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4일 수요일

바벨론 신학의 치명적 함정ㅡ로마서 7장 (중복 게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다"(요 14.12). 주님께서 죽은 사람 살리셨듯이 베드로나 바울 역시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큰 것도 한다" 하셨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교회사에 드러나진 바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 오실 때가 되었지만 "이보다 큰 것"이 아직 알려진 것이 없으니 대관절 무엇일까. 영영 나타나지 않을 것을 그렇게 말씀하실 리 없는데 그게 무엇일까?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알려 하나님 살아계심을 확실히 드러내는 일일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그 첫째이고, 그 둘째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그렇게 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어 있음을 밝히심이니 다시 말하면 "내가 모든 믿는 자에게 성령으로 임하게 될 것인즉 이보다 큰 일이라 하는 것도 내가 직접 관여함이기에 가능하다"는 뜻으로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 친히 나타내시는 것으로서 "이보다 큰 것"이 무엇이냐 할 때 오늘날 "21세기 표적과 기사"라고 할 3운법칙과 이에 수반되는 "3위1합(종전의 '3위1체')"이라 단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재 중의 천재라도 이런 일련의 것을 스스로 생각해낼 인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관여하시지 않는 한에는.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요 3.27) 한 세례요한의 대답 그대로입니다. 사람의 죽는 때를 정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이유, 그리고 그렇게 정하신 때까지 이 모두가 밝혀지기로는 인류사상 전무후무의 일로서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하켔습니다. 이보다 하나님의 존재를 더 잘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아주 정통으로 쐐기를 박아 증명하듯 드러내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애를 그 명암/明暗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름질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이제 모든 인간은 그림을 들여다보듯 구경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실 때 그 보내신 증거가 필요했듯 오늘날 온 세상이 마귀의 바벨론 신학에 들떠 있어 빈사지경에 있는데 유일하게 경고를 울릴 목소리에 하나님의 인장/印章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3운법칙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 21세기를 겨냥한 2,500년 전 예언으로서의 다니엘서 7.25/12.7, "한 때, 두 때, 반 때"입니다. 이는 정확히 "3위1합"의 도식/圖式으로서 3운법칙의 모양새 그 자체입니다. 21세기에 와서야 정확히 나타날 2천5백년간 묵혀 온 수수께끼였으나, 이제 천사의 복음시대에 드러나진 것입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 1.21). 명심합시다. 우리 구원은 <죽음에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동물성 육체에서 신령한 몸 되는 게 구원이 아닙니다.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이를 백 번 강조해도 좋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죽음이 왔으며 썩는 육체가 된 것입니다(롬 5.12). 범죄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는 천사와 같은 신령한 몸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해 죄가 왔고 죄의 결과가 썩음입니다. "영적 죽음"이란 말은 사탄 신학의 대표적 신학용어이니 입 밖에도 내지 맙시다. 그리고 그 대표적 교회 농간이 어거스틴, 루터, 깔벵 등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개신교 교리의 바탕에 깔려 있는 바 곧 "롬 7:24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평생 갈등"이라는 <지옥불에서 나오는> 사악한 주장 즉 "바벨론 신학"입니다. 이와 같이 사탄의 신학이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번창하여 어거스틴, 루터, 깔벵처럼 "교회"를 장악할 것을 아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는 엄중 경고를 내리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엄마의 사랑을 이해하는 본성 그대로의 하나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거기에 어떤 "신학"도 갖다붙이지 않으면 됩니다. 

이런 사탄을 왜 하나님이 처치하지 않으시느냐 하는데, 아담의 통치권 행사 차원에서 저지르는 짓거리라 다시 말해 아담 스스로 자기 통치권을 사탄에게 "넘겨준"(눅 4.6) 것이기에 아담 범죄의 보응 차원이기에,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는 천사들도 손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입니다. 이 때 만일 이런 사탄의 짓거리를 제재한다면 그것은 아담의 죄 자체를 유야무야로 돌리는 것과 같은 절대로 용납 못할 일이 됩니다. 고로 이같은 모든 인간고/人間苦의 직간접 원인이 되는 썩음과 죽음의 동물성 육체와 더불어 이 사악한 사탄의 횡포와 만행을 우리는 견디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 특별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이같은 흙의 인간으로 살도록 만드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름지기 전도인은 이 사실부터 알려야 합니다. 초대교회 전도 방식이 그러했습니다. 즉 죄에서의 구원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죄를 지어 그 때문에 신령한 영광의 몸을 상실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계시니 그러므로 "(죄를) 회개하라"(행 17.30)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영생하라"가 아닙니다. 바벨론 신학은 전도부터 틀린 것입니다. 

