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4일 토요일

.과거의 결과가 현재이고 현재는 미래의 원인ㅡ고로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미래를 기약 못해 [출처] 과거의 결과가 현재이고 현재는 미래의 원인ㅡ고로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는 미래를 기약 못해






행복하게 영원히 죽지 않고 살도록
인간은 창조되었었다.
그러나 생명의 법칙을 지키는 경우에만 한한다.
천사(영물/靈物)들도 그렇게 영광 중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범죄하니까 악령들이 되고
영원 멸망으로 운명지어져 있는 것을 보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인간이라고 차별하시겠는가.
항상 공평공정 무사하시어 더 여기시고 덜 여기시는 일이
없으시니까 창조주 하나님이신 것이다.
부모가 어느 자식은 더 여기고 덜 여기고 한다면
부모 자격조차 없다 할 것이 아닌가. 
그럴 바에야 낳기는 왜 낳았는가 비난만 받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도 범죄로 인해 죽은 자
다시 말해 이런 현재와 같은 자연계 육체가 되니
그 낳은 소생들 즉 모든 인간이
영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지라
그래서 오늘날 구원의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거를 짊어지고 있는 인생들이므로
현재의 이 자연계 몸의 처지는
사는 것도 아니요 또 기간도 당연히 잠정적이다. 

그러면 이러한 인생들의 미래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면
이렇게 죽은 아담을 대신하여
아담 역할을 하시고자
다시 말해 인생들을 아담 범죄 전의 정상 상태로
완전히 되돌리시고자 창조주 하나님 친히
부득불 사람되시니 이를 "임마누엘"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첫 사람 아담과 짝을 이루는 방법으로
"마지막(대칭/對稱을 이루었다는 뜻) 아담"(고전 15:45)이
되시어 인간 세상에 오시니 곧 메시야 구세주시다.

고로 이 세상은 이 대칭 아담을 통해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회복되는 단계 
그 이상 이하든 일체의 의미가 없다. 
이것이 그러한 과거를 지닌 인류의 현재 위치다.

이러한 인생들인 고로 그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듯 훤하다. 영물들처럼 되는 것이다. 
즉 범죄하지 않은 영물들은 "거룩한 천사"들로서 영원 생명 누리고
범죄한 영물들은 사탄을 비롯해 
영원 멸망의 불 못이 장차 그들의 무대다.
끔찍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것이 짝의 법칙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양자 중 택일한 결과이니까 필연적이다.
생명은 아니나 죽음의 멸망의 고통 고난 역시 아닌
그런 중간 단계가 일절 없다는 그 뜻이다. 
오직 두 갈래로만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들이 처음부터 영원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므로
비록 아담의 범죄로 일시(이세상) 자연계 몸이 되었지만
"마지막 아담"의 등장으로 현재는 완전 정상화되었은즉
모든 인생들은 예외 없이 원래의 모습인
초자연계 육체로 변환되어 
명과 죽음(영원한 고난 고통의 멸망)으로만 나누어짐이니 
이것이 모든 인생들의 장차 맞게 될 <미래>인 것이다.
즉 구원 받아 거룩한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영원한 영광의 생명으로, 
생명의 법칙에 어긋나게 행동하여 불법을 행한 범죄자들은
같은 자아중심을 선호하여 악령이 된 영물들과 함께
영원한, 참담한 고난, 고통의 바다인 불 못으로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지금 <현재>에 머물러 있으니까
이 중차대한(영원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는기간의 
의미심장함을 충분히 인식,
장차 닥칠 <미래>를 준비하는 데에만
온갖 심혈을 기울일 일이요
방심이나 안일한 자세는 절대 금물이다.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고로 외쳐라!
무엇이라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영광은 들의 꽃과 같아
마르고 시들고 지는 자연계 육체뿐이나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무궁하리라고 외쳐라!"(사 40:6-8)
고로 영원한 말씀의 복음(희소식)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자만이 밝은 미래가 있고
그렇지 않고 반대로 나아가는 자는
암담하고 처참한 목불인견의 미래만이 있다.

  







2020년 3월 9일 월요일

마른 하늘 날벼락 치기 전에 은은한 뇌성으로 울려 퍼지는 경종을 들으시라










로마 총독 벨릭스도 
"시방은(지금은) 가라 틈이 있으면 부르겠다",
바울의 사실 설명에 "두려워하면서도" 
그런 안일한 자세를 취함으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마음에 믿음이 들지 않고는 두려움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믿음'은 가도 '믿음의 결단'을 <미룬> 불찰이다.
그는 나중에 자살로써 멸망 길을 택함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이미 이렇게 차일피일함으로 멸맘의 문턱에 섰던 그. 
"차일피일"이 다반사인 우리 모두에게 경종이 된다. 





