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30일 목요일

이 티끌만한 벌레에게 물리면 항우 같은 장사라도 치사율 거의 50%로 죽어 나간다





출처:


이런 허약한 인간의 육체(초자연계가 아닌 자연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하는 신학자들아
당신네들 때문에 진화론이란 엉터리가 생겨난 것이다.
자연계 생물은 사람이 아니니까 종/ 환경에 따라
어느 정도 진화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도 해도 입 다물겠다.
그러나 인간만은 완벽한 것으로 만드셨음을 알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 영혼이 조성됨으로써
창조주의 대리자로 유일무이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생물이냐 아니냐 그 현주소도 불분명한
하찮기 이를 데 없는 존재인 바이러스
(요즈음은 겨우 "비세포성 생물"에 끼일 수 있을까 저울질되는 정도)
에게도 당하면 꼼짝없이 죽음을 당하는 인생.
그 육체가 자연계에 속해 있다는 것 외에 아무 이유가 없다.
인간이 처음부터 원래 자연계 물질의 육체로 지내도록
하시지 않았다는 증거는
개, 말 등은 UFO와 같은 영물
(악령들이 순간적으로 자연계 물질의 육체로 변환해 있을 경우)
들의 가장/변장한 것을 감지하고
미친 듯이 흥분 또는 공포에 짓눌려 울부짖지만
같은 순간 동일 장소의 인간에게는
전혀 그런 이상 징후를 못느끼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필자의 직접 경험 포함).
가축(일반 동물)들은 자동적으로 그런 것을 감지할 수 있지만
인간은 그렇지를 않기 때문이다.
같은 자연계 물질로서의 육체이건만 인간만이 퇴화한 것인가,
아니다. 본시 이런 자연계 물질의 육체로는 살도록 되어 있지 않는데도
아담 범죄로 갑자기 비정상적으로
이런 자연계 육체가 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아담이 영생하는 자로서 창조되어 그 육체가 물질과 반/물질의
양면성으로 된 초자연계 육체였다는 성경의 언급이 많은 가운데
그 가장 구체적인 지적으로 손꼽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죽음을 "멸망 받을 원수"(고전 15:26)라고 명시한데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홍해 휴양도시 후루가다 인근 사막에서 오후 
A((60·여)씨가 낙타 타기를 체험하던 중 
당시 낙타를 다루던 현지인이 줄을 놓으면서 
앉아 있던 낙타가 갑자기 일어나 몇 차례 뛰자 
A씨가 땅으로 떨어졌다. 머리가 먼저 떨어져 뇌 손상을 입어 
추락 직후 의식을 잃었고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병원으로 이송된 뒤 사망했다. .(2019. 2. 4)

경기도 안성시 그 곳 모 요양원 인근 산책로에서 
오전 7시 55분께 산책 중이던 
이 요양원에서 수년 전부터 지내 온 입소자 A씨(62·여)가 
요양원 원장이 키우던 도사견
(개가 갇혀 있던 개장 청소를 위해 문을 열어놓은 사이 
근처를 지나던 A씨를 공격한 것)에 
흉부, 둔부 등을 수차례 물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5시간 만인 오후 1시께 사망했다. (2019. 4. 10).

장모(66·여)씨는 강릉에서 일행 20여명과 함께 여행을 떠나 
낮 13시 30분께 거제도 한 식당에서 게장백반으로 식사했는데 
오후 5시께 함께 설사와 복통 증세를 호소한 일행 18명과 달리 
증세가 악화돼 부산의 모 대학병원에 이송돼 입원, 
패혈증 쇼크에 심장 이상 증세로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다가 
입원 7일만에 숨졌다. (2016. 10.27)

오전 8시10분쯤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 13층에서 
평소 우울증을 앓고 있던 B씨(56·여)가 스스로 몸을 날려 떨어지자 
마침 그 곳을 지나던 아침 출근 중의 A씨(68)를 덮치는 바람에 
두명 다 인근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숨졌다. (2017년 11월 3일)





