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4일 토요일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악바르의 의문점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구원했다면 왜 다시 와야 하나?"..........
•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의 인간(아담) 창조 경륜에서 아담은 세상을 천년 동안 통치하게 되어 있는데 그 범죄 죽음으로 이것이 불발로 끝나버리자 대신 아담이 되어 계시는 주님 친히 그 역할을 이제는 하시게 되어 있어 그 일을 수행하시고자 함이다. 우리는 "우리 구원" 하나만을 염두에 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관심사가 "만유 회복"(행 3.21)에 있으시므로 아담으로서의 원래 구실을 나타내심이 필수이시기 때문이다.

• "전지전능한 신이 왜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어야 했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위험(인간고)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동물성 육체의 취약성을 뒤집어쓰는 꼴을 연출하게 되심은 필연이기에.

"왜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적들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아담의 범죄로 그 죄인됨의 성격이 살인자의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기에 이를 그대로 따르시는 갖가지 질고를 감당하셔야 우리 위한 영광의 몸 취득이 가능한 순서를 밟으심이 되므로. 

•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성적으로 납득 못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일신교인 기독교가 세 인격(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이 다신교적 요소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도 보았다. "모순되다"는 뜻...........
•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 2분이시나("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ㅡ요 1.18). 또한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선언하셨다. '둘'이시면서 '하나'이시라 하셨으니까 여기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았어야지 엉뚱하게 왜 '셋'이냐 하는 질문이다. 인간 스스로 잘못 짚어 놓고는 웬 성경 탓이냐. 단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라고만 하셨지 하나님 관련해 "셋'이라 하신 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모순될 것도 말것도 없다. 억지로 긁어 부스럼 내지 말라.

• 악바르가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점은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성육신). 그는 신이 인간처럼 자손을 낳는다는 개념을 매우 세속적이고 따라서 신령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신이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신의 거룩함에 과연 적합한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으로서 거룩하시고 만유에 초월해 계심은 우리 위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육의 몸"으로 일시 변형되셨다고 영구적으로 손상되는 것이 아니신 것이다. 바울로 개명하기 전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 뵈웠던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정오의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채로 둘러싸이신) 그대로이신 것이다. 이 "하나님 아들" 개념은 피조물 인간의 그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만물 창조의 기조/基調를 이루심 즉 터를 닦으심과 같은 의미이다. 최근에야 드러났지만 이와 같이 부자/父子간 짝을 이루심이 만유 창조에서의 만유의 법칙의 근원이 되심이었다.

• 그는 "전능한 신이 왜 굳이 인간의 몸을 빌려 고통을 겪어야 (십자가) 하는가?". 삼위일체의 제2위격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악바르의 통치자적 관념에서 이해 불가였다. "온 우주 통치자인 신이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수 있나?" 신은 승리자이자 절대적인 권력자여야 했기에, 고난받는 신의 모습은 악바르가 생각하는 '신성'의 정의와 정면 배치되었던 것이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아담의 모습이 되시어 오신 것이다. 그것도 영광의 신령한 몸이었던 때의 모습이 아닌 동물적인 몸의 처참한 몰골로 전락한 모양 그대로. 우리와 똑같이 되셔야 나와 똑같은 모습이시라야 신령한 몸으로서 부활하실 때 바로 그것이 나의 영생하는 실체가 될 수 있음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친히 입증하신 현장이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은 것이다"(이사야 55.8,9). 3위1체 부분만 제외하고는 모든 의문점들이 "마지막 아담"으로 세상에 사람되어 오셨기 때문이라는 오직 이 한 마디로 깨끗이 정리되어 끝난다. 