2020년 3월 8일 일요일

가시성과 불가시성, 영원과 시한부, 죄와 의, 멸망과 영생의 양면 구조로 된 인간임을 각자 직시해야





그 필수 요건이 
"믿음으로써 은혜로 얻는 구원"이 아니라
회개 즉 하나님 정하신 생명의 법칙
(머리와 몸 관계로서의 둘이 하나됨) 준수임에 유의해야. 
왜냐면 현재의 불행(구원이 필요하게 된 요인)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범죄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영생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영생하지 않는 인간 창조'라는 말이 되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하시는 일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마귀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불경스러운 생각을 하도록
모든 인생들을 유인했고 인간들은 그를 따른 것인데
인간들 자신의 하나님 무시에 대한 당연 업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외면하는데 일이 제대로 될 리 없다.

회개하여 아담처럼 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자에 한해

"은혜로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선물"로서의 구원인 것이다.
아담처럼 죄 지을 바에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니
그런 아담의 전철을 밟는 자에게 독생자 하나님께서
온간 수모와 고통을 당하시면서까지 죽어주실 이유가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죽은 아담 다시 살리시면 될 일이다.
거룩한 천사들처럼 순종하고 악령들처럼 죄 짓지 않을 자들만
상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시니 이는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야 악령들은 멸망이고 거룩한 천사들은 영생이라는
지금까지의 논리가 그대로 통하고 하자가 없게 된다. 

지금까지 마귀는 '무조건 구원/영생'이라는 식의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으로써 복음이라 속였다.
회개를 빼버리고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도록 해서
이 가짜 복음을 믿는 자마다 거침없이 멸망에 쓸어 넣었다.
인생들로서는 자업자득이니 아담의 범죄와 같은 양상이다.
즉 아담 자신의 불순종이 원인되어 사탄의 거짓말이 통한 것.
사탄이 믿지 못하게 해서 못믿는 것이라기보다
인생들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들어 올
여지가 없었다고 보아야 정확한, 공평공정한 판단이 된다.

어쨌든 오늘날 마지막 때를 당하여 최종적인 은혜로

성경의 모든 진실이 드러나고 있으므로 
과거와 같은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적극 "문을 두드리고,
찾고 구하는" 구도자로서의 진지한 접근으로써
하나님의 이 마지막 은혜에 화답할 일이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다. 급격히 적그리스도의 쓰나미가
몰아칠 순간에 그제야 정신차리면 한참 때는 늦은 것이다. 


2020년 3월 7일 토요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마 28:18)ㅡ메시야 주님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발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



성령(항상 내 앞에 계시는 메시야 주님)의 의미도 양면성이 있으니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표현,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시기 위해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했고
원래의 시편 16:8은
내가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내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않으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짝의 법칙의 <양면성의 동시성>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자유>와 <포로됨>의 경계를 분간 못하고 있어.
무조건 죄에게 포로되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다시금 놀아나고 있어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범죄 전 아담의 위치로 복귀되었음에도
그래서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마지막 아담의 위치로 환원돼
범죄 전 아담처럼 악령들을 제압하고 호령하는(약 4:7) 권위자임에도
이를 활용할 줄을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ㅡ자기 믿은 대로 되기 때문.
다시 말해 "만물이 다 깨끗하되(정(淨)하되)" 
이 정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롬 14;20-23) 즉 정하지 않다고
믿는 자에게는 부정(不淨)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눈뜰 일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 
실제는 주님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돼 자유인이 됐으나
이를 믿지 않고 여전히 죄에게 포로되어 있다고 믿는 이는
결단코 그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 구원하고"(롬 10:9),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10).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므로(갈 6;15)
하나님이 약한 자로 창조하실 까닭이 없다. 강한 자로 창조하심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은(요 3:3,5,6)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막강한 아담으로서(범죄로 죽은 아담 대신) 높이 오르신 '사람'께서
친히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내가 그 아담처럼 돼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무슨 약함이 있고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을소냐!
이 죽음은 성령 안에서 내 스스로 필요(사람들 구원 위해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는-골 1:24)에 의해 자청하는 죽음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자청하신 십자가 죽으심 같이.   
이 차이, 이 경계선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자율과 타율의 판단 기준은 간단하다.
명령하지 않아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단순히 욕구에 충동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이지의 명령에 응해)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과의 차이.


