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0일 수요일

시편 78편 41절의 뜻은 "나를 부인하면 나도 부인할 것"과 같은 의미(삼상 2:30)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심뿐이다(시 139편).
물론 생명의 법칙에서 우리는 하나님만 위하도록 명하신다.
위 구절에서 지적하는 것이 이러한 하나님 손길을 
우리가 감히 막는다는 것ㅡ우리의 자아중심으로써. 
Biblegateway에 보니 우리말 번역처럼 된 영역이
"하나님을 제한한다"는 의미보다 3,4배 더 많으니 압도적이다.
여기서 히브리어 원문을 제대로 이해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번역자들이 이 사랑의 생명의 법칙의 오의
奧義를 알 리 없다.
"격동하시게" 하면 결국 진노밖에 없으니 의미는 단순하지만
하나님을 속수무책이시게 만든다는 것은 심각하고 심오하다.


2022년 3월 21일 월요일

현재의 인간 삶이 철두철미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고 거의 로봇, 허수아비, 꼭두각시 수준이라는 확실한 증거 두 가지

 






이러한 무가치, 무의미, 로봇 수준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으로 다시 나고 새로 창조되는 것 외에는 일절 없어.
인생의 모든 의미와 가치를 오직 여기에만 두어 자유인되는 것만이
영원토록 후회 없고 미련 없는 일일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영원 불행, 고통, 비애만이 한 아름 가득히 안겨질 것.
영원 비극에서 탈출하는 의미이냐, 영원 자유인이 되는 희열을 추구함이냐,
정답은 "어느 것이든 둘 중 하나"가 아니라, 
"이것 없으면 저것 없고 이것 있으면 저것도 있다"는 것. 
DPA pix는 누구나 보고서 확인만 하면 되고,
3운법칙은 초등생이라도 직접 검증만 하면 된다. 








2022년 3월 20일 일요일

2022년 3월 19일 토요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신을 백프로 바치는 자세이니 주는 것이 받음이요 죽음 곧 생명인 생명의 법칙(하나님 계명)

 



"율법도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롬 7:12) 한 것이 바로 이 생명의 법칙을 가리킴인 것.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3:20)(이라 함은
빛이 있음으로써 어두움을 인식한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
그런데도 바벨론 신학은 율법(모세 율법과 구분해야)의 <유일한> 목적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만 가르쳤으니
이런 거짓말을 만든 사탄의 저의가 역력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가장 핵심되는 "회개"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죄 짓도록 만들어 구원되지 못하게 속임입니다.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는 에덴에서의 거짓말과 같은 속성입니다.
"믿어도 헛되이 믿게"(고전 15:2) 한 것입니다. 









2022년 3월 18일 금요일

초대교회는 잘 진행되던 핍박 속의 300년만에 화석화/化石化(세속화)되고 한반도(북한) 교회는 100년 간의 핍박 속에 "마지막 때" 교회의 본이 되다

 






이 북한 교회는 아담/에덴의 초자연계 속성을 몰랐을  수 있습니다.
혹은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을 앙망하는 처지였기에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 알고 모름이 문제가 아니라 
십자가 사랑의 진실을 통해 주님이 전적으로 나를 위하심을 확인하여
나도 전적으로 주님 사랑하여 그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결의가 중요한 것입니다.

항상 변치 않는 그 일편단심이 이상과 같은 훌륭한 간증을 낳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간 것도
단순한 이 사실 하나, 즉 나만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나도 하나님만 위한다는
이 "어린 아이같이 된" 단순한 사랑의 믿음에 있으니 
따라서 아무리 악령들이 숱하고 거친 거짓말을 양산해 내어도
주님 경고하심과 같이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됨"(마 18:3) 을 능가하거나 무너뜨릴 수는 없습니다.
모든 성경 지식은 이러한 사랑의 믿음을 유발해 내기 위한 것이지
지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복음 전파에서 이 아담 관련 진실은 필수입니다. 
인간을 죽는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제대로 성경대로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22년 3월 17일 목요일