적그리스도가 임하는 때를 당하여 엄중 경고








그 때문에 대개 믿음에 들어온 이들을 보면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 능한 자가 많지 않으니"(고전 1:26),
이런 "없는" 자들의 공통점은 세상 삶의 낙을 별반 느끼지 못해
믿음과 장래 소망을 위해 세상을 버림이 그다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이 대목을 중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지 머리이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그 뜻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남으신 고난"의 <그리스도의 고난>이시므로
사람 살리시는 "하나님과 함께 일함(고후 6:1)에서 필수 불가결로
구원 사업의 일환으로서의 우리 고난 받음인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메시야 예수님"의 구속 사업은 완결이나,
그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근거로 한 직접적인 구원의 도구는
우리 자신의 제물됨(롬 12:1)을 배경으로 제사장 역할인 것입니다.
제물이란 것은 처음부터 자기 아닌 타생명을 위한 희생의
죽음, 이에 수반되는 고통과 고난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버림 받은 세상에 위치한 우리의 존재 가치입니다.
사람 살리는 가장 고귀한 일의 보람을 100% 누림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는 소위 "과학적 진실"이라는 탈을 다시 쓰고
넘볼 기회를 찾으려들지도 모릅니다.
허나 과학 관련해서만은 우리는 진화론을 통한 학습효과가 있습니다.
다아윈이 진화론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도
창조에 대한 강한 회의 속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진화론은 창조를 부정하는 무신론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3운법칙과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간의
상호 검증으로써 무신론과 진화론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간(무려 150년) 당당히 "과학"으로
군림해 왔던 것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과학의 이름으로 대대적인 기만 행위를 한 것입니다.
사이비 과학으로써 마귀의 본심을 드러내어 
대대적으로 사기를 친 것은 진화론이 그 시초라 하겠습니다.
다시 제2차의 "과학" 사기를 감행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물론 무신론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메시야 예수님께 대한 공격입니다.
좌우지간 '진화론 과학 사기극' 학습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더 이상 마귀의 사기 놀음에 놀아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020년 1월 29일 수요일

"구원"의 3단계







구원을 "이루었다", "이루고 있다", "이룰 것이다"
(구원에 이르렀다-과거, 이르고 있다-현재, 이를 것이다-미래)
이상 세 가지로 성경은 표현하는데
(헬라어 동사가 그렇게 되어 있기는 하나 굳이 원어를 보지 않아도 
'과거', '현재', '미래' 는 모든 번역본에서 충분히 나타내지고 있어)
이상의 <시작>, <진행>, <종결>을 말합니다. 
헷갈릴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적 표현으로는 대개 '종결'을 제외한 '시작', '진행'에서는
'산 자'가 아닌 '죽은 자'(골 3:3)로서 표현하는 바
이는 아직 초자연계 몸(아담의 범죄 전 몸)으로 
부활, 변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결' 때까지는 "산다", "잘 산다" 등의 말이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기"(골 1:24) 때문.
사형수로서 매일 사형수 형구를 지고 가는데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종결에서는 첫째 부활과 마지막 부활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계 20:6)고 했습니다. 
복이 있는 첫째 부활에 참여하려면 복음 전하는 일에
(적그리스도 출현 이후 그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으면
무조건 죽임을 당하니 자동적으로 "복 있는 자"가 되나
그 때가 박두하기는 했지만 언제일지는 모르니까)
목숨을 걸면 되니 말 그대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4).
이슬람 판도인 중동 등지로 나아가면 개연성이 높습니다.
선교지를 택해도 소위 "위험한" 데를 기피하는데
이와 같은 "위험"에는 "천년간 다스림"의 보답이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방해하는 지역이므로 그 어디보다도
복음 전파가 필요한 곳이라는 뜻도 되기에 그렇습니다.
북한도 있지만 북한은 전면적인 자유 해방을 위한 기도로써
대대적 세계 선교 보루로서의 한반도 교회 주축으로
세울 목적으로 임해야 더 타당성이 있습니다. 