2020년 3월 6일 금요일

갑은 을을 위하고 을은 갑을 위하고ㅡ몸은 머리를 머리는 몸을ㅡ영혼은 육체를 육체는 영을ㅡ주님은 나를 나는 주님을ㅡ이것이 짝의 축복






성경에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롬 12:10) 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존경하기를 먼저 해야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 했으면
여하한 일이 있어도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도록"
힘써야 하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교만죄에 빠져
멸망의 지름길로 달려감이 됩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펴 읽는 것도 
다 아는 진리요 사실이지만 반복해서 익힌다는 뜻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모쪼록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
그 뜻을 부지런히 살피기 위함의 차원이어야 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이 "나를 나타냄"의 약속은 한 번으로 그치시지 않고
평생 연속적으로 나타나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쉴 새 없는 주고 받음의 연속 작용이 사랑입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어버려 주님과 함께 장사지낸 나 자신ㅡ고로 부활하신 주님과 하나된 나 자신이 새로 창조되어 다시 출생하는 것이 성령 받음인 것





2020년 3월 5일 목요일

아담을 죽인 살인자 용에게 아담의 이름으로 설욕하시는 "마지막 아담"의 역전극 실화 드라마








이런 훌륭한 역전극의 역사적 사실을 무시하고
오직 구원 하나에만 매달리는 미련한 꼴을 노정시켜 
미신 투성이인 세상 종교와 다를 바 없었으니
산과 들, 하늘과 땅, 만물 앞에서도 부끄러운 인생들이다
그러나 여하튼 이제는 하나님 은혜로 진실에 접근했으니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여 그 말씀대로 충성할 일이다



21세기 교회에 부치는 격문(檄文) [2]





이것이 진정한 사회주의/공산주의 개념이다.
초기 한 때 공산주의 팽창은 
인간 본연의 양심을 자극한 이상주의였기 때문.
그러나 자기 부인에 기초하지 않고
강제력/폭력을 동원한 얼뜨기 착상이었으므로
실패할 수밖에 없어 사악한 독재자의 수단/도구만
되어준 것뿐이라 환멸의 눈물만 삼킨 것이다.

"저 산너머 머얼리 행복이 있다기에
아ㅡ나도야 따라 갔건만 
눈물만 글썽이며 돌아왔습네"
카알 붓세의 시구(詩句)처럼ㅡ.

그 몸된 교회 위해 자신을 버리신 머리되신
"마지막 아담"의 본을 따라 몸의 모든 지체가
자신을 버려 자기 부인으로 시종일관할 때
이상향적 이상주의는 현실로 성큼 힘 안들이고
다가서는 것을 인생들이여 왜 모르는가!
이것이 메시야 예수님의 복음(희소식)의 요체다. 

"천국(행복)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고
너희 안에 있다"(눅 17:21) 하신 대로
내 안에 계시는 성령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하나로 계심)
바로 "마지막 아담"과 
내가 하나됨에 있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러한 너와 내가 하나되어 
나폴레옹이 찬탄했다는 "사랑의 제국"이
형성되는 줄을 왜 모르는가.
"보라! 알렉산더, 시이저, 샬레망 그리고 나
모두 검을 휘둘러 제국을 세웠으나 지금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그가 사랑으로 세운 제국은 지금도 창창하다."
세인트 헬레나 고도에서의 나폴레옹의 말이라고 전한다.







21세기 교회에 부치는 격문(檄文)











 

이 곡은 강물이 흐르듯 하는 유쾌함은 있으나
애조를 띤 가사에 맞춘 것이므로
트럼펫으로 연주하면 경쾌한 그야말로
유수 같은 흐름을 느낄 수 있어
트럼펫 반주로 노래하듯이 하면 좋을 듯

이세상은 아담을 죽이고 차지한 사탄의 적지(敵地)인데 여기가 사람 사는 데라 착각하니 미쳤다는 소리 듣지 않겠는가










요컨대 현세상에 대한 인식 여하가 관건이다
인식을 그르치게 하는 장본이 아담의 죽음을
영적인 것이라고 부추기는 마귀의 책동이다
사탄의 압제 아래 있으니 당연히 악령들과의 전쟁마당이다
전쟁에 임한 자가 죽기 살기로 싸워 죽으면 죽으리라 해야지
그래서 죽기를 한하고 싸워야 승리를 넘볼 수 있는 것이다
사탄의 인간 압제, 인간 지배가 아담의 죽음에서 온 것임을
확신할 때 현재의 영적 "전시체제(戰時體制)"를 실감할 것이 아닌가
살인자 사탄이라고 주님께서 정확히 정의(定義)해주셨다(요 8:44)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죽는 자로 창조학셨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더 이상 다시는 마음에 두지 말 것이다. 
이 성격적인 똑바른 인식이 백전백승의 비결일 수도 있다