2026년 2월 13일 금요일

빛을 찾아 동방으로 말달려 왔던 한반도인들ㅡ이제는 천사의 복음의 빛을 들고 다시 말머리 돌려 서방으로 세계로

무굴(몽골과 비슷한 소리·이름이라 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나라 국호) 제국의 영걸 악바르 대제(1542-1605)는 기독교를 단순한 호기심 차원을 넘어 철학적·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매우 깊이 있게 대한 특이 인물(악바르는 친가 쪽으로나 외가 쪽으로나 징기스칸의 후예). 예수회 신부들을 3차례나 자신의 궁정으로 초청, 토론을 벌였으며 성경을 페르시아어로 번역하게 하거나 그리스도 생애 관련 책을 집필하게 명령하기도 했을 정도. 악바르의 열정적이고 이성적인 날카로운 질문에 신부들이 무척 당혹했었다고 한다. 그 자신들도 모르는 내용이니까 그럴 수밖에. 이 몰랐던 진실·진리가 20세기 이후 현재 21세기 한극교회(한극인들)를 통해 세계 만방에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모르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이 게재물로 독자들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키는 이유다. 악바르가 신부들에게 던진 질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은데 이를 소개하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도 여전히 품는 같은 "의문점"들이기 때문.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구원했다면 왜 다시 와야 하나?",
• "전지전능한 신이 왜 한 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난을 겪어야 했나?
"왜 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와 적들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음을 맞아야 했나?"
• "어떻게 하나님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셋일 수 있나?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개념을 이성적으로 납득 못하면 기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했다. 일신교인 기독교가 세 인격(성부, 성자, 성령)을 말하는 것이 다신교적 요소로 흐를 위험이 있다고도 보았다. "모순되다"는 뜻.
• 악바르가 가장 당혹스러워 했던 점은 "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성육신). 그는 신이 인간처럼 자손을 낳는다는 개념을 매우 세속적이고 따라서 신령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신이 인간의 태에서 태어난다는 것이 신의 거룩함에 과연 적합한가?" 신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되지 않았다.
• 그는 "전능한 신이 왜 굳이 인간의 몸을 빌려 고통을 겪어야 (십자가) 하는가?". 삼위일체의 제2위격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악바르의 통치자적 관념에서 이해 불가였다. "온 우주 통치자인 신이 어떻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붙잡혀 처형당할 수 있나?" 신은 승리자이자 절대적인 권력자여야 했기에, 고난받는 신의 모습은 악바르가 생각하는 '신성'의 정의와 정면 배치되었던 것이다.

신부들의 답변은 이성적이지 않고 덮어놓고 '전통적 권위'만 앞세우는 것이었다. 신부들이 "이것은 신비이며 믿음의 범주"라고 답할 때마다, 악바르는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하며 종교는 인간의 이성으로 마땅히 이해되어야 하므로 그런 대답은 논리적이 아니라고 반박·반발했다. 따라서 실망했던 것은 당연. 타 종교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신부들의 교조적 태도는 악바르에게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리는 요인이었다. 그 결과 신부들의 교리적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악바르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 모든 종교의 장점을 합쳤다고 믿은 '디네 일라히'(신의 종교)라는 혼합 종교 즉 자신만의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악바르가 기독교 교리 중 특히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 "하나님이 셋으로 나뉜다는 개념의 삼위일체. 악바르 대제는 기독교의 도덕성이나 예수의 성품은 높게 평가했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순된 교리"라고 단정지었던 것이다.

"3위1체"는 오늘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영원한 숙제, 수수께끼인가? 아니다! 이에 대한 해답이 오늘날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의 등장 이유다. 그러면 이 비밀이 <2천년만에야> 겨우 밝혀졌눈가? 그것도 아니다! 이유는 이미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했기 때문. "3위1체"를 모르고는(의식 않고는) 이런 축도가 나올 턱이 없다. 직언하면 초대교회에 이미 알려져 있던 진실·진리가 사탄의 거짓말의 대세/大勢에 가려져버려 그 존립마저 불투명하게 되어버린 탓. 천사들이 왜 이를 방관하느냐? 그러나, 방치한 것이 아니다.