앞서 올렸던 게재물







"혈과 육(flesh and blood)은 하나님 나라 상속받지 못하고
썩는 것(자연계 물질의 육체)은 
썩지 않는 것(초자연계 물질로서 영생하는 육체)을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15:50) 했으므로 엘리야와 에녹이 
자연계 육체로 승천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이런 점을 보아도 세상 종교의 막연한 "구원, 영생"은
허구에 가득 찬 거짓, 논리도 없는 인간의 망상 뿐임이
입증되는 것이니 오직 "마지막 아담"을 통한 
다시 출생함과 새로 창조됨으로써만 
이 썩음과 죽음이 영생으로 회복되는 것. 
이 모두 아담의 범죄로 파탄이 남으로써
인간의 죽음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니 "영적 죽음"이라면
"만유 회복"(행 3:21)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을 수 없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을" 뿐인데
왜 "만유가 회복되어야" 하겠는가. 

모든 창조의 최고 절정 완성품으로서 인간이 창조되어
영생하는 존재로 완결되었기에 7일째 날 쉬셨는데(안식)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창조를 다시 시작) 정도가 됐으니(요 5:17)
"영적 죽음"이면 인간의 영(혼)만 손보시면 될 일이지
만유까지 손대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살도록("산다"는 것은 자연계 동물 아닌 인간은 영생을 의미)
창조되었는데 죽는 존재로 돌연 변이를 일으키는 
사고가 생겨났으니 이로 인해 땅까지 저주를 받았기 때문(창 3:17).
마귀는 "구원"을 아주 괴상한 것으로 그 의미를 변질시켜
마치 "영생(구원)*만 얻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 것처럼
엉뚱하게 고깔을 뒤집어씌워 놓아도 인생들은
무작정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그런 줄로만 아는 것뿐이다.

"구원받아" 당장 지금 죽어도 영생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하여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영생이라는 주먹구구식의 사고방식으로만 온통 지배되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지금 "죽어 있다"(골 3:3) 한 것이다. 
메시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살아나셨지만 그러나 "감추어져"(:3) 계신다.
주님의 부활/승천이 "감춰져" 있음은 나도 "함께 감추어진" 것.  
그 부분은 감춰지고 죽어 무덤에 있는 것만 드러나져 있다.
다시 말해 우리(주님과 나)의 부활/승천이 드러나질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계 몸으로써이지 이 자연계 육체로써가 아니다.
바로 그 뜻이다.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의미이다.

바꾸어 말해 이 자연계 몸은 <죽음의 대명사>라는 것.
메시야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 것이다.
메시야 오시기 전에는 온 천지가 암흑(행 26:18)이라 분간을 못했다. 
이제 "마지막 아담"이 오심으로써 <아담>의 실상이 드러나자
모든 사연도 대낮 같이 밝아져 정상적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이 자연계 육체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무덤"이라는 것을.
우리(아담과 나)의 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죽음이란 측면 외에도
이와 같은 본원적인 의미의 죽음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
<형벌>만의 의미라면 죽음으로 죄값이 치러진 이상 
우리가 산 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헌데, 여전히 "죽은 자"다.

범죄 전 아담의 모습을 대변한 에녹과,
범죄 후 아담의 모습이 되시어 죽으시고 장사지낸 다음의 부활로 
정상적인 아담을 회복하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을 
미리 대변한 엘리야의 대조적이고 대칭적인 연관성을 
구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노아, 욥, 아브라함, 모세 등 모든 인생이
"죽은 자"(마 8:22)로서의 형상인 것이다.
 그 사실이 세상에 오신 "마지막 아담"으로 확인되었다는 것뿐이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 누구도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아담 본시(범죄 전)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됨으로 말미암는 
"산 자"로서의 모습으로 비로소 정상화되는 것이다. 


당연하고도 당연한 일









그러므로 나의 것은 조금도 없고
오직 주님의 것으로서 
주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행한다는
우리의 사랑에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2020년 1월 28일 화요일

주기도문





구원받은 자의 육체와 영혼 일체가 더 다시는 자기 것이 아닌 주님의 것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다
법질서대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니
여기는 사는 데가 아니므로 
살려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 따라 
적극 자발적으로 움직여
찬란한 미래를 기약함이 사람답고 
창조주의 피조물다운 것
현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뿐이다



에녹과 엘리야 (끝)









