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30일 월요일

성경과학(Biblical Science)ㅡ21세기 "첨단 과학"은 양자역학이 아니라 짝의 법칙

 









인과율을 아무리 주장해보아야

자연계 내에서의 인과 관계만 따지는 것으로 그치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과학적 표준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성경은 거시적(巨視的)으로 가시 세계와 불가시 세계로 나눕니다.

자연과학은 가시 세계에서만 미생물처럼 고물고물 움직입니다.

그러니 서로 말이 통하지를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자연과학자가 성경이 설명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안보이면 무조건 "없다"라는 것으로 아이 떼쓰듯 떼를 쓰는데 

그렇다고 볼기짝에다 철썩! 회초리 댈 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합니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과학이 바로 "성경과학"입니다. 

 

 

 



2020년 11월 29일 일요일

유성 중에서도 가장 밝은 불덩어리가 2020. 11. 29 오전 1시 34분경 낙하ㅡ시베리아 퉁구스 사건을 연상케 하지만

 



단지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는 큰 용이 떨어지는 광경이므로 

처음에는 둥근 불덩어리(화구/火球 형체로 접근하다가

지상에 근접해서는ㅡ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가 달라져)

낙하할 때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듯이 하며

긴 전봇대 모양의 광채 나는 물체가 지평선에 닿는가 하는 순간에

굉장한 폭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리듯 했다는 것.

열/熱과 광채와 진동을 동시에 느꼈다고 당시 목격자들은 전한다.



https://twitter.com/nhk_news/status/1332775847682592769


https://blog.naver.com/trinia/221494304599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 있는 자들의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관심사는 눈이 감겨 주변사방을 더듬거리는 세상 사람같지 않고 아버지 하나님처럼 오직 하나 밖에 없으니

 






BIBLEGATEWAY:
https://www.biblegateway.com/verse/en/Luke%2010:41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오직 하나이니

오직 하나이니ㅡ

아들로서 아버지의 상속자로서

만유의 상속자(주인)로서

아버지의 관심사 오직 그것뿐이니




2020년 11월 28일 토요일

가장 이상적 삶의 방법이 자기 부인이지만 온통 세상이 자아중심이다보니 우선 먹기에 곶감이 달아 자아중심으로 살고나 보자는 맹목(盲目)에 세상이 절여 있어 힘들 뿐 [출처] 가장 이상적 삶의 방법이 자기 부인이지만 온통 세상이 자아중심이다보니 우선 먹기에 곶감이 달아 자아중심으로 살고나 보자는 맹목(盲目)에 세상이 절여 있어 힘들 뿐

 








구원의 말씀 전파할 때 

"회개하라"(행 17:30)는 하나님 명령 반드시 전달해야 하고

어떤 잘못을 회개해야 하느냐를 설명함이 필수입니다. 

사람이 모두 함께 이상적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생명의 법칙입니다.

짝의 법칙에서 항상 극과 극의 대립입니다.

가장 행복함의 대명사인 생명이 아니면

가장 불행한 것이 영원 멸망입니다. 

양단간의 결정을 해야 할 너무나 떨리는 현실 감각 없이

"희야듸야 얼씨구절씨구" 하는 세상을 책망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막연히 천국, 극락을 이야기함에만 그치는

세상 종교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현재의 인간 비극의 원인과,

그 해결책으로서의 성령으로 다시 남으로써 새로 창조되는 

엄연히 짝의 원리에 입각한 이성적이고 완전무결한 

사랑과 생명의 법칙을 설파하는 성경입니다. 

영원히 살되 구체적으로 그 어떻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니

이렇게 엄정 정확한 논리는 거짓뿐인 세상 종교가 흉내도 못냅니다.

이 자랑스러운 말씀을 마음껏, 성심껏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이 쪼다같은 세상을 미련없이 털어버리고 

가장 이상적인 삶의 방식을 따라 또한 완전한 육체로서의

초자연계 속성의 몸을 향유하는 삶을 동경하고 지향하는 증거로서

"만유 소유"로서의 자기 부인인 "자기 모든 소유 버림"(눅 14:33)의 

"자기 재물을 조금도 제것이라 하지 않은"(행 4:32) 초대교회의 본을

주저 없이 따르는 과단성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 삶에 목이 매여 쩔쩔매는 양상을 세상이 보게 되면

"말로만 믿는다 하고 실제 믿지는 않는구나" 라고 판단하여

우리가 전한 생명의 말씀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기독교라는 세상 종교의 하나로 내려앉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즉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겠거든

아담의 범죄로 죽음 등 인간고가 왔다고 가르치지 말고

종전대로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죽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남들에게도 전하고 자신도 그렇게 믿으세요, 그대신 장래는 참담해요. 

짝의 법칙에서는 양단간의 오직 하나만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아울러 취하는 그런 무실서는 존재 않습니다.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의 손글씨"와 미국인의 "아메리까 인디안의 저주" 전설과는 무관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의 손글씨"의 특이한 "20년" 배열은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이 재임 중 타계함으로써 시작되는데

이 해리슨이 인디애너 주지사로 있을 때 아메리까 인디안

샤니(Shawnee)족과 토지 관련해 협상을 벌인 일이 있었던 바

인디안을 상대했던 부당한 수법에 격분한 추장측과 전투까지 벌이자

추장과 함께 했던 그 아우가 "예언자"여서 해리슨을 저주했다 한다.

그런데 1840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리슨이 취임하자 얼마 못가

감기에 걸렸고 그것이 폐렴으로 진행되어 이내 죽는 불상사가 생겼고

그로부터 20년마다 대통령이 재임 중 타계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 때 저주했던 그 저주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일부 믿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악령들의 능력으로 저주한다고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고

다만 악령들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바를 알 수는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차여차하게 일을 진행하실 줄 미리 알고 거기 맞추어 

예언 등을 함으로써 마치 자기가 능력이 있어 저주하면 저주한 대로 

되는 양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하나님께서는 20세기가 "마지막 때"임을 알리시려고

당시부터 작정하시고 있음을 악령들이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마귀가 이 세상 신으로서 죽음의 권세를 쥐고 있지만(히 2:14)

하나님 정하신 한도 내에서(욥 2:6) 인간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는 것.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종국적으로는 좋은 것이 되도록 전화위복시키시므로(롬 8:28), 

어디까지나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인내 유무일 뿐이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니 구원 곧 "사랑함"이다.

행함 없이 말로만 "사랑함"이 없듯이 믿음 역시 그러하기에 

야고보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헛것"이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상의 징조를 보이심은 다니엘 12장 4절을 가리키심이요

바로 이 20세기야말로 마귀가 하나님으로 가장하는 때인 줄을

경고하심이니, 방자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들을 

미리 경계하심이다.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는 것이 특히 그렇다.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성령"을 빙자하여 나타나더라도

성경에 "기록된"(마 4:4,7.10) 하나님 말씀 밖으로는 또는 어긋나게

절대로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사실만 마음에 새기면 족하다.

반면에 악령들은 예사로 "자기 이름으로"(요 5:43), 

"스스로 말하는"(7:18) 자들로서 다시 말하면 자아중심 일색이다.

생명의 법칙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함이 없는 것이다. 

철두철미 머리는 몸을, 몸은 머리를 위해서만 움직이는 체제다. 



 








2020년 11월 27일 금요일

<일부 수정>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글씨ㅡ"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복되는 내용입니다



20세기 바벨론 궁전 벽에 나타난 손 글씨

"메네메네 데겔 우바르신" 



 프롤로그

벨사살 왕이 귀족 1000명을 위해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실 때에 그 조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 은 그릇을 가져오라 명였으니 이는 왕과 귀족들, 왕후들과 빈궁(嬪宮)들이 다 그것으로 마시려 함이었다. 이에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성소(聖所) 중에서 탈취해온 금 그릇을 가져오니 왕이 그 귀족들과 왕후들, 빈궁들로 더불어 그것으로 마셨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동, 쇠, 나무, 돌로 만든 신(神)들을 경배하고 찬양하였다.

바로 그 때였다. 왕궁 촛대 맞은편 회칠한 벽에 느닷없이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글자를 써 나갔다. 왕이 그 손가락을 보고는 그 즐기던 안색이 변하고 정신이 산란해져 넓적다리 마디가 녹는 듯하고 그 무릎이 서로 부딪힌지라, 크게 소리 질러 점성술사들과 갈대아 역술가와 점장이를 불러오라 명했다. 왕은 그들이 오자 "누구를 막론하고 이 글자를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리면 권위의 옷을 입히고 금사슬로 그 목에 드리우고 나라의 제3인자로 삼겠다" 하였다. 때에 왕의 박사가 다 들어왔으나 능히 그 글자를 읽지 못하여 그 해석을 왕께 알리지를 못하자 왕이 크게 번민하여 그 낯빛이 변하였고 귀인(貴人)들도 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태후가 왕과 그 귀인들의 말을 전하여 듣고 잔치하는 궁에 들어 와 왕께 아뢰었다. "왕이여, 만수무강을 비옵니다. 조금도 심란해하실 일이 아닙니다. 왕의 나라에 거룩한 신들의 영이 있는 사람이 있으니 곧 왕의 조부 때 사람으로 명철과 총명과 지혜가 있어 신들의 지혜와 같은 자라 왕의 조부 느부갓네살 왕이 그를 중용하여 마술사와 점성술사와 갈대아 역술사와 점장이를 총괄하는 자로 삼으셨으니, 왕이 벨드사살이라 이름한 이 다니엘의 마음이 민첩하고 지식과 총명이 있어 능히 꿈을 해석하며 은밀한 말을 밝히며 의문을 깨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니엘을 부르십시오. 그리하시면 그가 그 해석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이에 다니엘이 왕명을 받고 왕의 앞에 나오니 왕이 다니엘에게 말했다. "네가 우리 조부께서 유다로부터 사로잡아 온 유다 자손 중의 그 다니엘이냐.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네 안에는 신들의 영이 있어 네가 명철과 총명과 비상한 지혜가 있다 하였다. 지금 여러 점성술사와 점술사를 내 앞에 불러다가 그들로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알게 하라 하였으나 그들이 다 능히 그 해석을 하지 못했다.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즉 너는 해석을 잘하고 의문을 깨친다 하니, 그런즉 이제 네가 이 글을 읽고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면 네게 자주 옷을 입히고 금사슬을 네 목에 드리우고 너로 나라의 제3인자를 삼겠다".

다니엘이 왕에게 대답했다, "왕의 예물은 왕께서 친히 취하시고 왕의 상급은 다른 사람에게 내려주시기 원합니다. 그럴지라도 소신(小臣)이 왕을 위해 이 글을 읽으며 그 해석을 아시게 하겠습니다. 왕이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조부 느부갓네살께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큰 권세를 주신 까닭에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고 그는 임의로 죽이며 살리며 높이며 낮추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높아져 그 생각이 교만으로 완고해졌으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어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아졌고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고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王位)에 세우시는 줄 알기까지에 이른 것입니다.

"벨사살 왕이시여, 왕께서는 그 손자가 되시어 이것을 다 아시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스스로를 높이셔서 하늘의 주재를 거역하시고 그 성전의 그릇들을 왕 앞으로 가져다가 왕과 귀인들과 왕후들과 빈궁들이 다 그것으로 술을 마시고 왕이 또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금, 은, 동, 철과 목, 석으로 만든 신상(身像)들을 찬양하고 도리어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왕의 앞에서 이 손가락이 나와 이 글을 기록한 것입니다. 씌어진 글자는 이러하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것으로서,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께서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인들에게 내어준 바 되었다 함이옵니다."

이에 벨사살 왕이 주위 사람들에 명하여 다니엘에게 권위를 상징하는 자주 옷을 입히게 하며 금 사슬로 그의 목에 드리우게 하고 그를 위해 조서를 내려 나라의 제3인자를 삼았으나,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살해되었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대신 나라를 차지하였다(단 5:1-31).

다니엘이 본 이 손 글씨는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됨을 알리는 선언이었고 여전히 잘못 돌아가는 세상 즉 인간 오만에 대한 심판의 선고였다. 어리석은 인간은 과학문명의 발달로 달에까지 인간을 착륙시키게 되자 더욱 오만해져 신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갔다고 자축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세상을 결국 접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오늘 20세기 바벨론(거대한 미합중국)의 궁전 벽(역대 대통령의 당선 시일과 사망 시일의 연대표)에 기괴한 대칭형으로 그 손 글씨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1)"이다.

이 "20 세기형 손 글씨"는 한 국가에 대한 선고나 예고가 아니라 21세기 전 지구 인류에 대한 경고 메시지다. 따라서 조물주 하나님으로서는 심판과 더불어 그 마지막 구원의 말씀이 없으실 수 없다. 곧 "심판할 날이 작정되어 가까웠으니 회개하고"(행 17:30) 구원을 받으라는 명령이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2)"의 메시지로서 트리니 호모(trini homo)로 나타난 것이다. 아래 내용은 이상 사실을 모두 설명하는 것이다.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1)

The Handwritings on the Babylonian Palace Wall of the 20th Century (part 1)

 미국 역대 대통령의 재임 중 사망한 연대의 신비한 배열 


 


(1789년 초대 워싱턴 당선으로 미국 건립)

1800년 대선은 미 역대 대통령 중 첫번째로 부자(父子)가 대통령을 지낸(1824년 아들 당선)
그 아버지 애덤즈(2대)가 백악관에서 물러나게 되는 때의 선거전이었다.

1840년 대선에서 해리슨 당선 후 1841년 재임 중 타계

1860년 대선에서 링컨 당선 후 1865년 재임 중 피살

1880년 대선에서 가필드 당선 후 1881년 재임 중 타계

1900년 대선에서 멕킨리 당선 후 1901년 재임 중 피살

1920년 대선에서 하아딩 당선 후 1923년 재임 중 타계

1940년 대선에서 루즈벨트 당선 후 1945년 재임 중 타계

1960년 대선에서 케네디 당선 후 1963년 재임 중 피살


2000년 대선은 미 역대 대통령 중 두 번째로(마지막으로) 부자(父子)가 대통령을 지내게 되는 즉
아들 부시가 그 아버지(1988년 당선)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들어가게 되는 때의 선거전이었다.


위의 특이한 배열에서 주목하는 것은 애덤즈 부자 대통령은 미국 건립의 국부 워싱턴과 직접 연결되어 맞물려 있는데 비해, 부쉬 부자 대통령은 그 대칭(청교도 정신에 의한 국가 건립의 정반대)인 기독교 정신과는 180도로 달리하여 "미국은 이제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다" 라고 선언, 정반대의 주장을 한 흑인 대통령과 맞물려 있다는 사실.  고로 1900년을 축으로 하여 좌우 대칭을 이루어 "20"년을 명백히 가리키는 구조는 산뜻하게 완성되어 일단락된 것이다. 그런즉 이 점에서만 의미가 있고 이 흑인 대통령 이후의 상황과는 아무 연계성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별도의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이 20세기를 강조하고 20세기가 다니엘서의 "마지막 때" 예언 경고임을 천명한다. 


미국 소식통에 따르면 이 흑인은 이번 2020년 미 대선에서 마침내 들통난 조작선거에 사용된 동일한 컴퓨터 프로그램(도미니언 등)에 의해 이루어진 사기 당선이라는 결론. 흑인이 절대로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국민 감정과 대세적인 여론에도 불구하고 "당첨"된 이면이라고 한다. 이들 공산주의 집단은 그렇게 맛을 들인 다음 트럼프/힐러리 대결에서도 조작선거가 성공할 것이라고 너무 확신한 나머지 방심한 것같다. 그래서 이 허점을 뚫고 트럼프가 성공을 거둔 것인데, 2020년 대선에서는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앞뒤 가릴 것 없이 너무 왕창 덤빈 바람에 오히려 이전의 조작된 것까지 모조리 폭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상의 20년 간격의 신비로운 죽음의 순환에 대한 단순한 사실 지적은 이미 구미 각국에서 널리 유포되어 있는 상태다. 다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나름으로 해석을 내린 것이다.

여기서 주목하는 현상은 20년 주기로 그 해 당선된 사람이 반드시 재임 중 죽는데 1940년서부터 이어져 오다가 1960년 케네디를 마지막으로 해서 그 주기가 끝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모두 
7명의 대통령이 그 고리에 걸려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7이라는 숫자로써 끝나는데 그렇게 놓고 볼 때 그 중앙이 1900년이다. 이 1900년을 축으로 해서 대칭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얼른 눈에 들어 온다.

그 중심축을 전후로 "재임 중 타계"로 대칭이 되고(가필드와 하딩)(대칭1),
"재임 중 타계ㅡ재임 중 피살"(위 표 양쪽의 황색 띠 부분)이 또 대칭을 이룬다(
대칭2). 그 대칭성을 강조라도 하듯이 이 가장자리의 대칭을 이루는 1840년ㅡ1860년과 1940년ㅡ1960년에서, 1840년과 1940년, 1860년과 1960년이 각각 100년간의 간격을 형성한다.              

그리고 여기에다 결정타라도 가하는 듯 이렇게 대칭성을 이루고 있는 그 두 20년 간의 간격 아래쪽에 위치한 링컨과 케네디ㅡ 그 두 사람이 놀라운 닮은꼴을 다시 형성하고 있다. 즉 '링컨'의 후계자도 '존슨', '케네디'의 후계자도 '존슨'이라는 성씨다. 또 암살자의 이름도 똑같이 '리(LEE)'라는 이름이다.

그리고 더 있다. 링컨의 비서 한 사람의 이름이 '케네디'이고 케네디의 여비서 이름이 '링컨'이다.

그리고 이들 7명을 전후로 해서 위의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40년 간격을 두고 또 대칭을 이루어(
대칭3), 부자(父子)가 다 대통령을 지내는 인물들이 출현하는 연도가 나타나는 바, 첫 경우는 그런 아버지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때의 선거전이 이 사이클의 시점(始點)이고, 마지막 경우는 그런 아들이 대통령으로 진출하는 때의 선거전이 그 연도의 종점(終點)이 되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그 중앙에 7명의 이름들이 그렇게 나열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들 부자 대통령은 아버지와 아들이 다 어떤 공통점을 지닌다. 아담즈 부자는 다 같이 공직에는 두 번 다시 나서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중에는 대통령직에까지 오르고, 부시 부자는 똑같이 이라크와의 전쟁에 뛰어든다는 점이다.

이 7이란 숫자는 완전 수로서 그 자체만으로써 독립성을 지닌다. 즉 연이어 7, 8. 9 ... 이렇게 더 나아가지 않아도 충분히 그 자체로써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는 숫자이다. 일주가 7일이고 사람들이 "럭키 세븐!" 하듯이ㅡ.

이상 대칭형으로 된 그림을 다시 요약해보면 아래와 같다.



1800
1900........100년 대칭 4 -A

1800년 선거전 다음해 애덤즈 父子 중 아버지가 퇴임 대칭 3 -A

1840년ㅡ1860년 해리슨/링컨(病死/피살)...링컨의 비서가 케네디 대칭 2 -A

1880년 가필드 재임중 병사 대칭 1 -A

1900년 멕킨리 재임중 피살 중심축

1920년 하아딩 재임중 병사 대칭 1 -B

1940년ㅡ1960년 루즈벨트/케네디(病死/피살)...케네디의 비서가 링컨 대칭 2 -B

2000년 선거전 다음해 부시 부자 중 아들이 취임 대칭 3 -B

1900ㅡ2000........100년 대칭 4 -B
 

기타 참고 사항

1840년ㅡ1860년 해리슨/링컨 病死/피살 대칭 2

각각(1840-1940, 1860-1960) 100년 간의 간격

1940년ㅡ1960년 루즈벨트/케네디 病死/피살 대칭 2



그리고 홀수와 짝수 면에서도 
일사불란하게 홀수의 연도에 사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배열은 사뭇 의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이라면 더욱 더 믿기 어려운, 더욱 더 합리적이지 못할 그런 정도다.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짜 맞추어 놓은 기묘한 대칭 현상이다. 이런 것이 우연일 수 있는가.

그렇다. 초지능의 고안이다. 그것도 인간세계를 통할, 주재하는 주재자가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 외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불가능하다. 이런 정도의 고안자라면 인간사, 세상사. 인간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자가 아니면 안된다. 꼭 그 해에 그렇게 사람이 죽게 하고, 그렇게 사람을 죽이게 하고, 그런 이름의 인물들이 등장하게 하고ㅡ.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전에서 더욱 현실감 있게 그 사실이 드러난다. 즉 쌍방이 치열하게 표 대결을 하는데 더군다나 상대방은 국민의 전체 표 수로는 이길 수도 있는 판국에서 부시(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을 지냈던)가 그것도 가까스로 대통령직에 오른 것이다. 이것은 기어이 위에 나타난 그런 대칭성을 이루기 위한 초월자의 손길이 확고하게 가해졌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흔적이 뚜렷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사실은 곧 이어 설명하게 될 트리니 호모(trini homo)를 통해 더욱 확증되고 있다. 또 사람의 생애란 것이 가령 조물주께서 엿가락 주무르듯 마음대로 주물러 뗐다 붙였다 하는 절대로 그렇게 불규칙으로 엮어지고 얽혀지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반대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철저한 규칙성이 있어 그 법칙대로 모든 인간 생애가 결정되고 그 결정대로 한 치 오차 없이 엮어져 나가고 있음이 이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발견으로 입증되고 있는 것이다.

그 수 많은 인간 생애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단 세 가지 종류에 한해서 생사(生死)와 그 부침(浮沈)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 '트리니 호모'이다. 필자가 쓴 "해설(解說) 호모리듬"(현재 품절)에 36명의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연보가 나와 있고 그들의 생과 사와 전성기와 침체기가 트리니 호모에 의해 여지없이 지배되어 일사불란하게 전개되고 있음이 드러나 있다.

물론 예로부터 생사 즉 인간의 명(命)이란 것은 하늘에 달렸다는 말은 많이 해 왔다. 그리고 일국의 통치자가 되고 세상을 울리는 갑부가 되는 일 등이 하늘에서 정하는 것이므로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해 왔다. 그러나 그런 일생이 하나의 엄연한 법칙의 지배를 받아 모든 인생에게 일률적으로 한결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은 드러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실상이 이 트리니 호모로 우리 앞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이 철두철미 법칙에 따라 그 죽음과 활동기가 정해져 있는 7명의 대통령이 마치 그런 법칙도 전혀 없는 듯이 진흙을 주물러 빚어놓듯 기막히게 이상과 같은 희한한 배열로 조합이 되어 있다는 사실, 이것은 절대자의 손길이 아니고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일임을 더욱 실감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 절대자의 손길이다. 그러면 그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옛날 화려한 바벨론 궁전 벽에 갑자기 사람의 손이 나타나 글씨를 써내려 갔다. 그것을 본 순간 왕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녹아 내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것은 신(神)의 불길한 메시지임을 본성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이상에 소개한 대칭성의 '그림'은 그 궁전 벽의 벽 글씨만큼이나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설명한 것처럼 트리니 호모의 배경을 깔면 더욱 더 그러하다.

예언자 다니엘에 의하여 밝혀진 그 벽 글씨의 내용인즉, "왕은 저울에 달아본 결과 모자람이 드러났다. 때문에 메대와 페르샤에게 국운이 넘어간다"는 저주의 선고였다 . 그 날 밤으로 과연 바벨론은 망하고 말았다.

미 역대 대통령 7명의 이상과 같은 기이한 대칭 배열로써 세계의 이목을 일단 집중시키고 있는,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바벨론 궁전 벽이 아닌 오늘날 세계 최대 강국의 권좌 그 심장부의 역사를 보여주는, 그래서 최대 강국 미국의 백악관 벽에 아니, "20세기 바벨론의 궁전 벽"에 나타나 있는 저 글씨는 도대체 무엇을 나타내주는 메시지인가?

그 '대칭형 그림'이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은 '20'이란 숫자다. 20년 주기에다, 1800년에서 1900년까지 그리고 1900년에서 2000년까지가 각각 100이요, 그 그림의 중심축을 전후로 한 링컨과 케네디로써 부각되어 있는 각 연대의 간격이 또한 각기 100년, 그래서 100과 20이다. 그래서 <20과 세기(century - 100년)>다. 또 그 중심 축이 가리키고 있는 연대가 바로 1900년이다. 그렇다면 그 메시지는 1900년에서 시작되는 20세기를 가리킨다.

100이면서 20, 이것은 20을 100배하면 2000이 된다는 것 외에도 100은 1세기를 의미하므로 20이라면 20세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20세기로써 이 세대는 종료되고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별다른 세대가 열려지기 시작한다는 메시지다.

7로써 그 기이한 죽음의 행렬이 끝났으니, 그래서 다시 그것을 전후하여 두 번째의 부자(父子) 대통령 탄생이 그 대칭성을 이루면서 완결(完結) 짓는 '2000년' 이 그 의미를 결정적으로 못박고 있다. 다니엘이 그 예언을 할 당시는 "이 말을 간수하고 봉함하라" 했으나 지금은 그 봉한 것이 벗겨지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있는 시점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다니엘이 말한 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고 한 예언이 20세기를 전후한 19세기 말에서부터 21세기초에 이르는 사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서기 2000년 전의 세계와 그 이후의 세계를 가름하여 그래서 2000년 이후의 세계를 주시/경계하라는 경고라 할까.

