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30일 수요일

"이 아저씨 미워하면 안된다"

    북한 땅굴 교회(20여명)   

 https://www.youtube.com/watch?v=2byC9uQYrWA

46:26에서부터

2020년 9월 25일 금요일

선하게 살고 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양심(창조시 장치하신 생명의 법칙)의 명령이라 모두가 이해하는데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이라니까 한낱 종교교리로만 인식되지

 



생명의 진리로서의 인상은 제로였으니

양심의 가책이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

고로 왜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이 내 구원이 되는지

그 이유가 안개 속에 가린 것처럼 선명해지지 않아서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대로의 "마지막 아담"이심을 몰라

아담 범죄의 결과가 현재의 죽음을 비롯한 인간고임을 

깨치지 못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이와 대칭을 이루는 은혜의 구원도 존재감이 희박해진 것.

①"믿으면 구원"(행 16:31)은 ②거룩하신 위엄(:26,27)에 접한

이후 빌립보 간수가 회개하는 심정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오늘날은 ②는 생략하고 ①만 줄창 외쳐대니 <구원>은 간데없고

<종교>의 잡풀만 무성하여 차라리 복음을 안 전함만 못하다.

구원받은 줄로 자기를 속임으로써 "나는 구원받았노라"며

정작 진리로부터서는 자신을 차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인생이 구원(영생)을 바라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처음부터 죄 지어

그 대가로 죽음이 와(롬 5:12) 영원히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사건의 순서를 따라 밟아가야 함인데  사탄은 ②를

감쪽같이 감추어 옴으로써 구원의 도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보라, 영혼은 어디 가라고 육체만 죽고 썩게 창조하시겠는가.

그럼, 영원한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라인가, 땅으로 꺼지라인가.

이런 것 하나도 생각할 줄 모르는 신학자들, 고루하기 그지 없다.

사탄은 그렇게 인간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 식은 죽먹기보다 쉽다.

"교회" 신학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렇게 미친, 바보로 만든다. 

이런 "미쳤다", "바보다" 하는 말은 성경에서 나왔다(전 9:3/시 14:1).

무궁세세 멸망의 고통을 앞두고도 이리도 태평으로 지내는 세상

사탄의 그런 무서운 거짓에 속아 지낸다는 단적 증거 중의 하나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는 몰랐다"고 광포(廣布)하는 것이다.

멋모르고 사탄의 장단 맞춰 춤추는 세상은 "과학"이라면 마치

진리의 대명사처럼 여기지만 과학자들은 실은 바보들이란 뜻이다. 

생사 가름하는 구원의 진리에 무식한 건 고사하고 경멸, 부정(否定)하여

정작 중요하기 짝이 없는 진리는 차 버리니 어찌 바보가 아닌가.

사물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니 "틀린" 것이고 "모르는" 것이다.

뉴턴은 신학까지 연구하면서도 3위1체, 예수님 신성은 부정했다.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는 아니라면서 성경보다 불경을 더 쳐주었다. 


지금까지 "마지막 아담"을 주제로 하여 그 어느 누구도

성경을 논한 역사가 없는 것은 사탄의 "바보" 만들기 작업 일환이다.

인간(아담)의 죽음이 범죄 때문인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적이었다면

메시야를 "아담"이라 할 필요도 없거니와 "마지막"이란 수식어도

가당치 않은 것은 이후로는 하나님의 보정책(補正), 구제책이 다시는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죽을 수 없는 아담이 죽었다는 뜻이요

이는 자연계 육체가 됨으로 인한 것이니 아담이 그 전에는 엄연히

초자연계 몸으로서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육체였다는 함의(含意)다. 

그래서 "최후"라는 <경고성 메시지>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교회 구성원을 보면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가 절대 다수라(고전 1:26)

"미리 아심"을 따라 구원 대상자를 그렇게 정하신 "미리 택하심"이라

보아도 하자는 없을 것인즉 고로 고상하고 유식한 말로써의 전도보다

장바닥의 장사꾼이든 벽지 산골 나무꾼이든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인 것이니 여기서 핵심 골자가 되는 것이 

아담의 범죄로 현재의 죽음이 왔다는 사실 숙지이다(롬 5:12). 

즉 범죄로 현재의 모든 고난, 고통이 왔으니, 죄 회개, 죄 미워함이다.

죄 짓지 않음 곧 말씀(계명-마 19:17/롬 13:9/고전 7:19/요일 2:3/계 12:17/14:12순종이다. 

그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 사랑이 된다(요 14:15,23,24/요일 5:3).