"혈과 육(flesh and blood)은 하나님 나라 상속받지 못하고
썩는 것(자연계 물질의 육체)은 
썩지 않는 것(초자연계 물질로서 영생하는 육체)을
상속받지 못한다"(고전 15:50) 했으므로 엘리야와 에녹이 
자연계 육체로 승천할 수는 없음을 알아야.
이런 점을 보아도 세상 종교의 막연한 "구원, 영생"은
허구에 가득 찬 거짓, 논리도 없는 인간의 망상 뿐임이
입증되는 것이니 오직 "마지막 아담"을 통한 
다시 출생함과 새로 창조됨으로써만 
이 썩음과 죽음이 영생으로 회복되는 것. 
이 모두 아담의 범죄로 파탄이 남으로써
인간의 죽음이 초래되었기 때문이니 "영적 죽음"이라면
"만유 회복"(행 3:21)이라는 거창한 의미가 있을 수 없어.
아담의 범죄로 인해 "영적으로 죽었을" 뿐인데
왜 "만유가 회복되어야" 하겠는가. 

모든 창조의 최고 절정 완성품으로서 인간이 창조되어
영생하는 존재로 완결되었기에 7일째 날 쉬셨는데(안식)
하나님이 다시 일하실(창조를 다시 시작) 정도가 됐으니(요 5:17)
"영적 죽음"이면 인간의 영(혼)만 손보시면 될 일이지
만유까지 손대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살도록("산다"는 것은 자연계 동물 아닌 인간은 영생을 의미)
창조되었는데 죽는 존재로 돌연 변이를 일으키는 
사고가 생겨났으니 이로 인해 땅까지 저주를 받았기 때문(창 3:17).
마귀는 "구원"을 아주 괴상한 것으로 그 의미를 변질시켜
마치 "영생(구원)*만 얻으면 모든 것이 종료된 것처럼
엉뚱하게 고깔을 뒤집어씌워 놓아도 인생들은
무작정 피동적으로 당하기만 하고 그런 줄로만 아는 것뿐이다.

"구원받아" 당장 지금 죽어도 영생하게 되었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 하여 이 세상 살다가 죽으면
영생이라는 주먹구구식의 사고방식으로만 온통 지배되고 있다.
성경은 구원받았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지금 "죽어 있다"(골 3:3) 한 것이다. 
메시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어 무덤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먼저 살아나셨지만 그러나 "감추어져"(:3) 계신다.
주님의 부활/승천이 "감춰져" 있음은 나도 "함께 감추어진" 것.  
그 부분은 감춰지고 죽어 무덤에 있는 것만 드러나져 있다.
다시 말해 우리(주님과 나)의 부활/승천이 드러나질 때에는
반드시 초자연계 몸으로써이지 이 자연계 육체로써가 아니다.
바로 그 뜻이다. 아주 중요한 핵심적인 의미이다.

바꾸어 말해 이 자연계 몸은 <죽음의 대명사>라는 것.
메시야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의미가 제대로 살아난 것이다.
메시야 오시기 전에는 온 천지가 암흑(행 26:18)이라 분간을 못했다. 
이제 "마지막 아담"이 오심으로써 <아담>의 실상이 드러나자
모든 사연도 대낮 같이 밝아져 정상적으로 알아보는 것이다.
이 자연계 육체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무덤"이라는 것을.
우리(아담과 나)의 죄로 인한 형벌로서의 죽음이란 측면 외에도
이와 같은 본원적인 의미의 죽음의 실상이 여실히 드러난 것.
<형벌>만의 의미라면 죽음으로 죄값이 치러진 이상 
우리가 산 자가 되어 있어야 마땅하다. 헌데, 여전히 "죽은 자"다.
범죄 전 아담의 모습을 대변한 에녹과,
범죄 후 아담의 모습이 되시어 죽으시고 장사지낸 다음의 부활로 
정상적인 아담을 회복하신 "마지막 아담"의 모습을 
미리 대변한 엘리야의 대조적이고 대칭적인 연관성을 
구현한 것을 제외하고는 노아, 욥, 아브라함, 모세 등 모든 인생이
"죽은 자"(마 8:22)로서의 형상인 것이다.
 그 사실이 세상에 오신 "마지막 아담"으로 확인되었다는 것뿐이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그 누구도 주님 다시 오심으로써
아담 본시(범죄 전)의 초자연계 몸으로 회복됨으로 말미암는 
"산 자"로서의 모습으로 비로소 정상화되는 것이다. 