현재의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 모습, 그 표정은 사랑의 미소가 아닌 그 정반대(시 7:11/요 3:36)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5,16).
다만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 동시에 작용하는 고로
그 진노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뿐.
이렇게 죽음과 죄 일색이라 저주와 진노 중에 있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찌 하여 "산다"는 것을 꿈 꾸고 염두에 두는지.
삶은 축복 가운데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우셨다"는 기록은 있어도 웃으셨다는 대목은 없어.
"부유한 자는 장차 위로 받을 것이 없다"(눅 6:24) 하시고
"배부른 자는 장차 굶주린다"(:25) 하셨고
"지금 웃는 자는 슬퍼하며 운다"(:25)고 굳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이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
지금까지 이세상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 "진노"(요 3:36).
믿지 않는 자에 한해 임하는 진노가 아니라
이미 온 인류 각인의 정수리에 덮여져 있는 것이니
이런 데에서 무슨 생명의 삶을 상상이나 하리요.











 


영생의 아담이 죄를 지어 죽어 인간 세상이 죄와 죽음의 참혹한 비정상이 되었다는 사실만 알아도 인생을 비로소 제대로 아는 것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은 썩는 육체와 관계된 것일 뿐.
그 해결책을 전연 엉뚱한 데에서 찾아 우스꽝스러워 그렇지
이런 현실을 직시하기로는 불교가 소위 "기독교"보다 나아.
"헛되다"는 것을 알고 세상을 등지고 있는 불승
佛僧들인데 반해
바벨론(계 14:8-18:21) 기독교는 현세적 탐욕으로 가득하니까.
하나님 주신 지혜로 세상사를 궁구한 솔로몬이 "헛되다" 한
결론마저 외면할 정도로까지 세상에 집착해 있으니
개탄, 개탄ㅡ그러고도 "은혜"로 구원이라고 자기 기만에 취해.
이세상이 마귀의 세상이지 아담의 세상이 아니건마는.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기독교"를 "바벨론"이라 한 것.
요한 사도가 이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긴" 이유.
악마가 교회로 분장하고 교회처럼 행세하고 있었기 때문(17:6).
적그리스도 곧 "짐승"이  이 "여자"를 미워한다는 것은
이제는 자기가 "하나님"으로 자처하게 되니까 당연지사. 
이제까지 마음껏 활용하다가 용도 폐기한다는 그 뜻.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18:4).

 
 







2022년 3월 16일 수요일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과 하나님 말씀의 관점, 가치관은 아주 다르니 전자에 매여 있는 한 구원은 불가능

 

세상의 관점과 가치관과 하나님 말씀의 관점, 가치관은 아주 다르니 전자에 매여 있는 한 구원은 불가능

세상은 사탄의 거짓과 속임수에 절여져 있어 
가치 전도
顚倒의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
바벨론 신학은 전자의 관점을 기반으로 세워진 것.
오늘날 이 "바벨론"에서 탈출하라(계 18:4) 명령하시는 것. 







2022년 3월 5일 토요일

짝의 법칙으로 모든 것의 개념 정리부터 하면 성경 진리를 이해하기 훨씬 쉬워진다

 





세상 권력자가 교회를 핍박한다.
그것도 순종해야 할 것인가.
메시야 예수님과 그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그들의 명령은 당연히 불복이다(행 4:19).
그러나 그런 그들의 권력에 항거하지는 말라는 것.
탄압을 하면 거기를 떠나 타지에 가서 복음을 전한다. 초대 예루살렘교회처럼(8:4).
그래서 그 핍박은 광범위한 복읍 전파의 기틀이 된다.
이런 판국인데 세상 한 곳에 정착해 삶을 누리려 하다니?
세상이 교회의 벗(친구)된 적이 없다. 오늘날까지(약 4:4).

바로 이 사실을 명심케 하시는 말씀이 주님의 사전事前 경고다(눅 14:25-33).

