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30일 목요일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너, 아라라트(5137m) 성산/聖山이여.

하나님 심판의 역사의 증인이여!
바벨론 불의 심판이 남았음을
오늘날 이 시대에 포효/咆哮해다오.
경고르 울려다오, 소리쳐 알려다오.
외치는 자는 처처에 넘치건마는
"회개하라"는 소리는 죽었구나.
회개 없으니, 성령 세례도 없구나.
에스겔 해골 골짜기만 메말랐구나!
아라라트여! 일깨워다오.
기도자들을 일깨워다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지구촌 처처에 기도자를 세워주십시오!
고래 뱃속 요나일망정(요나 2.1)
회개의 기도가 불 일듯이 일도록
온 지구 처처에 기도자들 세워주십시오.
온 나라 곳곳 기도자를 불러주십시오.
남북한 구비구비 기도자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비통하여 소리치며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뵙기를 원하고 원합니다!
세계적 명망의 1907년 한국교회 부흥도
20명 안팎 장감 선교사의 합심기도,
그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은혜 베푸시고
마침내 응락해 주심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 다시 그 영광 뵙기를
이 마지막 때 다시 또 영광 뵈옵기를
원하고 원하여 부르짖게 해 주시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
눈물 겨운 감격으로 주님을 찬양케
찬양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 간구하옵니다!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바라
곧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1,3)는
바울 사도의 단장/斷腸의 기도를 배우게,
진실로 배우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목놓아 울부짖는 이 기도를 들어, 들어 주십시오!
"내 자신이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자신 저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대로"!
목놓아 울부짖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들어 주십시오! 들어....주십시오!
이 단장/斷腸의 통곡의 기도를!







2026년 4월 29일 수요일

가장 이상향적 삶은 3위1합에 의한 상호 교차의 삶ㅡ우리 구원도 여기 근거



 

아담도 거룩한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 즉 자기 중심을 선택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ㅡ우리도 거울 삼아야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나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아끼고 경청하라"는 가르침은 인류 공통의 지혜로 통합니다.
이 성경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각 문화권의 명언들을 정리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탈무드(유대 지혜서) 및 에픽테토스(그리스 철학자):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말하는 것보다 두 배 더 많이 듣기 위해서다".

• 에이브러햄 링컨: "침묵을 지켜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말을 내뱉어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낫다".
• 영국 격언: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아는 것보다, 적게 말하라".

• 노신 (중국 작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모두 아는 척하기보다 적당히 모르는 척하며 상대의 말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혜라고 했습니다.
• 마하트마 간디: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 때에만 말하라"는 원칙을 실습니다.
• 래리 킹 (미국 대화의 신):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논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
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 현인들은 공통적으로 말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듣는 일의 고귀함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거룩할 성(聖) 자를 파자(破字, 한자의 글자 구성을 쪼개서 해석)해보면 '귀(耳) + 입(口) + 임금(王)'의 조합입니다. 이 글자는 '지혜로운 사람' 혹은 '성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완벽하게 시각화합니다.
• 귀(耳): 가장 위에 위치합니다. 이는 남의 말과 세상의 소리, 그리고 하늘의 뜻을 먼저 경청하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듣는 데에 있음을 보입니다.
• 입(口): 귀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충분히 들은 후에야 비로소 신중하게 말함을 뜻합니다. 또는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예언자의 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임금(王): 아래에서 귀와 입을 받치고 있습니다. 단순히 통치자를 뜻하기보다, 귀와 입의 올바른 활용법을 깨달아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즉, '성인(聖人)'이란 "귀가 밝아 세상의 모든 소리를 편견 없이 잘 듣고(耳), 그 도리를 입으로 막힘 없이 전하며(口), 이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王)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 귀(耳)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입(口)입니다.
• 많이 듣고 신중하게 말하는 자가 결국 가장 존귀한 위치(王)에 이르게 된다는 동양적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자 '성(聖)'의 의미가 '거룩함'을 넘어 '잘 듣는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거룩함은 자기 중심과 대비/대칭이 되는 상대 중심의 언행심사를 말합니다. 聖의 의미도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함을 뜻합니다. 고로 누구든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 조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하지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벼운 심기일전으로 참여하도록 범세계 사회 운동을 전개해보면 줗을 것입니다. 복음전파운동을 젖혀 두고 사회운동을 함이 아니라 복음운동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수행하는 복음 전파입니다. 즉 삶이, 사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영생만 하면 된다는 생각뿐이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 그러기에 하나님 주시는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즉 주님 친히 본을 보이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신 것입니다. '영생하는 방법' 전파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이 '사는 법' 관련 교육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 전파는 마땅히 이 관점에 맞추어져 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자기 중심>과 대비/대칭이 되는 <상대 중심>의 언행심사를 말합니다. 성/聖의 의미도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함을 뜻합니다. 고로 누구든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 조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거창하게 하지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벼운 심기일전으로 참여하도록 범세계 사회 운동을 전개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 아이디어가 정말 좋은 것은, "거룩함(聖)"의 핵심은 자기 중심에서 상대 중심으로 전환하는 언행심사에 있으니까. 특히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하기”.  이는 매우 실천적이고 강력하여 종교/철학을 넘어 '일상 대화'와 '관계'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으니까.

