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한 구원 문제를 다루는 종교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이상향 건설의 가장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친다.
이상향 건설을 표방하고 공산주의가 생겼고
오늘날의 사회주의 운동도 이상향적 삶의 추구의 한 단면도다.
그러나 인성이 개조되지 않는 한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인성 개조는 각자 노력에 의한 것이란 착각은 금물.
아무리 노력해보아야 오늘 밤 죽어버리면 일장춘몽.
고로 가장 기본되는 것부터 해결하라는 것이 성경의 핵심.
즉 먼저 살고보라는 것, 그래서 다시 출생하라 즉 새로 창조되라,
그 다음에 올바른 삶의 방식을 따르라, 생명과 사랑의 법칙대로 살라.
일껏 살려놓았더니 아담처럼 범죄함으로써
그 생명 "잃든지 빼앗기든지"(눅 9:25) 하면 말짱 도로무공이 아닌가.
이미 무서운 선례가 있다. 아담이 그렇고 영원 멸망 악령들이 그렇다.
그러므로 여하한 일이 있어도, 죽는 한이 나도, 죄를 짓지 말아야.
그래서 새 사람, 새 생명에 들어가기 전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것.
다신 범죄 않고 말씀 순종하겠다는 언약(言約)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죄를 지을 수 없도록(요일 3:9) 구조적으로 은혜의 조처를 해주셨는데
생명의 법칙을 어기면 이것은 아담이나 악령들처럼 고의적 범죄가 돼
영원토록 죄 용서가 없을 수가 있다(히 10:26).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부지중에 짓는 죄도 있어 용서는 되지만 회개 않는 경우에도)
새로 창조되는 순간 이와 같이 살도록 구조적으로 짜여져 있음이
"마지막 아담"에 의한 왕국이다. 성령으로 출생함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완벽한 삶의 아름다운 구도를 마귀는 한낱 종교의 범주에
쓸어 박아 놓은 것이 지금까지의 "바벨론" 신학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현실적 삶의 가장 완벽한 과학을 가르친다.
막연한 희망 사항, 바람, 욕구의 그런 종교가 아닌 것이다.
종교와 성경을 구별할 줄 알아야ㅡ그런 구분이 가능한 자 복이 있다.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이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당연히 죽지 않는 몸 즉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게 먼저다.
구조적으로 그런 기반이 만들어져야 하는 바 곧 성령으로 다시 남.
다시 말해 성령으로("마지막 아담" 안에서) 나와 주님과의 하나됨이다.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되는 일이니까 이미 '하나됨'의 기본은 이뤄진 것.
실제 육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 주님 다시 오실 때다.
꽃이라도 봉오리로 있을 때가 있고 그것이 개화할 때가 있듯이
모든 것은 때를 따라 순서대로 되어지는 것이야 누구나 아는 사실.
우리로 말하면, 벌써 꽃은 되어 있고, 단지 봉오리로만 있다는 것뿐.
화려하고 찬란하게 꽃망울을 터뜨릴 개화만발의 때는 좀 더 기다려야.
육체의 변환은 "때" 관련해 시간이 소요되어 기다려야 하나
육체와 상대되는 영혼의 측면에서는 이미 당당히 "하나님의 아들들"
(롬 8:15-17/요일 3:1, 2)의 기쁨(요 15:11)과 평안(14:27)이 넘쳐난다.
우리의 땅의 목숨이 끝나서가 아닌 현재 이 시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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