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5일 일요일

구원된 자가 죄 지을 수 없는 이유(요일 3.9)

성경의 3위1체는, "무릇 존재하는 것은 짝을 이루어 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실체(실질)와 형체("형상"ㅡ고후 4.4)로서의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 계심에서 연유된 것이고 모름지기 짝은 '하나'(요 10.30)로서만 그 의미가 있다"란 말로써 정확히 정의됩니다. "하나"됨은 또 그 유일무이의 존재 방식이 "상대방중심"에 있는지라 "자아중심"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지가 않는다>로 귀착됩니다.


우리는 나 위해 사람되시어 죽음을 맛 보시고 부활하신 예수 우리 주님과 제각기 "하나" 곧 "한 영"이 됨으로써(성령으로 내 영혼처럼 내 안에 강림하시어 영원히 나와 함께 계심을 인하여) 다시(거듭) 나 새 창조를 받음으로 구원된 것이니 무릇 구원 받았다는 이라면 이제부터는 절대로 자아중심이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즉각 돌이켜 회개해야 하고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이 하나님 중심의 상태를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한 것입니다. 자아중심은 "나는 나 자신의 것"이고 내가 주인이라는 의식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신 것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라는 말일 줄 당연히 예상했는데 의외로 "나를 소유하시기 위함 즉 나란 존재의 소유주가 되시기 위함"이셨다 하니 처음 듣는 말이라 하여 놀랄 사람도 있겠으나 성경은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우리 구원은 주님과 "하나" 곧 "한 영"됨이요 이 "한 영"은 "한 몸"됨과 이치가 똑같아서(고전 7.4) 교차(맞바꿈) 소유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짝으로서의 하나됨의 철칙입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절대 "하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하나"됨에서 비로소 성립이 되어 그제서야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교차 소유이니까 일방적이 아니고 쌍방 교류의 소유이니까 갑은 을의 것, 을은 갑의 소유가 되니 주님께서 나를 소유하심으로써 주님의 전부가 동시에 또한 나의 소유가 됨이라 그 죽으심이 곧 내 죽음 그 부활이 내 부활이 되어 나의 개인적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주님의 영광과 함께 고난도 나의 몫이 되어 새상에서 핍박과 환란의 대상이 되는 이유입니다. 무턱대고 "대신 죽음"이라고 "무조건 구원"이 아니니 맹목적인 바벨론 신학의 미신에서 벗어나야 하는 때입니다. 


2026년 2월 14일 토요일

구원 받음의 증거

사람의 아름다움도 단 한 꺼풀의 피부 차이. 그 한 꺼풀만 벗기면 금방이라도 썩을 수 있다고 위협하며 번들거리는 수분 그 아래에는 백골이 있어 살덩어리를 떠받쳐 주는 역할이라기보다 "허연 뼉다귀 봤지? 너도 시간 지나면 그 꼴이 된다, 알간?" 하며 사뭇 눈을 부라리는 조(쪼)이니 어시호, 슬프다! 썩음과 죽음은 자연계 생물에 국한되니 그것이 그들의 생명 자체이기 때문이다마는 그런데 영혼이 있는 인간이 이런 모양새라니! 모양만 아니라 이 물렁물컹한 육체가 온갖 인간고의 온상이 되어 있으니, 기가 차고 메가 찰 일이 아닌가.


영혼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이 이런 인간의 몸을 "삶을 즐기며 누리라"고 만들어 주실 턱이 없다. 성경대로, 아담 범죄로써 이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동물적 육체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아담을 이같은 몰골이 되게 거짓말로 속여 막되게 군 악령 사탄의 조종 아래 장단 맞추는 비굴한 꼭두각시가 되었으니 이 무슨 변괴냐말이다. 아담 자신이 그 죄로 이렇게 되도록 인간을 말짱 망쳐 놓은 것이다. "아담, 아담" 아담만 들추지만 실상은 아담의 <범죄>가 그 장본이니 "죄"란 마물/魔物 곧 자아중심이 이렇게 재앙을 자초하게 충동질을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자아중심을 부둥켜 안고 도는 "미친 마음"(전도서 9.3)으로 상대방중심의 <낙원/樂園의 삶의 자세>를 매몰차게 멸시할 것인가!

