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3일 월요일

항상 주님 앞에서 부지런히 자기 마음을 닦고 쓸고 걸레질을 해야





오죽하면 바울 사도가 스스로 교만해질까 하여
그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겠는가(고후 12:7)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바울이 아직 오만해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만일 당시 오만한 상태였다면 이런 은혜도 베푸실 수 없음을 알아야. 

내가 주님을 위할 때 주님은 나를 위하신다.
이것이 생명(삶)의 법칙이다.
내가 주님을 위하지 않을 때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싶어도 
위하실 수가 없다는 사실을 통절히 느껴야.


내가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나를 부인하실 수밖에 없다(딤후 2:12/마 10:33).
<법칙> 따라 되는 일이기에 그러하다. 
우리가 주님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도 자신을 나타내실 수 없다(요 14;21).
주님을 나타내시지 않으니 주님을 잘 모르는데 사랑할 수 없는
불행한 악순환만 되풀이되다가 비극으로 종막을 내리게 마련이다.
모든 것 다 법칙대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
(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한 점 오류도 있을 수 없다는 증거.) 

여기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 했는데
그리고 다시 "성령을 욕되게 한다" 했으므로
"성령"이라 할 때는 "아버지의 성령(마 10:20)", "아들의 영"(갈 4:6)
등으로 특별히 지목되시지 않을 경우에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신 대로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로 계시고 움직이심을 가리킴인 것. 
고로 "하나님 아들을 밟고", "성령을 욕되게 한다" 함이 통한다. 
이것이 3위1체 하나님의 <3위1체의 법칙에 의거한> 표현인 것이다. 

고로 성령을 받음 또는 성령의 세례는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모심을 가리키는 것(요이 1:9).
그래서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사실을 가리켜
"하나님의 씨(seed)"라 한 것이니(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으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다."

다시 출생하고("거듭나고") 새로 창조되는 것은
우리가 "육으로 나면서" '영혼'과 '육체' 이중 구조로 남과 같이
"성령으로 남" 역시 똑같은 체제의 이중 구조이니,
즉 나 자신은 <육체>가 되고 성령께서는 <영혼>이신 것이다.
'영혼'과 '육체'는 완전히 1조/ 2짝인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따로따로 노는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혼연 일체로서 영혼은 육체를 위하고(지시) 육체는 영혼을 위한다(순종).
주님은 나를 위하시고 나는 주님을 위하는데 죄가 가능한가.
이것이 요한 사도의 "하나님께로서 났으니 범죄 불가능"인 것이다.
어리석고 무식하고 무리한 자(신학자)들의 말을 듣지 말고
오직 성경에서 가르치시는 대로 믿고 승리의 생활을 구가할 일이다.
육체로서의 나는 영혼으로서의 주님(하나님의 "형상"이시니)을
항상(1년365일24시간60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어야 정상.
그렇게 함으로써 믿음으로 바다 물 위를 걸어가는 삶이 가능.
바로 베드로가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 때 
찰랑찰랑 감촉 좋은 바다 위를 기분 좋게 걸어가다가
눈을 떼고 다른 것, 거센 바람과 파도를 보고 의식할 때
당장 깊은 바닷속으로 빠지면서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
부르짖은 것과 같이 되니 이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마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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