아담 범죄의 죄얼(범죄로 인한 재앙/징벌)인 관계로써다. 고로 반드시 받아야(당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엄연하신 뜻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2천년간 지속되어 "바벨론 신학"의 발판이 되어 와 오늘까지의 혼란상을 빚은 것인데 이제 주님 재림 상황을 맞아 겨우 숨통이 틔어진 것으로, 미가엘의 천사 군단이 실력행사에 들어가 사탄의 세력과의 일대 접전 끝에 승리하면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주신다는 뜻으로 마침내 확정되었음이다. 과연 천사의 승리로 귀착되자(12.7-9) 그 쟁취한 전리품격이 바로 지금 말하는 "바벨론 신학" 척결이라는 결실. 따라서 천사가 한 판 싸움으로 이긴 대가·공로라 하여 "천사의 복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런즉 초대교회 당시 알려진 모든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신속히 떠나 다른 복음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긴다"(갈 1.6)고 바울이 놀라마지않은 것을 보아도 이 참혹한 실태를 넉넉히 알 수 있는 것. 3위1체도 이런 연유로 해서 빛을 보지 못하다가 드디어 "2천년만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뒤늦게 3위1체의 화려 웅장한 정체가 드러나진 것이다. 다름아닌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을 따라 이를 만유의 법칙으로 정하시고 이 기반을 통해 만물 만사를 운행·운영하신다는 사실! 자주 설명하는 도덕경(노자) 42장의"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에서의 "一生二"의 의미이다. 즉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게 되는데 "그 첫 시작으로서 독생자 하나님을 만드심/낳으심으로써 짝을 이루셨다"인 것. 하나님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만드시니 똑같은 하나님이시지 달리 다른 존재이실 수가 없다. 단지 구별은 '파생자'와 "피파생자'의 차이 즉 "짝"이시라는 것. 이런 심오한 진실이 이제서야 이 "천사의 복음"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이제는 3위1체의 모든 진실을 알았으니 따라서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마 28.19)이라는 의미를 상중하/上中下 ·식으로 인식해서는 큰 오류를 범함이 된다. 이유는, "누구든지 말로 인자(예수님 자신)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것"(마 12.32)이라 분명히 못박으셨듯이 "성령"께서 "성자"보다 우위이시기 때문. 이 경우 "인자"는 비록 현재도 하나님이심에는 불변이시나 사람되신 측면을 강조하셨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성령은 <성부와 하나되신> 성자를 가리키심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성령으로 계시나 육체를 지니심으로써 사람이신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과 처음부터 "하나"(요 10.30)로 계시는 성자 하나님과는 격이 전혀 다른 것이다.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3운법칙을 학문으로?

 운법칙은 지금까지의 그 내용으로도 충분히 판단되겠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소위 길흉화복의 점괘 같은 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생애를 분석해 보면 더 많은 새로운 사실이 분출돼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흥미 위주로 생애 분석에만 매달릴 수도 없고 해서 이 정도로만 알아두고 있지만 그래서 혹 관심을 가질 이들을 위해 fashomology (fas: divine law; homo: Homo sapiens; 신인학)라는 새 분야를 열어 두기는 했습니다.















"경이로움" 그 자체인 3운법칙

요셉의 생애가 유일하게 그 유소년기까지 밝혀져 있어 JP를 설명한다고 했거니와 만일 그런 요셉의 일대기가 성경에 없었다면 JP로 말미암아 생긴 차질(JP가 없는 FS형 생애는 풀려졌더라도 JP를 대동하는 OT, SN형은 끝내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았을 터이므로)을 섦명, 해결 못해 3운법칙은 세상에 영원히 알려지지 않았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택동과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JP 딱 둘만 분석했고 그래서 그 확실성을 확인했을 뿐 나머지는 손대지 않았습니다. 분석해보나 마나 틀림 없을 것이기에. 아브라함의 생애가 대표적 FS형으로 판명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무작정 믿음 하나로 자기 고향 땅을 버리고 말 그대로의 믿음의 행각을 처음 시작할 바로 그 시점이 그 생애의 LP의 시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아는 노아대홍수 때 유일하게 그 가족만 함께 살아남았을 때이고 모세는 그 생애가 40년 단위로 3등분됨을 보고 흥미를 느껴 다른 생애도 살펴보는 와중에 3운법칙이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을 뒤엎는 발견이 우연히 이루어진 것은 절대 아니고 그렇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나왔다는 것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FS형을 아브라함혈, OT형을 모세형,  SN형을 노아형이라고도 합니다. 영문으로 그렇게 부르는 이유는 FS는 four-sevenths(4/7), OT는 one-third(1/3), SN은 seven-nineteenths(7/19)의 약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필자의 역사적 인물의 생애 분석(비록 소수에 불과하여 방대하진 않으나)에서 특이점을 지닌 생애라고 지목할 수 있기로는 불교계의 선승 이효봉(1888-1966), 임진란 당시 도원수 권율(1566-1628,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을 떨친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 영국 웨일즈의 통칭 "웨일즈 부흥"(실상은 사이비)의 중심 인물이라는 에반 로버츠(Evan Roberts, 1878-1951)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우리의 상식 수준을 따라 그 활동에 맞추어 LP,  DP가 가려지는데 반해 이들의 경우는 색다릅니다. 먼저 불교 선사 효봉은 일제 강점기 판사로 재직했으나 한 사건의 판결에서 사형 언도를 내린 후 그것이 발단되어 깊은 인생 고뇌에 빠져 급기야 법복(남들은 대단한 성공으로 흠모하는)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 던지고 한 2년간 엿장수로 전전하다가 얼마 안되어 삭발하고 산문에 들어가는데 그 활동기(LP)가 판사 임용 때도 아니고 승려가 되는 때도 아니고 판사직을 내어던지고 엿장수 노릇할 그 방랑 시점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그렇게 맞춰지니까. 그리고 제니 린드의 경우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자신에게 명성과 돈방석(그래서 구제 활동도 많이 했지만)을 안겨 준 유럽 전역 성공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화려한 무대를 아무 미련 없이 툴툴 털어버리고 평범한 생활을 할 때부터 세상을 뜰 때까지가 놀랍게도 그의 LP인 것입니다. 역시 그렇게 LP, DP가 계산되어져 나오니까.