자아중심 때문에 인간이 산 자로서의 신령한 몸을 잃고 이런 죽음과 썩음의 육신을 끌고 다니는 주제에 구원 받았다면서 여전히 자아중심의 행세인가! 구원 받음의 명확한 증거를 성경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소유물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소유주·임자·주인)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로 확실하게 정리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중심, 상대방중심이다. 자아중심의 유일무이의 치유책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부터 자아중심인 사람은 절대로 "구원 받았다"느니 "영생한다"느니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말 것이다. 가장 불행하고 불쌍하고 무서운 것은 자기 기만이다. 바벨론 신학이 바로 이런 자기 기만 즉 사탄의 멸망의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여기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암적 존재다. 성경대로 믿어야지 "신학(성경 이해는 학문으로써가 아니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음이다ㅡ마 11.27/요 14.26) 운운" 하는 자들의 말만 따르니 오늘날 "바벨론 신학"이 양산되고 판을 치고 온통 교회를 쑥대밭이 되게 한 것이다. 

이 "마지막 때" 세계여, 주목하라!

내가 선 하나님 앞 영적 위치를 졍확히 파악해야. 원수 마귀는 호시탐탐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일념으로만 덤비는 자. 우리로 하여금 조금도 방심 못하게 만들어. 전쟁 와중에서의 방심은 결정적 패배를 뜻함.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ㅡ"내 어린 양을 먹이라". 또 두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ㅡ"내 양을 치라".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주님, 모든 것을 아시니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우리의 현 위치는 아담이 대형 사고를 낸 현장 바로 그것. 생명으로부터 죽음으로 직통으로 바로 뗠어진 비극의 현장. "죽은 자"(마 8.22). 고로 산 자부터 되고보는 것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 성령으로 거듭(다시) 남, 새로 창조됨. 내가 그렇게 구원되었으면, 구원되었다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 아님. 산 자로서의 마땅히 할 일은 다른 사람들 역시 당연히 나처럼 살아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나를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일, 그 뜻! 지금 내가 살아 있는 자로서의 살았다는 증거!

삶의 향락이라는 것은 다 함께 동시에 "한 몸"이 되어 누리는 법이니("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스러워지면 모든 지체도 함께 영광스러워짐"ㅡ고전 12.26)한 쪽 팔은 신이 나 있고 다른 팔은 당장 죽을 듯 끙끙 앓는 그런 것이 없어. 또 신이 나 있는 쪽을 따라감이 아니라 앓는 쪽과 동화되어 고통을 함께 나누게 마련.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다 한 가지로 죽음의 고통을 함께 하는 <때>와 <장소>임을 명심하고 일절 다른 생각 말아야. 바로 이 까닭에 현재의 부자들에게 "너희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아버렸으니(눅 6.24/16.25) 앞으로 남은 것은 고통 고민뿐"이라는 저주의 말씀을 하신 것, 정신 차려야.

하나님과 우리 각 사람과의 관계에서 혼자로서의 삶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또 여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공동체로 엮여 있는지라 위에서 말한 "한 몸" 체제/구조로 모든 삶이 영위됨은 너무나 당연. 때문에 우리 모든 피조물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 몸된 우리가 아담 범죄로 죽음에 이르자 우리의 죄인으로서의 죽음(동물성 육체)의 고통에 친히 동참하시어 죄인처럼 사형수로 십자가 처형의 죽음을 당하신 것. 

이 특별한 의미의 죽음의 고통을 그래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 하는 것이며 우리 모두 이러하신 "머리"로서의 주님을 성령으로 우리 안에 모심으로써 구원되었고 또 주님과 "한 영"(고전 6.17)인지라 그 고통을 "우리 몸에 채우게"(골 1.24) 되어 있음은 지당한 일이요 불변의 가치로서의 이치. 이를 "주님의 남은 고난"이라 함은 구원 받을 사람이 아직 남아 있어(잠재적 교회 구성원) 이 "고난"이 사람 살리는(생명을 끼치는) 고난, 우리 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으심의 연장선으로서의 "주님의 남은 고난"이기에. 이 고난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 비싼 것인지 이로써 짐작할 수 있어.

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이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롬 8.17). 따라서 100년에 걸쳐 핍박 받는 북한 땅은 장차 도래할 영광의 천년 제국을 주님과 더불어 주름잡을 현란한 왕후장상들이 배출되는 자리.