2020년 1월 27일 월요일

동물보다 더 퇴화/退化가 아닌 진화해 인간은 얼어 죽는가



   
수정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용의 NASA 원본 사진



위 그림은 NASA 촬영(2001년)의 용의 원본 사진
<이미지 다른 이름 저장>(마우스 오른쪽 눌러)한 후
편집(그림판)으로 옮긴 다음 4~5 차례 확대하면
구불텅거리는 뱀의 형상이 노출됨
돋보기로 700% 확대해도
사진의 정중앙에서 1/2 아래 못미친 약간 오른쪽에 나타남.









에녹과 엘리야






엘리야가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까닭에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이유
그 진정하신 목적을 엘리야ㅡ세례 요한으로 연계시켜 
아주 적확/的確게 설명하고 있는 성경이다.
성령의 가르치심이 아니면 글을 두고도 못읽는 것 같은 
성경 문쟁자라 하는 것이다.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통합 나(자아)ㅡ대아"와 "개체 나(자아)"ㅡ소아









그러므로 이 "통합된 나"의 말씀이시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을 해야 하고 절대 복종인 것이다.
"개체 나"인 호, 불호를 가려서는 파멸, 자살행위이다.
생명의 법칙을 다른 조명으로 탐색해본 것이다. 
진화론 따위에 휘둘리지 말고 이런 측면으로 격파해 나갈 일이다.
통합 자아.
개체 자아.
누구든지 통합 자아 안에 오면 "나" 자신이 온전히 보장돼 있음을 보니까
너나없이 이 통합 자아를 위함으로써 
나 자신을 100프로 위할 수 있음이다.
고로 통합 자아를 위함에서 모두가 하나되고 조화되어 평화가 온다.
모두가 평등하게 100% 행복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불문곡직 성경 말씀만을 따르라.
그러면 찬연한 미래는 기필코 따르리라.




명약관화














"개가 그 토한 것을 먹고 씻겨진 돼지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벧후 2:22) 것이 세상 삶 사랑이니 요주의



고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경고하신 것이니,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죄)를 절감,
세상이고 무엇이고 아무것도 소용 없고
오직 "물, 물, 물!"만 찾는 자가 생명수 마시고,
세상이고 삶이고 아무것도 다 귀찮고
오직 병낫기를 일구월심 바라는 자만 명약 명의 찾고,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살인 독사에게 물려
죽음을 경각간에 마주 대하는 절박한 자만이
모세가 세운 구리 뱀을 보고서 살아나듯이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꼼짝없이 죽는구나 하는
죄인으로서의 통절한 회개 없는 자에게
절대로 "나 위해 죽으신 독생자 하나님의 구원"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경고인 것이다.

영생이 탐이 나서 교회 문을 두드리는 자는
교회 전체 분위기를 망쳐놓기 십상이다.
이런 사람들이 구원받았노라고 믿는 자 행세하면
교회 타락, 속화는 순식간이다. 
하나님의 추상 같은 율법의 위엄을 구약시대에 먼저
교육, 교화시킨 연후에 십자가 사랑의 하나님 사랑이
신약시대에 비로소 나타나신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모름지가 전도 설교자(부흥사)는 
하나님의 율법의 단죄(롬 7:13/3:20)를 선포하기 전에는
은혜의 구원은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 순서를 어기고 "싸구려" 구원을 남발한 탓에
아담이 용/사탄에게 굴복하여 이 세상 신/왕으로 만든 것처럼 
교회가 세상에 굴복하여 
오늘날의 "배도"(살후 12:3)의 요인이 된 것이다.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 멸망해도 좋다는 심정인데
그런 사람이 로마서 7장 24절의 탄식의 주인공이라고?
로마서의 "죄와 사망의 법"이란 것은
자아중심 즉 세상에서 어찌하든 살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어찌 그리도 모르나, 신학자들아!
그런데 이 로마서 7장을 바울 사도 자신의 체험 피력이라니!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의 마음을 닮아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자연 주님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모세도 "제 이름 생명책에서 지워주십시오
이 백성 용서하실 수 없으시다면 저도 함께 멸망하고 싶습니다"
한 것과 똑같은 가식없는 사랑의 발로인 것이다(출 32:32)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