가 생명임을 자나깨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법의 엄정성은 우리가 자연법칙을 통해서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한 치 오차 없이 그대로 진행되는 자연법칙. 무릇 모든 법칙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2019년 11월 17일 일요일

만물은 짝으로 되어 있다ㅡ2019년 11월 11일 최종 확증






미시 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으로 알았던 "입자ㅡ파동" 이중구조가
거시 세계에서도 지배원리로 작동되는 것을
2019년 11월 11일 금년 이 달 최종 확증

  양자역학 최신 소식  



  모든 물질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만물은 짝으로 돼 있다ㅡ현대 물리학이 최종 입증   



 

2019년 11월 16일 토요일

양자역학 맛보기




양자역학 [quantum mechanics, 量子力學]








해설자의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든데
말이 빠르든 느리든 알아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 ^^.
단지 해설자도 진실로서 입증되어 있는 것은 확신하나
꼭 집어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왜 꼭집어 말 못하나ㅡ
"짝의 원리"라고 한 마디만 하면 충분한데ㅡ. 


2019년 11월 12일 화요일

주님의 뜻








모퉁이돌 선교회 이삭 목사는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고
단지 그가 소개하는 북한 교회 실정만은 귀한 것이므로
다른 데에서는 볼 수 없는 가치를 느끼기에
자주 소개하고 있습니다

19년간 북한 지하 땅굴 교회를 이루어
믿음을 지켜 간 우리의 지체들
(아래 비디오 46:31에서부터)
이 지하 땅굴에서 19년간 살던 사람은 
오직 의식하는 것이 주님뿐이었다는 것
이 점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주님 의식> 속에서
이 세상을 보내야 함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
이것이 이 지하교회를 소개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평균, 동등합니다.
누구는 더 여기고 덜 여기고 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교회만은 고난 받게 하시고 우리는 편안하게 하실 리가 없습니다. 
고난 받으면 영광을 이룬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북한교회만 우리보다 
더 영광되게 차별하시는 의미일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라 한 것입니다. 


2019년 11월 11일 월요일

사랑은 자주 독립성의 주인 의식

사랑은 자주 독립성의 주인 의식



사랑은 주인 의식
주인이라는 것은 자기 일이니까 힘쓰는 것은 당연
주인이 아니고 남이라면 힘쓰지 않는다
평범한 말이지만 바로 여기에 영원한 생사가 달린 줄을 모르므로 
많은 사람이 멸망 길에 들고 있다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본을 따라 나도 사랑을 배워 사랑하는데 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수동적으로 움직여
영생에 들어간다고 마귀가 가르쳐 왔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허구임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모든 죄는 사랑 없이 자기 욕구만 채우는 이기주의를 말한다. 
이기주의는 양심을 가진 인간으로서 태생적으로 거부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러하거늘
때문에 이 양심 따라 살기를 힘쓰는 것이 하나님 뜻일진대
어찌 이런 힘씀 없이 영생하기를 바라리요, 당연하지 않은가.

마귀가 꼬득이는 모든 거짓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도 단지 고난 받고 고생하는 것이 싦어
그래서 세상을 아무쪼록 살려고 편히 살고자  하는
헛된 욕망에 마귀로 인해 사로잡혀 선동되어
생명길을 버리고 부나방처럼 불로 스스로 뛰어드니
애닳다, 하염없는 눈물만이 앞을 가리누나.  