덧붙여 이 자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성경에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이유/설명을 전혀 않고 있다는 점. 주님의 재림만 아니라 다른 궁금해질 수밖에 없는 부분도 일절 일부러 설명을 한 듯한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오늘날 21세기 "천사가 가진 복음"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봇물 터지듯 각종 설명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오는 판이니 이야말로 성경이 진실의 기록 곧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 그 확고부동의 증거. 

또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시라는 사실이 성경의 핵심 부분임이 이제 비로소 판명 났건만 이제까지 바울만이 그것도 단 한 번 지적하여 밝혔을 뿐. 성경은 주님께서 아담으로서 오신 사실을 일부러로는 설명 않을 만큼 너무나 정직한 서술이었던 것이니 여기 한 점의 인위적 거짓이 있을 수 없어. 과연 이로써도 "천사의 복음"은 유감 없이 그 진실성과 확실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세계여! 그러므로 이 "천사가 가진 복음"에 주목하라! 마땅히 유의할 것이니 다시 말하니, 주목하라!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악바르의 의문점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구원했다면 왜 다시 와야 하나?"..........
•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의 인간(아담) 창조 경륜에서 아담은 세상을 천년 동안 통치하게 되어 있는데 그 범죄 죽음으로 이것이 불발로 끝나버리자 대신 아담이 되어 계시는 주님 친히 그 역할을 이제는 하시게 되어 있어 그 일을 수행하시고자 함이다. 우리는 "우리 구원" 하나만을 염두에 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관심사가 "만유 회복"(행 3.21)에 있으시므로 아담으로서의 원래 구실을 나타내심이 필수이시기 때문이다.

• "전지전능한 신이 왜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어야 했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위험(인간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동물성 육체의 취약성을 뒤집어쓰는 꼴을 연출하게 되심은 필연이기에.

"왜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적들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아담의 범죄로 그 죄인됨의 성격이 살인자의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이를 그대로 따르시는 갖가지 질고를 감당하셔야 우리 위한 영광의 몸 취득이 가능한 순서를 밟으심이 되므로. 

•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성적으로 납득 못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일신교인 기독교가 세 인격(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이 다신교적 요소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도 보았다. "모순되다"는 뜻...........
•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 2분이시나("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ㅡ요 1.18). 또한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선언하셨다. '둘'이시면서 '하나'이시라 하셨으니까 여기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어야지 엉뚱하게 왜 '셋'이냐 하는 질문이다. 인간 스스로 잘못 짚어 놓고는 웬 성경 탓이냐. 단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라고만 하셨지 하나님 관련해 "셋'이라 하신 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모순될 것도 말것도 없다. 억지로 긁어 부스럼 내지 말라.

• 악바르가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점은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성육신). 그는 신이 인간처럼 자손을 낳는다는 개념을 매우 세속적이고 따라서 신령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신이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신의 거룩함에 과연 적합한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으로서 거룩하시고 만유에 초월해 계심은 우리 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육의 몸"으로 일시 변형되셨다고 영구적으로 손상되는 것이 아니신 것이다. 바울로 개명하기 전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뵈웠던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채로 둘러싸이신) 그대로이신 것이다. 이 "하나님 아들" 개념은 피조물 인간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만물 창조의 기조/基調를 이루심 즉 터를 닦으심과 같은 의미이다. 최근에야 드러났지만 이와 같이 부자/父子간 짝을 이루심이 만유 창조에서의 만유의 법칙의 근원이 되심이었다.

• 그는 "전능한 신이 왜 굳이 인간의 몸을 빌려 고통을 겪어야 (십자가) 하는가?". 삼위일체의 제2위격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악바르의 통치자적 관념에서 이해 불가였다. "온 우주 통치자인 신이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수 있나?" 신은 승리자이자 절대적인 권력자여야 했기에, 고난받는 신의 모습은 악바르가 생각하는 '신성'의 정의와 정면 배치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담의 모습이 되시어 오신 것이다. 그것도 영광의 신령한 몸이었던 때의 모습이 아닌 동물적인 몸의 처참한 몰골로 전락한 모양 그대로. 우리와 똑같이 되셔야 나와 똑같은 모습이시라야 신령한 몸으로서 부활하실 때 바로 그것이 나의 영생하는 실체가 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친히 입증하신 현장이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은 것이다"(이사야 55.8,9). 3위1체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든 의문점들이 "마지막 아담"으로 세상에 사람되어 오셨기 때문이라는 오직 이 한 마디로 깨끗이 정리되어 끝난다. 


