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당시 유대인들이 우리 주 예수님을 배척했던 똑같은 이유로
오늘날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속일 때 메시야 주님을 버리고
적그리스도를 따르게 되어 있으니 주의가 요망됩니다.
거짓말과 속임수는 항상 진리/진실과 반대로(거꾸로) 나갑니다.
악인의 처벌은 주님 다시 오실 때 철두철미하게 수행되건마는
그런데도 죄인/악인들은 지금 당장 처벌되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것은 악한 자아중심이요 하나님의 구원은 전연 도외시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근본적으로 엄청난 괴리가 있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기 전의 악인 처벌은 세상 사랑임을 다시 천명합니다.
양심의 소리는 사람마다 다 장치되어 있는 하나님의 불문율입니다.
가룟 유다도 양심의 가책에 자살까지 했지만 그는 악인입니다.
견디고 오래 참으면서 회개를 기다리는 것이 사랑의 아름다움.
이런 것이 없으면 제아무리 양심적이란 소리 들어도 구원은 없어요.
죄인들의 자리에 있어주어 그들과 함께 하나되어 고난 받으면서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도록 기도와 오래 참고 말씀 전달로
힘쓰는 것이 이 시점 우리가 오로지 전념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인내로써 열매 맺습니다. 성경은 이 <인내>를 강조합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히 10:36)이라 했으니 주님이 명백히 하신 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마 7:21) 자라야 천국행입니다.
아무리 나 구원받았네 해도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구원되지 않았다
즉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이 아니라는 증거이니까.
구원받은 증거는 다시는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니
자기 위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롬 14:7-9/고후 5:15) 단언한데서
확인되는 것이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여지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하나님 위해 그 뜻대로 행함이니
내가 과연 뜻대로 행했을까 아닐까 전전긍긍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사랑의 상대의 뜻을 기꺼이 행하는 것이니까.
아담의 범죄로 "영광의 몸"을 상실하여 이다지도 쓰라린 고생이건만,
그래서 이 "낮은 몸"을 증오하고 이런 육체로서의 삶을 무한 수치로
느껴(이따위 짓을 해놓고 세상 사랑하라 유혹하며 마귀가 부추겨)
마귀의 조종 아래 있는 세상을 단연 배격하고 타기해야 하건만,
멋모르고 마귀 장단에 맞춰 춤추는 꼴인 이세상 실상을
뼈에 사무치게 느껴야 하건만, 각성하지 못하니 개탄할 일입니다.
이세상 실상을 똑바로 인식하지 않으면 결코 "이기는 자"가
될 수 없다는 엄중 경고에 너무 늦기 전에 눈떠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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