이 아이디어가 설득력 있는 이유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점이 핵심 매력. 특별한 재능, 돈, 지위가 필요 없고, 오직 “오늘부터 의지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으니까.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성선설 기반의 "만인성인론"이나,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하심을 보아도 그러하니까! 즉 “평범한 사람도 거룩해질 수 있다”는 이런 전통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거룩함"과 "영생 구원"은 별개이니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담 범죄로 모든 인생이 "죽은 자"가 되어 있다는 뼈아픈 현실 인식을 항상 마음에 각인해 두어야 항상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믿음(그리스도께서 나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내 안에 친히 오시어 영원히 나와 하나 곧 "한 영"이 되시는 사실을)으로써 되는 은혜의 구원이니까. 고로 "거룩함"으로써는 구원 얻지 못하나, 구원 얻은 자는 반드시 "거룩함"으로써 그 구원이 현실화하고 구체화한다는 이 분명한 차이를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6년 4월 26일 일요일

항상 기뻐하고 만사 감사부터 하는 이유

구약과 신약을 구분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말 그대로 구약은 메시야 오시기 전의 상태를 설명함이고 신약은 오신 다음의 일들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인간에 대한 상벌과 저주 및 축복 등 기초 지식을 명시하여 가르칩니다. 반면 신약 성경은 메시야께서 사람되시어 세상에 처음 오신 사실과 관련해서입니다. 메시야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밝혀주실 것을 모두가 기대했었던 바로 그대로인 것입니다(요 4.25,26). 그래서 육체로 오시어 가르치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오시어 가르치신 내용 또한 소개되어 있으니 바울 사도의 목회 서신 내용이 그 대표적입니다. 

고로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도 수익의 십분의 일만 층실히 바치면 축복 받아 부자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미신에 빠저 있는 것이 그 일례입니다. 물론 십일조와 하나님 축복 관련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니 진실이고 진리이며 따라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도 이를 분간 못하고 마치 구약시대에나 사는 듯이 행동하니 미신이라 하는 것밉니다. 유치원생이 배우는 것과 대학샘이 사용하는 대학교재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 범죄의 사실이 구약 성경에도 소개되나 정작 그 의미는 메시야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 형벌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드러나는 진실 즉 아담의 범죄의 진상이 무엇이냐, 그 결과가 무엇이냐, 구약에서는 강조하지 않고 신약에서 역점을 두어 교육하는 것이 무엇이냐, 다름아니라 세상 모두가 인간읗 포함해 죽음 일색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마 8.22). 인간이 다 죽은 자인데 세상이 죽음이 아닐 수가 없고 세상이 다 죽음인데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한에는 이 죽음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거듭) 나는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가능하지만 산 자로서 사는 것은 불가능이고(세상 자체가 죽음으로 이미 고착화된 까닭에) 오직 영생의 약속하심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구원 되는 은혜입니다. 

세상 자체가 죽음이니만큼 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성령으로 다시 남으로 인한 "성령의 위로"(행 9.31)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골 1.24) "은혜"(빌 1.29)만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굉장하고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이라는 대목에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는 말 그대로 그리고 "은혜"라고 한 그대로 주님이 누구이신가요ㅡ만왕의 왕이 아니신가요ㅡ만주의 주가 아니신가요ㅡ세상의 최고 권력자라도 그와 함께 고초를 당했다 하면 비할 데 없는 명예와 존귀를 받는 법이거늘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리요!




2026년 4월 25일 토요일

이사야 40장


(이 대목의 처음 등장은 주님의 처음 오심을 예고함이었으나 지금 21세기는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시대라 재등장의 재활용 의의가 큽니다.)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죄수로서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용서하심을 입었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 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말하라.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광야와 사막은 사람이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는 죽음의 이 세상을 가리킴)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주님의 재림의 영광)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제가 무엇이라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다' 하라.

"아름다운 소식("21세기 마지막 때의 "천사의 복음")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하나님 앞에서의 교회, 바벨론 교회가 아닌)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천사의 복음"으로 전파되시는)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주님의 재림)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천년 왕국), 보라! 상급(수고한 자에 대한 포상)이 그에게 있고 보응(거역한 자에 대한)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다.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신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세우는 것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심이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음이다.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실력자들을 헛되게 하심이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불어 버리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구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하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셨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심이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으시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이심이 되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께서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천사의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모든 이들을 상징함이라 판단됨)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구나.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았다. 저들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여자(바벨론 음녀)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14만 4천"이 "천사의 복음"을 듣는 자들임을 가리키는 듯)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

("천사의 복음"으로 사탄의 모든 거짓말
곧 바벨론이 마침내 무기력화됨을 가리키는 듯)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기를,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다" 하였다.

