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 신학"(계 18.4)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아래와 같은 것이니 에덴 동산에서의 사탄의 거짓말 속성 그대로 드러나진 것.
1.■ "영적 죽음"이란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림. 성경에는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결코 쓰는 법이 없고 따라서 그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도 믿고 구원되어야 하는 만인 상대의 구원의 메시지인 까닭에 성경이 어려운 낱말이나 개념으로 구성되어질 수 없음을 모든 사람은 명심해야.2.■ 신학자들이 말해 온 소위 "대신 죽음"은 3위1합(종전의 "3위1체") 또는 성령에 대한 무식무지의 결과다. 성경에서 주님은 "성령의 계시"(눅 10.22)만을 강조하시어 성경 이해는 학문에 속하지 않음을 경고하셨음에도 이에 유의하지 않음으로써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이런 육체로서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요 16.7) 하신 대로, 육체로 계실 때는 유대 땅 갈릴리로 한정되어 계셨으나 지금은 성령으로 계시니까 한 날 한 시 지구상 그 어디든 우리 각자와 함께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계심이다. <사람>으로서 그렇게 계심이다. 이 "사람"이시란 '사실'에 주목해야. 이 점 우리 각자 항상 의식해야. 다만 영으로서 하나님(사람의 영이 아니신)이시란 차이뿐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심으로서의 성령이시다. 즉 예수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계심이다. 고로 "대신 죽으심"이라 함은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 바로 이와 같이 성령으로 친히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시어 내 안에 오시니까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남", "거듭 남(다시 남)", "구원 받음", "성령 세례", "성령 받음",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이라 하는 것.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심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요 그래서 스데반이 뵈웠다는 것(행 7.55)이고 성령으로는 한결같이 당시 스데반 안에, 당시 모든 믿는 자 안에, 지금 내 안에, 여러분 각자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후 그 시각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고(고후 6.1)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약속하신 그대로다.
3.■ 로마서 7장(24절)을 바울 사도 자신 즉 믿은(구원 받은) 후의 보편적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마귀의 거짓말인 것.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 그대로의 자기 심령 상태를 어처구니 없이 "구원 받은" 자로 착각함으로써 이런 자기 체험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몰지각의 극치인 것이다. 2.■ 에서 설명했듯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지 여부 부터 최우선으로 확인해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특징은, <회개> 없이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인위적' 교리 일변도. '성경적'인 것은 회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믿어→회개→물 세례→죄 용서→성령 세례(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심ㅡ고전 6.17). 바벨론 신 학은, "믿어→물 세례→죄 용서(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정)→주님 내 안에 오셨다(고 스스로 인정). 회개 없어 죄가 그대로인 추악한 자리에 주님이 임하여 오실 리가 만무. 따라서 로마서 7장(24절)이 그들의 매일의 악몽이 될 수밖에. 그러면서도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그래도 나는 구윈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소름끼치는 종교적 환각에 빠져 있어.
죄인을, 죄인 그대로를 구원하는 것 즉 영생 얻게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닌 것이다. 지은 것은 죄 밖에 없는 나임에도 다시는 죄 짓지 않겠다는 나의 회개를 받아 주시는 것이 "은혜"이고 그래서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거룩한 자로 새로이 창조해 주심이 "은혜"인 것이다.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나와 주님은 끝까지 별개외 존재란 뜻으로 그 죽으심이 일회용으로 끝나는 의미이지만,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셔 나와 "하나" 곧 "한 영"이 되어 계실진대 그 죽으심은 항구적인 결과로 맺어지는 완벽한 것이라 나의 "죄의 몸이 파괴됨"(롬 6.6)은 철저하게 지속되므로 롬 7.24 같은 비명은 아예 생겨날 수가 없음을 알아야. 물과 기름 사이라 한데 섞일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반드시 둘 중 하나다.
4.■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롬 2.6), "행위대로 판단하시고"(벧전 1.17)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행위대로 심판 받는데"(계 20. 13), 바벨론 신학은 이를 완전 무시, 마치 믿음 유무로만 심판하시는 것처럼 성경을 왜곡함이 도를 넘는다.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바울 사도는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9)임을 분명히 하였고 동시에 문제점도 지적했으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1,12) 한 것. 선을 행함이 영생 길이기는 하나 이 근본 문제 해결 없이는 즉 "죄에서의 구원"(마 1.21) 없이는 아무리 선을 행한들 의미가 없음이니 아담 범죄로 인해 근본부터가 죄인이니까! 그래서 이 근본 문제 해결이 연이은 주제가 된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3, 24)는 결론. 그 다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내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은혜에 의한)만이 유효함을 밝힌다. 여기서 바벨론 신학의 방해꾼 사탄은 그 특유의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통해 뒤죽박죽을 시도한다. 즉 "행함"과 "믿음" 관련해서다. 새 창조 즉 구원 받음에서는 하나님의 단독 창조이시니까 당연히 우리의 행함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를 휙 돌려 구원된 후에도 여전히 필요치 않다는 뜻인 양 둔갑시킴이다. 이미 바울은 첫머리 말을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계명,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고 못박았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일이니 하나님 말씀이 이랬다저랬다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근본 문제(아담 범죄로 죄인됐으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를 해결했으니 이제는 본디로 돌아가 의와 선을 행하기만 하면 종결되는 것이다. 당연히 "참고 선을 행함=영생"이 아닌가. 선을 행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 구원 받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함으로써(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선을 행함인 것이다.
6.■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심을 강조하지 않아ㅡ주님 다시 오심의 이유를 몰라. "영적 죽음, 운운" 따위 소리만 하는 이유.
7.■ 3위1합(종전의 "3위1체")의 뜻을 몰라ㅡ"성령"의 의미도 따라서 설명 못함. 이런 것이 바벨론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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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자(the sexually immoral), 우상 숭배자(idolaters), 간음하는 자(adulterers), 탐색하는 자[남색하는 자](men who have sex with men), 도둑(thieves), 탐람하는 자(the greedy), 술 취하는 자(drunkards), 욕하는 자(slanderers, 중상하는 사람", "비방하는 자", 타인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 또는 말로 헐뜯어 명예를 훼손하는 자), 토색하는 자(swindlers, 사기꾼)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 너희 중에 이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고전 6.9~11).
"저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은 것이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들에게 응하였다"(벧후 2.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