구원은 <죄에서의 해방>이지 죽음으로부터서의 해방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당치도 않은 사탄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기에 오늘날 그 명백한 증거가 어거스틴, 루터, 깔벵 등의 신학에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복음과는 180도 반대입니다. 이제 겨우 글 맛을 알아 글을 읽을 줄 아는 초입에 들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유치원생만도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가, 로마서 7장과 8장도 구분 못하기 때문입니다. 롬 7.24 및 25까지는 구원 받지 못한 상태, 8장부터가 구원된 상태입니다. 그렇게 갈라놓았는데도 난데없이 롬 7.24,25가 그리스도인의 체험이라고? 어거스틴, 루터, 깔벵이 그렇게 주장했다는 이유로? 개신교 모든 교파가 그렇게 믿는다는 이유로?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는 일절 아무 관련도 없어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는 일종의 간투사(interjection)일 뿐입니다. 간투사가 뭔지, 국문 영문을 통해 다 한 번 읽어보세요! 해도해도 너무하다는 말이 여기 적용됩니다.

"죄에서의" 해방"이 우리 구원이니까 "구원 받았다"면서도 사탄처럼 자아중심이 되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지요? 당연히 멸망입니다. 원천무효이니까!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항상 복종함으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한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새로이 다시 창조된 것이니까 새로 다시 출발함으로써 아담이나 기타 악령들처럼 죄짓지 않고 거룩한 천사들처럼 의와 성결을 지켜 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망동 밖에 없으니까! "항상 복종하라"는 것은 교회의 각종 요구에 순응하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계명",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요 13.34/14.23)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마 7.21) 하심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신 것을 아니하면 되는 것이고 하라고 하신 대로 하면 됩니다. 아담은 하지 말라 하셨음에도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본을 보이신 대로 교차 소유의 교차 삶이 주님 뜻이니 내게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 말에나 일에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 이름으로 하고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소유)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7~9) 한 그대로입니다. 주님은 내가 그 소유주 그래서 "나는 섬기는 자로서 너희 중에 있다"(눅 22.27) 하신 것입니다. 나의 구원은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주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된 까닭. 이 세상에서 내가 고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것으로 삼아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골 1.24) 때문. 이것이 굉장한 영광이기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관심사)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한 바로 그대로입니다. 이 허깨비 그림자와 같은 세상 삶(실제는 삶도 아니지만)에서의 고난이 초래시키는 반대급부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의 의미는 "주님의 남으신" 고난이시기에 <사람 살리시는> 차원에서의 생명에 속한 것이라 그 보람으로 말하면 실로 또 엄청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점에서 흥분을 금치 못합니다. 

로마서의 바울 사도 복음 강해 요점은 "죄의 몸"(6.6)척결입니다. 7장에서의 통절한 탄식은(24절) 이 죄의 몸에서 오는 것이며, 반면 이 "죄의 몸" 처치하는 것 또한 너무 간단하니, 바로 6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유의해야 하는 것온, "우리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이 멸하였다>" 했듯이 지금까지 보편적으로 "대신 죽으심"으로 알려진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함께 죽으심", "함께 십자가에 못 박4히심"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이냐 하면 예수님 친히 영으로 내 안에 오심인 것입니다. 그 햭심은 <성령을 바로 이해함>에 있습니다. 즉 성령이 누구이신가? 바르, "성령으로 계시는" 예수님 자신이신 것입니다. 

