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7일 토요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마 28:18)ㅡ메시야 주님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발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



성령(항상 내 앞에 계시는 메시야 주님)의 의미도 양면성이 있으니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주님 친히 나를 위하시는 것으로 표현,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님을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시기 위해 내 우편에 계신다"(행 2:25) 했고
원래의 시편 16:8은
내가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 나타내어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않으리라" 하였으니
이것이 짝의 법칙의 <양면성의 동시성>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자유>와 <포로됨>의 경계를 분간 못하고 있어.
무조건 죄에게 포로되었다는 마귀의 거짓말에 다시금 놀아나고 있어
"마지막 아담"으로 말미암아 범죄 전 아담의 위치로 복귀되었음에도
그래서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마지막 아담의 위치로 환원돼
범죄 전 아담처럼 악령들을 제압하고 호령하는(약 4:7) 권위자임에도
이를 활용할 줄을 모르니 애석한 일이다ㅡ자기 믿은 대로 되기 때문.
다시 말해 "만물이 다 깨끗하되(정(淨)하되)" 
이 정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자(롬 14;20-23) 즉 정하지 않다고
믿는 자에게는 부정(不淨)한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이 놀라운 사실에 눈뜰 일이다. 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 
실제는 주님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돼 자유인이 됐으나
이를 믿지 않고 여전히 죄에게 포로되어 있다고 믿는 이는
결단코 그 자유를 향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그래서 "믿음이 구원하고"(롬 10:9),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10).

우리의 구원은 새 창조이므로(갈 6;15)
하나님이 약한 자로 창조하실 까닭이 없다. 강한 자로 창조하심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은(요 3:3,5,6) 그 십자가 죽으심으로써
막강한 아담으로서(범죄로 죽은 아담 대신) 높이 오르신 '사람'께서
친히 나와 하나되심을 인하여 내가 그 아담처럼 돼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무슨 약함이 있고 "죄와 사망의 법"이 있을소냐!
이 죽음은 성령 안에서 내 스스로 필요(사람들 구원 위해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우는-골 1:24)에 의해 자청하는 죽음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친히 자청하신 십자가 죽으심 같이.   
이 차이, 이 경계선을 정확히 구분하고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자율과 타율의 판단 기준은 간단하다.
명령하지 않아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단순히 욕구에 충동되어서가 아니라 자기 이지의 명령에 응해)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것과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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