("천사의 복음"이 선포되어 바벨론이 무너지자 그 당연한 반발 또는 그 필연적 다음 순서)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인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기록하라. 지금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니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이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하셨다.

(이로써 구원될 자는 다 구원됨)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지시고 있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으신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말하기를 '그 낫을 휘둘러 거두십시오.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습니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자 곡식이 거두어졌다.

(그 다음 남은 순서는 필연적인 하나님 심판)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날 선 낫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날 선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말하기를, '그 날 선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다' 하였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는데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1600 스다디온에 퍼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오직 "소리"일 뿐이다.
'소리'에는 눈에 띌 아무 '형상'도 없고
오직 전달하는 '메시지'만 있을 뿐입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26년 4월 23일 목요일

참고ㅡ우리말 성경 번역 잘못된 것

 잘못된 우리말 성경 번역(히브리서 1:8)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므로 모쪼록 첫 인상을 구기지 않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작업에 임함이 상식인데 그렇지를 않은 것 같으니 늦게나마 이를 지적하는 것이다.

바른 번역은,
"아들에 관하여는 '창조신이여 너의 보좌가 영영하며 네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다'"(히 1:8)
이유는,
성자 하나님에게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시니까.

잘못된 번역은,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개역개정)

밑도 끝도 없이 "규"가 무엇이란 말인가! 철저하게 감수를 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린다는 이런 흔적이 웬 말인가! 성경이
라면서 더군다나 번역을 한다면서 이 정도 관심뿐이었던가! 개탄스러운 일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개역한글)

영역은,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KJV

"But about the Son he says, “Your throne, O God, will last for ever and ever; a scepter of justice will be the scepter of your kingdom."  NIV(2011)

영어 셉터, sceptre(영국식) 또는 scepter(미국식)는 왕이 공식 석상에서 손에 쥐는 화려한 장식의 지팡이인 '왕홀(王笏)'을 뜻한다. 왕실이나 제국의 주권, 통치권, 권위를 상징하는 레갈리아(왕의 상징물) 중 하나. 
• 주요 의미: 왕홀, 지휘봉, 왕의 권위, 통치권.
• 유래: 고대 유목/목축 민족의 권위를 상징하던 목동의 지팡이나 갈고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ㅡ나무위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성경을 읽으시는 중에 혹 이같은 오류를 발견시
이 페이지 댓글 란을 통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6년 4월 22일 수요일

"바벨론에서 나와 그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 신학"(계 18.4)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아래와 같은 것이니 에덴 동산에서의 사탄의 거짓말 속성 그대로 드러나진 것.

1.■   "영적 죽음"이란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림. 성경에는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결코 쓰는 법이 없고 따라서 그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도 믿고 구원되어야 하는 만인 상대의 구원의 메시지인 까닭에 성경이 어려운 낱말이나 개념으로 구성되어질 수 없음을 모든 사람은 명심해야.
2.■   신학자들이 말해 온 소위 "대신 죽음"은 3위1합(종전의 "3위1체") 또는 성령에 대한 무식무지의 결과다. 성경에서 주님은 "성령의 계시"(눅 10.22)만을 강조하시어 성경 이해는 학문에 속하지 않음을 경고하셨음에도 이에 유의하지 않음으로써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이런 육체로서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요 16.7) 하신 대로, 육체로 계실 때는 유대 땅 갈릴리로 한정되어 계셨으나 지금은 성령으로 계시니까 한 날 한 시 지구상 그 어디든 우리 각자와 함께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계심이다. <사람>으로서 그렇게 계심이다. 이 "사람"이시란 '사실'에 주목해야. 이 점 우리 각자 항상 의식해야. 다만 영으로서 하나님(사람의 영이 아니신)이시란 차이뿐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심으로서의 성령이시다. 즉 예수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계심이다. 고로 "대신 죽으심"이라 함은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 바로 이와 같이 성령으로 친히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시어 내 안에 오시니까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남", "거듭 남(다시 남)", "구원 받음", "성령 세례", "성령 받음",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이라 하는 것.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심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요 그래서 스데반이 뵈웠다는 것(행 7.55)이고 성령으로는 한결같이 당시 스데반 안에, 당시 모든 믿는 자 안에, 지금 내 안에, 여러분 각자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후 그 시각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고(고후 6.1)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약속하신 그대로다.
3.■   로마서 7장(24절)을 바울 사도 자신 즉 믿은(구원 받은) 후의 보편적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마귀의 거짓말인 것.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 그대로의 자기 심령 상태를 어처구니 없이 "구원 받은" 자로 착각함으로써 이런 자기 체험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몰지각의 극치인 것이다. 2.■ 에서 설명했듯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지 여부 부터 최우선으로 확인해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특징은, <회개> 없이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인위적'  교리 일변도. '성경적'인 것은 회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믿어회개→물 세례→죄 용서→성령 세례(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심ㅡ고전 6.17). 바벨론 신  학은, "믿어→물 세례→죄 용서(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정)→주님 내 안에 오셨다(고 스스로 인정). 회개 없어 죄가 그대로인 추악한 자리에 주님이 임하여 오실 리가 만무. 따라서 로마서 7장(24절)이 그들의 매일의 악몽이 될 수밖에. 그러면서도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그래도 나는 구윈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소름끼치는 종교적 환각에 빠져 있어.

