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2일 화요일

 게재물 당분간 쉽니다




그럼 결과론적으로 말해 자기 확대, 확산인즉
자아중심이 아니냐 하겠지만
아내 사랑은 자기 사랑이라 함같이(엡 5:28)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으니
자기 부인은 우리를 위함이니 그 우리 속에
내가 포함된다는 뜻이고 반면에 자아중심은
우리를 전혀 고려함 없이 오직 자기뿐.
즉 자기 확대, 자기 확산은 한 몸됨의 이치.
한 몸이니까 모두 동고동락(고전 12:26).
허나 자아중심은 한 몸의 원리를 무시.
바로 이 차이에서 오므로 근본적으로 별개. 















2022년 7월 10일 일요일

.

 

"천사가 가진 복음"과 DPA pix




아래 글에서 "사탄의 기득권, 운운"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악한 자"에게 무슨 권익이냐 하겠지만

사탄이 <순진한> 아담 부부를 속여서가 아닌

즉 사탄만의 일방적 죄가 아닌 쌍방 범죄이므로

인간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어 구원하시자면

사탄 역시 같은 수준의 여유 또는 "기득권" 등이 

쌍방에 대한 공평공정 차원에서 있어야 하니까.
이것이 또한 하나님의 철저하신 원리원칙주의.









.

 



아무리 구원의 진리지만 회개 없는 악인에게는 이를 숨기시는 하나님

그러나 악인인지 의인될 사람인지 우리는 판별 못하는 것이니

네피림을 구별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2022년 7월 8일 금요일

20세기 이후 현대물리학의 최종 결론은 다름아닌 닐스 보어 가문 휘장의 <자신이 직접 그려 넣은> 태극 문양



닐스 보어의 작위 수여도 그의 과학적 업적 때문.
그러한 가문 휘장에 당당히 상보성 원리를 설명하는 라틴어 문구와
중국까지 와서 심취했다는 태극 문양이 상징하는 음양론
다시 말해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 COMPLEMENTA).
보어같은 과학적 관찰에 통달한 인물의 식견에서
그러한 항구적인 결론이 나왔을진대 이미 최종 결론은 내려진 것이다.
만약 음양론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취급했다면
그런 일을 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때문에 닐스 보어는 물리학자이기보다 
철학자로 불리기를 더 좋아했다는 말이 돌 정도.
짝의 법칙에 누구보다 진일보했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현대 과학적 기여도에서 그는 
아인슈타인보다 앞섰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과학을 섣불리 대하는 이들이나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 내듯이
동양의 음양론을 한낱 미신처럼 여기고 제 잘난듯 하지만
이런 과학계의 대가/大家들은 대물/大物을 알아보는 눈이 남다른 것이다.
그러나 음양론도 짝의 법칙에 미흡하기는 
상보성 원리와 같은 수준이지 더 나을 것도 없다.
노자만이 "삼생만물/三生萬物"이라 하고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라 했으니 3위1체의 법칙을 가리킴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짝의 법칙(pairs' principle, trinity law, the Universal law)에 의해 
정확히 해명되어 이해되어서야 노자의 그 말이 비로소 이해된 것.
고로 "마지막 때"의 다니엘 예언이 "봉함/封"되었던 것처럼
노자 역시 일종의 "봉함" 예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보어가 짝의 법칙의 과학적 함의/含意를 충분히 인정했으니
우리 또한 여기에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2022년 7월 7일 목요일

.

니 


천사가 다니엘에게 고한 "세상 끝" 예언은
2차에 걸쳐 연거푸 "봉함"되어 있음을 강조했고(단 12:4,9),
이 예언에서 천사의 괴이한 
표현의 언어 구사로서의
"한 때, 두 때, 반 때"도 2차에 걸쳐 연거푸 강조되고 있어
(7:25/12:7) 간단히 요약해 의미 심장한 
이 언어 유희는
다니엘서 12:4이 콕 집어서 지적한 20세기
(오늘날 20세기를 당해보니까 비로소 알게 되는) 이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니 다음아닌
숫자로 표기된 
"짝의 법칙의 도식" 즉 1, 1×2, 1÷2.

1은 1시/始 곧 처음 하나에서 출발한 2원/元  짝이란 뜻으로
짝은 반드시 성질이 정반대라는 특징이 있어  1×2, 1÷2.
그러나 처음 1에서 시작했은즉 2가 도로 1로 돌아가 1을 구성,
따라서 현재 짝을 이룬 2와, 2가 1이 된 그 1이 합치면 3.
그리하여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이라 하는 바, 
이는
노자의 "3생만물
/
生萬物"(짝의 법칙의 또다른 표현)과 일치. 

신구약 성경의 터전은 아시아 대륙 위치상 세계 중심이나
복음 전파가 서쪽으로 향하여 동쪽으로 돌아 오는 형국이므로
"기독교는 서양 종교"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기에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인 동양인에게 소외, 배척을 당했으나
이 노자의 도덕경이 그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 운행의 기본 법칙이 다니엘 예언 무렵
거의 같은 시기 역시 20세기 이후 겨냥의 "봉함된" 예언으로
정체 불명의 노자로 인해 존재애 왔기 때문. 허나 존재는 하되
오늘날까지 "짝"이라는 것이 만유의 법칙됨을 몰랐었기에
(오늘날 21세기에 짝의 법칙이 발견됨으로써만 가능했기에)
그래서 다니엘 예언과 더불어 "봉함 예언서"라 하는 것.


노자가 설파한 "도/道"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킴이니
"도생일/道生一"은 비로소 창조를 시작하신 그 시
점/時點
즉 홀로 존재하시다가 피조물과 관계를 이어가신 때를 말해
노자 주창/主唱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함께 
노자를 인간이 아닌 천사의 
일시적 화신으로 보는 이유.
"무위자연"이든 "작위/作爲"든 창조주를 제외시키면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궤변, 횡설수설이기 때문.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인데, "작위" 없이 무슨 문명 발달인가.
야만인은 벌거벗은 채 샅만 가리고 천만년 살란 뜻이 아닌가.
고로 오직 창조주를 전제해야 창조하신 그대로 따르란 뜻으로
"작위"를 배제하라, "무위자연"을 따르라 역설할 수 있는 것.
여기서 "창조"란, 처음 창조든 새 창조든 두루 엮어지니까.


그렇다면 노자의 사명은 다른 그 어느 무엇에도 있지 않고
다니엘 예언의 "봉함"이 풀려지는 이 20세기 이후에서야
각광을 받을 다니엘 예언의 중요한 보조 역할에 있는 것.
다시 말해 짝의 법칙의 "예언"적 권위를 확립해 줌인 것.
양자역학,상보성 원리 등의 현대 물리학과 맞물려
가히 그 "예언적"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것.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이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논하면서도
"창조"니, "창조신"이니 하는 것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에 
짝의 법칙이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는 21세기 지향의 
다니엘 예언과 관련시켜 "봉함 예언"이라 하는 것.
앞서 지적한 "서양을 상대한 성경"이란 오해 불식 차원에서도.
노자 도덕경은 짝의 법칙 관련해서만 유용하게 활용될 뿐,
그 외의 것은 오직 이를 위한 들러리 구실임을 알아야.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