권율의 경우 또 나름대로의 분명한 특성이 있습니다.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얼마든 과거 급제로 출세할 수 있는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었지만 40대가 되기까지 벼슬길에 오를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때문에 필자는 권율만큼은 도무지 생애 분석이 안되는 유일한 예외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3운법칙이 엄연한 인간 생애 관할의 하나님 법칙이라는 확신이기에 이유가 필시 있을 것이라 보고 고심하던 중(임란 당시 그의 혁혁한 공훈을 고려할 때) 문득 생각이 들기를 언제부터 벼슬 길의 과거 시험에 응시할 결심을 했는지 그 때가 그의 LP의 시작일 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당시 상황이 수군은 이순신 지휘 아래 건재했으나 육군은 전혀 그렇지 않아 관군을 통솔할(충주 탄금대 신립 전사 이후로) 채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행주성 대첩 당시의 권율의 지위가 겨우 현감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관직에 전혀 흥미가 없던 권율이 언제부터 과거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는지 그것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현감 자리라도 차지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에 "행주 싸움의 권율"이란 명성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기에. 그랴서 더 자세히 문헌을 살펴보니 과연! 그 부친의 한 마디에 아들이 결단하는 순간이 마침내 온 내용이 발견된 것입니다. 그때를 찾아 LP를 맞추어 보니 드디어 문제의 실마리가 예상대로 정확히 풀린 것입니다. 여축없이 계산되어져 나온 것입니다. 과연 3운법칙이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웬만큼 관심이 있는 기독교인이면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는 에반 로버츠란 인물 관련입니다. 지금도 그의 오도/誤導된 "명성"은 대단합니다. "오도되었다"는 것은 그와 관련지어 말할 때 모두가 "성령, 운운" 하는데, 천천만만의 말씀. 사이비임을 명백히 단언합니다. 세계 기독교계가 얼마나 "배도/背道"(살후 2.3)가 되어 있는지 그 증거라는 판단입니다. 마귀가 하는 짓거리를 분간 못하고 감히 하나님과 관련 짓다니! 그 거짓됨(사이비)을 이 에반 로보츠의 생애 도표로도 충분히 판명낰다는 뜻입니다. 그가 주도한 집회에서 나타난 영적 현상은 초능력에 속해 인위적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으나 악령들도 얼마든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촉구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집회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그가 신경쇠약에 걸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의사의 권유로 그 후 일절 집회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사이비성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역사"를 신경쇠약과 감히 연관시키다니! 차마 말이라도 꺼내지 못할 일입니다. 오직 할 수 있는 말은 처음부터 악령에 사로잡혀 그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는 결론 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그 결과가 그러했다"라는 말이라면 더욱 더한 모독죄가 됩니다. 에반 로버츠를 통해 사탄은 오늘날 각종 방언이나 기타 능력 행함들이 겉으로는 미심쩍은 행동으로 과거 같으면 일단 의심할 것도 웬만 하면 "성령 운동"으로 가볍게 취급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진 셈이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이 정도로 오늘날 이른바 "교회"가 영적 감각이 마비되었는지 실로 놀랍고 끔찍스럽다 할 것입니다. 