죄인을, 죄인 그대로를 구원하는 것 즉 영생 얻게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닌 것이다. 지은 것은 죄 밖에 없는 나임에도 다시는 죄 짓지 않겠다는 나의 회개를 받아 주시는 것이 "은혜"이고 그래서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거룩한 자로 새로이 창조해 주심이 "은혜"인 것이다.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나와 주님은 끝까지 별개외 존재란 뜻으로 그 죽으심이 일회용으로 끝나는 의미이지만,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셔 나와 "하나" 곧 "한 영"이 되어 계실진대 그 죽으심은 항구적인 결과로 맺어지는 완벽한 것이라 나의 "죄의 몸이 파괴됨"(롬 6.6)은 철저하게 지속되므로 롬 7.24 같은 비명은 아예 생겨날 수가 없음을 알아야. 물과 기름 사이라 한데 섞일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반드시 둘 중 하나다.
4.■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롬 2.6), "행위대로 판단하시고"(벧전 1.17)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행위대로 심판 받는데"(계 20. 13), 바벨론 신학은 이를 완전 무시, 마치 믿음 유무로만 심판하시는 것처럼 성경을 왜곡함이 도를 넘는다.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바울 사도는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9)임을 분명히 하였고 동시에 문제점도 지적했으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1,12) 한 것. 선을 행함이 영생 길이기는 하나 이 근본 문제 해결 없이는 즉 "죄에서의 구원"(마 1.21) 없이는 아무리 선을 행한들 의미가 없음이니 아담 범죄로 인해 근본부터가 죄인이니까! 그래서 이 근본 문제 해결이 연이은 주제가 된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3, 
24)는 결론. 그 다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내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은혜에 의한)만이 유효함을 밝힌다. 여기서 바벨론 신학의 방해꾼 사탄은 그 특유의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통해 뒤죽박죽을 시도한다. 즉 "행함"과 "믿음" 관련해서다. 새 창조 즉 구원 받음에서는 하나님의 단독 창조이시니까 당연히 우리의 행함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를 휙 돌려 구원된 후에도 여전히 필요치 않다는 뜻인 양 둔갑시킴이다. 이미 바울은 첫머리 말을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계명,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고 못박았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일이니 하나님 말씀이 이랬다저랬다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근본 문제(아담 범죄로 죄인됐으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를 해결했으니 이제는 본디로 돌아가 의와 선을 행하기만 하면 종결되는 것이다. 당연히 "참고 선을 행함=영생"이 아닌가. 선을 행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 구원 받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함으로써(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선을 행함인 것이다.
5.■  "일단 구원 받으면 그 구원은 영구 불변"이라는 황당무계 거짓말만 믿는 것이 바벨론 신학. 로마서 7.24의 왜곡된 해석이 낳는 당연 결말. 바벨론 신학을 벗어나는 것이 "그 죄", "그 재앙들"에서 벗어나는 지름길.
6.■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심을 강조하지 않아ㅡ주님 다시 오심의 이유를 몰라. "영적 죽음, 운운" 따위 소리만 하는 이유.
7.■   3위1합(종전의 "3위1체")의 뜻을 몰라ㅡ"성령"의 의미도 따라서 설명 못함. 이런 것이 바벨론 신학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자(the sexually immoral), 우상 숭배자(idolaters), 간음하는 자(adulterers), 탐색하는 자[남색하는 자](men who have sex with men), 도둑(thieves), 탐람하는 자(the greedy), 술 취하는 자(drunkards), 욕하는 자(slanderers,  중상하는 사람", "비방하는 자", 타인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 또는 말로 헐뜯어 명예를 훼손하는 자), 토색하는 자(swindlers, 사기꾼)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 너희 중에 이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고전 6.9~11).