따라서 나 위한 십자가 고난 받으심 보고서 하나님 사랑하여 

그 말씀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를 친히 아시므로(딤후 2:19)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고로 이보다 간결하고 간명한 구원의 이치가 세상에 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인간의 죽음, 나약한 자연계 육체가 됐음을

감추고 진실대로 말하지 않는 경우 전체가 중심을 잡을 수 없어

허공에 뜬 메아리나 연기처럼 되어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어려운 신햑적 해석"이 난무하니 이는 마귀가 노리는 바였다. 


이렇게 믿음에 들어오기는 지극히 단순 명료하나 그 이후가 문제다.

즉 건강하게 자라야 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필요성에서 초대교회는

매일 모인 것이니 구약율법시대의 안식일 지키기 차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매시 아담의 육체를 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창조에서는 성령으로 계시는 "마지막 아담" 주님을 똑같이 그렇게

의식하면서 <둘이 하나>로서의 동고동락 동거인 것이다. 고로 

말에나 일에나 주님 이름으로, 먹든 마시든 주님 영광 위해(골 3:17/고전 10:31)

함으로써 하나님께 충실한 충복(忠僕)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365일이다.  

왜냐ㅡ주님 친히 본으로서 나를 그렇게 섬기시기 때문이다(눅 22:27).


이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영적 존재에게는 "법, 계명"으로 통하니

요한이 죄를 정의하여 "법을 거스르는 일체의 행위"라 했다(요일 3:4).

이 법이 자연 만물을 상대해서는 <법칙>으로 통한다는 차이뿐이다. 

만물이 법칙대로 운행 안되면 파멸이다. 인간에게는 죽음, 멸망이다.

"죽음"의 개념은 오직 <인간의 자연계 육체로의 전락>에 있다. 

이 사실은 "멸망"을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 한데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아담으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오지 않았다면

죽음을 첫째, 둘째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계 2:11/20:6,14/21:8)이다

그냥 악령들처럼 "멸망"으로써 표현하면 간단한 것이다. 

"천국"이라는 말도 아담의 죽음 즉 자연계 몸으로 전락한 때문이니

처음부터 세상이 이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던 것.

"천국"과 짝을 이룸은 '인간 세계'가 아니라 '마귀의 나라'이니

모두 아담의 범죄 때문에 생긴 돌발 사태가 그 원인인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것은 초자연계 존재인 악마에 대한 우리의 

자연계 속성의 몸으로서의 일방적 열세다. 마치 사람 앞의 개미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하면 천사의 능력이 능히 이를 상쇄시키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처참한 개미(ant)의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주님과 나와의 하나됨을 자아중심 아닌 자기 부인으로 계속 유지하면

만유의 주인이신 "마지막 아담"이  바로 내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에

원수들이 내 머리터럭 하나라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눅 21:18/마10:30).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고 한 그대로다. 

  









이같이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오고 생명의 탄생(인간이 태어남)이

거의 초주검을 겪는 수준이다보니 덩달아 새 생명 탄생(인간 구원)도

똑같은 산고(産苦)를 거쳐야만 하므로 그래서 우리의 고난 받음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 그 몸된 교회의 고난이 필수불가결.

그래서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움이요(골 1:24)

그래서 이 고난을 주님을 위해서 받는 것이라 함이요(빌 1:29).

주님 위해 받는 모든 불이익이므로 "기뻐 뛰놀라"(눅 6:23) 하심이니

<주님과 함께 받는 영원한 영광>으로 

가까운 장래 변환되는 까닭이다(롬 8:17).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기"(고후 4:17) 때문.






2020년 9월 22일 화요일

아담의 범죄로 구원의 필요성이 생겼으니 구원되려면 죄의 회개가 반드시 선행돼야 하고 구원되었으면 아담의 범죄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함은 너무나 지당한 것임을 성경을 강조하고 있어

 






아담을 꾀어 죽음으로 몰아넣어 "살인자"(요 8:44)가 된 사탄은

아담을 그와 같이 초자연계 몸을 자연계 몸이 되게 했으니

자신 역시 초자연계 몸에다 자연계 몸의 속성이 덧붙여지는

저주를 받아 다른 영물들(천사든 악령이든)의 불가시적 특성이 

용에게만은 적응되지 않아(그런 특성의 상실)

자연계 육체로서의 가시적 특징이 대신 적용됨을 인해

다른 영물들은 그 스스로를 작동시키지 않는 한

인간의 눈에 띄일 수가 없는데도 유독 용만은 인간의 눈에 띄므로

아담을 죽인 대가를 제대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즉 자연계 육체가 감지할 수 있는 고통을 받음이니

(그것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는 "흙"을 먹는(창 3:14) 저주를 주셨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인간의 눈에 띄므로 예로부터 용의 형상은 잘 알려져 있는 그대로다.

