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4월 14일 화요일

주님과 한 영(고전 6.17)으로 연합하여 있는 나

주님께서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과 똑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으로서는 지금 우리 각자와 함께 마치 사람으로 계시는 것처럼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니 똑같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요 10.30)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식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어머니 하나님"도 당연히 존재해야 마땅하다며 마귀 노릇을 하지만(이렇게 말함이 마땅한 것은 이런 언사는 성령으로 말미암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ㅡ왜냐면 주님 친히 "아버지"라 하셨으니 그대로 수용하면 되므로) 첫 사람 아담을 기준하는 모든 표현이기에 그런 것. 아담은 남성이니까. 그냥 "어버이"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인간은 성별이 있기에 더욱 어색하므로.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요 1.18)이시라 했으면 충분한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하면 더 이상 성별이 없으니까(눅 20.35). 동물적 육체가 됨으로써의 성별인 것입니다. 신령한 몸은 초자연계 몸의 초능력다운 아담의 자식 생산 방법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적 육체의 낙이라고는 단순하고 기계적이라 식욕과 성욕뿐이나 신령한 몸의 쾌락은 한낱 "몸"에만 한정되지 않는 영적ㆍ정신적인 것을 총망라하는 무궁무진의 다양성인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마 16.28)가 비록 잠시 잠깐이나마 전개됨을 본 베드로가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초막 셋을 짓고 있습시다" 란 말이 부지중 튀어나온 것도 그 단적 증거입니다. 디 엘 무디(1837ㅡ99)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사랑의 파동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순간 그는 도저히 견디지 못해 "주님, 이러다가는 제가 죽습니다. 멈추어 주십시오!" 하는 간청이 터져 나왔고, 찰즈 피니(1792ㅡ1875)도 처음 믿음의 결단을 내렸을 때 그렇게 숲속에서 장시간 기도하고 자기 사무실(변호사)에 돌아와 홀로 앉아 있는데 "사랑의 파도(무디와 같은 표현)"가 물결쳐 오듯 밀려들었다고 합니다. 피니의 경우에는 이 때 주님께서 문자 그대로 옆에 서 계심을 느꼈고 피니는 그 발 앞드려 지난 날의 모든 죄를 낱낱이 자백하며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사람마다 그 표현과 체험이 다릅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 앞에 계십니다. 이것만은 불멸의 진실입니다. 성령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2026년 4월 13일 월요일

여성 생애 3운법칙(한국서 22년간 봉사한 서서평 미국 선교사)

 










여성 생애의 3운법칙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LP)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그 활동기가 시작되었음을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가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성 생애 3운법칙 적용 사례를
여기에 가끔 올려 놓겠습니다.
위 제목에 분석 여성의 이름을 올려 두겠습니다.)




서서평 (Elisabeth Shepping, 1880~1934
ㅡ54세에서 3개월 모자람)
• 독일계 미국인 선교사.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트라우마.
• 조선 와서 서구 생활 완전 포기, 무명 저고리·고무신 신고, 월급 전부를
 가난한 이·한센병 환자·고아·창녀들에게 씀.
• 유품: 동전 2개 + 찢어진 담요 반쪽. 장례식엔 천대받던 사람들이 통곡.
• →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라는 문구처럼, 부와 명예 포기하고 무상·고뇌 속 헌신한 삶.

