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31일 목요일

인생이여, 그대 이름은 비극의 주인공이니라/이 비극에서 탈출하지 않고는 존재 의미가 없다

인생이여, 그대 이름은 비극의 주인공이니라
이 비극에서 탈출하지 않고는 존재 의미가 없다

동물들도 악령이나 천사를 알아본다.
눈에 보이기 때문인데 현재 우리 인간만은 그렇지 않다. 
기계일 뿐인 카메라 렌즈에도 잡히는 형체를
오직 인간의 시야에만은 들어오지를 않는다.
5관이 작동을 않으니까 인식 작용도 당연히 굼뜨다.
보이지를 않으니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코 지내기가 일쑤다. 나를 해치려는 악령 원수들까지
인식 못하니까 이런 황당한 일도 없다. 
이 무서운 비극은 아담의 범죄가 불러들인 재앙이다.

하나님은 형체가 없으신 영이시므로
형체를 갖춘 피조물로서의 영과도 또 차원이 다르시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과의 대화는 가능하여
빛으로 계시나 그 음성을 들으므로 하나님과 충분히 통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인간은 그마저도 불가능이다.
무조건 보이지를 않으니까 마치 우리뿐인 양 착각하는 인생들.
고로 항상 이런 현실을 감안하여 
이중 삼중으로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을 이같이 속이는 결과를 빚지 말아야.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좌우지되지 않도록 마음을 써야. 
한시바삐 이 죽음과 썩음의 육체를 벗어나는 것밖에는
달리 수가 나지 않는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로는 한 시도 살 수 없는 것인데도
모르니까 태평이고 정상인 것처럼 태무심으로 일관한다.
알고보면 참으로 무서운 현실이다. 이 무서운 실상을 쉬지 말고 알려
성령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어 이 비극을 탈출하도록
는 것이 사람된 도리의 대본/大本이다.











2019년 10월 30일 수요일

죽음을 생명과 맞바꾸는 또는 죽음을 생명으로 둔갑시키는 초대능력을 그대는 아는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듯이
이를 이사치사/以死治死라 한다.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는 방법이니
죽은 첫 사람 아담과 대칭으로 오신
마지막 아담” 안에서만 가능한 승리의 쾌거.
사탄의 이 세상 통치(하나님 백성들 핍박)를 역으로 이용하는
인생들 구원의 방법으로 전화위복시켜주신 것.
즉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움".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살리시는 주님의 죽으심이니
이 <죽음>을 짊어진(고후 4:10)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추구하다니!
이는 주님 안에서의 생명을 내다버리는 만행.
그리고 이런 종류의 고난은 받으면 받는 족족
우리에게 영광을 이룸이니(고후 4:17)
그러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승리의 함성으로 기염을 토하다.
이 가당찮은 하나님의 아들들의 기개/氣槪
천하를 휘덮고도 남음이 있다(氣蓋世).





2019년 10월 29일 화요일

성경은 영적 전쟁에서의 핵폭탄급 무기임을 알아야




자연법칙과 대칭되는 초자연계 법칙의 존재를
세계 최초, 인류역사상 최신으로 소개하고 있으니
어찌 과학 신서/新書가 아니며
이로써 모든 과학 체계를 총망라해서 다루고 있었으니
어찌 과학 총서라 못하겠는가. 
물질계 저너머 반/反물질계가 존재함을 처음부터 밝히고 있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으니
다니엘이 말한 바 20세기 이후를 겨냥한 예언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의 최고봉을 이룬다고 하리라.
현대 물리학의 총결산이라고 해야 할 양자역학은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요
아는 성경이 말하는 짝의 원리를
형체만 겨우 갉작거린 모양새이다.

2019년 10월 28일 월요일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완벽하고)
하나도 그 짝(짝의 원리를 따른 것)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성령)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다"
(이사야서 34:16)






 

주 예수 넓은 사랑 그 크신 은혜를

나 힘써 전파함은 참 기쁜 일일세




2019년 10월 27일 일요일

1908년 이후 이 세상은 완전히 악령들의 소굴(den)화/化돼 있다


1908년 이후 이 세상은 완전히 악령들의 소굴(den)화/化돼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둥지 틀자는 단 꿈 깨라ㅡ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참고:
1908년



SBP(DPA) p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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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마지막 아담"의 뜻은
아담의 육체가 영원히 내 육체가 된 것처럼
대칭 아담이신 주(인) 예수님께서
그 성령(성부 하나님과 하나되시어)으로
나와 함께 영원히 제2의 나 자신으로 사시는 것