세계적 규모의 한 거대한 공룡 같은 집단이 생겨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을 통합하여 모든 나라를 단일체제로 흡수해 버림으로써, 지금까지와 같은 국가 체제는 더 이상 존속하지를 않는다는 뜻이니, 적 그리스도의 단일세계가 도래하는 것이다.

고로 단일국가 형태의 초대형강국 또는 지도 중심 국가가 세계 질서를 잡아간다는 개념은 사라지는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이 테러로 맥없이 무너져 내린 사실이 그 증거다. 초대강국으로서의 위상(位相)이 이 때 함께 무너져내려 앉은 것이다. 한 개인 집단에 의해 국가 체제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왜냐면 인류사상 일찍 구경할 수 없던 이런 게릴라성 테러에 완전 속수무책임을 미국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알아 왔던 미국, 세계 지도 중심 국가라는 이미지는 이미 완전히 함몰됐다는 의미다. 국가 차원이 아닌 이런 소수집단 즉 개인에 의한 테러공격 앞에 미국은 다른 약소국가처럼 무기력화한 것이다. 이들 테러집단이 가공할 핵무기나 더 큰 살상력의 생화학무기를 휘두르며 위협하는 판이면 가당치도 않게 된다.

다니엘이 해독한 바 바벨론 궁전 벽에 나타난 손 글씨가 나타낸 의미는 바벨론에 대한 저주였다. 마찬가지로 이상 나열된 20이라는 숫자의 연대 배열이 과연 20세기에 나타난 '바벨론 궁전 벽 손 글씨'라면 그 메시지의 내용 역시 같은 의미일 수밖에 없으니 곧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애초의 건국이념에서 이탈, 조상들의 순수한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하여 소돔 고모라처럼 부패타락한 데 대한 진노라 할 수 있을까(유 1:7).

대통령의 위치에 있는 이가 성경의 무서운 저주의 심판의 대상이었던 동성 성행위를 허락하는 제스처를 보내고 사법 당국이 이를 용인함에 대하여 교회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되어 아무 이의도 제기 못할 정도로 함께 부패해 버린 오늘의 미국. 옛 바벨론이 국가로서의 수(數)가 이미 다 헤아려졌다는 것처럼 오늘날 미국이 국가로서의 존립 의의도 다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일까.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 바 되었다" 함이라는 것이 다니엘의 그 글씨 해석이었다. "베레스"ㅡ초대강국 미국이라는 나라가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세계는 적 그리스도의 손으로 융해되어 들어가는 것을 가리킴일까.

미국 일개 국가를 상대로 한 메시지가 아니라 세계 초대강국인 미국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전체 세계에 주는 메시지이다. 즉 "메네"는 20세기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세계는 끝났다는 것. 다시 말해 20세기 이후의 세계는 지금까지 알아 왔던 세계와는 사뭇 양상으로 전개되고 마감할 것이라는 선고다.

느부갓네살 왕이 본 이상과도 연계되어 있다. 그가 보았던 이상에서 그 큰 신상(身像)의 특징은 머리로부터서는 금, 은, 철, 동으로 해서 단일 국가적 패권주의로 연이어 온 인류역사인데 반해 발과 발가락의 시대에 와서는 과거의 그런 강대국 개념과 함께 군소 국가들도 그 존립의 의미가 신장되고 인정되다가 급기야는 그 모든 것이 몇몇 개인의 손에 의해 와해되는 시점에 이른다는 데에 있다.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다"(단 2:33) 함과 같다. 20세기로써 그런 발과 발가락의 시대마저 종료된 사실을 21세기 초 이번 미국 테러참사에서 우리는 목도한 것이다.

"당신의 해석대로 하면 이미 초대 대통령 워싱턴 시대부터 즉 건국초기부터 이 20이란 신비한 숫자는 역대 대통령의 사망을 거쳐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유독 미국이 처음 믿음을 버림으로써 저주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으냐?" 할지 모르나, 이상 20이란 숫자가 그같은 한 개의 독립된 <메시지>로 구성이 된 뼈대는 위에 소개한 표에서 보듯이 <대칭 3>으로써 완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부시가 그렇게 당선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처음부터 후보로 나서고 당선되었다면 자연히 <대칭 3>은 구성이 되지 않고 이상의 20이란 숫자도 괴상한 배열이라는 소리만 들을 뿐 특정 의도성이 있는 완결(完結)된 의미를 나타내는 구조로는 판단되어지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바꾸어 말하면,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시는 하나님은 장차 미국이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고 워싱턴 이후의 시대부터 그런 의미의 경고성 대칭형을 준비하시면서 그 동안의 세월을 지켜보신 결과, 아니나다를까 미국이 그런 부패 타락의 길로 치닫게 됨에 이르러 결국 <대칭 3>으로 완결하신다는 그런 의미라 하겠다.

동전에다 "In God We Trust"ㅡ'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라는 문구까지 새겨 넣고 있는 미국이다. 이는 이상 설명처럼 미국의 뿌리 곧 그 밑바탕이 청교도신앙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갈수록 그동안 누적되어온 국가적, 교회적 부패와 타락상이 마침내 곪아 터질 정도에 이르렀음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오늘날 미국의 현주소다.

하나님의 시대적 시간표에 따라 물론 매사가 진행되어오는 터이지만 인과응보의 원리를 따라 그 이유가 다 있는 법. 즉 죄가 왕성하면 망하고 의가 유지되면 흥한다. 물론 세상에서 말하는 의(義)이지만 세상의 의도 모두 하나님의 의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벨사살 왕이 만일 그 조부 느부갓네살 왕의 유훈을 받들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이었더라면 성경 말씀에 의하건대, 그의 대(代)에서는 또는 그의 자손도 그런 동일한 경건한 자세를 견지할 경우 바벨론은 상당기간 그 성세를 누리고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세상의 관점은 단지 때가 되면 나라가 흥하고 그 때가 기울면 망하는 것으로 때의 변천에만 무게를 두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항상 그 이면을 들추고 <죄악의 척도(尺度)>로써 이루어지는 결과임을 밝힌다는 데에 유의할 일이다.

이상과 같은 미국 역대 대통령을 초대부터 나열시켜 이루어진 이 기이한 배열은 오늘날 미국이 소돔 고모라의 저주로 나타난 경고를 수용하지 않고 소위 "동성간의 결혼"을 합법화시킨데 대한 국가적 패망의 언도 곧 메네 메네 데겔 즉 "하나님이 이미 미국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미국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드러났다" 함이다(다니엘서 5:26, 27).

미국 역시 초기 신앙의 바탕대로 그렇게 급속히 부패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대칭 3>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하나님의 역사와 "때"는 항상 그러할 경우와 그러하지 않을 경우라는 두 개의 복선(複線)을 깔고 진행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요나로 말미암아 경고된 니느웨의 멸망에서 요나의 경고를 들을 경우와 듣지 않을 경우가 따로 설정되어 니느웨의 반응 여하에 따라 이리도 될 수 있고 저리도 될 수 있도록 마련되어져 있었음과 같다. 당시는 다행히 요나의 경고를 듣고 니느웨가 회개한 까닭에 비록 멸망의 저주가 선포되었지만 그것이 철회된 사례다.  

그리고 초대형 강국이 무기력화하면 다시는 핵 위협도 없어지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아니냐 하겠지만 지금까지의 초대강국으로 군림하던 것이 갑작스럽게 붕괴하는 마당에 그 여파가 과연 어떤 것으로 나타날까. 이제는 완전 통제불능이라고 아우성 칠 이런 때, 마치 구세주인 양 적 그리스도는 나타날 것이다.

강대국들이 그런 '얼굴 없는 전쟁'(핵, 생화학무기 등으로 위협하는 테러)으로 무기력화가 되어지면 그야말로 전쟁도 없어지고 온 세계가 하나가 될 것이니 좀 좋으랴 하겠지만 그것이야말로 인류에게는 보다 큰 재앙의 클라이맥스가 됨을 성경은 미리 나타내고 있음이니 그래서 이같은 '20세기 바벨론 궁전 벽 글씨'가 나타난 것이다.


뿐만 아니다. 지구 온난화가 부정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으로 지구와 그 거주민들을 가시적으로 위협해오고 있다. 지구 전체가 마치 비틀거리는 팽이(둥글고 짧은 나무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아 채로 돌리던 옛 시절의 어린애 장난감으로 채로 계속 때리지 않으면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돌기를 멈추고 나뒹굴어진다 )처럼 되어 그 수명이 다하여 걷잡을 수 없이 되어버리는 것과 같은 그런 모양새일진대 이는 누구도 손댈 수 없다.

북극 빙하 특히 그린란드의 얼음이 지금 나타내고 있는 속도대로 하면 수년 내에 전부 녹아 버리지 않을까 예상한다는데 이렇게 되면 말 그대로 지구 종말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세계 환경학자들의 한결같은 이구동성이다.

이 곧 인간이 자랑하는 과학문명의 최종 결산이다. 오늘날의 문명 이기(文明利器)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다. 초자연게 몸으로 변화하면 그 모든 것 하나도 쓸모없는 군더더기가 될 뿐이다. 단 한가지 목적으로 이같이 인류생활이 발달해온 것인 바 그것은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그 활동을 위함이다. 전세계를 단시일 내에 장악, 가장 효과적으로 제압 통치하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마야문명으로 알려진 남미 마야 고대인들이 믿고 사용해 오던 달력을 연구해온 사람들은 마야 문명권이 정확히 서기 2012년에 "종말"이 오는 것으로 계산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에 관심을 둘 필요는 없다.

그런 종류의 고도의 지식이나 예언은 악령 사단 곧 "이 세상 신(神-고후 4:4)"과 관련된 것이라고 단정하면 틀리지 않다. 악령이라 해서 무조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고, 에덴낙원에서 인간을 시험하던 그 수법에서 보듯이 반(半) 진실로써 그 속임수를 가장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양면 진실이어야 그것이 온전한 정보가 되는데 일면만 진실이고 다른 면 즉 핵심 부분에서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면 그 일면이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것만을 고집할 때 그것이 속임수가 되는 것이다. 일면만의 진실을 이용하여 전체가 다 진실인 것처럼 가장하는 이런 간계가 사단의 모든 책략의 특징이다.

고로 이 세상 신(神)이 이런 것을 알릴 때는 그 나름대로 활용할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용도라는 것은 그 목적이 인간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함게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말하고 그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지혜다. 노스트라다무스 역시 성경적인 것이 아님은 마찬가지다. 그 소위 예언이 아무리 적중율이 높다 해도 거기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것에 관심을 두다 보면 이 세상 신이 목적한 대로 말려들기 십상이다. 그래서 성경 외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든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 옳다. 모든 것에 대한 일체의 필요한 정보는 이미 성경에 명시되어 있으므로 이로써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 시기에 어떤 중대 전환기적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여기에 동요하지 말고 이상 미 대통령의 대칭성을 이룬 연대 배열이 나타내는 대로 "바벨론 궁전 벽의 손 글씨"의 결과임을 알고 이에 대처할 일이다. 이미 하나님이 경고해 주신 이상 세상은 그대로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소위 '마야 문명의 달력'이 이상 소개한 "바벨론 손 글씨"와 마침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런 따위 악령들의 짓거리에 흥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가 있지만, 세상사람은 무지하여 완전히 그들에게 장악당해 놀아나는 고로 악령들의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나, 하나님의 일에 전념하는 우리로서는 절대로 그런 것에 끌릴 이유가 없다.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안전하다, 편안하다" 할 때 주님이 오신다고 하신 것처럼 악령들이 소위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 주는 듯 하면서도 인류를 속여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 그들의 주목적이므로 그렇게 세상에 나타나게 되어 있는 자를 "악한 자", "멸망의 자식"이라 했고 계시록에서는 "짐승"이라 했다.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는 자"라 했으니 종교적인 인물로서 만인의 경배와 추앙을 유도하려 획책할 것이요 일단은 성공할 것이라고 성경은 예고한다. 이런 속임수의 시대가 전개되어 어디서나 "평화"와 "안전"을 구가하며 태평성대라고 할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것이다.

오늘날 논의되는 이른바 "휴거""(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공중에서 영접하는 것)는 우리의 구원과는 직접 연관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일이 소위 환난 전이냐, 후냐 하는 것으로 갑론을박할 필요도 없다. 단지 온 세계에 장차 임할 고난을 면하게 된다는 취지가 그 골자라면 그것은 단연 배격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고난은 다 함께 받는 것이 도리이고 또 우리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이 구원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기피할 이유가 없다.

대량살상의 직접적 기초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화약 발명의 노벨이 1896년에 사망하고 1901년부터 물리, 화학상 등 노벨상이 수여되기 시작한다. 즉 인류사회의 이른바 진보 발전을 기약하는 각종 지식이 세계적으로 공인되기 시작하는 때가 20세기 초부터다. 인지의 발달 즉 각종 과학 지식의 발전이 이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급속도로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이 말한 바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는 예언도 위에서 바울이 예언한 "멸망의 자식/악한 자의 나타남"과 연관되어 있다. 이런 지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생활의 편의를 위해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죽음의 삶을 인간이 계속 유지하도록 하시는데 있지 않다.

영원한 세계에 가면 이런 구질구질한 물질적 과학 문물에 관계 없이 우리의 초자연계 몸 자체가 그 모든 기계적 구실 아니, 그와는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의 초능력을 구사할 터이니까, 우리가 지금 자랑하는 각종 기계문명은 그 때 가서는 한낱 어린 아이 장난감에 지나지 못할 것이므로 그렇다.

성경에 밝히심과 같이, 에덴낙원에서 쫓겨난 인간 삶이 비록 죽음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이 지상생활을 차질없이 수행하는 데에 필요한 지식은 분명히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지식은 그 성질이 다르다.

성질이 다르다 해서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또는 그 뜻을 어겨가면서 되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니, 이 우주에서 이루어지는 것 단 하나도 그 뜻에 벗어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이 우주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인 이상, 이는 한낱 상식에 속한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허락 아래 되어지는 것이다.

욥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아무리 이 세상 신 사단이 욥을 미워하여 해를 가하려 하나 하나님의 지시와 의도를 벗어나서는 단 한 발짝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악령 사단 일당이 작용하여 자기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간의 두뇌 활용을 촉발 촉진시킨다는 그 사실이다. 그래서 각종 고안품을 매개로 하여 온 인류를 대대적으로 속이려는 그 원래의 흉계를 달성하려는 것이다. 즉 그같은 목적이 이같은 인지 발달의 직접 원인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첫째는 온 세계를 단시일 내로 효과 있게 통일시켜 한 손아귀에 넣어 조종하고, 둘째는 각종 과학 지식의 총결산처럼 해서 무지한(초자연계의 영역에서 보면) 인간들 앞에서 그 속임수(적 그리스도 출현)를 "과학'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기 위함이요, 셋째는 그와 같은 무리한 속도의(원래 이 지구 환경은 그런 인간 문명을 전적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애초 설정되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물질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각종 부작용-일테면 자연질서 파괴나 환경오염,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이상 변화 등 각종 재앙에 대한 공포, 절망감을 안겨 줌으로써 '현실적인 구원의 갈망'을 부채질하여 악한 자의 출현, 초능력의 구원자를 열망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함이다.

다시 말해 '발달된 과학 지식'의 이름으로 이 '멸망' 위기에 처한 지구에서의 인간 삶을 구제한다는 그럴 듯한 슬로건을 내다 걸고 세상 앞에 "구세주"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 그 간계의 골자다.

고로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얻은 사람 삶의 이익보다 그로 인하여 야기되는 인명 살상과 이같은 삶의 환경 파괴의 해(害)가 더 심한 것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런 문명발달의 본질을 너무나 분명히 꿰뚫어보는 것과 같은 다니엘의 그 예언 성취가 오늘날의 국면인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하늘에 대전쟁이 있어 마귀와 그 일당이 천사장과 그 휘하 세력과 싸우다가 완전히 압도당해 하늘에서 지상으로 영원히 쫓겨나게 되고 이 때문에 화가 꼭두까지 치민 사단의 훼방으로 인해 "지상에 화가 있으리라"고 했다. 이 예언이 성취된 것이 바로 1908년 6월 30일의 시베리아 퉁구스 사건(계 12:7)이다.

계시록에서 예언한 그 '우주전쟁'이 과연 이미 끝나고 악령들이 대거 지상으로 몰려들었는지 여부에 대한 답은, 그와 같은 1900년대 초기 즉 20세기 초에 가장 특기할 만한 인류사상 초유의 하늘의 장관(壯觀)이라기보다 최대의 기괴한 광경이 벌어진 것으로써 이미 나와 있는 것이다.

과연 1908년 퉁구스 사건 이후 세계대전이 두 번씩이나 연달아 일어나고, 많은 인구를 거느린 러시아와 중국 등이 거센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그 못지 않게 많은 인명의 대량 학살극이 일어나며, 기타 수없이 많은 전쟁, 자연 재해 등등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당한 인적 손실이 그 어느 세기보다 엄청난 규모로 참혹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20세기 들어 스페인 독감 하나로 수천만이 희생 당한 사실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는 생생하다.

너무나 기괴하고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그 사건의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음 또한 기괴한 일 중의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이 이른바 '시베리아 퉁구스카 대충돌'인 것이다. 사람들은 "폭발"이라 하고 있으나 우리는 "충돌"이라 명명한다. 다름 아닌 거대한 용이 하늘에서 문자 그대로 곤두박질치듯이 지상으로 내동댕이쳐진 바로 그 사건이라 판단하기 때문에 '충돌'이라 하는 것이다.

21세기 소위 "첨단 과학"으로써도 이 답을 얻지 못해 세상은 "수수께끼"라 부르고 있다. 유일한 정보원(源)인 성경을 무시하니 알 턱이 없다.

그래서도 1900년이 이상 설명한 신비한 대칭성 배열에서 그 축을 이루고 있음이 의미심장하고 그 메시지의 신빙성을 더해주는 터이다. 그 기괴한 대사건이 일어난 시점이 바로 1908년 6월 30일의 그 퉁구스 사건인 것.

이상 설명의 하나님 경고로서의 "손 글씨"는 사람이라면 경고만으로 그치겠지만 하나님의 메시지이므로 당연히 그에 대한 해결책 즉 구원의 메시지가 따르는 것이니 이 구원은 이미 성경으로 만천하에 선포된 터이다.

 

주님 오실 때도 노아의 홍수 당시처럼 천년 만년 살 듯이 집 짓고 결혼하고 태평으로 지낼 것이라고 주님께서 예언하셨으니 이런 경고도 마이동풍 격일 것은 불문가지나, 오직 이 경고를 수용하는 자는 때 늦기 전에 혼신의 힘으로 복음 전파에 진력할 것을 촉구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2)

The Handwritings on the Babylonian Palace Wall 

of the 20th Century (part 2)


 파쇼모, 파스 호모(fashomo, fas homo)/트리니 호모(trini homo) - 인간 생애의 법칙 

 3운법칙(三運法則) 


 이하 "파쇼모(fashomo)" 또는 트리니 호모(trini homo)라고 함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심이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어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너희 시인(詩人) 중에도 어떤 이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所生)이라' 하니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시어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公義)로 심판

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다"(행 17:24-31).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시지 않은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시어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신 것이다"(행 14:15-17).

위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대를 정하셨다" 한 그 연대를 설명하고 증명해주는 것이 다름아닌 이 '트리니 호모'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개인의 연대를 정하는 철칙(鐵則)"이다. 국가나 한 사회 집단의 연대는 이 개개인의 연대의 '집합적 결론'인 것이다. 이하의 내용은 그 모든 개개인, 인류 전체의 각 생애를 관장하고 있는 이 법칙을 해부, 분석하는 것이다.


 

이 인간 법칙을 '완전 과학'의 인간 법칙이라고도 한다. "완전 과학"이라 함은, 이 우주의 제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 과학이나 이 자연계에 한정해서만 규명하는 한정성을 지니는 불완전한 것임에 반해 초자연계까지 망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 만상은 '대칭성의 원리에 의한 인과율'로 되어 있다. 즉 자연계가 있으면 반드시 그 대칭인 보이지 않는 세계 곧 초자연계 또는 영계가 있는데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음이다.


다시 말해 일면만 알고 그 다른 대칭적인 면을 간과하면 완전하지 못한 지식이다. 현재의 과학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자연계만 아니라 그 대칭을 이루고 있는 초자연계(영계)의 법칙을 아울러 규명해야 현존하여 운행되는 모든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완전성을 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인간 법칙은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의 인간 주재(主宰), 관장(管掌)의 손길(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갑과 을이 사랑으로 하나되는 자기 부인의 생명의  법칙 또한 영적인 생명(영생)의 원리인 것이다. 이렇게 영계까지 아우르는 것을 일컬어 '완전하다' 함이다. 그 증거가 이미 '트리니 호모'나 '사랑과 생명의 법칙' 등으로 나타나져 있어 현실이 되어 있는 까닭이다.


인간 자체가 자연계(육체)와 영계(영혼)를 포함하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는 관계로 이 자연계와 대칭을 이루는 초자연계적 사실에 대한 진실 규명은 필수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고로  지금까지의 이른바 "과학"은 편중되고 편파적인 것으로서 동전의 일면만 보고 판단하는 '불완전 과학'이라 할 것이다. 동전의 일면뿐이면 통화(通貨)로서의 가치가 없는 무의미, 무가치이다.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구조 he Structure of trini homo 

  

“하나님을 찾아 발견하는”(행 17:27)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만드신 만물을 보고” 간단히 알 수 있다(롬 1:20). 저런 이성도 지성도 없는 미물(微物)들이 일구어 내는 최고도로 첨예. 첨단화한 작업 능력을 보라. 어느 인간도 따를 수 없는 이성과 지성의 작용이 아닌가. 그런 이성과 지성이 전혀 없는데도 그런 것들을 최고 극치로 나타내고 있으니 인간보다 월등한 이지(理智)가 있어 그런 기계적 장치를 그 내부에 설정해 두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아닌가. 멀리 찾아 볼 것도 없이 우리 인체(人體)의 구조와 작동을 보라. 내 스스로가 들어 나의 신체를 이와 같이 작동시키기는 꿈도 꾸지 못할 처지라면 나 이외의 존재가 나의 몸을 이렇게 만드셨다는 결론에 쉽사리 이르고도 남을 일이건마는 왜 생각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다는 말인가.


쥐 꼬리만한 지식에 오만하기 짝이 없는 인생들은 큰 소리 치기를 “자연법칙의 오묘함은 알지만 그러나, 인간을 이와 같이 조종하고 지배하고 있다는 무슨 증거라도 있다는 말인가” 했지만, 오늘날은 인간 생애마저도 자연 법칙과 하나도 다름없이 철두철미 원리원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 정확무오함은 그 법칙(‘트리니 호모’, trini homo)의 구조로써 확고하게 증명되어 있다. 즉 자체 증명이다. 그림을 그려놓듯이 그런 절묘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법칙을 최종 증명하여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존의 모든 인생들의 생애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안되었을 것이다. 왜냐면 ‘단 하나의 예외’라도 있다면 이 법칙은 법칙으로서의 의미가 전연 없기 때문이다. 어디 현존하는 인간들뿐인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인생들의 생애는 유명 인물을 제외하고라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 무명(無名) 인물들 가운데 그런 예외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단 하나가 있다고 가정해도 이 법칙은 법칙으로 검증될 수가 없으니 실험 기구로서 확증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인간 생애의 법칙은 영구히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칙의 구조 자체가 일부러 그려놓은 듯한 빈 틈 없는 도식화(圖式化)가 되어 있고 이 ‘도식’이 특정 원리를 그대로 빈 틈 없이 설명하고 있는 일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모든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인간 생애를 주장 주관하는 법칙의 생명은 수십 억 인류를 모두 다 단 3가지 유형으로만 마무리하여 결속(結束)시킨다는 점 외에도 선명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그림 같은 그 구조 자체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명한 의미’라는 것은 ‘사람의 얼굴’이면 사람의 얼굴로서 불가결한 눈, 코, 입, 귀가 제 위치에 반듯하게 놓인 그런 형상을 말한다.


 파쇼모(fashomo)의 명칭 


라틴어으로서 homo는 호모 사피엔스 즉 인간. trini는 영어로 'three each', 여기서 trinitas, 또 여기서 영어 trinity가 나오게 되므로 그래서 3위1체의 원리 또는 만유의 법칙을 "trini law"라 하고 3운법칙을 "trini homo"라고도 한다. 인간 생애의 법칙(trini homo)을 인간 법칙 또는 "3운법칙(三運法則)"이라고도 하는데  인간 생애를 주관하는 세 가지 갈래로 나타나는 원칙이란 뜻이다. "3운"의 '운(運)'이라 한 것은 인간 운명 즉 지상(地上) 생애(生涯)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철저한 통제(divine law)를 가리킴이다. 연한 의미의 '운'이란 것은 있을 수 없으니 운(運: destiny)이란 말 자체가 사전 계획이나 고안을 뜻하기 때문. 그러므로 이는 철저히 조물주의 창조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운명을 정한다 또는 개척한다는 말도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자기의 영원한 행, 불행 즉 생과 사를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좌우지하기 때문. 그래서 순종하여 생명에 이르고 불복종 즉 범죄로써 죽음에 이른다.