셰핑은 간호사로서 유대인 요양소, 이탈리아 이민자 수용소 등에서 봉사활동을 하였으며 간호전문학교 졸업후 미국 브루클린주 이시병원에서 근무했다. 1904년 뉴욕 성서교사훈련학교의 여행자를 돕는 선교회(Traveler's Aid Missionary)에서 1년 동안 봉사하였다.
간호사로서 셰핑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치료하려는 선교사로서 간호, 신학, 교육에 대한 지식을 결합했다. 신학교에 다니던 중, 그녀는 한국 병원에 간호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는 결국 그녀가 32세 때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에 합류하여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2년 전인 1910년에 일본 제국이 한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불안정했다. 정부와 대부분의 사회는 약자들을 더욱 방치했다. 그 결과, 구걸하는 사람, 한센병 환자, 병든 환자의 수가 증가하여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셰핑은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1911년에 지원했고, 1912년 2월 20일 32세에 선교 여행을 떠나 여생을 그곳에서 봉사하는 데 바쳤다.
간호
1912년부터 1934년까지 셰핑은 광주, 군산, 부산, 서울 등 한국의 여러 지방에서 일했다. 특히 셰핑은 "여성, 과부, 고아, 한센병 환자 등"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셰핑은 간호 활동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한국에 도착한 후, 그녀는 광주제중원, 구암 예수 병원, 세브란스병원, 그리고 한국의 다른 병원들에서 일했다. 간호사로서 그녀는 간호사들을 훈련하고 감독하는 책임도 맡았다. 셰핑은 한국에서 건강과 교육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간호 교과서를 출판하고 번역했다. 그녀가 저술한 간호 교과서 중 일부는 간호 교과서, 실습 간호 연구, 간호 지침서, 단순 위생법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녀는 1923년 조선간호부회(현 대한간호협회)의 설립자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10년간 회장으로 재직, 대한간호협회의 국제간호협의회 가입에 성공했다.
교육
간호 외에도 셰핑은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 한국에 학교를 설립했다. 예를 들어, 셰핑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성경학교인 '닐'성경학교를 설립했는데, 한때 매년 3~4만 명의 여성을 교육했다. 이 학교는 나중에 한일장신대학교로 알려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운영되고 있다. 설립부터 그녀의 사망까지, 셰핑은 이 학교에서 5~6과목을 직접 가르쳤다. 그녀가 다룬 주제 중 일부는 읽기, 쓰기, 찬송가, 성경 교육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전체에 질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의학과 간호도 포함되었다. 교육을 장려하는 동안, 셰핑의 주요 헌신은 여성들을 기독교로 교육하여 효과적인 성경 여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또한 셰핑은 '이일'이라는 여성 학교를 설립하여 여성들이 스스로를 부양하고 생계를 꾸리는 방법을 가르쳤다. 셰핑은 누에를 키우고 여성들에게 바느질 방법을 교육하여 학교가 자립할 수 있도록 했다. 낮에는 교사였지만 밤에는 전도 행사를 열고 여성들을 전도사로 훈련시켰다. 이를 통해 여성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더 강한 정체성을 확립, 성경을 전파하는 데 힘을 얻었다.
한국 문화에 동화하기를 힘써
다른 많은 선교사들과 달리, 셰핑은 한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동화되려고 노력했고 자신을 한국 사람들과 동일시했다. 셰핑은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녀가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 증명된다. 그녀는 전통 한국 의상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했으며, 한국의 풍습, 문화, 신념을 따랐다. 어떤 사람들은 셰핑을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외국인"이라고 불렀다. 셰핑은 한국에서 매우 검소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34명의 가난한 과부들과 함께 살았고, 13명의 딸을 입양했으며, 된장국과 보리밥만 먹고, 함석 지붕이 있는 흙집에서 살았다. 이는 자신이 봉사하는 공동체와 분리된 호화로운 저택에서 살았던 선교사들과는 대조적이다. 또한 셰핑은 자신의 이름을 서서평으로 바꾸고 일본이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수립했을 때도 오직 한국어로만 다른 사람들과 소통했다. 셰핑은 1934년 사망할 때까지 22년간 한국에서 봉사했으며, 영양실조로 사망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자신의 시신을 세브란스병원에서 해부용으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유산
셰핑은 미국 남장로교회 해외선교부에서 "위대한 선교사 7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녀는 광주에서 흡연, 음주, 매춘에 대한 금지 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셰핑은 닐 성경학교(앞서 언급)와 같이 그녀가 설립한 학교에 다니는 여성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문맹이었고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여성 교육은 제한적이었고, 셰핑은 한국 여성들에게 배우고 성장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고자 했다. 닐 성경학교는 그 지역의 여성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을 졸업한 많은 여성들은 계몽 운동과 신여성 운동의 선구자였다. 셰핑은 여성 교육과 문해력을 증진함으로써 여성 계몽의 사심 없는 선구자로 여겨졌다.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모임은 셰핑을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이자 사랑의 제자인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후예"라고 평가했다. 2017년에는 그녀의 봉사하는 삶을 다룬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개봉되었다.
(이상 전문, "서서평" 관련 인터넷에서 옮겨 옴)