2026년 2월 10일 화요일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그림 한 편으로 일람하는 유사이래 최초의 장관/壯觀ㅡ"21세기 표적과 기사"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리킬 때 바다는 둘로 갈라져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양쪽의 바다 벽>으로 어마무시하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멀찍이 갈라져 <두 해변>을 이루었던 것이기에 바로왕의 이짚트 기병들은 겁 없이 홍해 가운데로 뛰어든 것. 장관은 이 때 벌어졌으니 산더미 같은 바다가 순식간에 덮쳐 왔으니까.

"21세기 표적과 기사"는 "그림 한 편"이라 말했나?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가 그것인데 방금 말한 모세의 기적 그 압축판이라 한다면? 홍해라 해도 이 너른 광대무변의 우주에 비하면 손바닥 안에 든 그림 한 편보다 더 작다고 볼 때 규모가 크고 작음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평가되지 않고 하나님의 움직이심 그 움직이신 모습으로써 기적 여부가 가려져야 마땅하다는 점에 기준을 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래는 이 그림을 처음 대하는 이들을 위한 설명이다.

먼저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생애 도표로 눈을 돌려보자. 모든 인간의 생애는 딱 세 가지 SN, FS, OT의 3유형으로 나눠지는 바 셋으로만 분류된다 함은 "한 때, 두 때, 반 때"에 따른 것이기 때문. 어째서 "모든 인간"이라 단정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3운법칙의 얼개(structure) 즉 그 구성 요소인 LP, DP, JP가 각 유형 FS, OT, SN에 따라 1, 1×2, 1÷2가 나타내는 도식/圖式("3위1체"의 도식)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너무나 놀라운 특이한 사실 때문(아래 노아, 아브라함, 요셉, 모세의 생애 도표에서 보듯). 즉 이 세 마디, "한 때, 운운"은 1, 1×2, 1÷2의 문자화/文字化로서 천사(천사가 다니엘에게 나타나 21세기 예언을 하면서 이 말을 했기에)의 언어 기교/技巧인 것. 왜 이런 기교를 부렸느냐 하면 목적이 분명하니 21세기 무대에 등장하여 전개될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을 미리 알림이었던 것.

그런데 이를 예고/豫告하여 알리되 이 복음의 전주곡/前奏曲에 해당하는 "표적과 기사"(요 4.48)를 대표적으로 묘사하는 묘수/妙手를 두었던 것이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다름아닌 바로(아래 그림에서 설명하듯) 3위1체의 도식/圖式. 이 "3위1체"의 뜻은 지금에야 완연히 밝혀졌지만 "짝을 이룬 둘은 <들>로서가 아닌 반드시 <하나>로서 나타난다(존재한다)"인 것. 이것을 현대 물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상보성 원리(또는 양자역학)로서 이를 최초로 발견한 이가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이며 이렇게 <만유의 법칙>의 윤곽을 세상에 최초로 알린 공로를 감안할 때 역대 최고의 물리학자라 주저 않고 단정해도 좋을 인물. 그가 논파한 "상반/相反은 상보/相補(CONTRARIA SUNT COMPLEMENTA"라는 명언에 해당하는 것이 또한 1(상보), 1×2와 1÷2(상반)이기 때문. 1은 짝을 형성하기 전의 상태, 2는 짝의 형성, 3은 3위1체이니 이제는 짝으로서의 '둘'이지만 본디의 "하나'로서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속성이라 설명해도 무방할 것이다.

거듭 말이지만 노자(도덕경 42장 25언)의 "道生一("道가 1이 되었다"란 말은 창조 이전의 하나님이 비로소 "창조주 하나님"이 되셨다 즉 "창조를 시작하셨다"의 의미) 一生二(그 첫 시작으로서 독생자 하나님을 만드심/낳으심으로써 짝을 이루셨다) 二生三(짝으로서의 '둘'이시지만 '둘'로 계시지를 않고 본디 홀로 계시던 모습대로 '하나'로 계심의 조화를 이루시니 마치 별다른 세 모습의 제3자의 존재처럼 되시므로 이를 통틀어 "3위1체"라 한다) 三生萬物(이 3위1체의 이치를 기본/기반으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따라서 이 3위1체를 만유 운행/운영의 기본 법칙으로 정하셨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닐스 보어가 자기 가문 휘장에 아주 당당히 태극 문양과 함께 '상반'은 상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바로 그 이유)".