 파쇼모(fashomo)의 구성 숫자 (1)


핵심은 트리니 호모가 바로 숫자만으로 그 구조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간단한 숫자로써ㅡ.레오날드 다빈치
'수학과 결부시켜 입증할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한 것'이라고 했다.
철학자 
칸트
"모든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학에 의해 증명될 때 한해서만
실제 학문으로 통용될 수 있다"고 했다.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구성 숫자 (2)에서 상세히 설명한다.


 파쇼모(fashomo)의 구조식(構造式) (1)


모든 인간 생애는 오직 3가지 유형으로 대별된다. 즉 FS, OT, SN 이 세 가지인데 3위1체 도식에서의 甲, 乙, 丙과 대비해본 위 도표를 참고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구조식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트리니 호모의 구조식을 설명하기 전에 부득불 3위1체의 구조식을 먼저 소개할 필요가 있다. 왜냐면 이 트리니 호모 즉 인간 생애의 법칙이나 3위1체의 원리나 인간 삶의 기본 원리로서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구조식(構造式) (2)에서 다시 상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트리니 호모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 구조 또한 한 마디로 "기이하다". 이는 트리니 호모라는 인간 법칙이 결코 우연의 산물일 수 없고 그 존재가 철두철미 고안자의 지능에 의한 것임을 입증한다. 또한 실험실에서 증명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그 특성을 그 스스로가 증명하는 훌륭한 근거가 되어 있음이다.


또 그 구조가 극히 단순 명료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것이 그 애초 고안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우리 중 누구나 독자적으로 검증함으로써 확인, 확신할 수 있게 하시려는 분명한 목적성을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상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이 인간 법칙은 수천 년 후인 바로 오늘날 이같이 온 세상에 알려질 것으로 이미 예정되어진 채 오래 전 즉 인류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설정된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다시 말해 자연법칙을 위시하여 우주의 제반 법칙은 다 고등수학으로 그것도 '차세대' 수준의 컴퓨터를 동원해야 겨우 그 내용과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것이지만, 유독 이 트리니 호모의 구조만은 미래의 어느 특정 시점(時點) 다름아닌 오늘날 모든 인류에게 드러내어지도록 미리 작정해두시고 이같이 가장 초보적인 기초 셈법으로도 그 전모를 능히 파악할 수 있도록 일부러 이렇게 단순화시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 언급을 하다보니 부득불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 바 그것은, "그러면 이런 것을 당신에게 계시해주셨으니 당신은 특별한 사람인가" 한다면, 처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시는 사실을 두고 성경은 오직 "믿은 여자가 복이 있다"고만 했으니 바로 이것이 이 경우 정확한 대답이라는 것뿐이다. 같은 누가복음서에, 한 여자가 예수님더러 "선생님을 밴 태와 먹인 젖이 복이 있다" 했을 때, "그보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신 주님 말씀을 상기할 것을 삼가 권한다.


"믿은 자만이 복이 있고" 이 복은 "모든 믿는 자에게 공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고로 계시를 설혹 받았다 해서 남보다 나은 것은 하나도 없고 혹 그런 계시가 없었다 해서 그렇게 받은 자보다 결코 못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돌을 하나 집어 들자면 그 많은 돌 중 어차피 하나만 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단지 '트리니 호모'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놓고 볼 때 스스로가 생각해도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로 자처했다면 그 '괴수 중의 괴수'임을 잘 아는 처지에 "스스로 아무리 생각해도 교만해질 수 없는 자신임을 잘 알고 있다는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 이런 엄청난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이라"는 대답밖에 나올 것이 없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니, 하나님 홀로 받으실 영광을 제 것인 양 착각하는 자에게 언제나 저주가 따른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가를 잘 아는 자이기에, 그런 교만으로 자멸할 염려는 없다고 보셔서 이렇게 계시해주셨다는 이 점을 자신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두드리고, 찾고, 구하면 받게 되어 있다"는 법칙을 응용함으로써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하면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적 결과'라는 것이 인간 구원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고 인생 구원의 핵심적 사실이 되는 하나님의 실존과 주재 및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일진대, 이 메시지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친히 주시는 것이라 여기고 다  같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이다.

이 '트리니 호모'가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계 14:7)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된다면 그 가치와 의미는 분명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나타나지는 기타의 내용, 예컨대 "3위1체"의 실상, 사랑과 생명의 원리, 초자연계로서의 에덴낙원의 실상, 소위 "천사"들이 그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짐승들"이라는 등의 일련의 성경 사실이 역시 엄연한 "계시"임이 인정될 때 그 중요성은 막중하다. "하늘에서 주시지 않으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요 3:27/19:11) 것. 우리가 믿는 이 믿음 자체도 "계시"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하시지 않았는가(마 11:27). '계시'라는 말에 너무 무게를 둘 필요는 없다.

'트리니 호모'의 구조가 너무 '어린 아이 같은 짜임새'라고 하여 오히려 경멸하는 이가 있다면, 자연법칙이니 우주 천체의 모든 운행 법칙이 복잡다단하고 기묘하기가 기가 막힐 정도이기에 하물며 그보다 더 기기묘묘한 인간 생애의 법칙인데 그 구조가 어찌 이리도 단순하냐 하는 선입관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뜻이 계셔서, 그것도 어느 특정 미래에 특정 경로로 나타내어 주실 것을 예정하셔서 어떤 일을 추진하시고 정해놓으신 것이라면 그 특정 목적에 적합하게 지극히 단순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사실이 또 그렇게 이해하기에 어려운 것도 아니다.

지극히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키는 작업은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복잡한 것보다 실제로는 더 어려운 난공사(難工事)임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무조건 어렵고 난해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잘못이다. 목적성이 분명할진대(오늘날 이것이 온 세상에 알려져 그리스도 복음 전파에 촉진제 역할을 한다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쉽고 단순하게 기본 바탕을 그렇게 짜실 수 있는 것이다. 

 
'3위1체의 법칙/짝의 원리'(Trini Law)의 구조식



삼운 법칙의 발견으로
'만유 대칭 원리'가 증명되었다.
만물 만상이 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증명되지는 못하여 우주 만물의 지배 원리로는
인정되지 않았으나 이제 명백히 증명되기에 이른 것.
위 도안은 3위1체 원리(the law of Trinity)를 나타내어
갑은 을을 안고 을은 갑을 업어 <하나>되어 있는 모습이다.
똑같은 하나라도 '갑' 편에서 보면 '을'을 안은 것, '을' 편에서
보면 갑을 업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하나로 된 이 별개의 모습을
'갑'이라고도 못하고 '을'이라고도 못하니 그래서 '병'이라는 별도의
이름으로 불려질 수밖에 없어 갑, 을, 병 이렇게 3자가 별도 설정되어
있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음을 가리켜서 '3위1체의 원리'라 한다.
우리 태극 문양과 같은데 단지 업고 안은 모습을 강조한 것이 다른 점이다.
즉 태극 문양의 각 '머리' 부분을 변형시켜 '업고 안은 팔'로서 표현한 것으로
파랑은 빨강을 업고 빨강은 파랑을 안고 있으니 대는 소를 안고 소는 대를 업어
이 대칭 관계는 이같이 반드시 大小 및 主從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이 그 특징이다.
원래는 하나였으나 자기 닮은꼴을 만듦으로써 대소, 선후, 주종, 인과 관계가 형성된 것.



The Structure of 'trini law'


'트리니 호모'의 구조로써 이상의 삼위 일체 원리가 확고히 증명되는 것이니
왜냐면 '트리니 호모'의 구조가 그림 그려놓은 듯 

이상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을뿐더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만상, 만사가 철저히 

이 원리에 의해 적용되고 적응되므로
그런 통일성이 '한 하나님'의 손길임을 입증함을 명확히 보이는 것으로서
이 '트리니 호모' 즉 인간 생애의 법칙도 예외일 수 없는데
그 구조가 이를 선명히 나타내고 있음이다.
이것이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확실하게 나타내는 증거가 되어 있는 것.
이 원리는 상보성 원리를 제창한 

덴마크 물리학자 보어(Niels Bohr,1885-1962)가
동양의 음양조화 원리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고 했을
 그 정도에 불과함을 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일반적으로 짝의 개념은 보편화되어 인식되고 있음에 반해
이를 기본 원리로서 입증하지는 못했는데
이제 '트리니 호모'의 구조에 의해 명백하게 증명된 것이다.
이 가장 중요한 그리고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이 원리가 입증되지 못했음을 인해
불교의 근본 교리인 인생무상(人生無常)이 

그동안 그리고 아직도 신봉되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 토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니.
왜냐면 '무상(無常)'의 대칭 개념인 ‘상주(常住)’
곧 ‘영원(永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면 절대로 그런 교리에 

착념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기에 그러하다.
“모든 것이 덧없다”는 것은 이 자연계에 속한 것만 살피고
그 대칭 세계인 초자연계의 건재를 간과한 불찰이기 때문이다.
고로 "모든 것"이 덧없다 하지 말고,
"덧없는 것과 영원불변의 것이 양립, 병존한다" 해야 진리다.
동전의 양면에서 한 면만 보고 이를 고집하니 

진리로서의 ‘통화 가치’가 전무(全無)하다.
물질이 있으면 그 대칭인 반(反)물질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이로써 실증(實證)된 것이다.



 

그러면 '트리니 호모' 구조의 그 간단 명료함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그러한가. 위 그림이 그 설명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트리니 호모의 구조는 위의 3위1체의 원리(the law of Trinity)를 나타내는 도식(圖式)(위의 태극 문양에서 나타나 있듯이)을 하나도 틀림 없이 그대로 닮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3위1체를 나타내는 이 도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또 이렇다. 丙은 甲과 乙이 존재하기 이전의 원 모습이다. 다시 말해 애초 홀로 있던 丙이 자기 닮은꼴을 냄으로써 자기는 甲이 되고 자기가 파생시킨 것은 乙이 되어 있는 것이다. 즉 丙이 이제는 甲과 乙로 나누어져 존재하게 됨이다. 丙이 乙을 새롭게 존재하게 함으로써 즉 파생시킴으로써 이제는 <丙 하나>가 아닌 甲과 乙, 이렇게 <둘로서 존재하는 丙>이 되어 있는 것이다. 甲과 乙로 따로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甲과 乙이 별개의 존재임은 불변이나 옛 그대로의 丙의 형태를 여전히 지속한다는 그 뜻이다. 이것은 甲이 乙을 만들었다, 낳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전에는 없던 乙이란 존재를 새로 창출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만물 만사가 다 이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말하면 3위1체의 모습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여 아래 두 가지 사실을 예로 든다. 첫 예는 동양사상에서 말하는 소위 '음'과 '양'의 조화이다.

그리고 아래의 것은 원자의 구조에 대한 도식(圖式)이다. 즉 양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전하를 띤 전자가 서로 하나가 되어 음전기도 양전기도 아닌 원자라는 구조를 이루어 존재하는 것이다.

이 3위1체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 우주 만물 만상이 모두 짝으로 존재하는 그것이다. 즉 높은 것이 있으면 낮은 것이 있고 단 것이 있으면 쓴 것이 있다. 긴 것이 있으면 짧은 것이 있는 이렇게 대칭적 관계에서 서로 조화를 이룸인데 그 어느 것 하나도 이에서 예외가 없다.

천체의 별들도 제 짝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지 않는가. 우주는 이런 아름다움으로 구성되어 있는 훌륭한 대칭성 구조인 것이다. '만유 인력'이라는 말처럼 단정적으로 모든 만물에 적응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극과 극이 상호 대립하지 않고 서로 보완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낸다.

 짝의 원리

 이를 알기 쉽게 "짝의 원리"라고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 한 켤레가 있을 때 이 한 켤레는 좌우 두 신발로 구성되어 있다. 분명 두 개이기는 하지만 하나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왜냐면 한 짝으로는 아무 쓸모가 없다. 오직 한 켤레로서만 인식되고 유효하게 사용되어진다. 여기서 이 두 신발을 '갑'과 '을'이라 하고 두 개의 신발이 이루어 구성된 별개의 의미 즉 한 켤레를 '병'이라 하는 것이다.

병'은 '갑'과 '을'로 구성되어 있으나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고 전혀 별개의 독립된 의미를 지녀 '신발'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 그리고 이 두 개의 짝 즉 왼짝과 오른짝은 먼저 한 짝의 본을 만들고 나머지 한 짝은 그 먼저 만든 본을 따라 거기 맞추어 왼짝과 오른짝으로 구분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모양이 반대다. 먼저 만든 것을 '갑'이라 한다면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것 즉 '갑'의 본을 따라 만들어진 것을 '을'이라 하는 것이니, 항상 이렇게 짝으로 있는 것은 먼저 된 '갑'으로부터 나중 나온 '을'로 구성되는 것이다.

먼저 계시던 아버지께로부터 나중에 아들이 나오시니, 고로 하나님에게서 이런 이치가 그 기원(起源)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라는 개념은 먼저 계시던 즉 홀로 계시던 다시 말해 그 혼자의 하나로 애초 존재하시던 상태를 계속 유지하시기 위함이니 만물 만상이 다 이 이치를 따른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만드시되 자기 계시는 모습을 따라 만드신 때문이다.

남녀 부부도 짝으로 존재함이 분명할진대 남녀평등이란 망상은 인류가 저지르는 또 하나의 웃음거리가 된다. 이는 인간이 이 세상 신(神-고후 4:4)의 철통 깉은 조종에 얼마나 무지한지 그리고 일거수 일투족을 전혀 자유 없이 움직이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예의 그 신 한 켤레도 그 좌우 짝이 하나 즉 한 켤레로 존재하는 것이나 사람이 남녀 짝으로 되어 있는 것이나 의미는 마찬가지다. 항상 이렇게 짝이라는 개념은 원래의 하나라는 의미를 지속시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발로인 것이다. 세상 만물 만상이 다 짝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확증해서 나타난 것이 '3위1체의 원리'이다.

사랑의 원리

짝의 원리는 사람 삶에서 생명의 법칙 또는 사랑의 원리로 통한다. 3위1체의 원리는 인간사는 물론 우주만물의 성립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사실이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한다.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랑, 조물주와 피조물과의 사랑도 그 이치는 다 같은 것이니 모두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다. 사랑이란 둘이 하나되는 것이다.

 생명의 법칙

 '사랑의 원리'는 생명의 법칙이기도 하다. 甲(나)은 乙(너)을 위하고 乙은 甲을 위함으로써 우리(丙)를 이룬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따라서 甲도 乙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고후 5:15) 것이 자기 부인이다. 그러나, 甲이든 乙이든 丙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위해지는 것이고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경우보다 더 잘 그리고 풍성히 위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상대를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실 리가 없다. 자기를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하심으로써 나의 구원을 이루셨으니 나도 당연히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이것이 바로 '구원 받은 증거'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고 이 것이 "새 계명"(요 13:34)이라 하셨다.

 인간과 원수인 악령(사탄)이 이 세상 신으로서 인간 세상을 지배한다면 3운법칙대로 되는 것은 누구가 하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다른가 할 것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세상 영광과 부귀 권세를 보이면서 이 모든 것은 내게 넘겨진 것인데 자아중심을 따르면 얻을 수 있다고 했고(눅 4:7) 또 주님께서 그를 가리켜 이 세상 왕이라 하셨으며(요 14:30) "이 세상 신이라"(고후 4:4)이라 했기 때문. 

그는 시험하는 자로서 시험할 때는 회유와 위협이 병행된다. 세상의 부귀 영화가 전자에 속하고 육체적 고난과 죽음은 후자에 속한다(욥기). 무엇보다 그는 애초 에덴낙원에서 그러했듯이 거짓말로 인생들을 속이는 데에 있으니(계 12:9), 세상 지배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목적 인생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의 이러한 막강한 영향력과 3운법칙의 인간 생애의 지배 법칙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예컨대 그가 인생들을 죽음의 고난에 몰아넣든 혹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든 오직 3운법칙에 맞추어 행사할 따름이지 그 범주를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이 3운법칙이 인간이 나자마자 정해지는지 아니면 철들어 세상 물정을 알고 자기 진로를 어느 쪽으로 택할지 정한 다음에 정해지는지 그런 것은 알 수가 없다. 잔다르크의 19년 생애는 OT유형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 인생의 생애를 미리 보신다. 이는 모든 제조자의 특징이다. 인간 역시 자기가 만들 물건의 용도를 모르고는 감히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 물건이 해가 될지 이가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단지 확신하는 것은 악한 자의 지배를 받는 세상이므로 이런 세상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받음을 영광으로 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세상 살기를 더 좋아하여 고난 받음을 회피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런 점을 노려 이 세상 신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 나라의 왕으로 세우시는"(단 5:21) 것과 같이 이 세상 신이 부귀영화를 주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사람을 세우는 것이지 자기 마음대로 생사 여탈(與奪)을 감행하지는 못한다. 악령이 이 세상 신이지만 하나님은 신(악령이든 천사든)들 위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흐름은 항상 일정 방향 일변도이다.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3위1체 원리는, 갑에서 을로 계속하여 흐르되 그것이 다시 을에서 갑으로 흘러감을 보인다(그림 5). 즉 나는 나를 위하지 않고 자기 부인(self-denial)으로 일관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변함없이 위해지는 것이니 왜냐면 '갑'도 '을'도 모두 '병'의 본질을 내포하여 그 '병' 안에는 '갑'도 '을'도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

계속하여 일정 방향에의 흐름을 유지하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비결. 이는 원래 '갑'이 '병'이었는데 '갑'이 '을'을 파생시켜 '갑'과 '을'로 분리됐으나 본질이 같으므로 항상 '병'의 형태를 유지하려는 습성을 말하는 것. 이것이 공동체 의식으로서의 '사랑의 원리'이자 생명의 법칙이니 모두 '3위1체의 원리'에 기반을 두는 것이다.

위의 그림에서, '갑' 즉 '내'가 '병' 곧 '우리'였는데 '갑' 곧 '내'가 '을'인 '너'를 파생시켰다는 것은, 나를 주체로 하여(여기서는 '자아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님) 이루어지는 모든 행동에서의 각 개인의 의식 구조를 말함이다.

다시 말해 '우리'와 '나'를 동일시할 때 '우리'에는 '너'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으므로, '내'게 있어서 '너'란 것은 '나'의 분신으로서, '나'를 객관적으로 떼어 놓고 보는 것이 바로 '너' 곧 '나의 이웃'이라는 뜻이 된다.

또 '갑'과 '병'을 조물주라 할 때 '을'은 피조물로서 이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가 이상과 같은 모든 개인적 의식의 뿌리가 된다. '나'와 '너'가 '우리'라는 의식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으로 하나되는 모든 인간 관계가 애초 조물주께서 피조물을 만드심으로써 비롯되어 형성 유지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

왜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시는 사실을 확신하는 기본 바탕 위에서 내가 나를 위하지 않게 되고 자기 부인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 나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롹증되었기 때문에(롬 5:8) 이로써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고(요일 3:16) 사랑의 핵심인 자기 부인으로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음이다. 이 <요일 3:16>을 모르면 <요 3:16>을 아무리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트리니 호모(trini homo)/fashomo, fas homo(파쇼모, 파스호모)의 구성 숫자 (2)


앞에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와 레오나드 다빈치의 말을 인용했지만 트리니 호모가 이 예에 가장 적합한 경우다.
트리니 호모는 활동기(전성기)와 비활동기(침체기) 및 사망 연대를 수리적(數理的)으로 나타내고 있는 법칙으로서
산법(算法)은 초등학교생도 가능한 아주 간단한 산술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중요성이 있다.

트리니 호모를 구성하고 있는 수치를 보면 단순 명료하다는 말 한 마디로 족하다.
즉 
1/3. 3/7, 4/7, 7/19, 5/19 ... 이 정도, 그리고 이것뿐이다.

트리니 호모의 구조를 수치로 나타내는 이들 숫자에서 그 중심되는 것을 보면
단연 
3과 7이라 할 수 있다. 이 3과 7이란 숫자는 1과 2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잘 알려진 친숙한 숫자다.
약방에 감초처럼 끼어 드는 숫자이니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숫자라 거창한 수식
(數式)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모든 인생들이 스스로 검증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꾸며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인간 생애가 3부분씩 나누어져 양지(sunny)와 음지(shady) 기간이 가려셔 생애의 1/3이 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3위 1체의 원리에서도 이 
3이란 숫자가 주축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또는 사람 삶이 7등분되어 있다는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이니 6일간 창조에 제7일이 안식일이 아닌가.
해서 3이 끼이는 것은 당연하고 그러면 그 나머지가 되는 4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숫자니, 그래서 3/7, 4/7다.

문제는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7/19, 5/19인 것이다. 이 19라는 숫자가 수수께끼가 된다.
생애를 19등분하니 양지와 음지는 각각 똑같이 7/19로 나누어지므로 그 나머지가 5/19가 되어 유청소년 기간에 해당된다.
그리고 7/19이라 할 때 7 역시 당연히 끼어 들 수 있는 숫자다. 오직 기이한 것은 이 
19라는 숫자의 출처다.
이 19라는 숫자가 대관절 어디서 연유되었다는 것인가?

그보다 먼저 3, 4, 7에 대해 달리 설명을 시도해보면, 3은 1, 2, 3 ...이렇게 연이어 나가는 숫자 행렬에서
2의 
연수(連數)다. 다시 말해 2 다음에 오는 숫자인데 트리니 호모에서는 이 '연수'가 한 몫 역할을 하는 것 같다.

3의 연수는 4인데 이 둘을 보태면 7이다. 3으로써 일단 끝내고
그 
3의 연수로서 다시 4, 5...로 연이어지지 않고 3에다 3의 연수 4를 보태어 7을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7을 만든 다음에는 7의 연수인 8을 또 찾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7에다 8을 보태지 않고 7에다 8 곱한다. 곱해서 얻은 값이 56.

그래서 얻은 56에서 다시 연수를 찾는다. 그러면 57이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의 과정만 보아도 일정한 규칙성을 찾을 수 있는데 필자 개인의 생각일까. 

1, 2, 3....4(連數)+ 4 7....8(連數끼리 더하기)7 x 8 56(連數끼리 곱하기)....
56....
57(連數로 이어 나가기)
그래서 56마디(FS형)와 1차이로 아주 근접하게 다른 57마디(OT형과 SN형)로 형성된다.

마디(節, node, internode)

'트리니 호모'를 보면 사람 일생이 대(竹)의 마디(internode)처럼 나누어져 있다고 보아진다.
이 마디가 FS에서는 56개이나, OT 및 SN에서는 57개로서 똑같다는 것은
OT형과 SN형이 대칭형을 이루고 있다는 뜻이요,
FS형이 불과 1개 차이로써 거의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은
FS형이 OT형과 SN형으로 나누어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해석된다.

1 이상으로 차이가 벌어지면 세 유형이 모두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되어버리므로
1의 격차가 아주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이들 마디의 갯수(숫자)는 OT형과 SN형이 이루고 있는
희한한 대칭 관계(19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바)를 나타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인간 생애가 이런 대나무와 같은 마디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은
인간이 대나무처럼 절조 있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임을
은연 중에 드러내심이라 한다면 어떨까. 대의 마디처럼 되어 있기에 해보는 생각이다.

앞의 지적대로 이 인간 생애의 법칙이 오늘날 계시될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셨으면
예로부터 송죽(松竹)을 칭송해 온 대로 곧고 사시장철 푸른 기품과 기백이야 단연 식물 중 으뜸이다.


대는 본시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데에서 더욱 그 의미를 음미할만 하다.
약하디 약한 풀의 기질을 타고 났으면서도 너무나 강고하여
꺾어도 쉽사리 제대로 꺾이지 않는 강인함이야말로 과연 만고 충절의 본이라 하겠다.

사람의 평생이 대의 마디처럼 되어 있다는 것은 그 마디가 되는 바로 그 시점(時點)에
대의 마디에 줄기나 잎이 나는 것처럼 어떤 특정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
활동기(LP)나 비활동기(DP) 또는 JP기간(OT, SN형의 경우)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활동기, 비활동기 등이 인간 생애를 56 또는 57 등분한 데에서 정해져 나타나기 때문.

왜 하필이면 다른 숫자 다 젖혀두고 56과 57이냐 하면
56과 57은 OT유형과 SN유형과의 도치성()을 나타내는 데에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유일한 숫자들이기 때문. 
뿐 아니라 OT와 SN이 FS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는 가장 적절한 숫자이기 때문.


다른 설명으로는, FS형의 56 마디를 7을 중심으로 할 때, 7X7+7=56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56....57 즉 57은 56의 연수인 바, OT 및 SN은 FS와 "같으면서도 다른" 사실을 숫자로 부각시켰다고 하겠다.
우리 인간의 일상용어에서 결코 생소하지 않고 낯 익은 숫자로서의 1,3,4,7이다.
따라서 7을 위주로 하여(7X7+7) '56'이라는 값을 이미 얻었으므로
이 56이라는 숫자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다른 것으로서의 '57'을 중심으로 하여
OT형과 SN형이 탄생한 것이라 하겠다. 즉 이 57개 마디를 3등분하면 OT형,
이 OT형을 도치(倒置)하여 변형시킨 것이 SN형이 된다.
이렇게 해서 마디 수 '56'과 '57'이라는 숫자의 근거가 밝혀진 것.