"저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은 것이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들에게 응하였다"(벧후 2.20~22).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21세기 진리의 철옹성/鐵甕城


3위1합 또는 합1(종전의 "3위1체")과 3운법칙은 상
호 검증 관계에 있으므로 둘 다 반드시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3위1합(또는 합1)은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 애당초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3위1합(또는 합1)이 상세히 알려지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진실입니다. '3위1합'의 의미 또는 특징이 완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즉 왜 "3위"로서 "1합"인가 그 의미가 명명백백 밝혀졌기에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3위"의 뜻이 그 분명한 특이성을 갖추고 있으니, 다름아니라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둘이 "합하여" 하나로서 존재하고 기능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둘은 복수를 의미하면서도(둘이 '합한 것'이니까) 동시에 3인칭 단수(둘이 합하여 된 '하나'이니까)로 지칭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해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기존의 짝을 이룬 '갑'이나 ''이 아닌 '병'으로서의 새로운 위치를 인정 받음입니다. 이 내용은 주님 친히 하신 말씀을 비롯해 성경에서 모두 나오는 것이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셨고, 이렇게 "하나"로 계심을 "성령(보혜사, Comforter)"이라 하시면서 "우리"(요 14.23/창 1.26)라 하셨고 또한 "그"(요 14.26/15.26/16.7)라 하신 것입니다. 그 "우리" 안에 주님 친히 포함되시나 "나"라고 아니하신 것은 아버지와 합하여 계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 역시 주님과 "합하는 자로서 한 영"(고전 6.17)이라 하는 것이니, "3위1체"를 "3위1합"이라 함은 이 성경 용어를 따른 것이기에 올바른 표현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3위1체"라 함은 몸을 가리키므로 "한 몸"(창 2.24)에는 해당되나 "한 영"과는 어긋납니다.

"3위1합"이 만유의 기본 원리라 함은 오늘날 회자되는 양자역학(상보성의 원리)의 등장에 정확히 때 맞춘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때 맞추어 주신 것이라 확신합니다. 파동성과 입자성 이 두 미립자 쌍둥이의 귀여운 놀음놀이가 "3위1합" 꼭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양자 중첩", "양자 얽힘" 현상은 "3위1합"에서의 "1합"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미립자는 동시에 관측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써는 전체가 설명되지를 않습니다. 이는 이 둘이 "1합"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동시에 나타나게 되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뜻이 되어버리니까!

3운법칙은 이 특이성 즉 닐스 보어가 강조한 대로의 "contraria sunt complementa, 
상반 곧 상보
"를 그 형태로써 마치 그림 크리듯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음을 생명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림"이냐. 이 또한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하나님 친히 나타내신 "표적과 기사"의 성격을 유감 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만인 상대의 구원이니까 쉬운 그림 이상으로 진실ㆍ진리를 일반 대중에게 설명하여 나타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3위1합"은 3운법칙을 구성하는 기본 바탕이 되어 있고 3운법칙은 "3위1합"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例示가 되기에 이 둘은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의 엄연한 실존/實存의 절대 부정 못하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오늘날 노아 홍수의 하나님 심판을 비웃고 아담 이후 인류가 천년간(노아까지 포함하면 1,500년) 천년 가까이 생존한 역사적 진실을 경망히 부정하는 몰지각을 거뜬하게 일소시키는 작업을 하기도 하니 적극 홍보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따라서 왜 아담 이후 인생들이 천년 가깝께 장수했던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기도 합니다. 아담이 영생하는 신령한 몸 즉 초자연계 육체로 창조하셨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로써 무식하고 미련한 인생들이, "왜 선하시고 사랑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면서 인생들에게 이런 모질고 몹쓸 인간고를 주셨나? 이런 하나님을 어느 바보가 감히 믿으려 하겠는가?" 했었던 일체의 의혹을 깡그리 말소시켜 주는 것이기에 그러합니다. 사탄의 바벨론 신학 그 사악한 거짓말을 벗겨내는 유일한 도구이니 적극 활용합시다.





2026년 4월 20일 월요일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나의 기쁨과 평강이 되어

"외모(겉모양 즉 세상에서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평판)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마 23.9).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우리로 말하면 "어버이"시나 또한 "어버이" 그 이상이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그 어떤 어버이도 따라가지 못하는, 비할 바가 아니신 유일무이의 가장 이상적 어버이상/像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 "품속"에서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저 막연한 우리의 구원의 대상 정도로 알다가는 구원마저 그 맥을 끊어 놓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약 4.8).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과 비례하여 내게 가까이 하신다는 것이니 주님께서도, "나를 보내신 이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다>"(요 8.29) 하심으로써 인과 관계가 명확하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의 동반자이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더군다나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나는 주님의 삶을, 주님은 나의 삶을 사시는 관계에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으레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이시고 선하시니 인간처럼 하지 않으신다 가볍게 인식하기 쉬우나 실상은 이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ㅡ마 7.21/"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다"ㅡ요 4.34) 우리 "양식"이 되는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이룸"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양식을 취하지 않을 때 영양실조로 목숨까지 잃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들이 피하지 못했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분을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그러므로....<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것이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다"(히 12.25-29).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해타산으로만 따지는 모든 것을 깨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킴으로"(고후 10.5), "성령의 충만을 받아"(엡 5.18)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충만케 되고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롬 15.13)!