노자 당시 세상은 "3위1체"를 아직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대 환경인데 이와 같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3위1체가 만유법칙임을 이렇듯 유창한 명구명언으로 일목요연하게 설파해 놓았으니 그래서 노자를 멜기세덱의 변신으로 확인하는 것. 성경대로 하면 멜기세덱은 현재 유일무이의 신령한 몸으로서의 현존 인물이 되어 있으니까. 에녹과 엘리야는 신령한 몸으로의 변환은 있었으나(따라서 죽음을 보지 않음) 지금도 세상에 남아 있는 현역/現役은 아닌데 멜기세덱만은 죽음 이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따라서 초능력을 십분 발휘) 전신/前身 아담의 1차 변신/變身이고 2차 변신이 노자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3운법칙과 3위1체는 상호 검증 관계에 있다고 말함이니, 다시 말해 이 둘은 이로써 자체 증명이 되므로 별도로 검증 작업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이 된다. 왜냐면(이 도식을 "3위1체 도식"이라 하는 이유) 3운법칙은 3위1체의 도식 그대로를 구현하고 있는 3위1체의 대표적 '적용예'이고, 3위1체는 그 도식이 말해 주듯 3운법칙의 기본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두 때"와 "반 때"는 1×2, 1÷2와 똑같은 <상반>의 모습. 2를 <곱하기>와 <나누기>로 갈랐으니까. 이는 갑, 을, 병 도식에서 갑과 을이 병을 각기 반분/半分해 있음과 정확히 맞물린다. 반분되어 있는 병이 서로 좌와 우로 반대로 나누어져 있으니 즉 갑과 을은 <상반>이요 병은 <상보>의 모습 그대로다. 작은 그림이지만 이렇게 그 내용을 볼작시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이런 섬세한 그러나 정확한 초자연적인 초능력의 표현력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작용했단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적이라 하는 것이다. 천사 말이 났으니말이지만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두가 하나님의 행하심, "하나님의 기적"이신 것이다. 같은 초능력이라도 악령들은 자아중심이라 "자기 이름으로 한다" 즉 "제 것으로 말한다"(요 8.44)고 설명하신 것과 확실히 대비된다. 우리도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는 것이 같은 뜻.

요셉의 생애(아래 그림)에서도 확인된다. 인간 생애(OT, SN형에서만)에서 그 JP의 의미를 설명하는 세계 유일의 근거가 아이들 좋아하는 읽을거리처럼 재미나게 씌어진 기록이 이 요셉 일대기다. 성경 기록자가 아니, 하나님께서 심심하셔서 이런 삽화 같은 이야기를 성경에 끼워 넣으신 것이 아니다. 오직 목적이 이 21세기 마지막 때에 나타내실 "그림 한 편"의 특이한 아니, 기상천외의 JP, LP, DP를 설명하시고자 하심이다. 이것을 "당치도 않은 억단"이라 보는가? 어떻게 보든 자유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 마지막 때 "천사의 복음" 전파에 절대 불가결인 "천사의 21세기 표적과 기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대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이 "JP"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이 JP를 설명하는 세계 유일무이의 문서가 이 요셉의 생애 설화인 것이다.

요셉은 그 JP에서 LP, DP가 각각 17년, 13년으로서 도합 30년이다. LP가 17년인 것은 늙은 아버지 야곱의 총애를 받은 햇수이기 때문. 다시 말해 17세에 아버지 심부름으로 형들에게 갔다가 형들의 못된 시기심에 걸려 넘어져 그 후 13년간을 일어서지 못하다가 30세에 바로왕의 꿈 해몽 덕택에 일약 이짚트 제국의 제2인자로 등극하니 참으로 꿈같은 "꿈의 인생"이다. 그의 생애 분석에 따르면 40년간 그 자리에서 세도를 부리며 이짚트 전국을 호령한 것이다. 요셉의 JP에서 LP, DP가 각각 17년, 13년인 것은 30년의 JP에서 각각 4/7, 3/7이니 이는 인간 생애 유형 중 하나인 FS형의 닮은꼴 곧 축소형 그대로다. FS형의 LP, DP가 각각 4/7, 3/7이기 때문이다.