이렇게 되면 1,2,3,4,5,6,7,8,9 등의 아홉 숫자가 모두 동원되는 셈이다.
여기서 8이라는 숫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 같으나
57개 마디의 OT형이 19로써 3등분 되었고 SN형은 3으로써 19등분 되었으니
56마디 FS형은 8로써 7등분 되었다는 함의(含意)가 됨으로써 실질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으나
SN형과 OT형의 특이한 관계로 인하여 덩달아 그 의미가 조명되는 셈이다.

이렇게 해서 3/7, 4/7, 1/3, 7/19, 5/19로서 확정된다.


이상과 같은 일정 형태를 취한 연후에 여기서 트리니 호모의 구조가 이뤄진다.
때문에 이 구조에서 1, 3, 4 및 56, 57은 7 다음으로 중요 역할을 한다.
단 56과 57이라는 숫자는 3 또는 19라는 공약수(
公約數)로 변형되므로 실제 활용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억조창생 인간 생애가 정해져 나가는 데에 실제 활용되는 숫자는 1, 3, 4, 5, 7, 19 뿐이다. 
즉 인간 생애를 결정 짓는 데에 사용되는 수치의 근거(토대)가 된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냥 7이란 숫자를 기본으로 하고 7을 등분하지 않고 크고 작은 것으로 나누어도 4와 3이 되니 이것이 FS를 구성하는 인자(因子)이며 여기서 3이란 숫자가 나왔으므로 균등하게 3등분할 때 이것이 OT의 구성 인자가 된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SN의 구성 인자인 19란 숫자가 어째서 생기느냐에 미쳐서는 부득불 이상과 같은 설명 과정이 필수 필연인 것이다. 부언해 둘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마치 초등학교 그것도 저학년생이 머리를 굴리는 것처럼 하신 것으로 풀이해서야 되겠느냐 하겠지만 이 인간 생애의 법칙을 장차 인간들에게 알리고자 하셨다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진다. 무식자나 유식자나 모든 인간이 납득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방법이 가장 적합한 것이다. 왜냐 하니 하나님의 방식과 능력대로 하시는 일이라면 어느 인간도 감히 능히 추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로 최고 석학이라도 어린 아이들과 대화하려면 어린 아이 지능과 지식 수준으로
마치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런 것을 인간에게 알리시기로 작정하시고 이 법칙을 정하셨다는 사실이다. 
바로 위와 같은 식으로 풀어 나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이다.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구조식(構造式) (2)


이와 같이 인간 생애는 3가지 유형 즉 FS, OT, SN으로 대별되고
3위1체 원리를 설명하는 도식과 똑같은 구조를 가짐으로써 3위1체 원리를 이로서 검증하는 것이 되어 있다.

즉 FS가 3위1체 원리의 '병'에 해당하여 세 형태의 기본이 된다.
이 기본이 되는 형태가 바로 
7로써 시작되는 것이다.

OT나 SN형에서 나타나는 JP기간을 분석하려면
먼저 출생시부터 시작하는 생애의 5/19(SN) 또는 1/3(OT) 기간을 찾아낸 다음
그 기간을 7등분해서 그 4/7(보다 사정이 나은 기간)와 3/7(보다 못한 기간)을 가려내어 찾아가면 된다.





 파쇼모(fashomo)의 구조식(構造式) (3)


앞에서 연수(連數)의 개념으로 "19"의 개입 원인에 대한 설명을 했지만 연수는 무시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도 가능하다. 즉 56마디(節)와 57마디라는 56, 57이 무엇을 근거로 하느냐 하면 상호 도치형(倒置形)인 OT형의 3과 SN형의 19를 곱하면 57이 나온다. 이 자체가 두 유형이 도치형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57과 "가장 근접하고 다른" 숫자로서 56을 택하니까 7x8=56해서 맞아떨어진다. 이로써 FS형이 56등분된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면 가령 7x7이든가 7x6을 하게 되면 57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생겨 "가장 근접해야" 하는 기준에 훨씬 미달되기 때문이다.

OT형의 도치형이 SN형이라는 것은, OT형과 SN형이 57마디로 되어 있음을 전제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그 근거가 되어 있다.
OT형은 57마디를 3등분한 것이고 SN형은 거꾸로(그와 반대로) 57마디를 19등분한 것이 됨으로써 둘은 도치(inversion)형이 된다.

OT형의 3X19=57이라는 수식(數式)은, 3(OT형의 3등분의 3)X19(OT형의 LP 기간 즉 1/3 다시 말해 19/57의 19)=57. 이를 기준하면 FS형 역시 7(FS형의 7등분의 7)X4(FS형의 LP 기간 즉 32/56 다시 말해 4/7의 4)X2=56.

FS형의 7X4X2=56에서 7X4는 설명이 되었으나 여기에 다시 2를 곱하는 이 '2'는 무엇인가. 이 '2'는 OT의 '3'에 해당된다. OT의 '3'은 3등분되었다는 그 3과 더불어, 생애가 3기(期) 즉 예비기(또는 유청소년기, 모세는 40가 되기까지도 이 기간에 해당되었지만) 및 활동기와 비활동기 다시 말해 JP, LP(Lively Period), DP(Dull Period)로 나눠지는 그 '3'을 함께 의미하나, FS형은 JP(Joseph's Pattern)가 없이 DP, LP 단 2기로 나누어지므로 그 표시를 일부러 해야 하기 때문에 이 '2'가 표시됨이다. 그래서 7X4X2=56.


 


 파쇼모(fashomo)의 절묘한 구조는 무엇을 말하나 
'트리니 호모'가 3위1체 원리의 검증이 되는 이유


미리 언급해 두지만, 이 3운 법칙은 ①, ②, ③, ④, ⑤, ⑥, ⑦로 나누어 그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나 그 가장 중요한 것은 3위1체의 원리를 확실히 증명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과학적 법칙(일반으로 자연계에 속한 원리들을 말함)은 과학자의 실험을 통해 그 진실성이 입증되지만, 자연계만 아니라 그 대칭 구조인 초자연계 또는 영계(靈界)까지 통할하는 이 '3위1체 법칙'만은 그 특성답게 자연법칙을 입증하는 수단으로는 증명되지 않고 자연계에 속한 것과 영계에 속한 것과의 절충점이라 할 수 있는 이 3운 법칙의 구조의 형성 자체로써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 생애의 법칙(트리니 호모)'이 단 세 가지 유형이 아니고 모두가 동일하여 통일을 이루어 단 하나이든가① 아니면 아무 의미 없는 몇 가지 유형으로 중구난방으로 나타나질 수도 얼마든지 있는 일이다②.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만 도출 가능한 두어 가지 중요 사실을 나타내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첫째 ‘트리니 호모’의 진실성 입증이다. ①의 경우라 하더라도 혹시 그 외의 극소수 예외적인 유형이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르므로 전체 인류 각 개인의 생애를 분석해보지 않는 한 트리지 호모에 대해 확증 차원에서는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하게 된다.


또 다른 유형이 있을지 모르고 전혀 해당이 되지 않는 인간 생애도 있을 수 있다는 가정 아래 사람들이 이 트리니 호모의 존재를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체 모든 인류 각 개인의 생애를 분석하지 않는 한 이 ‘트리니 호모’를 확인 증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된다. ②의 경우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오밀조밀 신묘 막측하게 그리고 명확한 뜻(3위1체의 원리를 드러내는)을 나타내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모든 인류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분석하지 않아도 충분히 확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 트리니 호모의 구조 자체가 이상과 같은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 또는 구조식(構造式)이라는 하나의 완벽한 메시지를 이루어 그 자체 내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충분한 의미를 담고 있는 ‘트리니 호모’의 구성 인자(因子) 자체가 너무나 이지적이고도 의도적이어서 목적성이 분명하기 때문에 ‘트리니 호모’의 진실성에 대해 그 누구도 왈가왈부하거나 안일하게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니, 원천적으로 완전 봉쇄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 인물만을 표본으로 생애 분석을 해도 전체 인류가 다 그렇다는 결론을 내림에 아무 하자가 없게 되어 있다.


② 하나님의 창조물에서 예외 없이 명백히 드러나져 있는 3위1체의 원리를 이 ‘트리니 호모’에서도 확인하게 된다는 사실로서, 이는 모든 피조물에 드러나 있는 공통점임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 선명히 찍혀 있는 제조(製造) 마크(make mark, producing mark)가 확인된 이상 더 이상 의심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트리니 호모’의 유형이 현재 알려진 3가지 이상이어도 안되고 이하이어도 안되는 것이다. '트리니 호모' 구조의 희한한 희화성(繪畵性)의 의미와 목적이 이로써 선명해진다.


이상 두 가지 기본 증명에서 ① 하나님의 존재와 만물 창조, ② 성경의 진실성, ③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으로서의 실체(實體), 즉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심, ④ 이 때가 세상의 마지막이라는 것, ⑤ 이와 같이 ‘트리니 호모’에 의해 철저히 통제된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은 무의미하고 오직 초자연계 이상향(성경에서 "천국"이라 말하는)에서의 영원한 삶만이 완전한 자유 안에서의 진정한 인간 삶이라는 진실이 또한 각각 드러나고 있다.


①하나님의 ‘인간사(人間事) 개입’이라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이들은 "자연법칙은 우리가 알고 있다. 그러나 인생들을 직접 관장한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 않으냐" 하는 말로써 창조신을 부정해 왔다. 그러나 상보성 원리에서도 드러나듯이 자연 만물을 지배하는 '3위1체 원리'가 인간 생애를 온전히 3가지 갈래로만 한정하여 철통같이 장악하여 조정하고 지배한다는 증거를 확정해 주고 있지 않는가.


②하나님이 존재할 때 반드시 인간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을 것인 바 그 메시지로 자처하는 성경을 전적으로 근거하여 이 ‘트리니 호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 두드러진 예의 하나가 노아의 생애 분석으로서 천년 가까이 살았던 그 생애를 두고 지금까지 대다수 사람들이 신화(神話) 취급을 해왔지만, 노아 홍수 당시의 나이인 600세와 그 후 350년 생존한 기록을 근거로 해서 SN 유형이 알아졌던 것이다. 즉 SN 유형에 영락없이 들어맞는 생애이니 그의 950년 생애(고대인으로서는 유일의 대표적 사례)는 진실인 것이다. 기타 성경에 나오는 대로의 인물 가운데 그 수명(壽命)과 활동이 수치(數値)로 나타나 있는 경우 모두 이 ‘트리니 호모’의 분석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자료들이 되어 있다.


③중요 역사적 인물은 이와 같이 그 출생 사망 연도와 활동만 개략적으로 드러나면 필자(발견자)의 생애 분석으로는 예외 없이 다 ‘트리니 호모’에 적용되는데, 유독 예수 그리스도의 짧은 생애만은 성경대로의 33세 혹은 45세 또는 그 어떤 가정(假定)상의 연대(사람들이 가정하고 있는 대로의)를 맞추어보아도 적용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이 예언한 대로 갑자기 “산 자(生者)의 땅에서 끊어졌다”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함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아담은 영원히 죽지 않는 특성을 드러냄이니, 트리리니 호모 즉 3운법칙은 죽게 되어 있는 인생들을 주관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셨지만(갈 2:20)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죽은 자가 아니시다.


④역사적 인물들의 생애 분석에 관한 자료가 축적되면 그와 같은 3가지 유형 중에서도 여러 가지 일정 패턴(pattern)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각자는 자기의 지금까지 영위되어 온 생애가 어느 패턴에 속하는지를 알게 될 터이므로 각자 자기 죽을 날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니 그렇게 되면 사람은 그 죽을 때를 알지 못한다는 통념이 깨어지고 인간의 생활 양상이 바꾸어질 것이므로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을 우리의 경험으로는 감히 기대할 수 없는지라 이는 성경이 말하는 바 “마지막 때”임을 직감하게 되는 까닭이다.


왜냐면 성경 자체가 인간은 그 죽을 날을 알지 못하게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이 세상이 그 마지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다니엘의 예언(“마지막 때 사람이 신속히 내왕하며 지식이 더해진다”-단 12:4)대로 하면 분명 오늘 이 시대가 그 시점에 해당되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20세기를 전후하여 갑작스러운 화산 폭발처럼 봇물 터지듯 분출해 나오는 형상을 우리가 똑똑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나타났다면 우리가 정히 그 때가 어느 시점인지 짚어보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이와 같이 두드러진 양상으로 드러날 때는 “과연 여기구나” 하고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3위1체의 원리를 그림으로 그린 듯이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다시 정리하면, ‘갑’, ‘을’, ‘병’ 삼위(三位)에서 ①일시(一始) 또는 일체(一體)로서의 ‘병’의 존재를 부각시켜야 다시 말해 ‘갑’과 ‘을’로서 분리되기 이전의 그 원형(原形)이었고 현재는 또한 ‘갑’과 ‘을’이 하나로서 존재하는 형태가 ‘병’임을 드러내어야 하고, ②그리고 현재는 이원(二元)이 되어 있는 ‘갑’과 ‘을’이 서로 닮은꼴로서 ③둘 다 ‘병’에서 파생(派生)되었음을 나타내어야 하는데 바로 이런 모든 것 즉 ①, ②, ③이 아주 희한한 숫자 배열과 수치(數値)의 역할로 충분히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①에서는 ‘병’에 해당되는 FS형의 마디(節, internode, node) 수가 56개이고 갑과 을을 상징하는 OT형, SN형의 마디 수가 57개로서 똑같지 않으면서도 근접성 또는 유사성(類似性)을 나타냄으로써 해결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여기에는 OT와 SN이 각각 FS형의 축소판인 JP 기간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포함된다. ②에서는 OT와 SN이 똑같은 마디 수로 되어 있다는 사실로써 나타나고 그 ‘똑같은’ 57개의 57이라는 수는 19x3으로 얻어지는 값인데 바로 그 숫자 19와 3을 하나씩 순서만 바꾸어 나누어 가짐으로써 그 활동기(또는 ‘전성기’)/비활동기(또는 ‘침체기’)를 1/3 그리고 7/19로 나타내어 상호간 불가분의 닮은꼴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 희한한 그리고 치밀하고도 섬세한 구조가 ③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FS형은 활동기(‘Lively Period’이라 하여 ‘LP’로도 나타낸다)가 마디 수 56개이므로 32/56 즉 4/7이다. 그리고 비활동기(‘Dull Period’이라 하여 ‘DP’로 나타낸다)는 24/56 곧 3/7이다. 바로 이 3/7, 4/7 그대로를 OT, SN 각 유형은 그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JP 기간으로써 나타내는 것이다. 즉 OT에서는 JP 기간 19/57(1/3)의 4/7가 LP, 나머지 3/7이 DP이다.


또 SN에서는 역시 마디 수가 57개이므로 JP 기간은 15/57(5/19)인데 그 평생의 5/19 기간 중에서 LP는 4/7, DP는 3/7로 나타난다. 이것은 여러 사람의 생애를 ‘트리니 호모’로 실제 분석해본 결과 바로 이와 같이 여지없이 나타나지기에 얻어진 결론이다. 그러므로 OT형이나 SN형이나 DP와 LP가 모두 그 기간이 같은데도(2等分) JP 기간만은 FS형의 DP(3/7)와 LP(4/7)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전체 형태를 보아서도 OT와 SN은 FS형과 부정할 수 없는 유사성을 (꼭 그대로의 동일성은 띠지 않으면서도-이 경우 동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띠고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FS형의 마디 수가 56개인즉 56은 7x8로서 얻어지는 값이고 또 OT와 SN에서는 JP기간을 제하면 LP와 DP가 등분(1/2)으로 배분되어 있으므로, 이 놀라운 ‘트리니 호모’ 구조에서 아라비아 숫자만으로 보아도 0만 제외하고는 1, 2, 3, 4, 5, 6, 7, 8, 9가 모두 골고루 동원되어 나타나져 있다고 할까. 단 8만은 FS형의 마디 수가 56이므로 OT, SN형처럼 마디 수를 56=3x19, 56=19x3 식으로 표시하려면 56=7x8이어야 하므로 여기서 나오는 8이다.
 

  JP란 무엇인가  

여기서 JP 기간이 무엇이냐 하면, JP 기간은 사람이 출생하면서부터 시작되어 비활동/활동기로 연이어지는 기간으로서 FS에는 없고 OT와 SN에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FS에 없는 이유는 JP가 바로 FS형의 닮은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JP는 유형의 이름이 아니고 OT, SN유형에 종속되어 있는 특정 기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JP는 FS형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트리니 호모의 구조가 3위1체의 원리 구조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 결정적 증거 중 하나가 되어 있으므로 중요한 것이다. OT, SN 두 유형의 LP, DP 기간의 순서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먼저 오고 나중 오는 순서). FS유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JP 기간만은 유청소년 기간이므로 반드시 생애의 앞에 온다. OT, SN 공통이다. FS형은 JP기간이라는 것 자체가 없다.


JP 기간이 FS형의 축소판이라 해서 역시 56개의 마디를 두고 있느냐 하면, 원래 이 "마디"라고 하는 개념은 OT, SN형 구조에서 나온 것이다. OT와 SN형이 그렇게 57개의 마디로 되어 있으므로 FS형도 그런가 하여 7등분 한 것을 다시 8등분을 하니 OT, SN형과는 1개가 모자라는 56개의 마디라고 확정한 것이다. 고로 JP 기간도 그 자체적으로 56등분할 수도 있지만(LP 및 DP가 FS형처럼 4/7, 3/7으로 구분되므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 7등분으로 해서 분석하면 충분한 까닭이다. 
JP 기간은 OT형일 경우 마디 수가 LP, DP 각각 19개이므로 그 나머지도 역시 19개이고 SN형일 경우 그림 10과 같이 LP, DP 각각 21개이므로 그 나머지는 15개가 된다. 다시 말해 사람 생애는 56개의 마디를 지닌 FS형과 57개의 마디를 지닌 OT 및 SN형으로만 구분되는 것이다. 



 

  FS유형의 구조  

이제 각 유형을 소개하면, FS유형은 그 56개의 마디를 7등분해서 나타내는 인간 생애다.

7등분하니까 8개씩의 마디가 된다. 8 마디씩 7등분해서 나눈 것인데, 그 7등분을 3/7과 4/7로 나눈다. OT와 SN형에서는 DP(비활동기)와 LP(활동기)가 모두 똑같은 길이(長)의 기간이니까 차별화를 위해서(丙으로서 甲, 乙과는 달라야 하므로) DP와 LP를 장단(長短)으로 구분하여 4/7, 3/7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3/7은 비활동기(DP), 4/7는 활동기(LP)로 이루어진다. 활동기와 비활동기는 대칭 관계에 있어 대칭성의 대소(大小), 주종(主從) 원리를 따라 둘의 기간은 같지 않고 활동기가 보다 길어야 하기 때문이다. 
OT형과 SN형은 DP와 LP의 길이가 똑같은 반면에 JP기간이 있어 그런 FS형 기본 구조를 유지하는 것. 만물 만상이 대칭 관계로 되어 있으나 대등하지 않고 반드시 큰 것과 작은 것, 주(主)된 것과 종속된 것 등으로 엄격히 구분되어 있는데 이 구조에서 바로 그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삼위 일체 법칙의 구조식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 파쇼모(fashomo)'의 구조   

 

甲과 乙이 丙의 형태 ●와 같은 ◐과 ◑의 모양새를 띠는 것은 원래의 丙이 둘로써 나누어진 것인 만큼 모양새는 같으면서도 그 내용은 다르고 각자 자주 독립성은 유지하면서도 본질은 같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과 ◑의 모양에서 보듯 서로 대칭적인 모양새를 띠는 것으로 나타낸 것이다. 즉 하나가 검은 부분이 왼쪽이라면 나머지 하나는 그 반대 쪽인 오른 편에 붙어있는 것으로 나타낸다.

뿐 아니라 '같은 모양'이면서도 '각기 다른 내용'이라는 사실이 ●과 ○으로 표시되고 있다.

그리고 丙은 甲과 乙이 각기 별개의 모습을 취하여 내용이 다르면서도 원래의 모습인 丙의 형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한 그래서 하나로서의 모양새를 취하는 형태로서 반은 검고 반은 흰 모습인 ◑을 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그리고 여기서 甲이 乙보다 반드시 크다는 것을 →로 나타내어 甲→乙→丙→甲으로 표시한다.

원래의 丙이 乙을 만듦으로써(다른 말로 하면, "낳음으로써") 자기는 乙과 짝을 이루는 甲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丙이 '甲'이 되어 있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이전 즉 홀로 존재하실 때는 '창조주'라는 이름이 필요 없었으나 乙이라는 존재 즉 피조물을 자기로부터 즉 자기자신을 소재로 하여 만드셨을 때부터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두 개념을 떠나서는 만물 만상을 설명할 수가 없게 되어 있으므로 항상 <조물주>라는 이름으로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로 하나님께서 계심도 같은 맥락이다. 홀로 계실 때에는 "아버지", "아들"이라는 구별이 물론 없었으나 아들을 만드신(낳으신) 다음부터는 "아버지"와 "아들"로 계심과 같다. 丙이 다른 "이름" 즉 甲으로 존재함의 이치다.

위의 그림에서 甲과 乙은 丙의 ● 부분을 한 부분씩 나누어 가져 ◐과 ◑로 나타나져 있다. 화살표는 甲에서 乙로 줄곧 향하나 다시 말해 나(甲)는 너(乙)를 위하지 나 자신을 위하지 않지만 즉 자기중심이 아니고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지만
‘우리’ 곧 丙을 통해서 결국 자기 자신(甲)에게로 모든 "위함"이 되돌아온다는 이치를 丙으로부터 甲에게로 향하는 화살표가 나타낸다.

‘트리니 호모’ 구조에서 이런 화살표는 FS와 OT와의 접근성, FS와 SN과의 접근성으로 나타난다. 접근성이라는 것은 FS와 OT가 상호간 비슷한 모양을 담고 있고 FS와 SN이 그러한 닮은 모양새를 띠고 있고, OT와 SN과는 전연 닮은 데가 없다는 점에서 표현된다.

즉 SN과 FS는 7을 공유하고 있고(FS의 4/7, 3/7 등) FS와 OT는 3을 공유하기(FS의 3/7과 OT의 1/3) 때문. 그러나 SN과 OT 사이에는 전혀 그런 것이 없다. 대(大)가 되는 OT쪽에서 소(小)인 SN쪽으로 힘이 가해지니 SN은 가까운 FS쪽으로 달려가는 형국이고 또 FS 는 OT와 가까워 OT쪽으로 달려가는 형세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갑에서 을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SN도 FS를 통해 OT쪽으로 역류하는 현상을 보임으로써 3위1체 원리의 갑→을→병→갑의 순환 관계를 보인다고 할 것이다.


 

 OT/SN유형의 구조 

트리니 호모의 나머지 두 형태 즉 OT와 SN이 바로 이상 설명한 갑과 을과 똑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FS형의 마디 수와 비슷한 (마디 수 한 개만의 차이) 57개의 마디를 OT와 SN이 지니고 있음이다. OT와 SN 및 FS의 마디 수가 거의 같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 "모양새가 같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 내용이 다르다"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져 있는가.

OT유형의 경우, 57 개의 마디를 3등분하면 마디 수가 19개씩 해서 3등분이 된다. 그래서 활동기(LP), 비활동기(DP), JP기간이 균일하게 1/3씩이다. 그렇다면 갑과 을이 대칭형이라는 이 대칭성을 SN형은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면, 갑인 OT형의 구조를 그냥 뒤바꾸어버리는 아주 재미 있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니 즉 OT형과는 반대인 마디 수를 3개씩 해서 19등분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그림을 그린 듯이 딱 맞아 떨어지게 짜여져 있다는 말인가! 오직 놀라울 뿐이다. 7/19(LP), 7/19 (DP)이다 보니 나머지는 5/19(JP)일 수밖에 없다. 5란 숫자는 그래서 나온 것이다.

처음 7/19이란 SN형이 드러났을 때 나머지 1, 3, 4, 7 등의 숫자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SN형에서의 19란 숫자는 너무나 엉뚱하기만 한 난데없이 튀어나온 숫자였다.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는데 이상과 같이 놀라운 형태로 되어 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것.

밝혀 둘 것은, 먼저 이와 같은 구조의 이치를 알고 각 사람의 생애 분석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먼저 생애 분석을 하여 그 트리니 호모 분석의 진실성과 신빙성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다음에도 그 후에 풀지 못했단 숙제가 바로 이 19의 숫자였다. 19란 숫자가 엄연한 사실로서 각 생애 분석에서 척척 들어맞는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단지 19의 정체를 알고 싶었으나 알지 못해 궁금했던 것이다.

이 SN유형의 힌트를 준 것은 노아의 생애였다. 600세에 홍수가 났고 그 후 350년을 더 살아 950살의 나이에 죽은 것이다. 이것을 황당한 전설에 불과하다고 처음부터 치부해버리는 그런 선입견이었다면 절대로 노아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노아에 대한 성경 기록을 의심치 않고 믿은 결과라 할 것이다.

그리고 SN형과 OT형의 유사성은 이런 모양새 말고라도 그 활동기 및 비활동 기간의 비율이 19/57(OT)와 21/57(SN)로서 그 차이가 불과 2/57 정도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사람을 좌, 우 대칭으로 만드심

 SN형과 OT형의 대칭성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형국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일부 과학자들이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아메바에서부터 진화를 거듭한 결과 오늘과 같은 사람으로 발전해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지금 우리가 인식하는 바와 같은 다 자란 성인으로서의 인간의 완전한 형태를 '흙'으로 만드신 것인데 그것을 '좌우 대칭'으로 만드신 사실을 나타냄이다.