2026년 2월 13일 금요일

빛을 찾아 동방으로 말달려 왔던 한반도인들ㅡ이제는 천사의 복음의 빛을 들고 다시 말머리 돌려 서방으로 세계로

무굴(몽골과 비슷한 소리·이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나라 국호) 제국의 영걸 악바르 대제(1542-1605)는 기독교를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철학적·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매우 깊이 있게 대한 특이 인물(악바르는 친가 쪽으로나 외가 쪽으로나 징기스칸의 후예). 예수회 신부들을 3차례나 자신의 궁정으로 초청, 토론을 벌였으며 성경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게 하거나 그리스도 생애 관련 책을 집필하게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 악바르의 열정적이고 이성적인 날카로운 질문에 신부들이 무척 당혹했었다고 한다. 그 자신들도 모르는 내용이니까 그럴 수밖에. 이 몰랐던 진실·진리가 20세기 이후 현재 21세기 한극교회(한극인들)를 통해 세계 만방에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모르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 게재물로 독자들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키는 이유다. 악바르가 신부들에게 던진 질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데 이를 소개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도 여전히 품는 같은 "의문점"들이기 때문.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구원했다면 왜 다시 와야 하나?",
• "전지전능한 신이 왜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어야 했나?
"왜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적들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나?"
•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성적으로 납득 못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일신교인 기독교가 세 인격(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이 다신교적 요소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도 보았다. "모순되다"는 뜻.
• 악바르가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점은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성육신). 그는 신이 인간처럼 자손을 낳는다는 개념을 매우 세속적이고 따라서 신령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신이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신의 거룩함에 과연 적합한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 그는 "전능한 신이 왜 굳이 인간의 몸을 빌려 고통을 겪어야 (십자가) 하는가?". 삼위일체의 제2위격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악바르의 통치자적 관념에서 이해 불가였다. "온 우주 통치자인 신이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수 있나?" 신은 승리자이자 절대적인 권력자여야 했기에, 고난받는 신의 모습은 악바르가 생각하는 '신성'의 정의와 정면 배치되었던 것이다.

신부들의 답변은 이성적이지 않고 덮어놓고 '전통적 권위'만 앞세우는 것이었다. 신부들이 "이것은 신비이며 믿음의 범주"라고 답할 때마다, 악바르는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며 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마땅히 이해되어야 하므로 그런 대답은 논리적이 아니라고 반박·반발했다. 따라서 실망했던 것은 당연. 타 종교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신부들의 교조적 태도는 악바르에게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그 결과 신부들의 교리적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악바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모든 종교의 장점을 합쳤다고 믿은 '디네 일라히'(신의 종교)라는 혼합 종교 즉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악바르가 기독교 교리 중 특히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 "하나님이 셋으로 나뉜다는 개념의 삼위일체. 악바르 대제는 기독교의 도덕성이나 예수의 성품은 높게 평가했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순된 교리"라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3위1체"는 오늘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영원한 숙제, 수수께끼인가? 아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오늘날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등장 이유다. 그러면 이 비밀이 <2천년만에야> 겨우 밝혀졌눈가? 그것도 아니다! 이유는 이미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했기 때문. "3위1체"를 모르고는(의식 않고는) 이런 축도가 나올 턱이 없다. 직언하면 초대교회에 이미 알려져 있던 진실·진리가 사탄의 거짓말의 대세/大勢에 가려져버려 그 존립마저 불투명하게 되어버린 탓. 천사들이 왜 이를 방관하느냐? 그러나, 방치한 것이 아니다.