"해태" 등 영물로 알려져 오는 것들도 이러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용 아래의 악령들이 짐짓 그런 형태로서 스스로를 변장해

인간들에게 나타내준 결과일 뿐이다.

NASA의 우연한 촬영물(뱀의 형상인 용의 형태)이 세상에 알려지자

이를 희석시키기 위해(물타기 작전) 악령들이 갖가지 뱀의 형상을 한

형태들로 스스로를 가장하여 공중에서 과시해 보였던 것과 같다.

사진은 NASA에서 지워졌지만 그 후로부터 그런 현상이 두드러져. 




 

2020년 9월 21일 월요일

세상의 모든 악인을 걸러내시는 함정, 덫, 올무란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ㅡ불법자들은 무조건 당장 강한 것, 당장 잘 나가는 것 즉 현재의 세상 사랑에 있으니까

 










초대교회 첫 순교자들의 대표적 예로서 

야고보와 스데반을 들지 않더라도

사울(바울 사도가 되기 전) 자신이 증언한 대로

사울을 위시해 유대인들은 초대교회 중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죽게 만들었다. 

가인의 손에 죽은 아벨 이후 여러 의인이 나타나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이 등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면서도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지 않았고 특별히 엘리야의 경우 

그를 해치려는 군대가 50명씩 연달아 죽어나갈 정도로

그 위세가 등등했으니 감히 누구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손댈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류사상 첫 의인인 아벨이 

악인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세례 요한의 그와 비슷한 죽음과 더불어 

이 세상이 사탄의 장악하에 있고

인류 구원의 하나님 뜻 또한 의인의 고난 받음에 있어

이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아담의 범죄 전 영생 상태로의 환원이 가능해지는

영원 불변의 이치를 선명히 드러냄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림자로서의 의미를 나타내는 구약시대라도

인간 역사가 시작되면서 아벨의 무고한 피가 그 서두를

장식했다는 것은 바로 실체이신 메시야 오신 다음의

세례 요한의 죽음으로써 재확인된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불변의 의지 표명인 것. 


주님 앞서 보내심 받은 세례 요한이 위에 언급한 대로

능력의 엘리야라는 타이틀을 처음부터 띠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게 무참한 죽음을 당한 것을 효시로 

지금까지 모든 의인들이 똑같은 행보를 보임은 

"마지막 아담" 친히 보이신 자취를 그대로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약자로 가장한 강자의 풍모(風貌)인 것이다. 

천하무적의 최강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니 이를 아는 자 복이 있다.

     






2020년 9월 20일 일요일

아담의 범죄로 초래된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열화와 같이 선포하라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위로를 귓속말로 전달해주라

 

"귓속말로 전달해준다"는 뜻은 

관련 없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안된다는 의미.

즉 인간의 범죄로 인한 진노와 저주를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달되는 "은혜의 구원"은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구원의 희소식 대신

바로 멸망의 독극물로 역/逆작용하기 때문. 

고로 회개하여 다시는 죄짓지 않기로 작정하는

이에게만 "믿기만 하면 되는 구원"이 해당된다는 뜻.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아담 범죄 후의 세상 실상이 "인간 둘만 있어도 전쟁"인 자아중심인즉 그 우일무이의 타개책은 자기 부인의 새 창조 즉 성령으로 다시 출생함에 있어

 







창조주의 피조물이라고 창조주와의 머리 몸 관계가 

자동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닌 것은 

사랑은 자유의지가 핵심이기에 자기 자유 선택에 의해 

머리되심을 인정하고 그러한 상황을 사랑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경베하고 그 말씀 순종하는 경우에 한해

생명의 아름다움으로서 머리 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


현재 모든 인류는 아담 범죄 이후 머리 몸 관계가 무너져버려

오직 "마지막 아담"으로 인해서만 가능하게 돼 있습니다.

때문에 "마지막 아담"(고전 15:45) 오시기 전 에녹을 비롯한 모든 

의인들도 당시로서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근거하여

그 믿음(순종)이 "의/義"로 정해진 것입니다.