즉 좌, 우 대칭성으로 되어 있는 인체에서도 보듯이 한 쪽을 먼저 만드신 후에 그것을 복제하시듯이 해서 그 둘을 좌우로 봉합하신 그런 형국을 띠고 있는 것이다. 반신불수의 현상에서도 이 좌우 대치성이 드러난다. 그리고 비록 그렇게 좌우 대칭으로 돼 있으나 좌우가 완전히 같지 않다는 데에서도 이를 증명할 수 있으니 눈 모양을 보아도 대개 좌우가 서로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똑같게 하실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봉합 흔적을 나타내시기 위함이었다 할까. 약간의 차이를 그대로 남겨 두심으로써 3위1체 원리로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그 과정과 순서를 나타내 보이심이라 할까.

갑과 을의 대칭성 원리를 나타내는 SN형과 OT형의 형태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극히 유사하지만 그렇게 약간의 차이가 나게 하신 것을 그대로 따르는 모양새다. 그러나 그 차이는 기준 없는 무원칙이 아니라 엄연한 규칙성과 일괄성을 지닌 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같은 57을 3등분 해서 얻은 19와, 그것을 거꾸로 하여 19등분 해서 나오는 3의 상관 관계가 그래서 놀랍기만 하다는 것이다. 여자를 만드실 때도 남자를 원형(기본형)으로 하셔서 그 대칭으로 지으신 것이다. 그래서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2:21,22).


 


 JP의 구조 

다음에 JP를 보면, 이 JP는 위의 3위1체 원리를 나타내는 도식에서 丙의 모습 즉 FS형의 LP, DP를 그대로 나타낸다. 과연 트리니 호모의 구조에서 이 역시 그렇게 기막히게  맞아떨어짐과 같은 모양새인가 하면 역시 그렇게 절묘한 형태로 나타남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다시 말해 OT형이나 SN형의 JP기간은 FS유형의 축소형 또는 압축형이라는 의미가 담겨져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ㅡ. 그러면 JP가 FS의 닮은꼴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놀라운 것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즉 두 개의 내용상에서의 동일성이다. 즉 FS형의 활동기(LP-Lively Period)와 비활동기(DP-Dull or depressing Period)및 JP의 양지기(陽地期, LP)와 음지기(陰地期, DP) 비율이 똑같다는 것이다.

JP기간은 반드시 출생시부터 시작되어 보통 유소년기에 해당되므로 (단 장수자(長壽者)의 경우 SN이나 OT에 해당될 때는 물론 청년기의 일부도 포함된다) '활동기'라 할 수는 없고 명칭을 바꾸어 '양지 기간'과 '음지 기간'이라 부른다.

아니면, 그냥 간단히 LP 및 DP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JP에서의 LP와 DP가 FS형에서의 LP 및 DP와 똑같다는 것은 모택동, 베토벤, 미국 후버 대통령 등의 유(청)소년 시절을 분석해볼 결과 드러난 것을 기초로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세 유형에서 OT와 SN형은 기본유형 FS형의 활동/비활동 기간을 닮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OT와 SN형의 활동 및 비활동 기간은 똑같은 반면 활동기와 비활동기 비율이 4:3인 FS형의 축소 형태인 JP기간을 두고 있는 까닭이다.

즉 3위1체 원리의 도식 ●와 ◐, ◑이 3운법칙에서 FS, OT, SN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OT, SN의 JP가 FS으로서의 ●를 ◐, ◑와 같이 반분(半分)하여 가지는 모습이 JP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OT, SN 두 개가 검은 바탕을 나누어 갖되 좌우가 다르게 위치시키고 있는 것은 19라는 숫자로 드러나고 있는 대치성(inversion)으로 설명된

고로 세 유형 공통으로 활동/비활동기 비율이 4:3임이 되어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OT, SN형은 LP, DP의 비율은 같지만 그 둘의 JP가 4:3 비율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통일성과 공통점은 '트리니 호모'의 현재 구조의 확실성과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애 분석에서 실제 그렇게 드러나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서와 같이 OT형과 SN형이 서로 닮은 꼴이고 FS형과 JP기간이 또한 닮은꼴이다. 그리고 이 세 개가 모두 FS형을 중심으로 하여 유사성과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JP 기간은 성경에서 야곱의 아들 요셉의 소년 시절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파쇼모(fashomo) 구조의 기본 숫자: 3, 4, 7


참고로 3, 4, 7등의 숫자들이 성경상에 얼마나 사용되어졌나 하고 찾아보니
많이 사용된 순서로 나열하면 2, 7, 3, 4의 순이다.
트리니 호모의 구조를 이루는 FS, OT, SN 구성 숫자인 1, 7, 3, 4가 그대로 나와 있다.
2는 OT, SN유형의 LP, DP가 모두 2등분이 되어 있음에서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을까.

SN형의 19나 5는 OT형을 '뒤집기' 해서 얻는 숫자이므로
또 마디 수 56, 57 등은 실제 분석에는 활용되지 않으므로 이상의 1, 7, 3, 4만이 여기서 핵심이 된다.
성경을 택한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그 안의 숫자 표현이 우주 창조(혹은 존속)의 숫자와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2가 구약에서 487회, 신약에서 145회.7이 구약에서 438회, 신약에서 80회.3이 구약에서 296회, 신약에서 76회.4가 구약에서 274회, 신약에서 59회.

여기까지는 신, 구약 순이 같다.

참고로 나머지(5, 6, 8, 9, 11, 12, 13, 14)를 구약 순으로 하면-6(구-196, 신-26), 8(구-191, 신-23), 5(구-153, 신-39), 12(구-73, 신-57), 9(구-55, 신-11), 14(구-43, 신-5), 11(구-33, 신-11), 13(구-24, 신-0).

신약 순으로 하면- 12(구-73, 신-57), 5(구-153, 신-39), 6(구-196, 신-26), 8(구-191, 신-23), 9(구-55, 신-11), 11(구-33, 신-11), 14(구-43, 신-5), 13(구-24,신-0).

여기서 이상 8개 숫자를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면 신구약 공통으로
6, 8, 5, 12가 상위 부분에, 9, 11, 14, 13이 하위 부분에 오고 있다. 
2와 7이 단연 으뜸으로 돋보인다.
2라는 숫자는 일시이원3위1체(一始二元三位一體)에서 양면성 또는 대칭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활동기의 클라이맥스 

 유형 중에서 지금까지 분석해본 결과에 따르면 사람에 따라서는(모든 사람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현상이기는 하나 그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아서인지는 아직까지 단언할 수 없으나) 그 활동기간 중에 정점(頂點ㅡclimax)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時點)이 있다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 정점이 위치한 곳이 그 활동기간의 중간 시점에 그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그야말로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극적인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生)의 클라이맥스는 반드시 정확하게 활동기의 1/2 시점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 클라이맥스(정점)를 중심으로 한 그 전,후반(前後半) 기간의 길이가 반드시 전반기보다 후반기가 길다는 규칙성이 있어 트리니 호모 분석에서 그 정확성을 기하는데 참고가 되기도 한다. 박정희의 클라이맥스 역시 후반기(18년)가 전반기(17년)보다 1년 더 긴 것이다.



 

 파쇼모(fashomo) 활동 기간의 분석 사례

프랑스 잔다르크의 생애 분석에서 나타나는 트리니 호모 다이어그램은 13세 때 그가 "신의 음성"으로 믿은 신비한 소리를 듣고 17세 때부터 구국 전선에 뛰어들어 영국군을 쳐부수며 2년 간 연전연승하다가 마침내 포로되어 19세에 화형에 처해지는 기이한 생애다. 마호메트도 이른바 "음성"을 듣기 시작한 40세경부터 그 트리니 호모상의 활동기가 시작되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런 사람들은 그런 유사점으로써 생애 분석상 특정 부류를 형성하고 있다. Jenny Lind(19세기의 유명한 스웨덴 오페라 여가수)와 이효봉 선사의 생애가 그런 또 하나의 부류를 형성하는 예다.

1413년 태어나 1431년에 죽은 잔다르크의 생애는 OT형으로서 그 활동기는 바로 그 때 13세에 시작되는 것. 
트리니 호모의 "활동기" 개념은 우리가 인식하는 "활동" 또는 길흉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즉 그 생애를 특징 짓는 어떤 전환점이 일어날 때 그 시점이 바로 트리니 호모의 활동기 시작이다.
효봉 선사의 활동기도 판사직을 내동댕이친 때부터 시작되고 승려가 되던 때를 잡지 않는데 이것이 '트리니 호모'의 놀랄 수밖에 없는 특성이다. 즉 한 인간을 "정의(定義)하는" 것이다.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어주라는 "신의 지시"를 받고 집을 나간 17세시부터가 활동기가 아니고 그 훨씬 이전 13세 때 처음으로 "음성"을 듣기 시작한 시점을 활동기로 잡아주는 것이 트리니 호모다. 그 후로 종종 그런 "음성" 을 듣게 되고 그 소리의 내용은 앞으로의 중요한 역할에 대비해 심신 수양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트리니 호모가 정하는 이 분석은 과연 정확하고 합리성이 있는 것.


이와 비슷한 예가 박정희 전대통령의 경우다. 교직자로 인생을 출발했다가 중도에 뜻을 바꾸어 군인의 길을 밟기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는 바로 그 시점이 그의 FS형 생애의 활동기의 시발점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군사혁명 등 일련의 사건들은 그가 군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으므로 이렇게 한 생애의 활동/비활동기를 해석해내는 '트리니 호모'는 그 충분한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트리니 호모 특유의 생애 분석은 기타 많은 인물들의 생애 분석에서도 일관성 있게 나타난다. 

역사적 논쟁점을 해결하여 주는 '트리니 호모(파쇼모)'

그 두드러진 예가 임진왜란의 권율이다. 그는 권문세가 후손으로 과거를 보지 않아도 당시 벼슬할 길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빈번했던 사화의 참극을 보고 벼슬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40세가 넘도록까지 집에서만 빈둥거리는데 그러던 그가 뜻을 세워 과거를 보고 관계에 입문한다. 그가 이 때 이런 하위 관직이라도 맡지 않았던들 왜란 때 관병(官兵)을 이끌고 출동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행주대첩과 같은 공도 세우지 못했으리라.

어쨌든 역사는 그에게 임진왜란에서의 한 역할을 주문했고 그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런 사명을 이루기 위해 그 싫다던 관계에 뒤늦게나마 들어갔으니, 그가 언제 뜻을 세워 과거 공부를 시작했는지 그 시기를 역사의 기록은 적어놓지 않았으나 그의 트리니 호모는 그 시기를 바로 그의 활동기의 시작점(始點)으로 적시해주고 있는 것.

왜냐 하면 바로 그 시기가 그런 역사적 소명을 맡게 되는 권율로서는 생의 전환점이고 활동기 또는 전성기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트리니 호모의 성격이 이와 같다. 역사 무대에서의 한 인간을 정확히 평가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주팔개자 같은 점술, 복술은 알아 왔지만(그것이 어느 정도 또는 전적으로 거짓인지 참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하나님의 인간 생애를 관장하는 철칙이 알려진 것은 유사이래 처음이다.

 

트리니 호모는 그 수치의 정확성으로 인해 사가{史家}들마저 갑론을박하는 연대 결정에도 그 진가를 발휘하여 정확한 연대를 집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의 잔다아크가 그렇고 징기스칸의 경우도 그 좋은 예다.

 

히틀러가 종전 후 남아메리까 등지에 도주하여 거기서 재기를 꾀한다는 풍문이 유력하게 힘을 얻고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도 했지만 그의 트리니 호모는 그의 죽음이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임을 가리키고 있다.

 

김재규 역시 사형 당하지 않고 미국에 건너가 대로상에서 활보하는 것을 직접 목도한 이가 있다는 등 소문이 어디서든 나돌았으나 그의 트리니 호모는 정확히 그 사형 집행일을 그 한평생의 종료일로서 불변의 나침반 바늘처럼 가리키고 있다. 즉 기록된 그대로 그 때 그가 사망한 것이 트리니 호모로 입증되고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구차하게 그 목숨을 보존해보려고 마지막 해전 때 비겁하게 짐짓 전사(戰死)를 가장했다는 사학(史學)의 문외한들도 더러 있어 만대의 충절을 욕되게 하고 뜻있는 이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지만 충무공이 평소의 그 올곧은 심성과 충의대로 역사에 기록된 바로 그 날 장렬히 쓰러져 숨진 사실을 다름 아닌 그의
 트리니 호모가 어김 없이 증언하고 증명해주고 있다.

 

징키스칸의 경우 그 생년을 지금 몽골인들 사이에 전래되어 오는 바로 그 연도에 출생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즉 학자들 주장처럼 1167년이 아니고 1162년인 것이다. 지금 죽은 유병언도 마찬가지다.



 JP, FS, OT, SN 등의 명칭 

FS는 4/7라는 영어 즉 four-sevenths의 준말이고, OT는 one-third, SN은 seven-nineteenths의 첫머리 글자를 딴 것이다. 

그리고 JP는 Joseph's Pattern의 약자인데 성경 기록에 나타난 이짚트 제2인자였던 요셉(야곱의 아들)의 생애 분석에서 이 JP 기간을 찾아낸 것이다.

 

트리니 호모의 '호모'는 homo sapiens(인간)에서, '트리니'는 'trinity(3위1체)'라는 말이 나온 라틴어 trini를 원용 것으로, 3위1체 원리(the trinity principle, Trinity Law)에 의한 인간 생애의 법칙이라는 뜻이다.

 '트리니 호모'의 구조 자체가 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임을 명시하는 뜻도 있다. 인간 법칙의 세 가지 유형도 모두 성경 인물에서 찾아낸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고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며 두드리고 구하고 찾은 결과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약속 그대로 영락없이 이루어져 나타난 것이지 무슨 특별한 수련이나 학문이나 재주가 있어 알아진 것이 아니다.

즉 FS형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OT는 모세의 생애에서, SN은 노아의 생애에서 찾아낸 것이어서 '아브라함 유형', '모세 유형', '노아 유형'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전설이니 신화니 하면서 천년 가까이 산 노아의 생애를 믿지 않는데, 필자 역시 믿지 않았다면 즉 950년이나 생존한 노아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런 인간 법칙을 발견해내지 못했을 것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생존 인물의  파쇼모(fashomo) 산출/算出 사례

너무나 정확한 나머지 북한 김일성의 사망일자를(6개월 가량의 오차를 두고) 단정하여 발표한 일이 있다. 당시는 생존 인물이므로 그 자료 분석을 정확히 할 수 없어(해방 직후 권력을 잡기 시작한 때를 잘못 본 것)그런 오차를 내게 되었지만, 이런 불충분한 자료나마 각 보도매체에다 전했더니 모처에서 이를 기화로 점장이에게 다시 물어 필자가 보낸 내용은 무시하고 단지 그 점장이 말만 가지고 기사를 써서 특종 비슷한 것을 낸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부터 사람의 죽는 날 따위나 알고자 한 것이 아니지만 그 정확성이 너무나 뚜렷하기에 그렇다면 산 사람의 사망 일자도(나이가 지긋한 경우에 한해) 그 간단한 수치로 셈하여 알아볼 수 있다는 호기심에서 출발한 것인데, 그것이 그렇게 아주 기가 막히게 정확히 맞아떨어짐을 보게 된 것.

김일성의 출생 년월일이 1912년 4월 15일이므로(그것이 정확하다면) 1946년 2월 6일에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될 때까지의 날 수를 계산하니 12,352일이다.

이 날 수 계산은 그의 생애를 FS유형(4/7)으로 우선 전제하고 생년월일에 따라 생존 연수를 셈하니 82년 3개월이므로 그 활동기(전성기)가 47년이기 때문에 얻은 결과다.

언뜻 보기에는 49년간 권좌에 머문 것으로 되어 있으나 트리니 호모는 그 허와 실을 분명히 갈라내고 있다. 즉 북한에서 집권하는 계기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分局)이 설치되면서이고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지명되면서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으니 그 때부터 계산하여 사망일까지 이르면 48년 5개월이다. (지금 이 계산은 김일성 사망 후에 한 것이다).

그러면 위에 계산한 트리니 호모 활동기 47년과는 1년 5개월의 차이가 생기는데 이에 대한 조절은 그가 6. 25 전쟁을 일으킨 사건으로써 해결된다. 그 전쟁은 분명히 그에게는 침체기로 산정, 고로 그 기간(1950.6.25~1951.11.27)을 비활동기로서 빼주면 47년이라는 트리니 호모 활동기간과 맞아떨어진다. 이 1951.11.27이란 시점은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되어 군사분계선 확정이 합의되고 성립된 날이다.

참고로 말하면, 비록 해방 직후 권력을 잡기 시작한 때를 잘못 보았다 하더라도 1972년이 그 생애의 클라이맥스임이 확정된 이상(1972년을 정점으로 보는 이유는 이 해에 명실 상부하게 제일인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힌 때문이다) , 이 1951.11.27이란 날짜만 바로 짚었어도 그 사망 연도가 1994년이었음을 확정지었을 것이다.

그런 불충분한 정보로 인해 '93년 3월~12월 사이에 사망한다고 각 보도매체에다 돌린 것이다. 클라이맥스(활동기의 정점)를 중심으로 하여 전후반(前後半) 기간 산출에서 전반기가 21년 즉 1951-1972년이면 후반기는 1년이 더 많은 22년(1972-1994)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셈해서 얻은 12,352일이란 날 수는 ⓛ 그의 출생연월일(정확해야 한다) 및 ② 트리니 호모상의 전성기 시작인 1946년 2월 8일을 정확히 집어낸 다음의 결과다. 



 

이상 12352일은 그의 생애의 첫 비활동기이고, ③ 다음에는 비활동기로 잡은 1950.6.25~1951.11.27의 기간을 역시 위의 방법으로 날 수를 계산해보면 520일, ④ 이 날 수 520일에 12352일을 보태면 12,872일. 이 날 수는 그 생애의 전체 침체기 날 수. 이렇게 전체 비활동기 날 수가 셈해졌으니 비활동기는 전체 생애의 3/7인즉 전체 비활동기 날 수에다 3/7을 곱하면 전체 생애 날 수는 30,034.66...일(12872x7/3).

⑤ 이것을 1912년 4월 15일부터 시작해서 해수로 바꾸면 82년이므로 1994년.그러면 85일 정도가 남는데 4월 15일에다 이를 보태면 6월까지 마치고도 8~9일 정도가 아직 남으므로, 6월까지의 날 수를 다 셈했으니 남은 달은 7월. 정확히 7월의 8일 언저리까지 오는 것이다. "정도"라 말하는 까닭은 정확한 날 수 계산에는 기산(起算) 날짜의 시간까지도 알아야 하는 모양인데(그만큼 정확하다는 뜻) 그런 시각도 모르거니와 1년은 또 365.242195일로 셈해져 나오기 때문.

그의 사망 날짜는 7월 8일이 아니라 엿새 전인 2일께라고 하는 소식통도 있다. 뇌사 상태에 들어갔든 어쨌든 간에 트리니 호모는 숨이 끊어진 8일을 사망일로 계산하고 있다. 이상 계산이 물론 정확하다고 전제하면(여기서 말하는 '계산의 정확성'은 생년월일이 정확해야 하고 그 긴 생애 중에 병으로 앓아 누운 적이 있었으면 그것이 또한 영향을 주고 있는 등의 세부적인 정확한 정보 입수 여부가 관건이 된다) 그렇다. 트리니 호모의 정확성과 정밀성을 드러내는 일례로 이상 사례를 들었을 뿐이다.

친지 중 모 중앙 일간지 사진부 기자로 일하던 이가 있었는데 40대에 암으로 일찍 세상을 버렸다. 그의 트리니 호모는 그가 사진부 기자로 공채되어 입사할 때부터 시작되어 병원에 입원하여 사망함으로써 끝나고 있었다.

영국 엘리자벳 여왕 시대의 스콧틀랜드 여왕 메리의 생애를 분석해본 결과 그와 같이 빈틈없이 날짜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감을 볼 수 있었다. 김일성을 비롯한 이상 사례를 볼 때 시간 단위에 이르기까지 아주 정밀하고 철두철미하게 날 수 계산이 됨으로써 '트리니 호모'상으로 활동/비활동기가 정해지고 사망 일자도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결론은, 자기 자의로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이같은 조물주의 철통같은 통제 아래 있어 그 "때"가 되기 전에는 스스로 죽을 수도 없고 남이 또한 나를 죽일 수도 없고 내가 또한 남을 죽일 수도 없다. 주 예수님을 그들이 그토록 죽이고자 했어도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했다가 때가 이르자 비로소 손을 대었던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마 26:18/요 2:4/7:8,30/8:20/눅 22:53). 사람의 일생이란 것이 이렇듯 그 죽는 날까지 미리 예견할 수 있을 정도로 엄밀히 수치에 의하여 관장되어 창조주의 철저한 주재하에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3운법칙이 더 중요한 3위1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파쇼모(fashomo)는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첫째,
3운법칙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으므로 지금까지 확정 짓지 못한 인과율(因果律, the law of causality)도 동시에 입증한다. 자체의 진실성과 확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물론이다. 오늘날의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수수께끼도 넉넉히 풀어주고 있다.


둘째,
조물주 하나님의 실재(實在) 증명. ①수십 억이나 되는 인류의 생애를 단지 세 가지로만 나누어 분류하고 있는 이 놀라운 현상은 하나님의 역사(役事)가 아니고는 불가능하고, ②이 3운법칙의 구조(1/3, 7/19, 4/7 등의 수치로 나타내어지는)가 바로 하나님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3위1체를 나타내어 하나님 계시는 모습을 원리로 하여 만유를 창조하시고 유지 보전하심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③그리고 이런 생애의 법칙에 좌우되는 인생이 우연히 생겨난 결과일 수 없는 것.

셋째,
성경의 진실성 입증. 이 3 종류로 가닥을 잡는 3운법칙을 성경의 인물 즉 노아, 아브라함, 모세의 생애가 대표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노아는 950세를 살았는데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의 수명이 천년에 가깝다 하여 전설로만 취급해왔으나 이 3운법칙이 그 진실성을 증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되심을 입증. 3운법칙의 3가지 유형 중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시므로 이는 성경에 이른 대로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시라는 증거다. "비천한 모습이실 때 공정한 판결을 받지 못했으니 누가 가히 그의 일대(一代)를 이야기할 수 있으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다"(행 8:33) 함과 같으니 빌립 집사도 여기서 간다게의 내시에게 전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것이 바로 성령의 전도 주제(主題)이신 까닭이다. 이렇게 생(生)을 정상적으로 누리지 못하고 중간에서 끊겨져 버리는 즉 단절되는 생애로는 인류 역사 중 유일하신 것이니 이는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이 범죄로써 죽음을 자초하여 중단(中斷)되어버린(롬 5:12) 비극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이기 때문이다.

또 이와 정반대로 말할 수 있으니,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은 죽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도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스스로 범죄하여 죽음에 이른 결과로 모든 인생은 이 3운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인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어 영원히 산 자가 되어 계시는데 더군다나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시기도 하는 등 40일간이나 계심으로써 산 자이심을 나타내셨으니 출생과 죽음 사이의 일정 기간을 정해놓는 3운법칙에는 아예 해당되실 수가 없음이다.

다섯째,
이 때가 마지막 때임을 입증. 왜냐면 사람은 자기 죽을 때를 알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이 인간 생애의 법칙이 알려졌으니 조금만 더 연구하면 어느 정도 나이 든 사람이라면 자기 죽을  때를 알게 될지도 모르는 고로 그런 때가 오기 전에 이미 세상은 끝나게 되어 있는 의미도 무시못하리라.

여섯번째,
이 세상이 인간의 본격적 삶이 아님을 증명함이니, 이와 같이 철저히 획일적인 3종류로 규제되고 속박되어 있는 삶이 무슨 의의가 있다는 말인가. 고로 본격적인 인간 삶은 이런 규격화하지 않은 순수하게 자유의지로 스스로 운영해가는 사랑의 원리에 의한 천국에서의 삶인 것이다. 고로 이 세상 삶에 연연하지 말고 장차 전개될 영원한 세계의 빛(생명)과 어두움(멸망)을 구분하여 처신하라는 하나님의 경고이시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생명(삶)은 성경에 이르는 대로 "참 생명(life indeed)"(딤전 6:19)이 아닌 것이다

일곱번째,
자기 중심의 인간 세계가 조기(早期) 공멸(共滅)하지 않도록 나타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강권 발동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시는지 모르다가 이제 이 '트리니 호모'로 입증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인간 생활은 통제되는 삶이므로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 다시 강조된다. 하나님의 강권 방동은 사람이 생기자마자 형 가인이 아무 이유도 없이 오직 시기함으로써 아우 아벨을 죽이는 참사가 일어남을 보아 알 수 있음이다.

여덟번째,
인간 삶이 통제되어 있는 이유를 밝힘이니 곧 죄인으로서의 실상을 증명함이다.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그래서 구원 외에는 이 세상사가 일체의 의미가 없음을 입증한다.