2026년 4월 19일 일요일

진리를 사는 자 늘 평안 누리고 그 기쁨 주 안에 늘 넝쳐나노니

노아의 아라라트 산(5137m) 


노아의 950년 생애 도표는 가인과 라멕(창 4.23, 동명이인으로 '셋' 혈통도 있지만 여기는 '가인'계) 살인 사건 이후 인간 생애의 법칙을 하나님이 정하심으로써 그려지는 것으로 연대순으로 하면 유일한 인류 최초의 것입니다. 죽는 때가 아니면 사람이 절대 죽지 않도록 정하신 것이 이 3운법칙입니다. 이런 모든 인생 중 예수님만이 유일무이의 예외이시니 아담은 영원하므로, "마지막 아담"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아담이 죽은 것은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스스로 먹어 죽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먹지 말라 하셨는데 불순종하여 거역한 것. 모든 불복종이 <자기 중심>이므로 죄와 악입니다. <상대 중심>이 의()로움과 거룩함()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할 터이니 너는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나만을 위하여라" 하셨는데 이같이 '약속'과 '명령(계명)'을 동시에 하신 고로 아담의 범죄는 "언약을 어김"(호세아 6.7)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이라 하셨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나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읗 주심과 맞물립니다. "그가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이 어떤 것임)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고 한 그대로입니다.

고로 자기를 위함은 어떤 경우든 통하지 않고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상대방 중심>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면 <상대 중심>이요 <상대 중심>이 아니면 <자기 중심>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히 12.14)이라 한 이유밉니다.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입니다"(고전 6.17). 이것이 우리의 구원됨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됨 즉 "합일/" 또는 "일합/一合"(종전의 "3위1체" 개념)이 되는 필수 요건이 따르는 바 그것은 "교차(엇바꿈, 맞바꿈) 소유"입니다.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가리켜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7.21),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아버지의 것"(:10)이라 하셨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 14.10)이라 설명하신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갑은 을 안에 있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어 갑은 을 안에서 살고, 을 또한 갑 안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것 되어 을은 갑 안에서 사는 것이니 말을 바꾸면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맞바꿈의 삶입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가 됨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구원된 사람은 다시는 자기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의 삶인지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주님은 또 내게 그러하시므로 마치 나만이 주님을 모심과 같이 되어 사람마다 그러하니 주님은 만유에 충만하시기 때문. "공동"의 개념과는 별개이니,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은 내게 '공유'가 아닌 '전유/
專有'와 같은 의미이십니다. 몇%가 아닌 100% 전부가 나의 소유가 되십니다. 그래서 365일 24시간 내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게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이 그러하므로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신 것. 나만 아니라 믿는 자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하게 그러하십니다.


따라서 구원 받았다면서 이전처럼 여전히 자기 중심인 사람 즉 <나란 존재가 없고 오직 주님의 소유라는 의식>만이 살아 있어아 하는데(그대신 주님 친히 나의 소유, 나라는 존재가 되어 계심)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자기 기만으로 일관했다는 명백한 증거인즉 철저히 자기 중심을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풍성한 삶을 적극 선전할 일입니다. 


https://namu.wiki/w/%EA%B0%81%20%EC%A7%80%EC%A0%90%EB%B3%84%20%EC%B5%9C%EA%B3%A0%EB%B4%89%20%EB%AA%A9%EB%A1%9D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똑바로 딛고 서야 할 우리의 의치

