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념으로, 노자의 "3"(삼생만물/三生萬物')의 수수께끼도
마침내 풀려진 것이다. 노자 도덕경 42장에서 1은 수량으로서의 1이 아니라
시원(始原)으로서의 1인 것이며, 2는 짝을 (이룸을) 말하고,
짝을 이룬 둘이 하나됨을 가리켜서는 하나이니까 당연히 1이지마는
始原으로서의 1과 구별이 되지 않으므로 3이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3위(位)다.
고로 노자의 "3생만물(三生萬物)"은 "3위의 이치(3위1체의 법칙 즉 짝의 법칙)가
만물을 구성하는 기본이 된다는 뜻이라 해야 할 것이다.
단지 수량을 표시하는 1, 2, 3이라면 3이 만물을 구성한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
그 다음에 오는 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 中氣以爲和(중기이위화)로써
음과 양 다시 말해 짝의 원리를 가리킴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자도 만물이 짝의 원리로 운영됨을 명백히 한 것이다.
성경 이사야서 34:16 외에도 외경(外經) sirach 33:15,16에
"지존자께서는 피차간 대립되게 만물을 짝으로 만드셨음을 염두에 두라
(Think about it: the Most High has made everything in pairs,
each thing the opposite of something else.)" 했다.
each thing the opposite of something else.)" 했다.
"한 때, 두 때, 반 때"의 비밀도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한 때, 두 때, 반 때"라는 표현은 다니엘에게 나타난 천사가
바로 이 "마지막 때"를 예언하면서 두 번 사용한 것인데(단 7:25/12:7)
오늘의 마지막 때 관련 예언서인 계시록에서(12:14) 다시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이 말한 것이므로 마땅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꼭 이렇게 표현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한 때, 두 때, 반 때"를 숫자대로 말하면, ①1과 ②1x2, 그리고 ③1÷2다.
②와 ③은 성질이 정반대다. ②는 1을 2로 곱하는데, ③은 2로 나눈다.
이렇게 정반대로 나가니까 이 ①, ②, ③은 짝의 원리 도식에서의 ●, ◐, ◑이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이 "한 때, 두 때, 반 때"에 대해 이와는 다른
타당성 있는 해석을 한다면 당연히 이 해석은 취소하겠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특별한 해석이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3년 반"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일부러 "한 때, 두 때, 반 때"로
표시했느냐 하는 것인데, 그 점을 해석해보라는 것이다.
달리 해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21세기에 발맞추어 ●, ◐, ◑의 도식을 가진
짝의 법칙이 세상에 비로소 온전히 밝혀졌다는 것 이외에는.
모두 21세기 "계시"의 결정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 하나님의 계시는 크고 중요한 것이든 잣단 것이든
이전에는 몰랐던 것을 이제는 안다는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3위1체의 법칙과 3운법칙을 "계시"라고 하는 것은
3운법칙이 창조주 하나님을 직통으로 증명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의 한평생을 이같이 일정 규격대로 어김없이 갈라내는 것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면 누가 이렇게 하는가?
창조주 하나님 외에는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는 성경 외에는 없고
성경에서 밝히고 있는 대로의 모든 말씀대로 믿고 따르면 구원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더 핑계대고 빠져 나갈 구멍은 없다.
멸망하는 경우 순전히 개개인의 자업자득이라는 결론이 된다.
오늘날 시대는 앞을 다투어 서로 "계시" 자랑을 하는 미혹의 때이므로
"계시"라는 용어를 쓰는 것조차 도리어 민망해진다. "계시"라 말하든 않든
거기에 구애될 것 없고 오직 성경대로 "자기 목숨까지 미워함",
"십자가 짐", "자기 모든 소유 버림"(눅 14:28-33)으로써 기준을 삼으면,
이를 중시하지 않는 것은 100프로 사이비 이단이니 무조건 젖혀놓고
그 중에서 선별하되 최정원 목사의 경우처럼 왜곡되게 설명하는 것을 다시 걸러내고
우리 앞서 가신 주님의 그 십자가 지심을 따라 가는 십자가 사형수로서의 행보가
아닌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버릴 일이다. 상식에 어긋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사형수가 무슨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 있어 그 소유에 연연하겠는가.
현재의 이 자연계 육체(죽음과 썩음)가 바로 생명 아닌 죽음의 대명사이니까
그래서 이런 죽음의 몸을 가지고 삶, 생명 운운 하는 것 자체가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확고한 증명이므로 떨쳐 버릴 일이다.
인간의 고질적인 자아중심 그대로이냐, 아니면 자기 부인을 강조함이냐
이 기로(岐路)에 서서 다루어보면 모든 진위(眞僞)가 대개 드러나지게 되어 있다.
고로 이 혼란의 시대 아무리 악마의 농간이 극성스러워도
이 간단한 판별법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알고보면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다.
이와 같이 중심을 바로잡고 있으면 그 어떤 격랑과 태풍에도 만세반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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