이 서서평 선교사는 FS(아브라함형)에 해당되어
활동기가 30년(53×4/7)입니다. 생애 연보가 약사이기에 자세하지 않아 언제부터가 활동기 개시인지는 불분명하나 이전의 카톨릭 신앙을 버리고 장로교회 나가는 동료 간호사 소개로 "큰 깨우침을 받았다" 했고 그 후에 의료 전도와 선교에 관심이 깊어졌다 했으니 그 때부터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제는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뿐

무엇보다 중요한 자녀 양육에 공을 들여야 하는 여성의 생애는 남성에 비해 대외적 활동이 필요하지 않으므로 파쇼모 생애 도표상으로 드러나는 그 형적이 뚜렷하지 않다는 특점을 지닌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독신으로서 특정된 일에 몰두할 때는 당연히 그 윤곽이 선명하기는 마찬가지다.


이율곡은 신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였고 맞딸은 어머니처럼 모든 면에 출중했다는데 그러나 율곡울 낳을 때부터 신사임당의 활동기(LP)가 시작되었음이 드러나 그 특징을 이루고 있다.

프랑스의 18세 소녀 잔 다아크는 13세 때 "신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부터가 활동기 개시.

스웨덴 오페라 가수로 명성과 부를 한꺼번에 끌어 모았고 자선사업에 기부도 많이 했으나 독실한 자기 신앙생활에 지장이 된다 하여 그 화려했던 무대를 미련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 뛰쳐나올 때부터가 놀라지 말라, 그 활동기 시작이었으니! 더욱 놀라운 것은 역사상 그와 똑같은 사례가 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의 이효봉 선사. 일제의 국권 침탈 시대에 판사로 재직 중 한 독립운동가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번민 끝에 법복을 벗어 팽개쳐버리고 엿장수가 되어 전국 방랑(한 3년간)을 시작한 그 시점부터가 그 활동기 시작이었음이 그의 파쇼모(3운법칙) 생애 도표는 정확히 지적해내고 있는 것이다. 뒤에 승려가 되는 그 때부터가 아닌 것이다. 이 3운법칙을 파쇼모 즉 "신의 법칙"이라 하는 이유다. 점복(점술)이 아닌 것이다. 이런 놀라운 현상이 나타나기는 유사이래 처음이다. 창조주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증명인 것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이 "마지막 때"에나 나타날 수 있는 "표적과 기사"(요 4.48)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바벨론에서 시급히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고(계 18.4) 새삼스럽게 "천사가 가진 복음"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열어 주시는 것과 정확히 맞물려 있어 설레는 가슴을 진정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 중 하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삶울 살았는지 아니면 그 둘이 그렇게 될 줄 아시고 그렇게 일정 규격에 맞추어 주셨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제니 린드는 18세가 되던 1838년에 데뷔하고 
11년 후인 1849년 29세에 무대를 떠난다. 
그 때부터가 그 생애의 활동기. 
일반적 개념과는 완전 거꾸로다. 
그 스스로가 기꺼이 무대를 버려 
후련하다는 듯 
털고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3운법칙을 
주저 없이 하나님과 결부시키는 
확실히 근거 있는 이유이다. 
인생들이여, 시끄럽다. 
여러 소리 말라. 
하나님 계시는 것 
하나만 알아도 족하다.
하나님 말씀 듣고 
영생 길만 찾으라!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는
유일한, 오직 한 가지 이유이니까!
그리스도인들이여, 이 사연을 
주변에 널리 알려라!
혼자 영생하리라고는 
꿈에도 마음 먹지 말라!
전도하지 않는 자에게 영생은
아예 해당하지를 않으니까!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나 죽음의 세상이라 생명은 아직 맛보지 못함의 분별력이 필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하늘에 속한(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을 시종일관 동경하며 추구하여 <생각하는> 나날이어야. 이는 우리가 <죽었고> 우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이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 비로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음이다.