"마지막 아담" 없이 자기 순종으로 의인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아담"으로 인한 재출생, 새 창조를 통하지 않고는

단순히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 인간이라 해서 

창조주와의 머리 몸 관계가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바로 이 머리와 몸 관계에서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을 위함으로 어느 쪽도 자기를 위하지 않는 데에 있지만

반드시 "마지막 아담"의 성령을 받아 새 피조물이 되어야만

아담 범죄 이전과 같은 정상으로 회복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말씀하신 "이웃 사랑"은

이와 같이 "성령의 세례"를 받아(메시야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

주님(머리 곧 섬김을 받는 주인)의 모든 말씀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지 사람이라고 다 내 이웃(한 몸된 각 지체)이

아닌 것이며 그리고 메시야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 받아 모시어 새로 창조된 이는 아무리 거지 행색이라도

바로 그 안에는 찬송과 경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계시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그 형제를 사랑해야 마땅한 까닭에,

"나를 믿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음"이라 하신 대로 영원 멸망의 대상입니다.

아무리 한 때 믿음 좋아 능력을 행했어도(마 7:22) 그 자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믿음이 한 때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기에 

누구든 이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21)는 

천국 차단이라, "불법을 행하는 자"(:23)로서 단죄, 멸망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 편지에서

당시나 오늘날이나 형제 사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주 잘못된 인식을 엄히 질책한 것입니다(요일 1:6-2:6).

"형제 사랑 않음은 살인죄"(3:15)로 서슴없이 단정했습니다.

내 형제 곧 나와 함께 한 몸의 지체, 각 부분이 되어 있으면 

모두가 무조건 나를 위하는지라(자기를 위하지 않고)

나를 위하는 나와 똑같은 존재를 부정하면 곧 나를 부정함이니

이런 자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것이 자기 부인의 의미입니다.

자아중심을 한사코 미워하여 멀리해야 하는 것이니 

다름아닌 자살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진리)를 몰라(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아) 자아중심으로

일관했던 오늘날까지의 우리 행티였으나 이제는 성경을 통해

대오각성함으로 다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어야 하는 것입니다. 


파쇼모(fashomo, fas homo, 3운법칙)

 





2020년 9월 18일 금요일

처음부터 인간이 자연계 몸으로 살도록 창조하셨다면 사람 따라 수명 차이 없이 일률적 생존 햇수를 정하셨을 것ㅡ죽음과 생명은 엄연한 대칭인데 산 자로 창조하시면서 죽도록 만드신다는 것은 모순이라 상상조차 불허이지만

 

   
이 내용은 반복 게재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시종 자연계 존재로만 살도록 창조되었다면

3운법칙이라는 것이 아예 처음부터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

일률적으로 몇 십년만 살도록 정해져 있을 것이기에 그렇다. 

(3운법칙은 사람마다 제각기인 사망 연도를 중심한 규칙성이므로).

노아를 비롯해 아담 시대에는 천년 가까이 산다는 것도

오늘날 인류가 100세도 못채운다는 것을 감안하면 어불성설.

그러나 아담이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는데 범죄로 죽었을 경우

그런 평균 9백살 수명이 합리적인 것은 

인간의 영원한 초자연계 속성의 체력이 당장 지금과 같이

변환될 수는 없는 것이야 상식 아닌가. 그러므로

죽지 않는 초자연계 몸이었다가 범죄로 자연계 존재가 되어

우리처럼 "강건하면 팔십"(시 90:10)이라면 그것도 어불성설. 


이와 같이 성경은 빈 틈 없이 조리 정연한 합리성의 상징인데

당신이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나.

3운법칙은 오늘날 신학자들의 오만무도함에 대한 엄중 경고다.

3운법칙은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인간 주재와

성경의 진실성과 강제 규제되는 인간 삶의 허무와 무의미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장 기본 바탕이 되는

이 아담의 초자연계 속성(따라서 에덴의 동일 속성까지 포함)을

이의의 여지가 없도록 완벽하게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유의 법칙으로서의 짝의 원리는 단지 측면 지원일 뿐이다.

성경 이해의 근본 핵심이 이 아담의 "자연계 몸 죽음"에 있기에 

이와 같이 다니엘 예언서가 족집게로 집어낸 "20세기" 말에

3운법칙을 인간 세계에 나타내주신 것이다. 

3운법칙이야말로 다니엘 예언서의 "하나, 둘, 반"의 비밀이

짝의 법칙을 가리키고 있음을 그 도식(구조식)으로써

적나라하게 구김 없이 있는 그대로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

 






구원 받았다고 방심은 금물ㅡ아담은 바보가 아니었건만 그러나 범죄하여 빚어진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한 비극이었으니 이를 항상 거울 삼아야

 






"방심 않는다"고 해서 내 구원 관련해 전전긍긍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짝의 법칙에 기초한 사랑과 생명의 법칙의 <동시성의 양면성>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음이 구원이니(요 20:21,22)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일을 함(주님을 위함)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의미를 설명하실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요 4:34)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양식"이란 우리가 매일 먹지 않으면 존재가 끊어짐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살전 5:19), "성령을 근심하시게"(엡 4:30) 하지 않는 등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힘쓰는"(고후 5:9) 것을 말합니다.