아래 눅 9.57~62 말씀을 이전에 여러 번 게시글로 올렸으나 이 말씀을 이제 다시 대하니 같은 말이지만 또 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누가 말했을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씩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 이 분만 따라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다 생각했던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는 모르나 주님은 "마지막 아담" 즉 인간의 대표로서 인생의 참 실상을 정확히 밝혀 주신 것입니다. 자연계 생물은 하나님 창조해 주신 그대로이나 인간만은 아담 범죄로 자기 고유 영역인 신령한 세계로부터 전락해버려 동물성 육체의 물질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비극의 주인공" 인생. 우리는 똑바른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저로 먼저 가서 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자 이에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신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창 2.17) 하신 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후대들이니 "죽은 자"이지 그 외 달리 무엇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 '산 자'가 아닙니다. '산 자'로 착각하지 맙시다. 모든 세상 사람이 '산 자'로 스스로를 알고 있는데 헛다리 짚는 정도가 아니라 낭떠러지로 수직 하락하는 위급한 수준에 처해 있음임을 알아야 합니다. "살려 주시오!", "살려 주시오!" 부르짖어야 또 부르짖어야 하는 몹시 다급한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임을 의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절박하고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는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심히 궁박한 처지입니다. 매일 매순이 실제 그러합니다. 이 동물적 육체는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이 경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ㅡ즉 앞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자 살리는, 살려 눟고 보아야 하는 절박한 순간에, 즉 전쟁 중의 군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수술 환자를 앞에 놓고 딴전을 피우는 집도의/執刀醫와 같은 행위가 용납될 리 만무합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영적 수술과도 같은 "성령으로 다시 나는"(요 3.5) 일입니다. 사람 목숨은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더욱 더 위급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바로 그런 절박한 순간에 서 있는 집도의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초심/初心 자세를 한 순간도 잃지 맙시다!


2026년 4월 14일 화요일

주님과 한 영(고전 6.17)으로 연합하여 있는 나

주님께서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과 똑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으로서는 지금 우리 각자와 함께 마치 사람으로 계시는 것처럼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니 똑같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어머니 하나님"도 당연히 존재해야 마땅하다며 마귀 노릇을 하지만(이렇게 말함이 마땅한 것은 이런 언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ㅡ왜냐면 주님 친히 "아버지"라 하셨으니 그대로 수용하면 되므로)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는 모든 표현이기에 그런 것. 아담은 남성이니까. 그냥 "어버이"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인간은 성별이 있기에 더욱 어색하므로.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시라 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더 이상 성별이 없으니까(눅 20.35).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의 성별인 것입니다. 신령한 몸은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다운 아담의 자식 생산 방법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적 육체의 낙이라고는 단순하고 기계적이라 식욕과 성욕뿐이나 신령한 몸의 쾌락은 한낱 "몸"에만 한정되지 않는 영적ㆍ정신적인 것을 총망라하는 무궁무진의 다양성인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마 16.28)가 비록 잠시 잠깐이나마 전개됨을 본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있습시다" 란 말이 부지중 튀어나온 것도 그 단적 증거입니다. 디 엘 무디(1837ㅡ99)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사랑의 파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 그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 "주님, 이러다가는 제가 죽습니다. 멈추어 주십시오!" 하는 간청이 터져 나왔고, 찰즈 피니(1792ㅡ1875)도 처음 믿음의 결단을 내렸을 때 그렇게 숲속에서 장시간 기도하고 자기 사무실(변호사)에 돌아와 홀로 앉아 있는데 "사랑의 파도(무디와 같은 표현)"가 물결쳐 오듯 밀려들었다고 합니다. 피니의 경우에는 이 때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옆에 서 계심을 느꼈고 피니는 그 발 앞드려 지난 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자백하며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사람마다 그 표현과 체험이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 앞에 계십니다. 이것만은 불멸의 진실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여성 생애 3운법칙(한국서 22년간 봉사한 서서평 미국 선교사)

 










여성 생애의 3운법칙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LP)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그 활동기가 시작되었음을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가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성 생애 3운법칙 적용 사례를
여기에 가끔 올려 놓겠습니다.
위 제목에 분석 여성의 이름을 올려 두겠습니다.)




서서평 (Elisabeth Shepping, 1880~1934
ㅡ54세에서 3개월 모자람)
•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트라우마.
• 조선 와서 서구 생활 완전 포기, 무명 저고리·고무신 신고, 월급 전부를
 가난한 이·한센병 환자·고아·창녀들에게 씀.
• 유품: 동전 2개 + 찢어진 담요 반쪽. 장례식엔 천대받던 사람들이 통곡.
•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문구처럼, 부와 명예 포기하고 무상·고뇌 속 헌신한 삶.