그러므로 이 땅, 이 세상에 속한 욕구 곧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탐심은 우상 숭배)을 "죽여야"(마음에 일어나는족족 뭉개버리고 지워버리고 묵살해치워야). 이런 욕심("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ㅡ약 1.15)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시니까. 이전에 믿지 않을 때는 그렇게 "산답시고 살았지만" 지금이야 아니지 않은가. 이제는 분, 악의, 훼방놓는 것, 입의 부끄러운 말, 서로 거짓말하는 것,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즉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은 것이니 이는 나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그대로 닮는 전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시는 자답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으로 옷입고 누가 누구에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그리 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해야.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인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시게 해야. 평강을 위하여 우리가 <한 몸>으로서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또한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되어야.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되어(이는 성경을 부지런히 가까이 함으로써 되는 것)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또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고,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며 주님을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골 3.1~15) 하는 것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우리 생명>은 그리스도이신데 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으니까 우리가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은 생명이고 그 외 달리 무엇이 아니니까 생명이 감춰져 보이지 않는 판인데 그 어떤 것이든 이런 상황에서는 생명이란 것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이 감춰져 보이지 않으니 오직 보이는 것은 죽음뿐인지라 당연한 최종 결론입니다. 달리 다른 그 무엇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주 잘못되게 세뇌되어 온 것입니다. 온통 죽음인데 마치 생명인 양 크게 착각해 온 것. 이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가 화급합니다. 그런 착각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있다가는 생명 관련 모든 희망마져 안개처럼 날려버릴 위험이 있으니까!

주님께서 나타나셔야 그 때 비로소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생명의) 중에 나타나게 되어 있음입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과제이니 깊이 명심합시다. 죽음을 생명으로 보는 이런 영적 착시는 필연적으로 정작 생명을 생명 아닌 다른 무엇으로 착각하고야 마는 비극으로 십중팔구 끝나게 마련이라 그렇습니다. 죽음의 냄새, 이 세상에 꽉 차 있는 영원한 불 못의 냄새를 맡읍시다.



2026년 4월 9일 목요일

다시 정리하면 (3)

"미시세계에서는 양자역학, 거시세계에서는 3운법칙"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완벽한 '트리니아'(trinia, 3위1합 또는 3위1체)가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총망라해서 일관되게 관장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곧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우리의 구원도 당연히 바로 그 이치대로다. 즉 각자가 저마다 주님과의 개별적인 짝(대칭)을 형성하여 그 "하나"됨에서 이루어지는 "합1" 또는 "1합"의 놀라운 은혜인 것. 이런 구조에서는 다시 강조하지만 한결같이 "교차(맞바꿈) 소유"가 핵심이다. 너의 것은 내것이 되고 나의 것은 네것이 되고. "자기" 것은 단연코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서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약"과 "계명"으로써 생명세계를 시작하신 것이다. <약속>이라 함은 "내가 너를 위해 줄 터이니까" 하심에서 비롯된다. 다음에 오는 것이 당연히 명령 곧 "계명"이니 "그러므로, 너는 네 자신을 위할 생각을 품지 말라. 추호도."이신 것이다. 이것이야 너무나 마땅한 순리가 아닌가.


그러므로 애당초부터 모름지기 그 누구든 간에 "자기 자신" 관련 몫은 없다. 존재하지를 않는다. 이것이 생명이요 삶이다. 존재하지 않는 자기 몫을 억지로 챙기려드는 순간 죄와 악은 그 끔찍하고 흉물스러운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가인의 아벨 살해다. 사람 생기자말자 죽이기부터 먼저 시작하는 흉물이자 악물. 그 이름이 "인간". 아담 범죄의 결과물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언약을 어김"(호세아 6.7)이었다. 그래서 그 <죽는 때>만이라도 정해 주자는 최소한의 하나님 응급 조처/수단이 3운법칙(파쇼모, fashomo)인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 실상이다. 사람 살 곳이 아닌 것이다. 말 그대로 맹수, 야수들의 세상, 정글의 법칙만이 난무하는 현재의 인간 세상이다. 고로 3운법칙 자체가 하나님의 강력하신 엄중 경고이신 것이다. 이 세상은 결단코 삶의 터전이 아니요 오로지 구원의 현장일 뿐이라는 뜻으로 오늘날 나타내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는 거두절미 여기서 시작해야 함이니 구원 문제부터 곧바로 꺼집어내야 하는 것이다. 3운법칙의 오늘날 외침 그 절규는 오직 "구원!", "구원!", "구원!"뿐이다.