2019년 11월 9일 토요일

자유인의 삶







사람의 영원 운명도 각자 심은 대로 거둔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토지)를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막 10:29,30)

이 세상에서 "백배"나 받으면 애당초 버리지 말고 
자기 것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다음의 주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 사랑하면 그 생명 잃는다"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유효한가. 유효하기로 말하면 다 유효하다.
"백"은 충족 수/數이다. 
다시 말해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은 
내가 버린 그만큼 아니 그보다는, "충족하게" 도로 얻는다는 뜻.
더 필요 없을 정도로 더 요구할 것이 없도록
충분히 채워진다는 <생명의 법칙>을 말씀하심이다.
단,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자기 생명 사랑하지 말라는 것.
"백배"로 얻는 그것이 재물일 경우,
백배로 얻은 그 재물을 주님 말씀대로
"다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우리가 주님 말씀대로 다 버렸으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까?" 여쭌데 대한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신 것이다(마 19:27). 
그리고 혈육 곧 살붙이(보모 자식 형제)일 경우
아담이 애초 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 홀로 계속 자식 생산을 할 것인즉
모든 인간은 다 형제간이다. 이것이 혈육, 살붙이의 원 개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특별히 나만의 부모 자식 형제란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생명의 법칙에서 모든 내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의 분신.
거대한 나 자신을 형성함이니 바로 말 그대로의 대아/大我다. 
"한 몸" 구조/체제에서 나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를 모신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어 있는 이런 무한대의 풍족함을 다 함께 누림이다. 
삶 자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인식,
고정 관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
왜냐면 아담 범죄로 야기된 폐단, 병폐가
지금까지 (메시야 오시기 전까지의) 왜곡된 모든 관념과 인식이었기 때문.

고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식구가 무작정 반대하여
혈육으로서의 의를 끊는 것으로 위협을 해온다면
이 경우 나는 그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아담이 지금까지 범죄 않고 생존해 있다면
그리고 많은 자식들을 낳아 내가 그 중 하나일진대
개중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어
의롭게 거룩하게 살기를 좋아하는 이들과는 원수지간이 될 것인즉
그들에게 더 이상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백배"나 되는 여러 형제들이 내 주변으로 건재하여 차고 넘치니까.

기본 자세는 이렇게 정하고,
세부적으로는 내가 먼저 구원받았으니 당연히
나의 남은 가족이나 정든 친척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순서를 밟아 감이다. 
눈을 뜬 자와 아직 눈을 감아 보지 못하는 자와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



우리가 구원받아 산 자가 되어 있음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다시 산 자가 되신 대칭 아담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칭 아담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고후 4:10)이 필연.
대칭 아담의 남은 고난 즉 이 죽음을 짊어짐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를 산 자로 만드신 <대칭 아담을 위함>인 것(:11/빌 1:29).
이렇게 여전히 대칭 아담께서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죽음의 고난 가운데 계시니
아담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사탄이 아직 "죽음의 권세를 쥐고"(히 2:14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물린다. 
이 원수가 무저갱(bottomless pit)에 들어가야 그 권세를 비로소 빼앗기게 된다(계 20:3).
이 모든 것은 나머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 여부를 가려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도 아담의 범죄처럼 악령들의 멸망처럼 될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대처할 일이다.  



★★★★★★★★★★★★★★★★★★★★★★★★★★★★★★★★★★★★★★★







2019년 11월 8일 금요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살라고 하시더라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멸망에 들어가는 급박한 이 시기에
나 혼자 살겠다고 이 악한 세상에서 덤비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구원 얻는 복음을 전하겠으며, 제사장 기도로써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을(창 32;24) 하겠습니까" 해야 옳다.
하물며 명명백백히 명령하시기를, 계명을 주시기를,
"세상에서 자기 생명 사랑하면 잃느다"고 하셨음에랴(요 12:25)!
우리가 백년 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제한된 삶을 산다면 평생 살아도 아쉬울 정도로
시간이 모자랄 판에 그런 시간을 쪼개서
사람 살리는 기도와 전도에 할애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어불성설.

바울 사도가 혼자 지냄이 복이 있다 할 때
"마음이 나누어진다"(고전 7:33), "이치에 합함",
"분요함(내적 갈등)이 없이 주를 섬긴다"(:35)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이는 상식선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일.
고로 산다는 생각을 아주 접어버리고
오로지 일구월심 사람들 구원해내겠다는 일념(롬 9:3)으로
일하지 않으면 "주의 일을 염려함"(;32)이 될 수가 없다.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주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빌 2:21)고
바울 사도가 탄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3:18)이라, "멸망"(:19)이기 때문.  
바울의 "많은 눈물"(:18/고후 2:4/행 20:19,31)이 이 때문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일꾼의 이러한 "눈물"인 것이다.