셰핑은 간호사로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미국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했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간호사로서 셰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선교사로서 간호, 신학, 교육에 대한 지식을 결합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그녀는 한국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결국 그녀가 32세 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2년 전인 1910년에 일본 제국이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정부와 대부분의 사회는 약자들을 더욱 방치했다. 그 결과, 구걸하는 사람, 한센병 환자, 병든 환자의 수가 증가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셰핑은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1911년에 지원했고, 1912년 2월 20일 32세에 선교 여행을 떠나 여생을 그곳에서 봉사하는 데 바쳤다.
간호
1912년부터 1934년까지 셰핑은 광주, 군산, 부산, 서울 등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일했다. 특히 셰핑은 "여성, 과부, 고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셰핑은 간호 활동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녀는 광주제중원, 구암 예수 병원,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한국의 다른 병원들에서 일했다. 간호사로서 그녀는 간호사들을 훈련하고 감독하는 책임도 맡았다. 셰핑은 한국에서 건강과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간호 교과서를 출판하고 번역했다. 그녀가 저술한 간호 교과서 중 일부는 간호 교과서, 실습 간호 연구, 간호 지침서, 단순 위생법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1923년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0년간 회장으로 재직, 대한간호협회의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에 성공했다.
교육
간호 외에도 셰핑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한국에 학교를 설립했다. 예를 들어, 셰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한때 매년 3~4만 명의 여성을 교육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한일장신대학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설립부터 그녀의 사망까지, 셰핑은 이 학교에서 5~6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그녀가 다룬 주제 중 일부는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에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의학과 간호도 포함되었다. 교육을 장려하는 동안, 셰핑의 주요 헌신은 여성들을 기독교로 교육하여 효과적인 성경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셰핑은 '이일'이라는 여성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셰핑은 누에를 키우고 여성들에게 바느질 방법을 교육하여 학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낮에는 교사였지만 밤에는 전도 행사를 열고 여성들을 전도사로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더 강한 정체성을 확립, 성경을 전파하는 데 힘을 얻었다.
한국 문화에 동화하기를 힘써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달리, 셰핑은 한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한국 사람들과 동일시했다. 셰핑은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증명된다. 그녀는 전통 한국 의상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한국의 풍습, 문화, 신념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셰핑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셰핑은 한국에서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34명의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고, 13명의 딸을 입양했으며,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고, 함석 지붕이 있는 흙집에서 살았다. 이는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와 분리된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았던 선교사들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셰핑은 자신의 이름을 서서평으로 바꾸고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립했을 때도 오직 한국어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다. 셰핑은 1934년 사망할 때까지 22년간 한국에서 봉사했으며,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유산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대한 금지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셰핑은 닐 성경학교(앞서 언급)와 같이 그녀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문맹이었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여성 교육은 제한적이었고, 셰핑은 한국 여성들에게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고자 했다. 닐 성경학교는 그 지역의 여성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였다. 셰핑은 여성 교육과 문해력을 증진함으로써 여성 계몽의 사심 없는 선구자로 여겨졌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모임은 셰핑을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다.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하는 삶을 다룬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었다.
(이상 전문, "서서평" 관련 인터넷에서 옮겨 옴)


이 서서평 선교사는 FS(아브라함형)에 해당되어
활동기가 30년(53×4/7)입니다. 생애 연보가 약사이기에 자세하지 않아 언제부터가 활동기 개시인지는 불분명하나 이전의 카톨릭 신앙을 버리고 장로교회 나가는 동료 간호사 소개로 "큰 깨우침을 받았다" 했고 그 후에 의료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깊어졌다 했으니 그 때부터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제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뿐

무엇보다 중요한 자녀 양육에 공을 들여야 하는 여성의 생애는 남성에 비해 대외적 활동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파쇼모 생애 도표상으로 드러나는 그 형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특점을 지닌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독신으로서 특정된 일에 몰두할 때는 당연히 그 윤곽이 선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였고 맞딸은 어머니처럼 모든 면에 출중했다는데 그러나 율곡울 낳을 때부터 신사임당의 활동기(LP)가 시작되었음이 드러나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한 3년간)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가 그 활동기 시작이었음이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는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승려가 되는 그 때부터가 아닌 것이다. 이 3운법칙을 파쇼모 즉 "신의 법칙"이라 하는 이유다. 점복(점술)이 아닌 것이다. 이런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기는 유사이래 처음이다. 창조주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증명인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이 "마지막 때"에나 나타날 수 있는 "표적과 기사"(요 4.48)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바벨론에서 시급히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계 18.4) 새삼스럽게 "천사가 가진 복음"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시는 것과 정확히 맞물려 있어 설레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삶울 살았는지 아니면 그 둘이 그렇게 될 줄 아시고 그렇게 일정 규격에 맞추어 주셨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제니 린드는 18세가 되던 1838년에 데뷔하고 
11년 후인 1849년 29세에 무대를 떠난다. 
그 때부터가 그 생애의 활동기. 
일반적 개념과는 완전 거꾸로다. 
그 스스로가 기꺼이 무대를 버려 
후련하다는 듯 
털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3운법칙을 
주저 없이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확실히 근거 있는 이유이다. 
인생들이여, 시끄럽다. 
여러 소리 말라. 
하나님 계시는 것 
하나만 알아도 족하다.
하나님 말씀 듣고 
영생 길만 찾으라!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유일한, 오직 한 가지 이유이니까!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연을 
주변에 널리 알려라!
혼자 영생하리라고는 
꿈에도 마음 먹지 말라!
전도하지 않는 자에게 영생은
아예 해당하지를 않으니까!







왜 구원 받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