아담 범죄의 죄얼(범죄로 인한 재앙/징벌)인 관계로써다. 고로 반드시 받아야(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엄연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2천년간 지속되어 "바벨론 신학"의 발판이 되어 와 오늘까지의 혼란상을 빚은 것인데 이제 주님 재림 상황을 맞아 겨우 숨통이 틔어진 것으로, 미가엘의 천사 군단이 실력행사에 들어가 사탄의 세력과의 일대 접전 끝에 승리하면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주신다는 뜻으로 마침내 확정되었음이다. 과연 천사의 승리로 귀착되자(12.7-9) 그 쟁취한 전리품격이 바로 지금 말하는 "바벨론 신학" 척결이라는 결실. 따라서 천사가 한 판 싸움으로 이긴 대가·공로라 하여 "천사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즉 초대교회 당시 알려진 모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바울이 놀라마지않은 것을 보아도 이 참혹한 실태를 넉넉히 알 수 있는 것. 3위1체도 이런 연유로 해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2천년만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뒤늦게 3위1체의 화려 웅장한 정체가 드러나진 것이다. 다름아닌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를 만유의 법칙으로 정하시고 이 기반을 통해 만물 만사를 운행·운영하신다는 사실! 자주 설명하는 도덕경(노자) 42장의"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에서의 "一生二"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게 되는데 "그 첫 시작으로서 독생자 하나님을 만드심/낳으심으로써 짝을 이루셨다"인 것. 하나님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시니 똑같은 하나님이시지 달리 다른 존재이실 수가 없다. 단지 구별은 '파생자'와 "피파생자'의 차이 즉 "짝"이시라는 것. 이런 심오한 진실이 이제서야 이 "천사의 복음"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이제는 3위1체의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는 의미를 상중하/上中下 ·식으로 인식해서는 큰 오류를 범함이 된다. 이유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예수님 자신)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마 12.32)이라 분명히 못박으셨듯이 "성령"께서 "성자"보다 우위이시기 때문. 이 경우 "인자"는 비록 현재도 하나님이심에는 불변이시나 사람되신 측면을 강조하셨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성령은 <성부와 하나되신> 성자를 가리키심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령으로 계시나 육체를 지니심으로써 사람이신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처음부터 "하나"(요 10.30)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과는 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3운법칙을 학문으로?

 운법칙은 지금까지의 그 내용으로도 충분히 판단되겠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길흉화복의 점괘 같은 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애를 분석해 보면 더 많은 새로운 사실이 분출돼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흥미 위주로 생애 분석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해서 이 정도로만 알아두고 있지만 그래서 혹 관심을 가질 이들을 위해 fashomology (fas: divine law; homo: Homo sapiens; 신인학)라는 새 분야를 열어 두기는 했습니다.















"경이로움" 그 자체인 3운법칙

요셉의 생애가 유일하게 그 유소년기까지 밝혀져 있어 JP를 설명한다고 했거니와 만일 그런 요셉의 일대기가 성경에 없었다면 JP로 말미암아 생긴 차질(JP가 없는 FS형 생애는 풀려졌더라도 JP를 대동하는 OT, SN형은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았을 터이므로)을 섦명, 해결 못해 3운법칙은 세상에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택동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JP 딱 둘만 분석했고 그래서 그 확실성을 확인했을 뿐 나머지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분석해보나 마나 틀림 없을 것이기에. 아브라함의 생애가 대표적 FS형으로 판명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무작정 믿음 하나로 자기 고향 땅을 버리고 말 그대로의 믿음의 행각을 처음 시작할 바로 그 시점이 그 생애의 LP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노아대홍수 때 유일하게 그 가족만 함께 살아남았을 때이고 모세는 그 생애가 40년 단위로 3등분됨을 보고 흥미를 느껴 다른 생애도 살펴보는 와중에 3운법칙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뒤엎는 발견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절대 아니고 그렇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나왔다는 것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FS형을 아브라함혈, OT형을 모세형,  SN형을 노아형이라고도 합니다. 영문으로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FS는 four-sevenths(4/7), OT는 one-third(1/3), SN은 seven-nineteenths(7/19)의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역사적 인물의 생애 분석(비록 소수에 불과하여 방대하진 않으나)에서 특이점을 지닌 생애라고 지목할 수 있기로는 불교계의 선승 이효봉(1888-1966), 임진란 당시 도원수 권율(1566-1628,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을 떨친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 영국 웨일즈의 통칭 "웨일즈 부흥"(실상은 사이비)의 중심 인물이라는 에반 로버츠(Evan Roberts, 1878-1951)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우리의 상식 수준을 따라 그 활동에 맞추어 LP,  DP가 가려지는데 반해 이들의 경우는 색다릅니다. 먼저 불교 선사 효봉은 일제 강점기 판사로 재직했으나 한 사건의 판결에서 사형 언도를 내린 후 그것이 발단되어 깊은 인생 고뇌에 빠져 급기야 법복(남들은 대단한 성공으로 흠모하는)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 던지고 한 2년간 엿장수로 전전하다가 얼마 안되어 삭발하고 산문에 들어가는데 그 활동기(LP)가 판사 임용 때도 아니고 승려가 되는 때도 아니고 판사직을 내어던지고 엿장수 노릇할 그 방랑 시점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그렇게 맞춰지니까. 그리고 제니 린드의 경우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에게 명성과 돈방석(그래서 구제 활동도 많이 했지만)을 안겨 준 유럽 전역 성공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화려한 무대를 아무 미련 없이 툴툴 털어버리고 평범한 생활을 할 때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가 놀랍게도 그의 LP인 것입니다. 역시 그렇게 LP, DP가 계산되어져 나오니까.