아홉번째,
3운법칙은 이 세상이나 인간 생애가 철저히 때(기간)에 지배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지금은 우는 때요 웃는 때가 아니며 구원의 때이지 삶의 낙을 향유하는 때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열 번째
'트리니 호모'는 사람이 죽는 때가 정해져 있음을 밝힌다. 고로 살인 행위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니 왜냐면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사람이 죽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겠다고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철부지 생각을 아예 버릴 일이다. 죽을 때가 되어야 내 손에 죽는데, 따라서 실패할 경우 나만 손해 보는 일을 왜 그다지도 못해서 안달이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만 자초하려는 어리석음만 범하는가?

열 한번째
인간이 인간을 살상(殺傷)해서도 그렇지만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불의의 사고라도 만나면 이 시간 후의 목숨은 없다. 그러므로 죽을 때가 되기 이전에는 그 어떤 불의의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철두철미한 통제력의 작동을 이 3운법칙은 증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톱니바퀴처럼 정밀하게 돌아가는 인생 삶이야말로 이 자연계의 우주만큼이나 아니 더 이상으로 정밀한데 대해 경탄을 불금한다.

갓나서도 죽고 10, 20대에 요사하는 인생은 왜 그런가. 그런 사람의 평생은 하나님의 소관사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한도와 범위가 정해져 있다. 첫 사람 아담이 초자연계 몸으로서 초자연계 존재로 있다가 자연계로 전락하여 자연계 존재가 된 이후로 많은 제약이 뒤따랐다. 원래의 정상적인(초자연계에 속한) 정보 처리 능력을 대부분 상실해버렸다. 고로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되어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되어 있다. 성경은 알 만한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지만 모르는 것은 과감히 덮어두어야 하는 "생략"의 미학을 가르친다.

그 한 가지 예가 창세기부터 시작된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운을 떼고는 느닷없이 물과 그리고 그 물 속에 풀어져 있는 땅에 대한 설명이 일절 없다. 물이든 뭍이든 창조의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생략해버린 것이다. 고로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주제넘게 알려고 한다든가 할 필요가 없다. 나 자신에 관한 구원 문제가 우선 발 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 불부터 끄라는 것이 성경이 지시다. 그리고 이 구원의 작업이 끝나지마자 이 세상을 종료된다고 하셨다(). 조금도 여유를 두지 않는다.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나기가 바쁘게 세상은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상이 새로 시작된 다음에 나머지 문제를 풀어도 늦지 않고 충분하다는 뜻이다.

선을 행하라니 선을 행하고서 이 세상 어찌 살란 말이냐 한다. 육신이다보니 우선 살아야 그래서 살자니 연약해서 죄도 짓고 이렇게 나약한 인생에다 구원을 베푸심이 하나님의 은혜요 긍휼이요 자비요 인애가 아닌가 한다. 완전히 성경을 거꾸로 배운 것이다. 첫째로 이 세상 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이 세상 살려고 하여 이 세상에서의 자기 목숨 사랑하면 반드시 멸망한다고 경고하셨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 12:25)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24)로서의 삶이 참으로 사는 법대로 사는 삶이라 정의해주셨다. 고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회개한 그 열매를 맺음을 말하는 것이니 그리하여 "참고 선을 행하여"(롬 2:7-10) "거룩함에 이른 그 마지막이 영생"(롬 6:22)인 것.

때문에 이 자기 부인의 말씀을 듣고 많은 제자가 반발하여 스스로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때 주신 말씀으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였다"(요 6:65) 하셨고 이 불변의 사실을 냉엄하게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하셨고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을 것이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하게 여기실 것"(12:26)이라 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매일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인인 것이다.

사람 삶은 하나처럼 한 몸의 체제 안에서 사랑 가운데에서 살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계하고 적대시하고 파괴 살상하는 데에서 살려면 나 역시 악하지 않고는 지탱할 수가 없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이기라 함이 그 때문이다. 악하면 처음부터 악한 길로 들어선 이 세상 제왕이요 이 세상 신이 악마를 추종하는 결과밖에 없다. 그를 첫 사람 아담이 추종한 결과가 오늘날까지의 인류의 이 기막힌 자연계에 예속된 삶의 삭막한 살풍경인 것이다.

구원은 "이제까지 속고 살아왔구나"(계 12:9)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이것이 "그 눈을 뜨게 됨으로써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감"(행 26:18)인 것이다. 그냥 영생만 "공짜로" 얻어 챙기는 것이 아니다. 실제 그렇게 챙길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얻어 챙겼다고 스스로를 속이다가 멸망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전체적인 "기독교'가 이런 속임수에 말려들어 자기도 말하고 남도 망하게 되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눅 6:39) 전철을 밟아온 것이다.

이 세상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선언은 다음 말씀으로도 명백히 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 9:58). 인자가 누구이신가-"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아니신가. 인간의 대표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 자연계는 자연계 생물의 서식처일 따름이니 영혼이 있어 처음부터 영적 존재로서 초자연계 몸을 가지고 살아야 할 그렇게 애초 살았던 아담 곧 인간의 삶의 본고장이 아닌 것이다.

때문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 하셨다. 자연계에 처해 있는 인간은 죽은 자이고 죽은 자의 형상인 것이다. "죽을 것이다"(창 2:17) 하신 그 죽음의 선언 아래 속박당하여 재차 출생하여 새로 창조되기 전에는 영원히 죽음의 멸망자인 것이다. 고로 이제 새 창조와 재출생의 삶이 시작되었으니 이 희소식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외의 보람차고 마땅하고 실속 있는 일은 천하에 없는 것.

그리고 다시 못지 않게 중요한 말씀으로 경고하셨으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 하셨다. 이 유일무이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이것저것 세상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자아중심일 수밖에 없으니 보내심을 받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고자 하는 자세가 아닌 것이다(요 2)21,22/4:34).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빌 1:29)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 하나님께 결초보은하는 이 세상의 자리에서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 자가 이 세상에서 살고자 하다니 그런 모순도 없다. 로마서 7장(14~25절)에 살지 말고 고린도전서 7장(1~40절)에 사는 것이 구원 받은 증거요 자기를 "스스로 시험하고 확증할"(고후 13:5) 수 있는 빙거가 된다.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이것은 은혜로 믿음으로 선물로서 구원을 얻고 의인이 된다고 가르친 사도 바울의 교회에 내리는 준엄한 경고다(고전 16:22).

열 두번째
오늘날 적(敵)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렀음을 온 세상에 고지(告知)하고 있다.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리는 다섯째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의 성격을 규명해 주기 때문이니, 즉 하나님으로 자처하여 등장하게 된다. 그 때 가서 거짓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믿을 때는 멸망의 재앙을 불러들이는 꼴이니 지금 이 구원의 때에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하라"(행 17:30)는 명령을 따를 일이다.





성경에 보면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장수(長壽)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의 악이 지나치면 "기한 전에 죽는다"(전 7:17)고 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그 수명이 철칙으로 정해지는 것은 아니고 각자의 행동 여하에 따라 필요하면 단축 또는 신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드시 이 3운법칙에 따라 그 테우리 내에서 모든 것이 시행되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는 히스기야 왕의 사례에서도 입증된다.

즉 히스기야 왕은 애초 39세에 죽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벽을 향하여 슬프게 울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 이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그에게 15년을 더 수명 연장시키셨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39년 생애를 3운법칙으로 분석해보아도 딱 들어맞고 15년이 연장된 54년의 생애로 분석해도 3운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바로 이 사실이 창조주 하나님의 인간 주재를 가장 명확히 증명하는 증언이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미리 보시고 아시는 예지(豫知)를 근거로 해서 예정(豫定)하시므로 사람이 자기 행동을 자기 자유 의지로 수행하는 것은 불변의 진실이다.

하나님은 조물주로서 살아 계심을 증명하고 그 말씀이 곧 성경인데 이 성경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이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증언하는데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여 이상 세 가지를 모두 진실로서 입증하는 '3운법칙'이 모든 인류에게 이로써 경고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런 사실 자체로써 충분히 경고가 된다. 하나님께서 계시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성경이 그 말씀이신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이시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3운법칙'이라는 현실 앞에서 답변이 강요되는 시점에 직면해 있는 오늘날 모든 인생들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더러 종교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종교와 구원은 별개이다. 왜냐면 세상에 종교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종류가 많다.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제각각 자기 주장을 한다. 고로 종교를 믿을 일이 아니라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950년을 살았다고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노아를 한낱 전설이나 신화로서 취급한 것이 우리의 결정적 잘못이다. 그러므로 오직 해결책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성경을 새로 인식함에 있다. 이 3운법칙의 정확성을 인정한다면 이는 당연 결과이다. 3운법칙의 존재는 성경의 정확성, 진실성이 그 뿌리이기 때문이다.

자연법칙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철칙이요 과학적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이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서 이런 자연법칙에 어긋나게 죽지 않고 영생한다는 종교 교리는 미신이요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다. 오직 3운법칙에서도 입증되고 있는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것. 이 창조주 하나님을 통한 새 창조 즉 이 자연법칙을 벗어나는 새 피조물됨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제되고 영생할 수 있음이다.

성경이 가르치고 이 '3운법칙'이 증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 인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받아 모셔야(나는 '육체'이고 성령께서는 그 '영혼'으로서의 이중 구조인 새 인간으로 창조되고 다시 출생하는 것) 새 창조가 되는 것이고 인하여 이 자연법칙을 초월하여 영생에 이르게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인간 각자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신 것이다.

선물이란 뜻은 이것이다. 즉 사랑이라는 것이 그 하나다. 사랑 없이 즉 상대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없는 선물이란 상상도 못한다. 나머지 하나는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새 창조의 필요성이다. 선물이 창조의 의미가 됨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사랑에 의한 창조이기 때문이다.

창조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므로 무조건 선물이 아닌 것이 없으니 왜냐면 모든 존재는 그 존재에 필요불가결한 것을 값없이 거저 받음으로써 창조되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자기의 무엇을 들여 창조주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자기가 창조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조물주에게서 거저 받는 것이고 그렇게 거저 받아 세상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음으로써 창조된다 함이다.

자연법칙에 철저히 예속된 인간이 이 자연법칙을 초월하고 이에 예속되지 않는 존재로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므로 과학적이라 하고 그런 것 없이 막연히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가 어떻게 되겠지, 나의 소원대로 자연법칙에 구애됨이 없는 그 무엇으로 변화하겠지 하는 것은 망상일 뿐이므로 모든 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하고 그래서 미신이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종교와 성경의 구원이 별개라고 단정했듯이 종교와 성경은 어느 하나 내용이 같은 것이 없는 까닭이다. 비록 기독교로 자처하는 집단도 성경과는 전연 별개의 내용을 담아 멋대로 해석하여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연법칙을 초월해야 그래서 초월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이 죽음을 벗어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그렇게 자연법칙을 초월할 수 있게 하는 인자(因子)가 내 속에 있어야 하고 나란 존재가 썩지 않는 영원한 구조로 새로 구성되어 하는데 그 '인자'가 예수 그리스도시다. 비록 아담의 범죄 결과로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되어 있으나 나는 이미 영혼이 있어 엄연한 영적 존재다. 영적 존재라는 것은 인격성이 있어 지, 정, 의를 아울러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의지대로 자유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자유 선택에 의해 자기 행동을 결정 짓고 스스로의 영원한 운명까지 스스로 좌지우지하는 것이 그 특성이다.

우리 각 사람의 항구적인 운명이 전적으로 조물주께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데 이는 아주 잘못된 정보이다. 이 한가지만 보아도 조물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소위 지식 즉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천박하고 피상적인지 알 수 있다. 이런 소위 "지식"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자기 운명을 결정 짓는다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의 무모함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든 알고 그것도 정확하게 알고 나서야 행동에 옮겨야 사람이 아닌가.

인격적 존재라는 것은 다시 강조하지만 자기 운명을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결정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한다. 그것이 가장 핵심되는 특징이다.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알아도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의지로 자기 행동을 결정하고 자기 운명까지 스스로 요리하는 존재로서의 나 자신이고 보니(바로 그 자유로써 아담이 범죄했고 죽음에 이른 것) 내가 새롭게 창조되는 방법은 양면성을 지니게 됨은 당연하다. 즉 하나는 앞에서 지적한 바 영원한 생명의 '인자'를 반드시 선물로서 받아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 스스로 즉 나의 자유로운 의지로써 그 '인자'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니 내 결정, 내 선택에 달렸다. 내 선택에 달린 유일한 이유가 내 스스로 사랑에 북받쳐 사랑으로 모셔야 하는 까닭이다. 나를 사랑하시어 나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신 그 사랑에 감화, 감동하지 않는 한 입으로 아무리 믿는다고 사랑한다고 천마디 만마디로 외쳐보아야 소용이 없다.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이라 정의했듯이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은 사랑이다. 앞에서, 바로 그 '인자(因子)'가 예수 그리스도시라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 말씀이라면 사지(死地)로 가라고 해도 믿고 순종해야 구원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승 감사라도 자기 싫으면 그만이다. 아무리 훌륭한 하나님의 선물이 있어도 그리고 천하없는 사랑이라도(요 15:13) 그것을 받을 당사자가 받기를 거절하면 속수무책, 도로무공(徒勞無功)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여과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나 역시 그 사랑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발로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므로 이 점에 단단히 유의할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새로 창조되는 나와 영구적으로 하나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시고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다가 사람이 되셨으므로 그 하나님되심은 항구적으로 변할 리 없다. 이렇게 나를 위해 사람이시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사실은 모든 문제를 단 한번에 해결하시는 효과가 있다.

즉 과거의 나의 모든 죄의 대가(代價)로서의 죽음을 영원히 해결하셨다는 것, 이렇게 나를 위해 죽어주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살아나셔야만 나와 하나되실 수 있으므로) 내 안에 임하셔서 나로 하여금 육체는 썩어도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자'가 되어 계신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현실화한 것이다.

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살아나실 수가 있었으니 그러므로 내 안에 임하실 때도 아버지와 함께 임하시므로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날 때 부모의 육체를 물려받아 나는 것처럼 하나님(아버지)의 영을 물려받아 다시 출생하는 것이 되어 당당히 하나님이 아들로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와 하나되심만 아니라 하나님되심을 인하여 나와 똑같이 모든 믿는 사람과도 하나되어 계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모든 사람을 상대로 풍성하신 하나님은 나 개인에 대해서도 마치 나 한 사람과만 상대하는 것처럼 그 어느 인간보다 가까우신 관계로 나와 함께 하시니 그래서 이를 가리켜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으로 합한다"고 하는 것이다(고전 6:17).

 다시 말해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으로서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니까 그래서 나와 하나되어 내 안에 영원히 함께 계시니까 내가 이 자연계를 초월하여 자연법칙에 구애받지 않는 영생하는 존재로 보장 받아 있음이 명백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간 구원의 복음(福音)ㅡ희소식, 기쁜 소식, 반가운 소식, 복된 소식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도 분명하고 반가운 소식인데 사람들이 앞에서 지적한바 있듯이 자기 자유 의지로써 그리스도를 반갑게 영입하려 들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악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있느냐, 악을 좋아할 까닭이 있느냐 하겠으나, 악이 무엇이냐 하면 선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다시 말해 사랑 아닌 모든 것, 즉 자아중심이다(롬 2:8,9의 우리말 번역 또는 흠정영역 "당을 짓는다"는 것은 잘못된 번역이니 NIV 등의 영역 selfishness가 옳은 것).

사랑이 무엇이냐(요일 3:16-"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보여주신 것이니 곧 자기 부인이다. 바로 이 점을 많은 사람이 싫어하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아닌 것은 자아중심 즉 자기를 전적으로 위주하고 자기 본위로 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대개 사람의 일반적인 성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이 독립적 존재로서 자주(自主)하는 것이 정상이니 자기 중심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무엇이 이상하냐 하겠으나, 바로 이 당연하다는 것이 실제는 당연하지 않은 것이다. 자주 독립성과 자아중심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하기 싫어하는 것을 아니할 수 있는 것이 자유, 자주이다. 자신에 관한 일은 자기 맘대로 처리하는 것이 자주장(自主張)이지만 자주장을 해도 원칙이 있음이다.

그 원칙이 자기 부인이다. 왜 그러냐 하면 자기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으로부터 자기가 나왔고 또 자신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 즉 이웃들이 함께 창조되어 나와 여럿이 '우리(we)'를 이루어 있으므로 이 여럿이 마치 하나인 것처럼 서로 사랑하며 다투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도 피조물을 지으신 이상, 기꺼이 이 범주에 드셔서 피조물과 사랑으로 하나되어 계시므로 이 원리원칙을 따라 움직이심은 당연하다. 바로 그 증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셨던(갈 2:20) 것이다.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 전도다. 당신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다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 당신을 위해 사람이 되어주신 그 분의 사랑을 당신이 믿느냐 하는 영원히 변함없는 메시지다. 3운법칙의 증언이 바로 이 메시지 전달인 것이다.

문제는 이 자기 부인을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지혜 있음과 없음의 차이라 할까. 멀리 보는 것과 당장 목전의 가까운 것만 보는 그런 차이라 할까. 자주하는 인간이로되 하나님 정하신 이 원리원칙을 따라 하는 것이 진정 사람 사는 도리인데 하나님의 모든 뜻과 말씀이 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순종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악이고 죄이며 불법이고 불의다.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 중심인 이 세상과 자연 마찰이 일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이 세상 인간을 관장하는 이 세상 신(神-고후 4:4/요일 5"19/눅 4:6/요 14:30) 안에 있다. 원래 첫 사람 아담 아래 있던 영물이나 인간을 속여 인류를 오늘날과 같은 비극 속으로 빠뜨린 장본인으로서의 영물(靈物)인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려고 하는 이들은 고초 속에 지내야 함이 불가피하다. 이 때문으로도 많은 사람이 자기 부인을 버리고 자아 중심을 선호하는 것이나, 자아중심이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다.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됨은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함이니 이렇게 상대를 위할 때는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된다. 하나되어 영원히 함께 살 때에는 영원히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이다(고후 5:15). 이렇게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것을 가리켜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강조한 몸과 머리 관계가 그러하다(롬 12:4).

고로 자기 부인이라 함은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정작 자기를 위해주는 상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를 위할 필요가 없어서 위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도 많은 사람이 여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다. 몸이 머리의 각 지체가 자기를 위한다고 가상해보라, 한 몸으로 기능하겠는가. 성경에 대한 무지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써 즉 성령의 가르치심으로써 알게 되어 있는데 인위적으로 학문 다루듯이 접근하기 때문에 평생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당신 자신을 위하시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하심을 십자가 고난의 사랑으로 증명해 주셨다. 바로 이 사실을 바탕으로 나는 자기 부인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기 부인의 바탕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에 있다. 나와 함께 하나되어 계시니 그 죽으심이 곧 나의 죽음이다.

바로 이 막중한 사실의 현실화를 위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고로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살아난 것이니 죽어 무덤에 함께 묻혀버린 나인데 또 무슨 내가 있어 나를 위해 살아 자아중심으로 살아 자ㅣ기 부인을 못할 것인가.

나와 하나되어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중에 나도는 그림 나부랭이 같은 모습이 아니시다. 조물주로서 피조물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시니 인간 중에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고ㅡ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초자연계 몸의 영광의 모습이시다. 그 용태(容態)는 물론 그 인품과 기품으로 논할진대 더 이상 가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모습으로 당신 안에 계시는 것을 상상해보시라.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살아나셔서 내 안에 영원하신 '선물'로서 항구적으로 오시는 것을 가리켜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요 14:18) 않고 오신다고 하셨다. 다시 말해 엄마 아빠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그 부모로서 다시 자식을 찾아 오시는 것이 내 안에 오시는 의미임을 명백히 밝히셨다.

사람이시되 나의 자애로우신 어버이, 나의 사랑하는 "친구"(요 15:15)로서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시니까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계시지만 사람이시니까 오직 나만을 위해 계시고 나만을 사랑하시며 나만을 위하시는(자기 자신을 위하심이 없이ㅡ나를 위한 십자가 고난이 그 증명이 아닌가-갈 2:20) 분이시다. 지금 당신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영접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이 막중한 사실을 '3운법칙'은 당신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나의 자주 독립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니 사랑의 핵심이기 때문이요 사랑은 생명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고로 일절 자기를 위하시지 않는 모습은 내가 나의 자주성으로 잘못된 길을 들어 자아중심이 되어버려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히 6:6) 중에도 자기를 위해 동작하시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당하는 모습으로 묘사하는 사실 앞에서 "두렵고 떨지"(빌 2:12) 않을 수 없는 것이다(갈 6:1).

당신이 이 선물을 받고 새로 창조되는 기회는 이 세상뿐으로 한정하셨다. 내일을 당신은 모르지 않는가. 이 시간 후의 일도 기약 없고 보장 받지 못하고 있다(눅 12:20). 당신은 당신의 영원한 운명을 홀로 좌지우지하는 이 우주 속에서의 유일한 존재-당신에 관해서만은 유일하다. 하나님도 이에 관해서는 당신을 도우실 수 없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간섭이 되고 강제가 되는 까닭이다. 나로서 사랑이 있고 나서야 도우시는 단계이지 사랑 자체를 건드리실 수는 없는 것이다.

당신을 들여다보라. 가냘프고 연약한 육체를 끌고 이 세상에서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것이 당신 자신이 보아도 처량하고 측은하지 않은가. 눈물겨운 비극의 참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것은 운명이 아니다. 조물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렇게 인간을 지으신 일이 없다. 인간 스스로의 범죄로써 불러들인 비극적인 화근이요 재앙이다. 자초한 결과이다.

이제 당신에게 새로 창조되는 기틀을 잡아주셨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고집대로 뻗대고 있으려는 것인가. 인간은 절대로 자연계의 동물들처럼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에서 인격성의 특징은 지, 정, 의라 했고 그 핵심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함에 있다고 했다.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하나님 주신 의식이 있기 때문에 영원토록 죽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욕구도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영원성에 대한 희구가 일반 짐승들과는 달리 영적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증거다. 일반 동물들에게는 이런 욕구가 없다. 그래서 언제나 먹고 자고 뛰놀고 만족스럽고 그래서 태평이다. 그러나 인간만은 영원한 자기 생명을 동경한다. 이는 본디 태생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로 탄생하였음 즉 창조되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당신이야 당신의 영혼을 부정하든 말든 그 점을 묻지 않는다. 바로 이 영원에 대한 갈구 자체가 당신에게 영혼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임을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다. 


 


 파쇼모(fashomo)가 오늘날 인류에게 알리려는 내용이 있다면 
무엇이라 증언하고 있는가?

3운법칙(三運法則一트리니 호모)의 존재가 왜 지금 와서 인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가? 단순히 세 가지 사실 즉 조물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 성경이 그 유일한 말씀 곧 메시지라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입증하기 위함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존재는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밝힌 대로 그 만드신 만물에 보여 알아지게 되어 있다. 물론 이 3운법칙도 "그 만드신 만물"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경의 형태로 되어져 있다는 것은 성경을 진실된 마음으로 읽는 자면 그 진실성은 자체 증명이 되고 있음을 알도록 되어 있다. 왜냐면 진실이 아니고는 그런 식으로 성경이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의 상식이 강력히 이를 뒷받침하여 증언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구주시라는 것은 성경을 읽는 이면 자연적으로 알게 되어 있다. 

그러면 무엇인가. 이러한 인간 생애의 법칙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따라서 이 마지막 때 인생들에게 알려져야 하는 목적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①사람 삶의 원리를 재차 확인해줌이다. 따라서 이 정상적인 생명의 법칙을 벗어나 있는 현재 ②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강제적인 간섭, 강제력이 동원되지 않고는 안될 정도로 인간 생애에 굴레를 씌워놓지 않으면 인간 삶이 그나마도 지탱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심에 있는 것이다. 

③ 자유 없이 강제로 굴레에 씌어져야 할 인생 삶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가. 바로 이 세상이 이와 같다는 사실을 인생들에게 알리시고자 함이다. 고로 이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니 다시 말해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요 6:27)는 경고인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인간은 그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고 그 영원한 생사까지도 각자의 손에 달려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할 것이다. 그것은 영원한,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생사(生死) 곧 영원한 운명의 결정권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범죄하면 멸망에 이르고 순종하면 영생에 이른다. 이렇게 순종이냐, 불복이냐 그래서 범죄에 이르느냐의 여부는 각 개인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으로서 항상 그 자유 의지가 시종 일관되게 자기 자신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주장(自主張)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각자의 행보(行步)만은 철저히 통제된다-이것이다. 이것이 '3운법칙'이 가리키는 진실이다. 이는 성경과도 일치한다. "주 하나님, 제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합니다"(렘 10:23), "사람의 걸음(인생 행보)은 주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다"(잠16:9) 등의 말씀이 그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사람의 미리 정한 때'를 말하는 성경 구절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왜 이같이 철저히 통제하셔야 하는가. 인간의 자아중심이라는 성향 때문이다. 인간 상호간의 충돌, 알력, 불화, 증오가 이 자아중심에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다. 그러면 종국적으로 상호간의 파괴행위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면 인류 전체의 공멸(共滅)뿐임은 불문가지다. 