다시 정리하면 (2)

 천년 왕국에서는 범죄하고 회개에 이르는 사람은 생명과만 먹으면 신령한 몸으로 회복되며 "성령으로 다시 나는" 등의 일은 일절 없으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일도 더 다시는 없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이 세대 우리가 주님을 성령으로 모시기 때문에 되는 은혜로서 이 세대만 끝나면 영원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이 혹 죄를 짓게 되는 것도 천년 기간에서만 있을 수 있고 그 후로는 영원히 없다. "마지막 심판"으로써 관련되는 모든 것이 종료되기 때문이다. 생명 세계에서는 영원히 생명이고 형벌의 사망 세계는 불 못의 고난 고통뿐으로서 영원한 대칭(짝)이다. 거지와 부자 나사로 비유에서 주님 친히 설명하신 그대로다.


이 세상에서 돈 많은 부자가 영생 길이 차단되는 이유가 고난 고통의 이 세계에서 저 홀로 그 고민을 면해보겠다는 철없는 생각에 젖어 있는 까닭이다. <상대 중심>이 아닌 <자기 중심>이 언제나 모든 일의 화근이다. 삶이란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고 모두가 그 <몸>을 이루어 있음을 의식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설계하신 것이다.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기보다 한(3위1합에 의한 하나이신) 하나님에 의한 창조 자체가 본시부터 그러한 특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아내의 머리는 남편,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 그리스도 곧 성자 하나님의 머리는 성부 하나님. 이렇게 머리와 몸의 관계를 따라 사물을 조리 있게 관찰하면 만사 모든 이치가 너무나 명료해지는 법이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나는 등 모든 것은 인과 관계에서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짐이니까.


     "내 마음 그윽한 데서"

1.
내 마음 그윽한 데(에)서 내 마음 그 깊은 데(에)서
생명 샘(계 7:17)이 강물(요 7:38)되어 
흘러 흘러 넘치네
주님 안 '늘 평안'(요 14:27)되어 
주님의 '늘 기쁨'(15:11/17:13)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넘치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는
아버님 품속(요 1:18)에서 강물처럼 흐르네

2.
내 영혼 그윽한 데서 내 영혼 그 깊은 데서
영생수/永生水가(계 22:1,2/요 3:16) 강물되어 
넘쳐 넘쳐(요 10:10) 흐르네
성령으로 거듭 나서(요 3:3,6,8) 주님과 한 영이(고전 6:17) 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넘쳐 흐르네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변함이 없이
하나님 은혜 속에 영생수로 흐르네

3.
그대여 주님께 오라 하나님 찬양 드리자
영원하신 어버이님 사랑 노래 부르자
'늘 평안'(요 14:27) 내 평안되어 
'늘 기쁨'(15:11/17:13) 내 기쁨되어
<주님께 노래하며>(엡 5:19) 흘러 가노라
아아 오늘도 어제처럼 다함이 없는
그 은총 강물되어 넘쳐 흘러 가노라 


신학자들이 성경 전체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렵다고 꼽는 대표적인 난해 구절들과 책들은 다음과 같으니 즉