JP가 FS형의 닮은꼴/축소형이라는 것은 놀랍게도 다름아닌 3위1체 도식에서의 1, 1×2, 1÷2 그대로를 나타냄이다. 즉 갑과 을이 병을 각기 상반되게 반분/半分해 가지는 형태를 곧이곧대로 반영시킴인 것이다(아래 그림)! 가감 없이 쏙 빼닮은 그대로인 것이다. FS형은 JP가 없고 OT, SN형에만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솜씨이고 기적, "표적과 기사"이지 달리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더 있다. 모세의 생애가 대표하는 OT형을 보면 3등분의 아주 말끔하고 말쑥한 세련된 모습이다. FS형도 7등분으로서 JP 없는 LP, DP가 각기 4/7, 3/7이다. 3과 7은 원래부터 신/神의 숫자로 알려진 누구에게나 낯익은 것이지만 이 7등분도 3등분(OT형)의 우아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데 3가지 유형 모두 "마디(절/節)"가 있는데(이 "마디"라는 것의 정체가 달리 다른 뜻이 있는지 없는지는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다) FS형은 56마디, OT와 SN형은 똑같이 57마디이다. 바로 이 점에서도 중대한 의미가 있다. 즉 OT와 SN형은 같은 57마디로써 대칭을 이루어 상반/相反이다. 따라서 FS형은 상보/相補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상반"으로서의 OT와 SN형이 걸작이니 OT는 앞서의 설명대로 어느 모로 보나 단정/의연하여 귀태가 나는데 SN형은 그 반대다(아래 그림의 모세와 노아 생애 도표 참조). 한 마디로 "지저분" 그 자체다. 난데없이 19라는 숫자가 어디서 굴러 왔는가 말이다. 다른 것은 다 1, 3, 4, 7로 퍽이나 익숙한 꽉 짜여진 잘 다듬어진 모습인데 "19"라니! 어디서 굴러 온 돌멩이란 말인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있어도 너무나 명백하게 마치 "글(또는 숫자) 그림"처럼. 다시 말해 그 "지저분함" 자체가 답이요 설명일 줄이야! 얌전한 것을 거꾸로 뒤집어 놓았으니 흉물일 수밖에는! 왜 뒤집어 놓았느냐? 상반/相反이 되도록 하기 위해! 오직 이 이유 하나뿐인 것.

57(마디)=3×19(OT형)
57(마디)=19×3(SN형)
3×19의 뒤집힘이 19×3인 것이다
(아래 그림 모세와 노아 생애 참조).
19개 마디의 3등분이 OT형.
3개씩 마디의 19등분이 SN형.
이렇게 설명이 되도록 일부러 짜 맞춘 것이
하나님 솜씨,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어떤 무엇이 "21세기 표적 기사"란 말인가!
"최소한 인간의 손길은 닿지 않았다".
이것이 "기적"의 정의/定義다.
"천사의 복음"과 직결되었으니
악령의 초능력은 아니다.
끝으로 닐스 보어가 "상반은 상보"라는
명구를 세상에 선물로 남긴 것은
역사적이요 기념비적인 것이다.
노자의 "3생만물"과 맞먹는다 하리라.
세계 교회는 이들에게 사의를 표해야.








교회 중의 "믿음 연약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


바울 사도 역시 교회 중 "믿음이 연약한 자"(롬 14.1)가 있음을 인정했고 또한 그런 형제자매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1)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는다"고 했으며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3)이라 했습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니 그가 세움을 받을 것이요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음"(:4)이라 했습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김이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 것이요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5-8)이라 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다"(:9,10)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아 다시[거듭] 나 성령 받아 모신) 중 "믿음이 자라가는"(살후 1.3) 과정 중인 형제자매도 없지 않아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중에 "신령한 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도 있어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실상도 밝혔습니다. 즉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가 있음을 말하고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 할 정도였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행함이 아니냐"(고전 3.1-3) 한 것입니다. 


고로 모두가 일제히 완벽한 상대방중심으로 변하여 자아중심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사정이리요. 그러나 이런 현상을 당연시함을 경계하여 교회에 대하여 엄중 경고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다"(:16,17) 했습니다.


이 세상은 사실대로 말하면 일대 난장판입니다. 영광의 신령한 몸이었던 아담이 졸지에 물컹물컹한 썩을 짐승의 육체가 되는가 하면, 인간 세상이 "미친 마음"투성이인 악령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탓입니다. 그들의 등쌀에 6천년래 안정을 찾지 못하는 가엾다, 너 인생이여! 그나마도 속아 넘어 가 여기가 삶의 본고장인 양 들떠 밤낮 저들끼리 아귀다툼을 일삼는구나! "하나님은 없다"는 악령들의 말장난에 맥없이 놀아나는구나! 이 모두 아담의 죄 곧 자아중심이 벌어들인 날벼락입니다. 생명의 상대방중심을 헌신짝처럼 여긴 메서운 대가요 보응입니다. 어찌 할꼬! 어찌 할꼬!