사람 나자마자 가인이 아우 아벨을 아무 이유 없이 단지 시기심에서 죽여버린 것이 그 가장 명확한 실례이고 증거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3운법칙'과 같은 것으로써 인간의 생사 흥망을 일정 틀 안에 넣고 통제하실 필요를 느끼신 것이다. 가령 가인들이 아벨들을 죽이려 할 때 그냥 두어두면 서로가 죽이고 말 것이지만(이쯤 두면 살아남을 인간이 없다) 각자의 수명(壽命)을 '3운법칙'에 따라 정해 두심으로써 남이 아무리 죽이고 싶어도 못 죽이고 그 살해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도록 통제하심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도 살해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니 그 살해 당하는 것도 철저히 이 '3운법칙'에 따라 죽고 살고 흥하고 망하고 하는 일이 되풀이되게 하심이다. 인간의 이같은 파괴 행위의 뿌리가 되는 자아중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와 악을 범하게 되는 근거, 토대가 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이를 척결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영아 때 죽어 나가는 인생도 3운법칙의 지배를 받는가? 그것까지는 우리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알 수 없다"는 사실로써 3운법칙의 권위가 망가뜨려지지는 않는다. 이미 3운법칙의 절묘한 구조에서 3위1체 원리가 검증되고 있음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의 생애를 일일이 분석해보지 않고는 3운법칙의 실존이 증명될 수 없다는 말이 거침없이 나올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이런 철칙(鐵則)으로서의 '3운법칙'이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자아중심으로 인간이 나가는 한, 자율적으로는 통제불능이 된다는 사실을 적시하는 것이다. 타율에 의한 통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상(理想) 세계에서는 이런 '3운법칙'이 통용되지 않음은 물론이다. 이런 통제는 이 세상에서만 한한다. 이상 세계에서는 영원히 사랑의 삶의 원리를 따라 자율적으로 생동하므로 모두가 한 몸처럼 되어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사는 까닭에 이런 강제 통치 혹은 간섭이 필요가 없다. 

또 죽지 않으므로 죽을 때가 정해질 필요도 없고 따라서 이런 법칙 자체가 소용 없는 것이니 '3운법칙'은 그 죽음의 연도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그 테두리를 절대로 벗어나지 않게 하는 강제력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중심으로 인간이 계속 나가지도 않고 모든 인간이 자기 부인으로 나아가며 '3운법칙'과 같은 철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 세계에서는 그러면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중심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자(因子)이시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너나 할 것없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모시고 있어 머리로 삼고 절대 복종하므로 자연 한 몸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음이다. 그리고 각자가 그리스도와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위하시고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므로 내 안에서 완전한 자기 부인이 이루어져 있어 모든 사람이 나를 위해주는 마당이다. 

그러므로 자기 중심의 인간들을 '3운법칙'과 같은 외부적인 강제력으로 통제함이 이 세상에서처럼 전혀 필요치가 않다. 이래서 '3운법칙'이 증언하는 바가 바로 이 사실을 명확히 우리에게 가르침에 있는 것이니, 앞에 지적한 ①, ②, ③이다. 자아중심의 인간은 통제가 불가피하다, 이런 통제가 불가피한 세상은 영원히 존속하지 못한다, 존속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의 강제 통제에 의해서 겨우 가까스로 지탱해오는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이 '3운법칙'은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저한 자기 부인을 위해서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각 사람이 자기의 위치 즉 한 몸에서의 지체(肢體) 역할임을 자각하여 그 이치대로 사는 길 외에 그 어떤 방법도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3운법칙'은 증언한다. 

인간 세계가 이처럼 강제력에 의해 겨우 유지될 수 있는 지경이라면 이 세계가 더 이상 존속될 수 없고 멀지 않은 아니, 아주 가까운 장래에 그 종막(終幕)이 내려지지 않을 수 없는 운명임을 입증한다. 이런 강제 통치는 하나님도 인간도 더 이상 원치 않는 바이기에 그렇다. ④ 그래서 이 '3운법칙'은 바로 이 세계가 시한부(時限附)의 임시, 일시적 세계임을 동시에 증언하는 것이다. 

고로 이 세상은 완전한 세계가 아니다. 완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각종 부조리가 판칠 수 있는 것이다. 악이 성행하고 의로운 사람이 일반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 채 구석으로 밀리기만 한다. 성경이 바로 이런 현상을 밝히고 있다. "제가 주님께 질문합니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어그러진 길을 걷는 자가 모두 안락함은 무슨 연고입니까?"(렘 12:1). 

"어찌하여 사악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십니까? 주님께서 어찌하여 인간들로 바다의 어족(魚族)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십니까?"(합 1:13,14). "주권자가 없다"는 것은 법도도 없고 양심도 없고 모든 것이 무질서하고 엉망처럼 보이는 이 인간세계를 불평하는 말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이다. 즉 환경과 조건 여하에 아랑곳 않고 오직 시종일관 굳게 자기 신념대로 삶에 의인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어떤 신념이냐. ①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정상적인 삶의 도리 곧 생명의 법질서대로 나아감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3위1체의 원리가 사람 삶의 법질서로 나타날 때에는 甲은 '나', 乙은 '너', 丙은 '우리' 곧 공동체 의식이 철저히 시행된다. 

왜 '갑'이 나 자신이 되느냐 하니 나 자신이라는 것은 하나님 주신 자주 독립성으로 말하면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자의식(自意識)이 모든 의식의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럼 '중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 위해 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은, 나 자신 조물주(갑)로부터 나온 피조물(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외에도 나와 같은 피조물이 많은 고로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만유(병)를 이루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갑, 을, 병이라는 이 삼각(三角) 구도에서 모두가 하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갑에서 을로 을에서 병으로 병에서 다시 갑으로 흐르는 일정 방향의 일사불란한 운동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을 나타냄이다. 이것이 3위1체 법칙이다. 창조의 원리이기도 하다. 이 영원한 원리원칙을 도식화(圖式化)하여 나타내는 것이 곧 '트리니 호모(3운법칙)'의 FS, OT, SN 3 유형의 삼각 구도 그 구조 원리인 것이다.

이 3자 구도에서 화살표 방향은 일관성 있게 영원히 변경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즉 스스로는 자기를 위하지 않음으로써 자기가 위해지는 다시 말해 내가 나를 위함이 아닌 남이 즉 나의 상대가 나를 위해주는 그런 절묘한 삶의 최고 지혜가 이런 3위1체 원리에서의 자기 부인인 것이다. 

이러한 삶의 숭고한 법칙을 외면하는 악인을 걸러내기 위해서는 악을 좋아함으로써 형통해지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함이 필수다. 또한 의인을 추려내어 선별하기 위해서는 그 의로운 행위에 대한 대가가 비록 고난과 죽음일지라도 의(義, 무릇 올바른 것)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로운 행위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악인의 형통, 의인의 고난이 필연이다. 그러므로 이상 모든 사실은 이렇게 의인은 의인대로, 악인은 악인대로 선별된 이후의 완전한 세계가 엄존(嚴存)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런즉 통제되어 마땅한 이 세상 삶은 개개인의 절대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것이므로 무의미, 무가치하고 오직 유일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장차 전개될 완전한 인간 삶의 세계에 적합한 인생을 선별(選別)하는 장소라는 데에 있다. 즉 이 세상 인생 삶의 철저한 무실론(無實論)이다. 

신(神)의 존재에 앞선 자유로운 인간 존재를 주장하는 것이 사르트르 등의 이른바 무신론적 실존주의라는 것인데 알고 보면 철두철미 노예화된 실상을 모르는 무지에서 나오는 구슬픈 결과다. 그러나 역으로, 이렇듯이 자유를 부르짖는 것을 보아도 자유 없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한가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자유 없는 인생 삶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완전 무의미, 무가치다. 바로 이 세상이 그러함을 이 '트리니 호모'는 증명하고 있다. 위의 그림에서 강조되듯이 '트리니 호모(인간 생애의 법칙)'는 남을 해치려는 자의 그 시도가 이루어지는지의 여부, 그런 시도에 의해 피해를 입게 되는 자의 그 피해 유무를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해야(가끔 하나님의 뜻에 의해 그런 악한 시도가 그 결과를 나타내 범죄 행위가 구성되기도 하지만) 이 무질서한 세상이 강제로라도 질서가 잡혀지기 때문이다. 

시종 통제된 것일 수밖에 없으니 그렇게 되어야 광포(狂暴)한 자가 일정 행동 외에는 못하도록 또 그 광포에 시달릴 자는 그런 행동에 이유없이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양면의 구실을 하는 것이 '트리니 호모'가 나타내는 우리(cage)의 의미인 것이다.

이렇게 강제된 질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세상은 이대로 계속될 수 없고 필연적으로 그 종막을 내리게 되어 있으며 새 세상으로 대체될 운명에 처해 있음이니, 그 새 세상에 대비하여 새로운 인간, 새 피조물로 다시 출생해야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즉 세상 종교처럼 죽어 영생하여 극락에나 들어가기를 막연하게나마 바라는 그래서 자신의 행복이나 도모하는 그런 취지와는 전혀 다르다. 어디까지나 법질서 차원이니 이 자연계로 말하면 자연법칙을 따라 우주가 운행되는 바로 그런 의미이다. 그리하여 진정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능력을 베푸는 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이요 그렇게 사람답게 바르게 살면 자연스럽게 영생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이 복음의 핵심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유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살 가치가 없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 삶은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철저히 통제를 받는 것이고 이를 증명하는 것이 3운법칙이다. 통제 받지 않는 사랑의 삶 즉 자기부인이 되어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의 복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아름다운 삶이란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랑의 삶이요 사랑은 자유 의지에 의한 자기 부인이 그 핵심이다. 자기 중심과 대칭되는 것이 자기 부인이다. 굴레 씌워진 인생, 간섭을 받아야 하는 인생, 울타리를 쳐두어 밖으로 나가지도(남을 해칠까 하여) 밖에서 들어오지도 못하게(남에게서 해침을 받을까 하여) 하지 않을 수 없는 조처가 필연적인 인생이요 세계라면 우리 안에 가두어진 야수(野獸)의 부자연스러운 부자유뿐인즉 그것을 감히 삶이라 할 수도 없다.

바르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즉 죄를 지어 얻은 결과가 오늘날같은 인생 비극이니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머리로 하여 이 머리 중심의 '한 몸'으로서의 공동체 의식인 것이다. 여기서는 자아중심이란 것이 용납되지 않고 오직 자기 부인만이 유일한 살 길이다.

이 자기 부인을 버려 자아중심이 됨으로써 죄악이 생기고 자타에게 미치는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이러한 불행을 초래시킨 원인의 그 제거 작업이다. 범죄는 자기 중심, 위주, 본위요 여기서 죽음이 왔고 갖가지 인생 불행이 왔으니 이 자기 중심을 버리고 자기 부인으로 환원되면 그것이 생명이고 구원이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인간이 생존해 있는 유일한 의미요 목적이다. 이 외에는 '트리니 호모'가 증명하듯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솔로몬이 말한 대로 "헛되고 헛된" 것뿐이다. 

그렇다고 지금부터라도 깨닫고 자아부인으로 산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니다. 자기 부인은 절대로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부인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을 보지 않는 것이므로 이미 지적한 대로 반드시 나를 보아주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상대적 반응은 자기와 대칭 관계를 형성한 터전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머리와 몸의 대칭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피조물과 조물주이다. 따라서 피조물이 자기 부인을 할 수 있는 것은 조물주께서 피조물을 위하신다(피조물 자신이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닌)는 전제 하에서다. 즉 조물주께서 나를 위하시기 때문에 내가 나를 부인하여 나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되는 것.

로써 머리의 지시를 따라 다른 모든 지체 즉 자기 이웃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된다. 조물주께서는 원래 그 모든 피조물의 머리로서 존재하심이니 한 몸의 구조로서 모든 피조물이 함께 행복하게 살도록 하심이었던 것. 머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모든 것을 파생시킨 즉 낳은 어버이 위치라야 그것이 유일한 자격이다. 이 한 몸된 체제의 법질서(생명의 법칙)를 어기는 것이 죄, 악, 불의, 불법이다. 즉 자기를 위하는 자아중심이 모든 악과 불행의 토대다. 고로 이 죽음과 죄를 척결하는 것은 자기 부인이요 자기 부인은 스스로로는 되지 않고 상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니 바로 이 상대로서의 역할을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

머리가 자신을 위한다는 전제 아래에서 그 몸의 각 지체는 머리를 위함으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이미 이 자기 부인이라는(또는 자아중심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머리이시고 어버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 생명의 법질서를 어김으로 나타나 생명 아닌 죽음의 대가를 받고 있는 인생이라 이 죽음이라는 대가부터 치러야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다. 이는 법질서 확립 차원에서 그렇다. 그렇지 않으면 법칙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그러므로 엿장수 엿가락 주무르듯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법질서를 논하고 법칙을 어긴 것을 따지니 철저히 과학적인 사고방식이다. 법칙을 어기면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하고 대가를 치른 다음이라야 다음 단계를 비로소 생각할 수 있음이니, 이런 모든 요구를 충족시키고 완벽하게 해결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그 법질서는 트리니 호모의 구조에서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3위1체의 법칙이다. 첫 사람 아담은 첫째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해 자아중심이 되어 버려 범죄하였고, 둘째는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자기 중심이 되어버려 죽음에 이르렀으므로 새로 시작하려면 즉 구원 받으려면 이 죽음이라는 대가부터 먼저 치르고 그리고 하나님 중심이라는 새로운 대칭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대가를 치르는 일에서, 죽은 것을 다시 살리지는 못한다. 그렇게 되면 법질서 존립의 의미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법은 법대로 확립되고(즉 죽음은 죽음대로 영원히 끝나고 그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없고) 인간 구원은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하자면 부득불 새 창조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우리가 재 출생, 새 창조로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 부활의 생명을 내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요, 나 위해 그렇게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은(스스로 다시 살아나실 수는 없는 것, 그리 되면 한 바탕 쇼밖에 되지 않으니까)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아버지 친히 아들을 살리셨기 때문. 아버지께서 어떻게 해서 아들을 살리셨느냐 하면 아들과 아버지께서 하나이시므로 그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을 아버지 친히 낱낱이 다 당하셨기 때문. 하나이셨기 때문에 아들을 살리셨고, 하나이셨기 때문에 아들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 고통을 함께 당하신 결과인 것이다. 

아버지 친히 당하시는 이런 고난이 없었더라면 아들도 살아나실 수 없고, 살아나실 수 없는데 어떻게 우리 위해 죽으실 수 있으며, 죽으시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그리 되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버지 친히 우리 위해 죽음을 당하시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바라시는데 아들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이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아버지만 그러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께서 아버지와 한 마음이시니 친히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자기를 영원한 선물로 내 품에 안겨주셨고 따라서 영원히 나를 위하시는 분으로 존재하심이다. 이 놀라운 사랑, 생명의 환희여! 사랑하는 자에게는 사랑이시고 거역하는 자 즉 범죄밖에 모르는 자아중심인 자에게는 영원히 진노하시는 소멸하시는 불이시다(히 12:29/롬 11:22). 

첫 인간 창조와는 다르게 새 창조이므로 그 구조부터 다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구조가 어떻게 다른가. 첫 사람 아담이라는 피조물의 대칭 관계 형성은 아담을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였다. 그리고 육체로는 남자와 여자 관계였다. 남자를 돕기 위해 여자가 생겼는데 돕기커녕 결과론적으로 파탄에 빠뜨려 둘 다 죽음에 이른 것이다.

그러면 새 창조는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육체로서의 한 몸이 아닌 영(성령)으로서의 한 영이 되는 대칭 관계를 형성하여 그렇게 대칭 관계를 이루어 있는 둘 다 함께 사는(둘 다 함께 죽음에 이른 아담 부부와는 반대로) 것으로서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그 본디 대칭 관계로 연이어져 환원 복귀되는 이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의 한 영 관계로서의 대칭 관계다(고전 6:17).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골자이다. 이는 하나님 친히(즉 하나님의 아들께서) 인간이 되심으로써 새 창조가 가능하게 되어진 결과다.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내가 한 영을 이룬 대칭 관계를 영원히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인하여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됨으로써 나의 죄의 대가가 청산되고 그리고 동시에 그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니 내가 나 자신을 위할 자아중심의 토대가 근본부터 완전히 붕괴되어버리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나와 하나되심으로 영원한 나와의 대칭관계로 계시니 나를 만드신 그리스도 친히 나를 위하시므로 나를 위함이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위하지 않으니 자기 부인이므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요일 3:4). 죄에 대한 원천 봉쇄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내 구원이 아니라 죽음과 더불어 그 죽음을 토대로 한 다시 사심이 나의 구원의 토대가 된다고 성경은 명백히 하고 있는 것(고전 15:17,18). 성경에도 없는 인간의 교리인 "대신 죽으심"으로 착각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닌 죽음에다 비중을 둔다. 그래서 나의 앞으로 지을 죄까지도 짊어지시고 영원한 멸망을 나 대신 당하셨으니 내가 죄를 지어도 구원은 받아 있다는 허무 맹랑한 사탄의 교리가 도입되어 온 세계 교회가 중병에 쓰러져 있는 꼴이다. 이것이 "배도"(背道-살후 2:3)이다.

 때문에 인간이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이(행 4:12) 유일한 우리의 구원이신 그리스도시다. 이런 절대적 구원의 요소 없이 무작정 바르게 살기만 하면 된다, 자기를 비우고 자기에 대한 일체의 상념, 욕심, 욕구 등을 없애면 영생 영존한다 등의 주장은 부질없는 세상 종교의 헛된 구호일 뿐이다. 

그리고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만사가 끝난 것이 아니다. 새 창조이므로 첫 창조와 같은 수준의 시험이 적용됨이니 과거 이 척도에 의해 영물들 가운데 거룩한 것과 악한 것이 갈라지고 첫 사람 역시 이 시험의 저울에서 수준 미달임이 드러나 범죄하고 죽음에 이른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정해서가 아니라 자주 독립성을 잘못 씀으로 인하여 스스로가 만든 수준 미달이다. 따라서 우리 구원 받은 사람들도 새로 창조된 새로운 피조물이므로 당연히 이 시험의 저울질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회개함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낙원으로 직행했던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에서 오는 미리 정하심에 의함이다. 그는 세상에 남아 자기 믿음과 사랑을 검증할 기회도 없었으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그 몫을 해낸 것이니, 무슨 몫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시험 받아 우리 스스로를 시험(앞의 "시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하고 확증해야 하지만(고후 13:5) 결코 그리스도의 구원이 미완성이기 때문이 아님을 증명함에 있는 것. 그러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요일 3:1,2)이 아닌가  

따라서 이제는 아담의 죄 때문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범죄에 의해 자기 운명을 아담처럼 스스로 결정 짓는 위치에 와 있는 관계로 또다시 아담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뜻에서 "항상 복종함으로써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게"(빌 2:12)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즉 구원이란 것은 죽음에 처한 인생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질서 차원에서 새로 생을 시작할 수 있게 함에 그 의의가 있는 것. 이 이치는 아담을 두고 말할 때도 합당한 것이니 영물들이나 아담이 스스로 자기 운명을 결정하였던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 창조된 이상 우리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함은 공평공정 차원에서 마땅한 것이다.

 만일 우리만 특별 취급을 받아 그대로 영생에로 직행한다면 아담이나 영물들은 당연히 항변하고 불평할 것인가. 하나님은 일절 이런 불평불만을 허용하시지 않는다. 공평공정하게 모든 피조물을 대하시는 까닭이다. 이 세상 신(神-고후 4:4)이 우리를 시험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필요가 없으면 이 세상 신이 무엇 때문에 시험하겠는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시험하지 않는 것이니 그들은 완전히 그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시험할 필요가 없어서다. 이 세상 신 사단의 수중에서 벗어난 이 자체가 우리의 구원 받았음을 입증함이다. 첫 사람 아담과 동일한 위치에 있음을 말함이다. 즉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는 증거이다. 

조물주 하나님의 철두철미한 공평공정성은 그 철저한 원리원칙주의에서 오는 것이니 고로 법치주의(法治主義)다.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철두철미 관장하듯이 인간 삶에 이 삶의 법질서가 절대로 없을 수 없다. 이 법을 어기는 것이 죄이니 죄는 공적(公敵)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법치주의적 성격의 구원이 아니라면 가히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구원답다 못할 것이다. 법질서의 확립에서 모든 조화, 통일이 오고 거기서만이 행복이 있는 것이니 달리 그 어떤 행복을 찾든 그것은 한낱 공상이나 꿈에 불과하고 현실일 수가 없다. 

바로 이 원칙에 충실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나 위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신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런 방법 외에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셨으리라. 친히 나 위해 죽으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철저한 원리원칙을 찾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든지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원리원칙대로 하시지 않고 그 때 그 때 기분 따라 임의로 하신다면 모든 피조물이 불안해서 어떻게 한 시인들 살 수 있으랴. 

그리고 이 원리원칙을 찾으심에는 일말의 거짓이나 불법이나 불의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다는 뜻을 강조함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을 그려내는 성경의 모든 저자들이 바로 그러하다는 증거다. 함부로 사실을 왜곡하고 지어낼 정도의 거짓말쟁이가 이렇게 하나님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수가 절대로 없다는 그 뜻이다. 다시 말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을 이런 데에서 찾게 된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고로 성경을 읽는 자만이 이 지혜를 얻게 된다. 

같은 법을 논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 것은 범법행위의 대신(代身) 지불이라는 당치도 않은 일방적 해석 때문임을 앞에서도 언급했다. 이는 여전히 자아중심으로 살겠다는 즉 하나님의 법을 여전히 어기고 무시하면서도 영생은 하겠다는 욕심이니 가당찮은 또 하나의 고집이요 반역밖에 될 것이 없다.

범죄의 대가로 형을 부과하는 것은 재범 않도록 하기 위함이니 이것이 행형(行刑)의 1차 목적이다. 그래서 법은 다스림이 위주가 아니라 예방이 그 제일 과제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지엄하신 하나님을 그런 법 상식도 모르시는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인식한다는 말인가.

 이는 자기 묘혈(墓穴)을 자기 스스로 파는 꼴이다. 죄를 극복하여 이길 수 있는 힘은 주시지 않고 무조건 죄만 용서하셔서 천국으로 직행하게 하신다면 애초 아담을 죽지 않게 하셨을 것이고 애초 범죄부터 하지 않도록 간섭, 강제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면 한번 자유를 주신 피조물인데 그 자유를 뒤집고 번복하는 결과가 되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순탄하기만 한 천국에서의 법 준수는 자연 그대로일 것이므로 새삼스러운 아무 의미가 없다. 이는 상식에 속한다. 오직 그러한 법 준수의 아름다운 열매만 영원토록 누릴 따름이다.

 일종의 기계적인 행위 즉 로봇과 같지 않고 당당히 각자의 자유 의지에 의해 주인 의식으로 법을 준수하는 것이라면 갖가지 방해와 장애가 현존하는 이 세상보다 더 이상적인 시험 무대는 없다는 결론이다.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 부인하는 것이다. 사랑은 피차간의 자기 부인에서 이루어지고 유지되어 항존(恒存)한다. 사랑하지 않는 것 즉 "육신대로 사는"(롬 8:13) 것이 자아중심이다. 그래서 육신대로 살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엇이 어려워서 육신대로 살지 않을 수 없다고 푸념인가.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사랑 유무, 사랑하는지 여부를 시험하는 것이다. 사단이 그 영원한 행복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똑같은 이유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사랑하는지 않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이다. 그 누구도 이를 대행해줄 수 없다. 있다면 아담도 범죄 않아 지금도 생존해 있을 것이고, 이 세상 신 악마도 지금 천사로  남아 있을 터이다. 그래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각자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경고임을 다시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부언해 두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섭, 통제하신다면 왜 이 세상에 부조리가 심하냐, 억울한 일이 흔하냐 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완전한 세상 또는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강제로라도 만드시고자 함에 있지 않은 것이다. 순수하게 인간의 자유 의지로써 의(義)를 사랑하기 때문에 의와 사랑의 세계가 되는 것을 보기 원하시므로 억지로 통제에 의해 그런 세상이 만들어지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온당치 못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강제로 통제하시는 목적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심이니, 미리 보시고 아심을 따라 미리 택하신 구원 받을 사람들이 일정 기간에 걸쳐 세상에 태어날 것인즉 그 동안만이라도 이 세상이 지탱해주어야 하는데 그대로 놓아두면 그 동안이 아니라 훨씬 그 이전에라도 세상은 벌써 파탄이 날 것이 뻔하므로 그 동안이나마 이 세계가 지탱 유지할 수 있도록 인간사를 부득불 통제하심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아중심에서 빚어지는 악함 그 자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니,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인간을 처음부터 로봇으로 만드셨을 것이다. 악한 것은 아주 나타내지 않고 오직 선한 것만 나타내도록 자유 의지를 완전히 제거해 버리시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악은 악대로 여전히 자행되는 것이지만 그 결과로서의 파괴행위 즉 살인행위만은 그 악한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강제하심에 이 하나님의 철통 같은 간섭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상이 이 마지막 때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기묘한 구조의 인간 생애의 법칙을 나타내시는 목적인 것이다. 계시하여 주셨으니 그 계시하신 목적이 반드시 있으시게 마련이고 그 뜻을 여기서 일부 피력한 것이다. 곧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라 마지막으로 분부하심이다(행 17:30/계 14:6). 그렇지 않으면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전 지구적으로 임하될 "하나님이 역사하시게 될 유혹("strong delusion")을 믿게 하실" 것이니 결단코 어느 인간도 이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살후 2:9-12).