권율의 경우 또 나름대로의 분명한 특성이 있습니다.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얼마든 과거 급제로 출세할 수 있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지만 40대가 되기까지 벼슬길에 오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때문에 필자는 권율만큼은 도무지 생애 분석이 안되는 유일한 예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운법칙이 엄연한 인간 생애 관할의 하나님 법칙이라는 확신이기에 이유가 필시 있을 것이라 보고 고심하던 중(임란 당시 그의 혁혁한 공훈을 고려할 때) 문득 생각이 들기를 언제부터 벼슬 길의 과거 시험에 응시할 결심을 했는지 그 때가 그의 LP의 시작일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상황이 수군은 이순신 지휘 아래 건재했으나 육군은 전혀 그렇지 않아 관군을 통솔할(충주 탄금대 신립 전사 이후로) 채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주성 대첩 당시의 권율의 지위가 겨우 현감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에 전혀 흥미가 없던 권율이 언제부터 과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지 그것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현감 자리라도 차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 "행주 싸움의 권율"이란 명성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랴서 더 자세히 문헌을 살펴보니 과연! 그 부친의 한 마디에 아들이 결단하는 순간이 마침내 온 내용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때를 찾아 LP를 맞추어 보니 드디어 문제의 실마리가 예상대로 정확히 풀린 것입니다. 여축없이 계산되어져 나온 것입니다. 과연 3운법칙이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웬만큼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에반 로버츠란 인물 관련입니다. 지금도 그의 오도/誤導된 "명성"은 대단합니다. "오도되었다"는 것은 그와 관련지어 말할 때 모두가 "성령, 운운" 하는데, 천천만만의 말씀. 사이비임을 명백히 단언합니다. 세계 기독교계가 얼마나 "배도/背道"(살후 2.3)가 되어 있는지 그 증거라는 판단입니다. 마귀가 하는 짓거리를 분간 못하고 감히 하나님과 관련 짓다니! 그 거짓됨(사이비)을 이 에반 로보츠의 생애 도표로도 충분히 판명낰다는 뜻입니다. 그가 주도한 집회에서 나타난 영적 현상은 초능력에 속해 인위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으나 악령들도 얼마든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집회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그가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의사의 권유로 그 후 일절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사이비성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역사"를 신경쇠약과 감히 연관시키다니! 차마 말이라도 꺼내지 못할 일입니다. 오직 할 수 있는 말은 처음부터 악령에 사로잡혀 그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는 결론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그 결과가 그러했다"라는 말이라면 더욱 더한 모독죄가 됩니다. 에반 로버츠를 통해 사탄은 오늘날 각종 방언이나 기타 능력 행함들이 겉으로는 미심쩍은 행동으로 과거 같으면 일단 의심할 것도 웬만 하면 "성령 운동"으로 가볍게 취급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진 셈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오늘날 이른바 "교회"가 영적 감각이 마비되었는지 실로 놀랍고 끔찍스럽다 할 것입니다. 











구원된 자가 죄 지을 수 없는 이유(요일 3.9)

성경의 3위1체는, "무릇 존재하는 것은 짝을 이루어 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실체(실질)와 형체("형상"ㅡ고후 4.4)로서의 성부와 성자 하나님으로 계심에서 연유된 것이고 모름지기 짝은 '하나'(요 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