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18일 토요일

"한 영"과 "한 몸"ㅡ똑같은 "둘이 하나됨"ㅡ그러나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한 영"됨이 비교가 안되리만큼 훨씬 우세




남녀 사랑 주제 가사를 만든 이유는
절대로 결혼 예찬의 뜻이 아니니 오해 마시기를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지금이 어느 때라고 감히...
언제 어디서나 젊은이들을 상대해서는
"천국을 위해 고자되는 것"(마 19:12), "혼자 지내는 것"(고전 7:26)이
"더 복이 있음"(:40)을 변함 없이, 아니 주님 오심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강조하는 바이다

여기서 남녀 사랑의 "한 몸"됨을 주제로 다룬 것은
우리 주님과의 각자의 "한 영"됨을 보다 실감 있게 다루기 위함이다
그래서 남녀 사랑을 연상하면서 
주님과의 하나됨을 음미, 감상, 돈독히 하자는 것
고로 두 가사, "내 마음 그윽한데서"와 "이 마음 그윽한 데서"를
함께 음미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본다
가사를 분류할 때 전자는 "생명수 강물의 노래"(계 22:1/요 7:38)
후자를 "둥지의 노래"라 해도 무방하겠다

굳이 비교하자면 남녀 사랑은 가냘픈 새들의 둥지
자연계 육체의 구차한 둥지에 비하면
하나님 사랑, 초자연계 육체로서의 삶은 큰 강물과 같은
유유하고 도도함이 충분히 부각되는 것이다
좋은 대조가 된다

성경에 남녀 사랑을 그린 아가서가 끼어 있다는 것이 바로 이 뜻이다.
하나님 사랑을 실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다"(아 8:6)
"남자의 몸은 여자의 것이 되고 여자의 것은 남자의 것이 됨"(고전 7:4)
주님과 나는 삶 그 자체가 그렇게 된다 

이 가사에서, 아무리 이상적인 남녀 사랑이라 해도
"그 삶을 내가 살아주고 내 삶을 그가 살아준다"는 것은
한낱 이상론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사랑과 생명의 법칙 차원에서 본다면 영원불변의 진리 
그러나 주님은 문자 그대로 그러하시고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한다>는 것으로써 양자 사이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 웅큼 쥔다는 점에서는 아기나 부모(어른)나 같지만
그 움켜쥔 양으로 따질 때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그 뜻이다 

곡조는 그대로 하면 되는 이안삼의 곡
이 남녀 사랑의 노래 가사는 이상과 같은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저작권을 가지며 뜻이 있는 작곡가가 작곡하는 것은 환영한다
"내 마음 그윽한 데서"의 가사는 저작권을 행사할 필요가 없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