아버지 친히 그 품에 나를 안고 나와 함께 계시니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있는 것
아버지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 하나님이시니(요 1:18)
그 안에 내가, 내 안에 그가 계시니ㅡ. 
"그 날에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 것이다"(요 14:20)





2019년 10월 26일 토요일

개나 소는 그 종류를 한 개체로 잡을 때 천사들의 나이보다 더 많다 하물며 하나님 형상과 모양인 인생이 이 지경인데 어찌 삶이라 하랴

하나님,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렇게 죽는 썩는 육체로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인생을 살라고 하셨는데 이런 인생 살자니 힘듭니다 그래서요
힘든 삶을 사느라고 저지르는 각종 연약함의 범죄이오니 하량해주시와요

내가 언제 이 세상 살라고 하였느냐 
도리어, 네 목숨까지 미워하고
사형수로서 십자가 형틀을 매일 지고
네 모든 소유를 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사형장으로 나가는 사형수가 무슨 재물이 소용이더냐
생명은 이 십자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인데
너더러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라고 할 리가 있느냐
지금은 천사든 인간이든 죽어가는 인생들 살리기 위해
즉 새 생명 탄생시키기 위한 산고, 진통의 때라
만물이 다 함께 이 산통(birthpangs) 중에 있는데(롬 8:22)
만유의 주 하나님도 친히 이 고통 가운데 위치하거늘(행 26:14)
어찌하여 삶의 낙을 꿈 꾸는 헛된 생각에 젖어 있는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구원이 직결되어 있다는 것은
<순종>이 구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범죄가 되고 이같은 비극이 온 것처럼ㅡ.
사도신경을 낭송하는 것은 종교행위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애지중지, 묵상하는 것은 
믿어 구원 얻은 자의 핵심 기본 자세입니다.
사도신경에 기록된 그 이상의 것을 알고 
매일 매시 순종의 생활을 영위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 하나하나는 다
(그렇다고 구약의 모세 율법까지 지키려는 이는 없겠지만)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사가 좌우된다 한 것입니다.

"사도신경" 같은 것으로 "믿는다"는 고백(말)만 하면
구원이 되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은데
이런 것이 구원 없는 전형적 종교 유형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 신인 사탄으로부터 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에 대한 물타기 작전의 일환일 뿐
그래서 거짓말로 속이기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단지 이 세상이 사탄의 소속이라는 증거만 될 뿐입니다.
거짓을 일삼는 사탄이 이 세상이 자기 아래 있다는
일종의 영역 표시인 셈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도 자기의 것을 만들어놓고
운영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벨론"
즉 천주교 그리고 다소간의 일부 개신교입니다. 

몌시야 예수님을 "나 위한 죽으심"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시자 사람("마지막 아담")이시므로
우리 위해 죽으심과 동시 나 위해 죽으심인즉(갈 2:20)
하나님 친히 이 나를 자기 전부를 다 바쳐 사랑하시어
나를 구원하셨다는 이 엄청난 사실을 믿는 것이고
따라서 나는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난 것처럼
이 놀라운 사실에 호응하여 나의 마땅한 자세를 취함이니
곧 나를 이처럼 사랑하신(요 3:16) 주님을 사랑하여
그 모든 말씀의 뜻이 나(우리)를 위하심인 줄 알아
그 분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이의 없이 100퍼센트 순종함입니다.
아이가 엄마를 믿고 순종하여 따름과 똑같은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생각하고 불복종할 때 아담의 범죄처럼 되고
따라서 아담처럼 그에 상당하는 보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만 받으면 모든 것이 종결인 양 착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제까지 잘못 배운 것입니다. 성경을 배우지 않고
종교를 배운 것뿐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친숙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대속, 구속이라는 말 그대로 
원상태로 회복되어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죄는 아담이 지은 것인데 우리까지 엮여 함께 휩쓸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고로 우리도 아담의 범죄 전의
상태로 돌아가 아담의 죄와는 상관이 없도록
아담으로 인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일체의 허물/죄는 용서 받고
범죄 전 아담과 같이 의인(더 다시는 죄인이 아닌)으로
새 삶의 출발을 시작하는 바로 그 뜻입니다. 
따라서 아담처럼 고의적으로 범죄할 경우
아담처럼 동일한 운명에 처해짐은 당연합니다. 
거룩한 천사들처럼 사랑 가운데 충성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악령들처럼 교만해져 범죄하면 악령과 똑같은 운명입니다.
천사와 악령이 우리에게 모본임과 동시 반면교사입니다. 