이제까지 "교회" 즉 바벨론 신학의 바벨론 교회는 거꾸로 가르쳤다. 사탄의 거짓말 따라.
주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요점은 아담 범죄 후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 사형수라는 것.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면 사형수지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우리까지도 에외가 아니다. 사형수다.
바로 에수님이 보여주신 본이 아니던가.
주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과 똑같다 하셨다(요 20:21).
이런 죽음의 실상과 실체 일색인데도 인간 멋대로 생각해
구원 받았으니 더다시는 죽음이 아니고 생명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덫이 웅크린다.
아담을 처음부터 초자연계 육체로 영생하게 만드신 하나님께는
인간이 이 초자연계 속성의 영광이 몸이 아니면 생명의 산 자로 인정하시지 않는다. 전혀. 
우리도 이 올바른 정확한 관점대로 나가면 그뿐인데
왜 실없이 엉뚱한 생각으로 사탄의 황당한 거짓말에 놀아나느냐, 하는 것이다.
아담이 초래한 죽음을 생명이라고 여기는, 우기는 일체가 다 사탄의 옛부터의 거짓말이다.
사탄의 세상이니 거짓이 진리보다 판치고 득세하고
거의 모두가 이를 따르는 것이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 

진리는 언제나 단순하고 간단명료하다. 
여기
에 거짓말이 섞이니까, 의도적으로 섞어 놓으니까
복잡하고 어렵고 그래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사탄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2022년 3월 3일 목요일

우리 주님께서 사람되시어 죽으심은 단순히 나의 죄 용서하시려 함이 아니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시고자 함이다.
아담이 되시는 필수 요건이,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죄인으로서의 죽음을 
꼭 그 의미대로 죽으심에 있기 때문. 그래야 죽은 아담이 다시 살아남과 같은 의미가 되므로.
또한 아담의 죽음은 우리 모든 인간의 죽음의 시초이였기에
바로 그 맥락에서 나 위한, 내 죄 때문의 죽으심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앞 뒤 순서를 제대로 가려야. 먼저 머리이고 다음이 몸통, 나중에야 다리다.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이 의미는 고전 15:45에만 있지 않다. 
롬 5:12를 비롯해 여러 번 언급하는 성경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여 성경을 읽지 않고
먼저 "사람의 교훈으로 가르친"(마 15:9) 것만 의존해서
그 색안경으로 모두 성경을 읽으니 "하나님을헛되이 예배한다"(:9).

이제 우리애게는 만세반석 아담이 계시는 것이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신데 자연계 몸이 아니신 초자연계 몸, 영광의 몸이시니
이는 애초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바로 그러한 몸으로 살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친히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 몸으로(사람되심으로써 죽어) 다시 살아나신 것뿐이다. 
성경이 이런 몸으로 부활하심에 대해 일언반구라도 설명이 있었던가?
만일 사탄의 거짓말대로 처음부터 이런 육체로 사람을 만드시고 살게 하셨다면
반드시 현재 우리와 같은 몸으로 부활하셔야 마땅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일관성이 없는
경천동지할 일대 사건이 되는 까닭에 반드시 그에 상응한 설명이 필요불가결이다.

그러나 일절 해설이 없다. 이는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이제는 명실 상부한 아담이 되셨다는 의미 외 달리 없기 때문.
바로 이 영광의 몸이 인간 본연의 몸, 아담 범죄로 상실했었던 초자연계 몸이다.
이런 거짓말로 인간을 내쳐 속인 사탄이 악하기보다
이따위 거짓말에 잘도 속아 넘어가 포로된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만이 더 가증스러움을 알아
이제는 모두가 회개해야 하는 것이다. 다시 새 마음으로 주 하나님께 나아가야.

내가 육
으로 출생하여 범죄한 아담(범죄하지 않은 원래의 아담이 아닌)의 육체의 옷을 입었으나
이제 "마지막 아담"의 영(성령)으로 다시 나
성령(성령으로 계신 메시야 아담 또는 성자
聖子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는 성부 하나님)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어느 쪽이냐 할 것은 없다. 주 예수님 셰상에 오신 그대로의 모습이니까.
나도 "마지막 아담"의 모습이 되어 그 하신 일을 본받아 따르면 되는 간단 명료한 일이다.
메시야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모습이시나(요 10:30)
우리와 또한 하나되시기 위해서 죽은 아담의 옷(육체)을 입으셔야 했던 것.
우리 역시 우리가 기도하고 전도해 살려야 할 심령들과 하나되는 이치로써
머리 따라 머리께서 하신 대로 행하는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기 때문.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