(一始二元三位一體)

(1시2원3위1체)


애초에 하나로 존재하던 것이
자기와 같은 또 하나를 파생시켰으니
이제는 하나가 아니요 둘이 되었으나
애초 하나이던 것이 둘이 되었다는 것일 뿐
애초부터 둘이었던 것은 아니므로
둘로서 존재하면서도 항상 하나로 존재하여
애초의 하나였던 모습을 계속 유지하려는
이 성질을 일컬어 3위1체의 원리라 하고
그 모습을 가리켜 3위1체라 한다.

이것이 사랑의 뿌리요,
한 몸 의식, 하나 의식, 공동체 의식의 근본이니,
이 모든 것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름이다.

따라서 조물주를 인정함이 없이 사랑을 말하거나
하나 의식, 한 몸 의식, 또는 공동체 의식을 논함은
한낱 망상으로서 뿌리 없는 식물을 상상하고 논함과 같다.

만물 만상과 만사가 다 이 3위1체의 원리로 되어 있는 것은
이 우주가 한 조물주의 피조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3위1체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났으므로
인간이 범죄하여 오늘날 같은 비극에 이르고,
이 3위1체의 원리를 따라 인류는 구원이 되고,
이 원리를 따라 영원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

이 질서 정연한 아름다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세계가 영원한 멸망이니
이 영원한 법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처해질 공간이다.
적용되는 세계가 영원한 생명이니
이 법질서를 지키는 이들이 누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한 평생은 그 영원한 두 세계에서의 운명을
각자 스스로 결정하여 가름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다.
그 영원한 확정을 잠시 유보한 유예기간이다.
그 외에는 이 세상에서의 의미가
전혀 없다.

오늘날 계시된 이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출현이야말로
이상의 메시지를 담아 모든 인류에게 엄중 경고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첫째, 3운법칙이 3위1체 원리를 증명하고 있으므로
지금까지 확정 짓지 못한 인과율(因果律, the law of causality)도 
동시에 입증된 것이다.

둘째, '트리니 호모'로써 조물주의 존재가 입증된 것이다.
현재를 기준해도 무려 수십 억의 인간 생애가 

그와 같이 단 세 가지 형태로만 나누어져
철저히 관장되고 있다는 것 자체도 그렇지만,
그 단 세 가지를 구성하는 숫자들이 조합, 배열되어 있는 것 자체가
다름아닌 3위1체 원리의 도식(圖式)이기 때문에
이는 사전(事前) 고안, 설계, 기획이 아니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

고로 지금까지 3위1체 원리의 실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입증되지는 못했는데 이 트리니 호모의 구조로써
훌륭하고 당당하게 증명이 되었다는 것이 그 
셋째다.
이 대칭 원리에 의해 자연계의 대칭으로서 초자연계(靈界)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성경에 말하는 천국(天國, 하늘의 왕국)이 바로 그 세계인 것이다.

넷째, '트리니 호모'로써 성경의 진실성이 입증되었다.
950세에 죽은 노아 등 각 성경 인물이 3운법칙의 유형을 대표할 뿐 아니라
3위1체 원리와 이를 증명하는 3운법칙이 모두 유일하게

성경에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트리니 호모'로써 그리스도의 구세주(마지막 아담)되심이 입증되었다.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것은 아담은 원래 영생하는 존재로 창조된 까닭에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역시 영생하는 존재여야 하므로
비록 우리 위해 죽으셨으나 반드시 살아나셔야 함이었다.
따라서 3운법칙에 해당되지 않으니
3운법칙은 각 생애의 의미와 더불어
생존 기간(죽음의 때)을 정하는 법칙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일단 사람으로 태어나셔서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것은 사실이니
이에 대한 3운법칙 적용은 당연하지 않으냐 하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친히 사람되신 분으로서
그리고 죄가 없으신 사람으로서는 유일하시니
그 특수성이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는 것.

사람이 되셨다고 해서 만물의 창조자, 주재자(主宰者)이심에
변함이 있는 것은 아닌 것.


아담은 영생하는 존재였으나 범죄함으로써 죽게 되었던 것이다(롬 5:12).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육체를 물려받는
우리 인간 역시 죽지 않는 것이었다.

그가 범죄함으로 죽은 자가 되어 죽음의 육체를 물려받은 것이
오늘의 인생 비극이다.

고로 마지막 아담의 영을 "물려받는" 이마다
죽지 않고 영생하는 것은 당연 논리다.

여섯번째, '트리니 호모'로써 이 때가 마지막 때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왜냐면 사람은 자기 죽을 때를 모르도록 되어 있는데
이 '트리니 호모'를 오래도록 연구하면 그 때를 알 수 있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고로 모르도록 되어 있는 것과 알도록 되어 있는 것,
이 둘이 만나는 지금, 다시 말해 이 '트리니 호모'가 발견된 오늘이야말로
인류의 마지막 때임이 입증됨이다.
모르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더 이상 시간이 허용되면 모르도록 된 것을 알아 버리는 결과를 낳으므로
더 이상 인류 생존의 시간을 허용 않는다는 것이 이 시대의 메시지이다.

첫째와 셋째 그리고 넷째는 서로 연동(連動)되는 것들이다.
왜냐면 조물주 계시면 그 메시지가 반드시 있게 마련인데 그것이 성경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진실이라면 그 성경이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성경이 진실되다는 것은 지금까지 노아를 천년 가까이 살았다 해서
황당한 전설이나 신화로 취급했는데 '트리니 호모'로써 그 사실성이 증명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트리니 호모'에는 해당될 수 없는 유일한 인생 유형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이시자 사람이신 유일한 존재임을 드러내고
산 자로서 그 생명이 중간에서 끊어지는 사실을
'트리니 호모'는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

또 마지막 아담으로서 영생하는 이로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아나신 것)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의 인간 세계가 조기(早期)에 공멸(共滅)할 것을
오늘날까지 방지해온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강권 발동 즉 강제적인 통할과 그 관리에 있는 줄은 아는데
실제로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 그 진상을 모르다가 바로 그런 실체 중 하나가
이 '트리니 호모'로써 입증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 중요한데 이것이 
일곱번째다.

2005년 9월 11일 미국 뉴욕 쌍둥이 빌딩 폭파 사건은 바로 그 증명이다.
즉 한 개인이 마음만 먹으면 무차별적으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야기시킬 수 있음을 입증한 것.
여기는 양심도 없다. 심지어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것이니 더 무슨 말을 하랴.
다시 말해 자아중심의 인간에게 살 길은 자기 부인뿐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 자기 부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인간 삶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이 여섯번째의 핵심 내용은
 이 세상 인간 생활은 통제되는 삶이므로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
물론 인간의 자유 의지는 일절 저촉되지 않으니
완전히 보장되어 있어 하나님도 이를 좌지우지 못하신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완전히 행사되면서도
그 생활만은 철저히 통제되었다는 것은 한 가지 의미밖에 없다.
즉 완전 통제된 이 세상 인간 삶이므로 무의미 그 자체이나,
 각자의 영원한 운명만은 자유 의지로써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니, 따라서 이 세상은 장차 영원한 삶의 행복을 누리느냐
 아니면 영원한 멸망의 고통이냐 그 여부를
각자 자유 선택하는 오직 그 의미만 유효하다는 것.
고로 이 세상 인간 삶의 의미를 완벽하게 정의(定義)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대할 준비를 하라(Prepare to meet your God the Creator)는
메시지가 3운법칙이다.
여덟번째는 인간 삶이 통제되어 있는 이유를 밝힘이니 

곧 죄인으로서의 실상을 증명함이다.
절대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그래서 구원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입증함이다.

이 여섯, 일곱, 여덟째 역시 모두 연동되는 의미다.

3운법칙은 이 세상이나 인간 생애가 철저히 때(기간)에 지배되고 있음을
입증한다는 것이 그 
아홉번째다.
지금은 우는 때요 웃는 때가 아니며 구원의 때이지
 삶의 낙을 향유하는 때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열 번째, '트리니 호모'는 살인 행위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왜냐면 사람이 죽는 때가 정해져 있는데
따라서 죽을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로 죽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죽이겠다 해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철부지 생각을 아예 버릴 일이다.

그 죽을 때가 되어야 내 손에 죽는 것이다.
따라서 실패할 경우 나만 손해 보는데 왜 그다지도 어리석고자 하는가?
악인을 통제하는 의미만 아니라
 그 악인의 살상 행위로부터 인생들을 보호하는 보호 막
(幕) 역할도 함이다.

열 한번째, 인간이 인간을 살상(殺傷)해서도 그렇지만
이 자연계에 속한 육체로 말하면 불의의 사고라도 만나면
 이 시간 후의 목숨은 없을 수 있는 것.
고로 죽을 때가 되기 이전에는 그 어떤 불의의 사고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철두철미한 통제력이 작동하고 있음을 3운법칙은 증명하고 있다.
고로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시계의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정확하게 시점(時點)을 정해놓듯이
모든 것이 일사불란하게 정밀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음을 

이로써 확인하게 된다.

열 두번째, 오늘날 적(敵) 그리스도의 때가 이르렀음을
온 세상에 고지(告知)함이다.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알리는 다섯째와는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은
적 그리스도의 성격을 규명해 주기 때문이다. 

이반 로버츠(Evan Roberts, 1878-1951)의 3운법칙 도표야말로
트리니 호모(trini homo)의 독보성(獨步性)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열 세번째,
자기중심의 이기주의로는 이 인간 세상은

단 한 때라도 부지 못하고 망하게 되어 있는데도
오늘날까지 이 세상이 지탱해오고 있는 이유가
이 '트리니 호모'의 강제력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 것이다.

고로 자아중심으로 살아도
인간 생활은 얼마든지 유지 보전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품지 말 것이니
가인이 아벨을 죽였듯이 공동의 멸망만이 있을 뿐이다.
죄를 짓고는 파멸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시니

지금은 구원 얻을 사람은 다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한 기회 부여에만 의미가 있다.
자율성의 인간을 지으셨는데도 현재 3운법칙에 의한 타율에 의한 제재가

정상일 수 없으니 고로 이 세상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3운법칙(三運法則) 곧
트리니 호모(trini homo)를
"20세기 바벨론 궁전 벽에 나타난 손 글씨"라 하는 것이다.

미국 역대 대통령 사망 연대의 신비한 배열은
구 시대(벨사살 당시의 바벨론)의 종료를 선언하고
트리니 호모(trini homo)는
새로운 시대(벨사살 당시의 메대, 파사)의 도래를

강력히 예고함인 까닭이다.
오래 전 바로 이 시대를 예고하여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한 다니엘의 예언은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1), (2)에 이은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3)이 된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의 역사가 그 종언을 고하게 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이 지상(地上) 세계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고
그 끝이 바로 눈 앞에 다다랐음을 선언하고 있다.

결국 '3운법칙'으로 나타난 이 증언과 경고의 핵심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 피조물됨이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미리 정한 때'를 말하는 성경 구절

The KJV Verses Indicating 'Times Preappointed to Human Beings'


Job 14:5 Seeing his days are determined, the number of his months are with thee,
thou hast appointed his bounds that he cannot pass;
"그 날을 정하셨고 그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니"(욥 14:5)

John 7:6 Then Jesus said unto them, My time is not yet come:
but your time is alway ready.
"내 때(기한)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지마는"(요 7:6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말씀이시다)

John 7:8 Go ye up unto this feast: I go not up yet unto this feast;
for my time is not yet full come.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요 7:8 - 역시 '사람'으로서의 주님의 말씀)

Acts 17:26 And hath made of one blood all nations of men for to dwell on all the face of the earth,
and hath determined the times before appointed, and the bounds of their habitation;
"그들의 연대(年代)를 앞서 정하시며"(행 17:26). 한글 역은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렘 10:23)O Lord, I know that the way of man {is} not in himself: {it is} not in man that walketh to direct his steps.
“주 하나님, 제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합니다”)
(잠 20:24)Man's goings {are} of the Lord; how can a man then understand his own way? 
“사람의 걸음은 주 하나님께로서 말미암는 것이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잠 16:9)A man's heart deviseth his way: but the Lord directeth his steps.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자기 죽을 날을 알도록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런 정확한 인간 생애의 법칙을 알았으니, 그렇다면 인류는 자기 죽을 날을 아는 지식을 알면서도 활용해보지도 못한 채 다시 말해 그런 지식은 사장(死藏)되어진 채, 더 분명히 말하면 끝까지 "사람은 자기 죽을 날을 모른다"는 옛부터의 정설은 깨어지지 않은 채 세상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는 얘기가 되는 것일까.

그 때문에 이 지식 다시 말해 조물주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인간 세계를 주재하시고 통치하신다는 최후 확정적인 증명이 되는 이 트리니 호모의 발견이 20세기 말 오늘에야 알려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의 입장은 "자연계에 자연법칙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만으론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기에 미흡하다. 직접 인간계를 관장하고 주재한다는 그런 무엇이라도 최소한 밝혀져야 할 게 아니냐"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런 무엇"이 트리니 호모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밝혀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그 증명"으로 받아들이는 여부는 각자 자유다. 얼마든 이의를 제기하고 그리고도 자기를 합리화할 수도 아니, 합리화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원래 '무신론'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자기 해석이지 객관적인 합리성과 논리성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건 아니기에. 그러나 진실은 때가 되면 모든 거짓의 입을 봉해버리도록 되어 있다. 모든 거짓은 때가 지나면 그 정체를 더 이상 숨기지 못하고 봄 눈 녹듯 사라져버리게 되어 있다.

 사필귀정으로 조물주의 존재를 이의없이 시인한다 해서, 더 나아가 성경이 그 조물주의 말씀이라 믿는다 해서 그것이 구원의 보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조물주를 인정은 하면서도 엉뚱한 이단사설에 넘어가 자기 운명을 망치는 예가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을 믿되 자기 식대로 믿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수도 허다하다. 그러나 조물주를 인정하고 성경이 그 유일무이의 메시지임을 아는 지식은 그런 모든 보증과 보장에의 첫걸음이 되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


사람이 한번 태어나 언제 어떻게 죽든지 그 죽는 날까지의 한 평생의 기간이 정해지고, 그 기간에 맞추어 일정한 틀로 즉 단 세 가지 규격으로만 그 활동기와 침체 기간이 사람에 따라 정해져, 엄밀히 단 몇 가지 수치라는 규칙성을 따라 한 치도 오차 없이 번갈아 드는 이 기막힌 현상. 
지금까지 그 법칙대로 일사불란하고 질서 정연하게 나타나지도록 하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티끌만큼도 차질 없이 돌아가는 이 우주의 자연법칙의 운행과 더불어 그렇게 인간 생애를 조정하시는 창조신의 손길이 아니고는 절대 불가능한 것.

마치 자기가 신인 양 큰 소리치는 인간도 한낱 무대 위에 올려진 꼭두각시처럼 철저한 조종 아래 그러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트리니 호모'로 입증된 이 사실 앞에서도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다. 즉 "인간이 철두철미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정묘한 기계의 한 부속품에 불과한 것이냐?" 하는 물음인데, 대답은, 단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영원한 존재로서 애초부터 창조된 인간은 이런 유한(有限)의 일시적 삶이 아니라, 이런 임시방편적인 한 때뿐인 목숨 저너머를 기다리는 영원한 세계가 인생의 본고장이라는 것이니, 거기서의 삶이 장차 어떻게 전개되느냐가 사실은 인생 최대 현안이요 당면문제이다.

그 의미를 떠나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함을 이 인간 법칙은 웅변으로 입증해주는 것이다. 왜냐면 이 세상 삶은 '트리니 호모'에서 입증되듯이 일정 규격에 짜맞춰진 "한평생"들이니까.

규격에 짜맞추어진 대로 되어질 뿐, 옴치고 뛰고 별 짓을 다해도 이 철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 아무리 화려하고 성대하게 살아도, 아무리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도, 규격품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오직 각자가 임의대로 작용하는 단 한 영역이 있으니 그것이 정작 중요한데 곧 인간의 자유 의지로써 결정되는 각자의 영원 운명이다. 여기는 조물주도 손 못대고 그 누구도 간섭 못하고 오직 자기 자신만이 좌지우지한다. 여기 이 세상이 바로 각자의 영원한 운명이 정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본격적인 인생 삶으로서의 그런 영원한 내세를 결정 짓는 그래서 그 영원할 '현세(現世)'ㅡ이는 물론 그 때 가서야 부르게 될 명칭이나ㅡ그 '현세'의 운명을 결정 짓는 '전생(前生)'ㅡ이 역시 그 때 가서야 부르게 될 명칭이지만ㅡ그 '전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인과응보'에서 그 <인(因)>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창조주의 피조물일진대 조물주를 떠남은 생명을 떠나는 것이므로 조물주를 떠날 수 없는지 있는지의 여부를 내 스스로 가름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이 '현세'요 그 때 가서는 '전생'이라 부를 오늘의 삶이다.

이 갈림길을 순수한 나의 의지로 가름하는 것이기에 이를 '자유 의지'라 부른다. 이 갈림길에서 유일무이의 핵심 열쇠 역할을 하는 것이 "사랑"이다. 다시 말해 창조주의 사랑을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현재의 나의 위치다. 결코 어렵지 않은 당연한 결정인데도 어렵게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왜냐면 트리니 호모가 정하는 모든 때는 현세에 국한한 것으로서 인간의 본격적인 삶은 내세에 오는 것이기에 그렇다. 내세의 삶만은 트리니 호모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유일한 소관사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 그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기 부인을 토대로 한 사랑의 삶이기 때문에 트리니 호모와 같은 하나님의 강제적인 간섭이 일절 필요없다는 뜻이다. 타율적인 삶이 아니라 자율적인 삶, 이것이야말로 사람다운 사람답게 사는 삶이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자주 독립성이 그 특징이다. 왜냐면 하나님과 닮아 있어야 하기 때문. 사랑이 바로 그런 자주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자율이지 결단코 타율일 수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3)
The Handwritings on the Babylonian Palace Wall of the 20th Century(part 3) 

 

이 다니엘의 예언 성취 역시 앞서 소개한 대로 

20세기 바벨론 궁전 벽에 나타난 손 글씨로 손색이 없다.
이 시대에 나타난 두드러진 징후인 것만은 틀림 없기에
여기 다시 등장시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니 
모쪼록 이 사실에 깊이 유념할 일이다.

 

소위 "성경 학자"들은 (1) 이 다니엘 예언의 핵심 부분을 놓쳐, "사람들이 신속히 내왕한다"는 부분을 오늘날의 시대적 특징 중 하나인 교통 통신 분야에서의 괄목할 발달로서 보지 않고 엉뚱한 해석을 하고 있다. 알맹이는 버리고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모든 것을 영문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라 자랑하고 흡족해하지만 실상은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한 전주곡인데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성경상이 무지무식의 경우는 비단 여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2) 성경이 너무나 명백하게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덴낙원을 이 자연계의 동산쯤으로 착각한다. 에덴 동산은 초자연계인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에덴"이라는 곳의 동쪽에다 창설하신 "동산"이다. 자연계 동산이라면 어찌하여 그 안의 한 나무가 영생하게 하는 초능력의 나무가 될 수 있는가. 완전히 상식을 뒤엎는 성경 해석임에도 태연해하니 이 세상 지배 신(神)으로서의 사탄의 간섭이 이 정도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상하게 여기셨을(to marvel at) 정도다(막 6:6) 

(3) 따라서 아담 부부가 초자연계 몸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에 눈뜨지 못하고 있다. 이 사실은 성경에 명백히 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다"(롬 5:12)는 대목을 제대로 읽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범죄가 없었다면 아담이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뜻이요 자연계 몸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을 리가 없으니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까닭이다. 고로 초자연계 몸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4) 따라서 왜 "마지막 아담"(고전 15:45)께서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 꿀 먹은 벙어리 형상이 되어 있다. 기껏해야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러하다고만 알고 있다. 죽음에 곧 이어진 부활이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의 모든 일이다. 하나님이시자 사람, 사람이시자 하나님, 항상 50:50으로 항상 균형 잡아 인식해야 할 유일무이의 사람이시다. 하나님으로 또는 사람으로 치중하게 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첫 사람이 초자연계 몸으로 있다가 죽어 자연계 몸이 되었으므로 그 죽음의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회복하시는 마지막 아담께서는 죽음의 자연계 몸을 탈피하셨기 때문에 과거 애초의 첫 사람 아담(범죄하기 전)의 초자연계 몸으로 복구하셨음을 입증해 보이신 것이다. 이렇게 첫 단추를 잘못 채우니까 나머지가 모두 뒤틀리게 된다.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유구한 전통의 해석법을 깨뜨렸다고 우왕좌왕할 필요가 없다.

 (5) 초자연계 시간법으로 따지면 천년이 불과 하루다. 하루 이틀 착각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틀렸으므로 바로 알아두는 것이다. 초대교회 사도 시대에는 올바르게 가르쳤으나 불과 3,4백년 사이 교회에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고후 11:4)이 침투해 들어와 이에 대비를 못하게 되면서 이질적으로 흘러간 것이다. 사탄을 "그룹" 중 하나로 착각함이 그런 뒤틀린 성경 해석 중 하나다. 에덴낙원에서 창조된 "각종 짐승들"(창 2:19)이 천사들인 것이다.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두 번씩이나 강조한 사탄 곧 뱀 곧 용이라는 등식을(계 12:9/20:2) 완전히 무시하는 우매함을 보인 것이다. 사탄의 조종을 받아 어떤 이는 사탄을 "하나님보다 한 수만 모자라는 초능력자"로 대접하는 부끄러움까지 연출하고 있다. 왕년에 아담 아래 있었던 자로 인식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우리의 믿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 즉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천사 곧 그런 영물(靈物)들을 관할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탄은 그 교만으로 하극상을 한 것이다. 아담을 시기하고 미워했기 때문이다.

 (6) 삼위일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이런 지식이 없어도 하나님을 사랑하여(고전 8:3) 그 모든 뜻과 말씀에 제대로 순종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은"(마 18:3) 이들은 구원 받음에 하등 지장이 없었음을 먼저 밝혀둔다. 되지도 않은 "신학적 지식"을 합리화하려 한 이들만 구원이 차단되고 있을 따름이다(마 11:25-27).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이 하나로 계심을 가리켜 "성령"이시라는 "이름"으로 통하는 것이다(마 28:19). 

(7)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되어 계시는 그 이치(이것이 3위1체 법칙)를 따라 우리 구원도 이루어져, 나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을 이루시기 위해 죽으셨는데도(엡 2:4,5), 우리 인간을 "대신한 죽으심"이라는 날조된 교리가 특히 루터 깔벵 이래 만들어져 지배 세력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이런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대신 죽으심"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일단락되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너희 믿음도 헛것...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을 것"(고전 15:14-18)이라 할  리가 없다.

 (8) 때문에 오늘날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로마서 7장에 속박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7장의 자유인의 위치에 서지 못하고 있다. 로마서 7장 24,25절을 믿음에 들어온 바울 사도 자신의 체험이라 거의 전부가 가르쳐 오고 있으니 너무 황당하여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다. 이렇게 지독하게도 독해력이 없단 말인가. 다른 면에서는 사람들이 다 똑똑하지만 유독 이 성경에서만은 바보 노릇을 하고 있음이니 이는 인간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악령의 조종으로 인한 결과다.

 (9)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가장 심각한 성경의 경계를 완전 무시하고 있어 그런 시의적절한 경고를 들을 수가 없다. 아주 완전히 180도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경고 팻말이 없어 안심하고 수영하고 놀다가 마침내 참변을 겪고 있는 것보다 더 심각한 사태이건만 지금까지 "기독교"는 자기 도취에 빠져 잠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치명적인 오류가 한 두 가지가 아닌 오늘날 사태의 심각성을 대충 몇 가지만 잠깐 소개하였다. 자세한 설명은 다른 글에서 밝힐 것이다.

 



20세기 바벨론 왕궁 벽에 나타난 손 글씨 (4)

The Handwritings on the Babylonian Palace Wall of the 20th Century (part 4)

https://blog.naver.com/trinia/221494304599

 

네 번째로 거론되는 것은 1908년 6월 30일 오전 7시 17분 

대 충돌(일반적으로 "폭발"로 표현되고 있으나)이 있었는데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때
용과 그의 사자(使者)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지상으로
추방당하는"(계 12:7)것이 예언되어 있는 대로 사단이 완전히 하늘로서 추방되는
사건이 역사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노아 홍수 전 노아는 당시 세상에 대하여 경고하였으나
이 경고에 유의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 세상에서 구출된 사람은 오직 노아의 직계 가족 8명이었으니
노아 부부와 아들 3형제와 자부들이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던 전날 밤 롯이 

그 사위될 사람들에게 경고를 해주었으나
그들은 롯이 농담을 하는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경고는 받았지만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해버리니 무슨 소용이랴.

오늘날도 노아 때와 같으리라고 주님은 미리 경고하셨다(눅 17:26).
이런 경고를 역시 농담쯤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오늘날 이 경고도 온 세상에 알려지지만 이에 유의하는 사람은 과연 몇일까?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음산한 이 경고가 스스로에게 적응되지 않도록
 각자 혼신의 힘을 기울일 일이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