79세 목자/牧者의 65명 북한 교회 이야기



2020년 3월 4일 수요일

인간 구원의 중요성에 비추어도 인류 역사 최대의 경이





양념으로, 노자의 "3"(삼생만물/三生萬物')의 수수께끼도 
마침내 풀려진 것이다. 노자 도덕경 42장에서 1은 수량으로서의 1이 아니라 
시원(始原)으로서의 1인 것이며, 2는 짝을 (이룸을) 말하고, 
짝을 이룬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서는 하나이니까 당연히 1이지마는
始原으로서의 1과 구별이 되지 않으므로 3이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3위(位)다. 
고로 노자의 "3생만물(三生物)"은 "3위의 이치(3위1체의 법칙 즉 짝의 법칙)가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이 된다는 뜻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수량을 표시하는 1, 2, 3이라면 3이 만물을 구성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에 오는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氣以爲和(중기이위화)로써
음과 양 다시 말해 짝의 원리를 가리킴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자도 만물이 짝의 원리로 운영됨을 명백히 한 것이다.
성경 이사야서 34:16 외에도 외경(外經) sirach 33:15,16에
"지존자께서는 피차간 대립되게 만물을 짝으로 만드셨음을 염두에 두라
(Think about it: the Most High has made everything in pairs, 
each thing the opposite of something else.)" 했다. 
"한 때, 두 때, 반 때"의 비밀도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표현은 다니엘에게 나타난 천사가 
바로 이 "마지막 때"를 예언하면서 두 번 사용한 것인데(단 7:25/12:7)
오늘의 마지막 때 관련 예언서인 계시록에서(12:14) 다시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이 말한 것이므로 마땅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꼭 이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 때, 두 때, 반 때"를 숫자대로 말하면, ①1과 1x2, 리고 1÷2다. 
②와 ③은 성질이 정반대다. ②는 1을 2로 곱하는데, ③은 2로 나눈다.
이렇게 정반대로 나가니까 이 ①, ②, ③은 짝의 원리 도식에서의 ●, ◐, 이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이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해 이와는 다른 
타당성 있는 해석을 한다면 당연히 이 해석은 취소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특별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3년 반"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일부러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시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점을 해석해보라는 것이다. 
달리 해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21세기에  발맞추어 ●, ◐, ◑의 도식을 가진
짝의 법칙이 세상에 비로소 온전히 밝혀졌다는 것 이외에는. 

모두 21세기 "계시"의 결정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 계시는 크고 중요한 것이든 잣단 것이든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안다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3위1체의 법칙과 3운법칙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3운법칙이 창조주 하나님을 직통으로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한평생을 이같이 일정 규격대로 어김없이 갈라내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하는가?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성경 외에는 없고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의 모든 말씀대로 믿고 따르면 구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핑계대고 빠져 나갈 구멍은 없다. 
멸망하는 경우 순전히 개개인의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이 된다. 



오늘날 시대는 앞을 다투어 서로 "계시" 자랑을 하는 미혹의 때이므
"계시"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도리어 민망해진다. "계시"라 말하든 않든
거기에 구애될 것 없고 오직 성경대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함",
"십자가 짐", "자기 모든 소유 버림"(눅 14:28-33)으로써 기준을 삼으면,
이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100프로 사이비 이단이니 무조건 젖혀놓고
그 중에서 선별하되 최정원 목사의 경우처럼 왜곡되게 설명하는 것을 다시 걸러내고
우리 앞서 가신 주님의 그 십자가 지심을 따라 가는 십자가 사형수로서의 행보가
아닌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릴 일이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사형수가 무슨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있어 그 소유에 연연하겠는가. 
현재의 이 자연계 육체(죽음과 썩음)가 바로 생명 아닌 죽음의 대명사이니까
그래서 이런 죽음의 몸을 가지고 삶, 생명 운운 하는 것 자체가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확고한 증명이므로 떨쳐 버릴 일이다. 
인간의 고질적인 자아중심 그대로이냐, 아니면 자기 부인을 강조함이냐
이 기로(岐路)에 서서 다루어보면 모든 진위(眞僞)가 대개 드러나지게 되어 있다. 
고로 이 혼란의 시대 아무리 악마의 농간이 극성스러워도 
이 간단한 판별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알고보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이와 같이 중심을 바로잡고 있으면 그 어떤 격랑과 태풍에도 만세반석일 것이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