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7일 목요일

현재의 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 모습, 그 표정은 사랑의 미소가 아닌 그 정반대(시 7:11/요 3:36)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계 6:15,16).
다만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고후 6:2)이 동시에 작용하는 고로
그 진노를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뿐.
이렇게 죽음과 죄 일색이라 저주와 진노 중에 있는 현실을 알면서도
어찌 하여 "산다"는 것을 꿈 꾸고 염두에 두는지.
삶은 축복 가운데에서나 가능한 것이 아니던가.
때문에 "우셨다"는 기록은 있어도 웃으셨다는 대목은 없어.
"부유한 자는 장차 위로 받을 것이 없다"(눅 6:24) 하시고
"배부른 자는 장차 굶주린다"(:25) 하셨고
"지금 웃는 자는 슬퍼하며 운다"(:25)고 굳이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이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
지금까지 이세상 각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님 "진노"(요 3:36).
믿지 않는 자에 한해 임하는 진노가 아니라
이미 온 인류 각인의 정수리에 덮여져 있는 것이니
이런 데에서 무슨 생명의 삶을 상상이나 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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