사명을 받고 일단 파송된 자가 자기 업무를 소신껏 수행해 나가야지

남의 일 하듯 무사 태평 식으로 다잡아 일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게 되어 있는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약속을 내가 파기하는 경우 구원도 무효입니다. 

무효라기보다, 처음부터 계약 관계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양자가 입양하면 앙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이 요구됨은 당연합니다.

양자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 파양됨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서 구원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교회"가 너무나 세상 종교인 양 변질되어

인간이 만든 교리만 믿고 성경을 숫제 도외시하다시피 되는 통에

이런 아주 요긴한 대목인데도 가르치지도 않고 알려고도 않습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성경을 읽어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소위 "인터넷 교회" 같은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한 대로

모여서 대면해 친교하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인터넷 상으로 아무리 "교류"해보아야 "말"뿐입니다.

주님의 약속 말씀과 같이 2,3명이 모이는 곳에도 주님이 계시니(마 18:20)

모여서 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사정상 여성끼리만 모여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남편들도 전도해서 같이 모이면 됩니다. 

어쨌든 모이기를 폐하지 않아야 함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입니다(히 10:25).


북한 교회가 우리의 교회 모델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개화가 되어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판단할 때 핍박이 없어도 이미 교회는 고사(枯死) 상태이므로

일부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손보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고로 생명의 교회 활동이 시작되면 반드시 핍박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살전 3:4).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라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시대상에 부합하게 교회 운영을 지금부터라도 진행해 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대형교회도 목회자가 성경적 안목을 지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같은 선에서 교인들을 훈련/단련해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세상 또는 나라가 아닙니다. 악령들의 세상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그렇게 되었는데 인간 나라는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심으로써만 정상 실현됩니다.

고로 원수의 나라, 원수의 세상에서 포로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물론 악령 속성인 네피림도 절대 다수로서 이 세상에 서식하여

인간  행세를 하고 있으나 여기서의 고려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식별하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렇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을 원수시하는 악령들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이니 

그 옛날 야곱(이스라엘) 시대가 지난 후의 모세 시대가 이를 상징합니다.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해도 가나안 복된 땅 들어가기 전은 황야 일색입니다.

전자는 전반적인 이세상 인생살이의, 후자는 이세상 믿음 생활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땅 정착은 믿음 생활의 또다른 이면(裏面)을 말하는 바

가나안 이전은 전체 교회로서의 측면, 이후는 개인적 측면을 상징한 것이라 할까요.

어느 면으로나 범죄할 때에는 아담 범죄처럼 파멸뿐입니다. 


이 세상의 이같은 속성을 매번 강조하는 것은 세상 일에 부질없이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란 존재의 모든 시간과 모든 힘을 

과거 습관대로 내 것처럼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각자 조심하기 위함이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한눈파는 자마다(눅 9:62)

믿음 없음과 불순종으로 낙인 찍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라 하면 두려워하고 떨라고 했으면 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 경시하는 자마다 결단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바로 내 앞에 계심이니 감시자로 의식함이 아니라 

100퍼센트 "나를 돕는 자(히 13:6)"로 의식함이지만 

(그래서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멸망의 망나니 짓을 해도(히 6:6)

그냥 잠자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 분명히 함이니

왜냐면 성령으로 계심은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을 따르심이라

이같이 하나됨에는 반드시 양쪽은 자기 아닌 상대를 위함뿐이기에)

생명과 사랑의 법칙의 '동시성의 양면성'에서

나 역시 철저히 주님을 위하는 자로서의 자의식(自意識)으로 

이 세상 시험의 때를 값 있게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에 의한 자율(自律)입니다.  

때문에 말씀(하나님의 뜻)을 성경으로 확실히 밝혀주신 이상

달리 그 어떤 것으로도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힘씀, 노력,  정성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구약시대는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아 성령으로 일하시기 전이니까 

양상이 달라 여러 가지로 인도하셨으나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소위 "방언파"들이 "성령의 음성, 운운"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식의 "타율"로는 지금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때인 오늘날 "성령"으로 가장하여

악령들이 얼마든지 마음놓고 그런 일을 하는 시대입니다(살후 2:7)

지금은 그동안 "막았던" 것이 다 틔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기 통제력은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이는 누구나 발휘할 수 있지만 

오직 그 강도(強度)는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의 강도에 비례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되신 성자 하나님과 함께 사랑이신 성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 품속에 살게 해주시니 "아버지, 감사합니다"

 








설명 추가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