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18일 금요일

구원 받았다고 방심은 금물ㅡ아담은 바보가 아니었건만 그러나 범죄하여 빚어진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한 비극이었으니 이를 항상 거울 삼아야

 






"방심 않는다"고 해서 내 구원 관련해 전전긍긍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짝의 법칙에 기초한 사랑과 생명의 법칙의 <동시성의 양면성>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음이 구원이니(요 20:21,22)

주님의 뜻을 받들어 주님의 일을 함(주님을 위함)에 차질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으신 의미를 설명하실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룸"(요 4:34)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양식"이란 우리가 매일 먹지 않으면 존재가 끊어짐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살전 5:19), "성령을 근심하시게"(엡 4:30) 하지 않는 등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힘쓰는"(고후 5:9) 것을 말합니다.

사명을 받고 일단 파송된 자가 자기 업무를 소신껏 수행해 나가야지

남의 일 하듯 무사 태평 식으로 다잡아 일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책임을 지게 되어 있는 것은 명약관화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므로

약속을 내가 파기하는 경우 구원도 무효입니다. 

무효라기보다, 처음부터 계약 관계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양자가 입양하면 앙자로서의 책무를 다할 것이 요구됨은 당연합니다.

양자로서의 위치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할 때 파양됨은 물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로서 구원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교회"가 너무나 세상 종교인 양 변질되어

인간이 만든 교리만 믿고 성경을 숫제 도외시하다시피 되는 통에

이런 아주 요긴한 대목인데도 가르치지도 않고 알려고도 않습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성경을 읽어 성령의 가르치심을 사모함이 필수입니다.

그러나 소위 "인터넷 교회" 같은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 한 대로

모여서 대면해 친교하는 가운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지

인터넷 상으로 아무리 "교류"해보아야 "말"뿐입니다.

주님의 약속 말씀과 같이 2,3명이 모이는 곳에도 주님이 계시니(마 18:20)

모여서 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사정상 여성끼리만 모여도 주님은 계십니다.

또 남편들도 전도해서 같이 모이면 됩니다. 

어쨌든 모이기를 폐하지 않아야 함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입니다(히 10:25).


북한 교회가 우리의 교회 모델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개화가 되어 핍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판단할 때 핍박이 없어도 이미 교회는 고사(枯死) 상태이므로

일부러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손보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고로 생명의 교회 활동이 시작되면 반드시 핍박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살전 3:4).

그렇지 않아도 지금은 적그리스도의 때라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시대상에 부합하게 교회 운영을 지금부터라도 진행해 나가는 것이 옳습니다. 

대형교회도 목회자가 성경적 안목을 지녔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같은 선에서 교인들을 훈련/단련해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세상 또는 나라가 아닙니다. 악령들의 세상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그렇게 되었는데 인간 나라는 "마지막 아담"께서 

다시 세상에 오심으로써만 정상 실현됩니다.

고로 원수의 나라, 원수의 세상에서 포로되어 있는 인생들입니다. 

물론 악령 속성인 네피림도 절대 다수로서 이 세상에 서식하여

인간  행세를 하고 있으나 여기서의 고려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들을 식별하도록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렇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인생들을 원수시하는 악령들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이니 

그 옛날 야곱(이스라엘) 시대가 지난 후의 모세 시대가 이를 상징합니다.

종살이하던 이집트를 탈출해도 가나안 복된 땅 들어가기 전은 황야 일색입니다.

전자는 전반적인 이세상 인생살이의, 후자는 이세상 믿음 생활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땅 정착은 믿음 생활의 또다른 이면(裏面)을 말하는 바

가나안 이전은 전체 교회로서의 측면, 이후는 개인적 측면을 상징한 것이라 할까요.

어느 면으로나 범죄할 때에는 아담 범죄처럼 파멸뿐입니다. 


이 세상의 이같은 속성을 매번 강조하는 것은 세상 일에 부질없이 관심을 가져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는 나란 존재의 모든 시간과 모든 힘을 

과거 습관대로 내 것처럼 착각하여 내 마음대로 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각자 조심하기 위함이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한눈파는 자마다(눅 9:62)

믿음 없음과 불순종으로 낙인 찍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두려워하라 하면 두려워하고 떨라고 했으면 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 경시하는 자마다 결단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바로 내 앞에 계심이니 감시자로 의식함이 아니라 

100퍼센트 "나를 돕는 자(히 13:6)"로 의식함이지만 

(그래서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멸망의 망나니 짓을 해도(히 6:6)

그냥 잠자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모습이심을 성경이 분명히 함이니

왜냐면 성령으로 계심은 사랑으로 둘이 하나됨을 따르심이라

이같이 하나됨에는 반드시 양쪽은 자기 아닌 상대를 위함뿐이기에)

생명과 사랑의 법칙의 '동시성의 양면성'에서

나 역시 철저히 주님을 위하는 자로서의 자의식(自意識)으로 

이 세상 시험의 때를 값 있게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에 의한 자율(自律)입니다.  

때문에 말씀(하나님의 뜻)을 성경으로 확실히 밝혀주신 이상

달리 그 어떤 것으로도 간섭하시거나 강제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힘씀, 노력,  정성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라십니다.

구약시대는 주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아 성령으로 일하시기 전이니까 

양상이 달라 여러 가지로 인도하셨으나 지금은 전혀 다릅니다.

소위 "방언파"들이 "성령의 음성, 운운"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 식의 "타율"로는 지금은 일하시지 않습니다. 

적그리스도의 때인 오늘날 "성령"으로 가장하여

악령들이 얼마든지 마음놓고 그런 일을 하는 시대입니다(살후 2:7)

지금은 그동안 "막았던" 것이 다 틔어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키는" 자기 통제력은 

"마지막 아담"과 하나된 이는 누구나 발휘할 수 있지만 

오직 그 강도(強度)는 주님께 대한 나의 사랑의 강도에 비례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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