아담으로 인하여 현재 내가 자연계 육체로 있어 불리한 듯하나
구원자 메시야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내 안에 내 영혼처럼 계셔
그 자연계 육체라는 불이익이 충분히 상쇄되고도 남습니다. 
범죄 전 아담이나 거룩한 천사들은 우리처럼 이런 
육체적 고난 고통은 당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당하는데
그 대신 우리는 그들과 달리 직접적인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무한 영광으로 보상되니까 이 역시 충분히 상쇄되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친 아들들로서 
천사들도 우리의 판단 아래 있게 되니(고전 6:3)
신분이 높으면 그만큼 시련도 혹독하다는 뜻이니
우리로서는 불만이 없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크면 클수록 영광도 크니까(고후 4:17)  .



거짓 없는 불변의 법칙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명사다

하나님은 한 번 뜻을 정하시면 불변이고
거짓말하시는 것이 불가능하다(히 6:17,18)
거짓 없는 불변의 법칙이 창조주 하나님의 대명사다







2019년 10월 25일 금요일

기도 없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는다



기도 없이 하나님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일을 이루시기 때문.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와 같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것 역시 딱의 원리를 따름입니다.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하는
동시성의 양면성에 의
해서만 만사는 이루어집니다.






2019년 10월 23일 수요일

선악과 나무와 생명과 나무

선악과 나무와 생명과 나무

아담이 초자연계 몸이 된 과정: 
영혼 조성→에덴 동산 창설→생명과 먹음(영생)

아담이 도로 자연계 몸이 된 경로: 
선악과 먹음(불복종, 범죄)→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되어 자연계 존재









아담 부부가 선악과 나무 과일을 먹은 직후
생명과 나무 과일을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이미 이들은 범죄하여 죽음의 선고를 받아서
죄의 형벌로 죽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과를 먹음으로써 처벌 없이 생명에 다시 이르게 되면
법질서는 실종이 되는 것인즉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낙원(에덴)"(계 2:7),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천국)" 등

이 모두 초자연계 즉 반/反물질계를 말합니다.


2019년 10월 22일 화요일

ㅊ아는 바가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죽음에 대해 너무 안일한 생각을 한다
아는 바가 눈곱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로 간다는 둥, 완전히 인멸된다는 둥,
끝없는 윤회에 들어간다는 둥,
이 세상을 주름잡는 마귀가 조종하는 대로
천방지축으로 생각하고 결론 내리기 때문이다
만약 진실 그대로의 실상을 파악한다면
세상이 이처럼 살기 위해 바둥거리지 않을 것이다.






2019년 10월 20일 일요일

범죄/타락/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 믿음, 구원, 소위 "성령 체험" 등등을 앞세움에 있어

범죄/타락/멸망의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하나님 믿음, 구원, 소위 "성령 체험" 등등을 앞세움에 있어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지만
오늘날 "배도", "말씀 혼잡"의 원인은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각색하여
무엄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기만하고 주변을 오염시키는데 있다.
말씀 찬양의 시(詩)인 시편 119편이  
신구약 성경의 정히 중암에 위치함이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2019년 10월 19일 토요일

참고 견뎌 새 날을 기다리는 자 복이 있다



아담이 죽으면 우리도 죽고
아담이 살면 우리도 살고
아담이 욕됨을 당하면 우리도 욕됨일 뿐이고
아담이 영광스러우면 우리도 당연히 영광으로 빛날 것이고
아담과 우리는 한 운명공동체
이것이 몸과 머리 관계다
이것이 "마지막 아담"의 뜻이다. 













메시야 예수님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
이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인 것이다.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으로 나누어지는 이유다.
이런 빈 틈 없는 논리성은 완벽한 과학성을 말한다.
지금은 의 기간/期間이지 의 때가 아니다.
다시 말해 아담께서는 여전히 십자가 고난 중에 계시는 모습.
때문에 그 몸된 교회가 그 남은 고난을 마저 채운다.
때문에 사울더러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신 것.
이는 다시 말해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여전히 고통 중에 계신다는 뜻.
왜 나의 교회를 핍박하느냐“ 하시지 않은 의미이다.
그런데도 하나님 축복 받아 잘 살고 형통한다
모든 자에게 화가 있다머리이신 아담으로부터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만행이다우맹이다.
바벨론이다. ”거기서 나오라“(계 18:4) 하신다.
그러나 이제 곧 가 다가오고 있다.
머리를 들라너희 구속이 가까웠다“(눅 21:28).
 때문에 성경은 항상 "인내"를 강조한다. 
 참고 견뎌 새 날을 기다리는 자 복이 있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