"하나님"이시라니까 무턱대고 노예근성부터 앞선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 하는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인의식>임을 항상 망각하지 말아야.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지 않는"(마 11;12/눅 16:16) 한 못들어간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하셨겠는가.
믿음 좋은 아브라함.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친구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믿음이 좋을 수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말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 살아도 된다" 하시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아닙니다" 할 줄 알아야
이것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인 것이다.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함이 많을수록 그 사랑은 많고 크고 깊다. 
다른 말로 하면 의식생활에 뿌리 박힘이다.
주님 의식, 예수님 의식의 일상생활.
그래서도 "쉬지 말고 기도함"(살전 5;17)이다. 
그 단적인 증거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킴"(고후 10:5)이다.
사람은 생각 없이는 삶의 영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말에든 일에서든.
그런데, "모든" 생각이다. 주님 의식 없이 그것이 가능할까?
주님과 더불어 엮어지는 일상생활의 행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에녹을 가리켜 "하나님과 동행했다(to walk with God) 한 것. 
아브라함에게 "내 앞(면전에서)에서 행하라(Walk before Me.)" 하셨다.
모름지기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으니 그 (잊은) 날을 셀 수조차 없다"(렘 2:32).
이것이 타락의 시초이다. "멸망"(빌 3:19)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고 한
본 뜻이다. 마음 깊이 아로새길 일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을 가까이하라는 이유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께서 "책망" 등의 일을 하실 수가 없다.
마귀가 "성령, 방언, 치유" 등을 빙자하며
멸망 길로 유도하는 줄도 모르는 이 세대여!
회개하여 하나님 말씀 성경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안내 말씀









성경의 대요/大要는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요령부득 또는 미비점이라 
느끼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본문의 댓글로 남겨주시면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해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시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하게 해주십시오 
할 것이니"(엡 6:18,19)





보이지 아니하시는 사람 마지막 아담

보이지 아니하시는 사람 마지막 아담









2019년 11월 6일 수요일

만세반석 위에 굳게 서리라


시종일관 철두철미 짝의 원리로
빈 틈 없이 맞추어진 우리 구원, 생명의 말씀이시다.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인생 구원의 이치가 아니다. 
모든 조화가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 때 
이를 가리켜 아름다움이라 한다. 하나님 말씀이 그러하다
처음과 끝이 거짓말로 일관하는 세상 종교처럼
지금까지 한낱 주먹구구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죽으심"이니 "아담의 영적 죽음"이니 따위로
격하시켜 왔었는데 더 이상 이런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제 성경의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이 21세기에 나타났으니
이를 자기가 위치할 만세반석으로 만들지 않는 한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이다"
(마 21:44). 















①과 ②의 순서를 반드시 지킬 일이다. 
지금은 ①의 시대이지 ②의 때가 아니다. 
①은 죽음의 고난, 아담의 범죄의  여파, 아담의 살인자 악마의 세상.
①을 ②로 착각함은 멸망뿐이다. 세심하고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②는 마지막 아담의 시대로서 ①이 끝나야 비로소 시작된다.
아담은 ②를 시작하기도 전에 무참히 죽어버렸다.
원래 세상은 ①과 ②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아담의 범죄로 분리돼 정상적인 아담의 세상이 ②로 밀려난 것이다.
아담 대신 마지막 아담께서 ②의 문을 여신다. 기뻐하라. 
바야흐로 때는 ②로 치닫고 있다. ①의 "마지막 때(단 12:4)"이다. 
①의 최후 발악이 시작되려는 시점이다. 
②에 대한 소망으로 지금부터 철저히 대비하시라.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