원래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 로 존재하십니다. 사람이 되시기 위해 친히 여자(마리아)의 태에 들어가시던 순간부터 30세쯤 세례 받으신 그 시각까지만 제외하고는. 독생자 하나님의 영으로 마리아 잉태 당시 움직이셨으니까 멱시 "성령"이셨습니다. "성령"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말 그대로 "거룩하신 영" 즉 하나님의 영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임하신 성령께서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영이셨던 것밉니다.  즉 그 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께서는 다시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 시각까지는 약 30년간 단 한 번 따로 떨어져 계셨던 셈입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한도 내에서의 "하나"되심으로 판단하면 그렇다는 뜻이고 그 이상은 우리가 모릅니다. 주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물론 "하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영" (요 4.24)이시니 인간으로서의 육체 안에만 계심이 아니라 광대무변의 우주에 꽉 차 계시고 또한 그 만유 위에 계시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왜 <대신 죽으심>이 아니고 "함께 죽으심"인지 이제는 확실히 이해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 주님은 <육체로 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 없이> 내 안에 성령으로 친히 계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문자 그대로 나와 "한 영으로 합해"(고전 6.17) 현재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으로 나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후 바르 그대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한 영"으로 "합하셨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멊지요. 그러니까 본디로 돌아가, 죄의 몸(이 "죄의 몸"은 아담 범죄로 모든 인간이 빛과 영광의 신령한 몸을 잃고 동물성 육체가 되자 자동적으로 자기 중심의 동물적 본능이 발동되는 당연한 순서 따라 나타나는 생래적인 것)으로 인한 영적 갈등(롬 7.24,25)이 로마서 7장의 현장인데 이러한 동물성 육체는 죽음 하나로써 당장 끝나는 아주 간단한 것이 그 처치법입니다. 썩는 물질의 육체는 죽음 하나로 순식간에 종료됩니다. 피조물 인간에 대한 무한대의 사랑으로 그에 수반되는 무한한 죽음의 고통을 견뎌 이겨내신 것이 우리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가닥은 너무나 쉽게 아니, 너무 싱겁게 끝나지 않았나요! 죽음으로 한 순간에 종지부를 찍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의 나 위하신 은혜와 사랑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오늘날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로! 

7장 끝절까지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가 8장에 와 그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이 까닭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이제는 사탄의 헛된 장단에 놀아나지 마세요. 시간이 아깝습니다. 결론은 14장으로 정확히 그리고 말끔하게 맺어집니다.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임자, 소유주)가 되려 하심이다".  다시 말해 우리 구원의 결과물, 목적, 의미, 모든 것입니다. 롬 7.24 관련해 "전통적 신자 갈등설(루터·칼빈 입장), 운운" 따위는 아주 입 싹 닫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적해 온 바벨론(신학)이 일부 교파나 교단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개신교) 자체가 완전히 여기에 함몰되어 있습니다. 방금도 지적했지만 어떤 것이 그리스도인인지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것뿐입니다. 바벨론 신학을 믿는 것입니다. 때문에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상태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놓고 오늘날까지 논쟁이랍시고 판을 벌이고 있는 한심한 실정입니다. 각자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하라고 강력 권고하는 이유입니다. 

설교자든 신학자든 사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 2.30). 참고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안됩니다. 왜 안되느냐, 가장 가까우시고 가장 권위가 있으신 분이 오늘날 그 누구에게든 그 어디에든 언제 어느 때든 바로 옆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성령으로 계시는 것을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신 까닭입니다. 오늘날 지혜 있는 자에게 "숨기시는" (마 11.25) 것은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신 그대로 하시는 것뿐입니다.


3운법칙 검증은 초등생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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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증거·증명"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바벨론 탈퇴"(계 18.4)와 "천사의 복음"(14.6)에 모두 주목하시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길, 구원의 길에 왕도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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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13일 화요일

육하원칙(5Ws1H)에 의한 3운법칙


 



오늘날 세상 되어 가는 추이 다시 말해 
아담 범죄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거동을 보니 적그리스도는 
소위 "외계인/외계문명"이란 것과 
결부시켜 등장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입니다. 
성경이 이 시탄의 짓거리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살후 2.9~10)
이라 설명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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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운법칙ㅡ21세기 들어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 증거/증명"







 

바벨론 신학의 치명적 함정ㅡ로마서 7장 (중복 게재)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다"(요 14.12). 주님께서 죽은 사람 살리셨듯이 베드로나 바울 역시 죽은 자를 살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