그래도 모든 피조물의 어버이신지라 인간 구제를 위해 친히 죽음의 진창 속으로 뛰어드신 창조주 하나님. 전체 인류와 "하나"되심의 3위1체 이치로 개개인을 원래 창조하신 그 신령한 몸으로 되돌리시고자 함입니다.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이 되신 후에 성령으로 각자 안에 임하시어 해당 인간의 영혼과 "한 영"(고전 6.17)으로서의 "하나"를 이루시면 그 사람 역시 똑같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 따라 "그렇게 죽고 부활하는" 몸이 됨으로써 범죄 전 아담의 영생하는 신령한 몸으로 복귀되는 고로 이를 "성령으로 나는(출생하는)" 것이라 하고 "새 창조"라 하는 것이며 그래서 "구원 받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한 영"으로 "하나"를 이루는 여기에 구원의 핵심이 있습니다. "대신 죽음" 따위의 무식한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읽고 오직(사람의 생각에서 난 신학 서적이나 설교집이 아닌 성경만) 명상하며 "성령의 가르치심"(요 16.13)에서 오는 "계시"를 갈망하면 아니가르치실 이유가 없습니다. "문을 두드려러, 그러면 열린다" 하심은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열리는 법이 없다"는 바로 그 말씀. 자동적으로 알아지고 베우는 법은 없습니다. 두드려야, 찾아야, 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과 한 영, 하나되어 구원이 되는 까닭에 그래서 주님의 죽으심이 내 죽음, 주님의 부활이 내 부활이 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기에 이렇게 됨에는 엇바꿔(맞바꿔) 즉 상호 교환하여 상대의 것을 소유하는 것으로 <얽혀지는> 것이니, 이것이 짝을 이룬 둘의 하나됨인 3위1체에서 "3위"로 나타나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3위"가 결성되는 요건입니다. 어려운 말도 아니고 상식 차원입니다. 즉 남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면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요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가 똑같은 이치입니다. 어느 쪽이든 자기 몸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하여 다른 이성과 별도로 관계할 때 둘의 하나됨은 와해되고 이혼이 성립되는 것입니다(고전 7.4). 이상 설명대로의 육체적 관계일 때 그렇게 갈라질 수 있고(마 19.9) 기타 다른 사유로는 이혼은 일체 불허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한 몸"에서처럼 모름지기 삶이란 것은 "한 영"으로서의 피조물과 창조주와의 이런 관계 형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저절로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이니까. 바꾸어 말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신 것은 모든 인간이 한 분 <머리(창조주)>를 모신 한 <몸>으로서의 각 지체 각 부분을 구성한 "하나"로서 가장 이상향적 삶을 향유할 수 있게 하려 하심입니다. 주님과 내가 짝(창조주와 피조물)을 이룬 것과 같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께서 짝(파생하신 이와 파생되신 이)을 이루심이니 만유는 이렇게 짝(대칭)으로 빈 틈 없이 구성된 것이라 이래서 '3위1체'를 "만유의 법칙"이라 하는 것이요 무릇 삶이란 것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의 법질서로 영위되는지라 성부 하나님을 위시해 일체의 존재가 상대방중심이요 생명의 세계에서는 자아중심을 찾아보려야 볼 수 없고 멸망과 죽음의 세계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실상이 바로 그러한 자아중심입니다. 고로 새 창조로 "새 생명"(롬 6.4)의 "새 사람"(엡 2.15/4.24/골 3.10)/된 자는 모름지기 상대방중심 일색의 인생관이니까 여전히 옛 버릇대로 자아중심인 자는 무릇 그 누구든 자기의 구원됨 여부를 스스로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자아중심이면서도 여전히 구원 받았다 고집한다면 자기 기만의 비극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명확한 진단입니다. 무조건 믿으면 무조건 구원이라는 사탄의 고색창연한 옛 에덴 거짓말의 바벨론 신학에 더 이상 휘둘리지 말고 바벨론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악바르의 의문점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 그리스도가 이미 세상을 구원했다면 왜 다시 와야 하나? ".......... • "마지막 아담"으로 오셨기에. 하나님의 인간(아담) 창조 경륜에서 아담은 세상을 천년 동안 통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