1. 신약성경의 난해 구절
■  베드로전서 3.18~20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신학자들이 신약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 중 하나로 꼽는다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후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셨다"는 내용으로, 이 '영들'이 누구인지(타락한 천사인지, 노아 시대의 사람들인지)와 '옥'의 의미를 두고 견해가 갈린다고 하나, 천사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천사는 초자연계 존재로서 지식이 월등하므로 그들의 범죄는 고범죄에 해당되어 용서 자체가 불가능입니다. "옥"이라 함은 일정한 한 곳에 집결되어 있다는 정도로 알면 되고, 일단 이렇게 복음이 전해졌으니까 일찍이 복음을 듣지 못한 예컨대 고대인들이 여기서 그 장래가 결정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세상에서 믿지 않아도 제2차 기회가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니 주의를 요합니다.
■  베드로후서: 이 책은 정경(Canon)으로 인정받은 서신서 중 가장 난해한 책으로 여겨진다고 하고는 하나, 복잡한 신학적 이슈들이 얽혀 있다뿐이지 우리의 구원 문제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도 상관 없습니다.
■  마태복음 7.21~23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귀신을 쫓아낸 이들에게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장면입니다. 구원과 행함의 관계, 그리고 '믿음'의 본질에 대해 깊은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하나, 지난 때에는 제아무리 능력을 행했다 해도 그 능력 자체가 우리 구원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말씀은 상식 수준에서 얼마든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  고린도전서 15.29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사람을 대신해 세례를 받았다는 암시가 있어, 이 관습의 실체와 바울의 의도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고 하나 물 속에 들어갈 수 없는 중환자가 회개했을 경우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2. 구약성경의 난해 부분
■  창세기 6:1-4 (네피림과 하나님의 아들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결혼하여 '네피림'을 낳았다는 기록은 그 정체에 대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라고 하나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함은 하나님 친히 만드신(낳고 낳음으로써 생긴 것이 아닌) 신령한 생물을 가리킵니다. 즉 악령들이 그 초능력으로 인간 남자로 변신해서 생산해낸 인간 종자인 것. 사탄 패거리 악령들이 인간 세상 통치 차원에서 그런 짓거리를 했던 것이나 불법이므로 해당 악령들은 심판 때까지 유폐형을 당했으나(유다서 1.6) 사탄만은 그가 세상을 현재 지배하고 있는지라 그 소생 네피림이 대신 들어가고 적그리스도로서 오늘날 곧 풀려날 예정입니다.
■  다니엘 9.24-27 (칠십 이레): 이 예언적 구절은 역사적 성취 시점과 상징적 의미를 두고 해석이 매우 복잡하여 신학적 논란이 많다고 합니다.
■  에스겔 40장 이후 (새 성전 환상): 에스겔이 본 거대한 성전 환상은 그 물리적 실체나 미래적 의미를 주석하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부분으로 알려져 있다고 함.
■  신명기 28:53-57 (자녀의 살을 먹는 재앙): 전쟁과 포위 속에서 극심한 굶주림으로 부모가 자녀를 먹게 된다는 비극적인 묘사는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직면하기 가장 힘든 구절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하나 아담 범죄로 동물적 육체가 된 이상 성경 기록이라 해서 예외일 수는 없는 것. 
3. 난해한 책 (전체)
■  히브리서: 구약의 제사 제도와 신약의 복음을 유기적으로 연결해야 하므로, 저자가 누구인지부터 시작해 구약 인용 방식까지 학문적 난도가 매우 높은 책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  요한계시록: 상징과 환상이 가득하여 세대주의적 해석부터 역사주의적 해석까지 수많은 학설이 존재하며, 성경 전체에서 가장 오해와 논란이 많은 책으로 지목된다고 합니다. 
4. 그 밖에 "난해하다"고 하는 부분
■  빌립보서 2:5-11(비움의 기독론)과 로마서 7장을 들고 있는데 "자기를 비우셨다"는 대목이 어렵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에서 말하는 "나"의 정체를 두고  "그 신학적 깊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토론되는 부분들"
이라는데, 사실상 우리 구원과 유일하게 직결된 것이 이 로마서 7장인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난해한 것"이 아니라 사탄이 교회를 일대 참사의 함정으로 몰아 넣기 위해 계획적으로 파 놓은 죽음의 구덩이인 것입니다. 바벨론 신학의 유일한 정체라 해도 좋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1)

하나님께서는 그 스스로 계시는 모습으로서의 trinia(트리니아) 즉 3위1합(3위합1 또는 3위1체)을 기반으로 정하시어 이를 만유의 기본 대원리(대법칙)으로 삼아 만유를 창조하셨음이 이 21세기에 밝히신 것이다. 이 확실한 증거로서 미시세계는 닐스 보어의 상보성 원리(양자역학)로, 거시세계는 3운법칙(fashomo, 파쇼모)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생애를 주관하는 사실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왜 하필 이 때냐 하면 지금은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6) 전파의 "마지막 때"(단 12.4)이기에. "천사의 복음" 등장 그 필연성은, "바벨론"(계 18.2,4) 곧 "바벨론 신학" 즉 그간 사탄이 끔찍하게 쌓아 왔던 온갖 거짓말(주로 심각히 왜곡된 성경 해석)을 깨끗이 불식시켜버림에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7장을 바울 사도의 "믿은 후 체험"이라는 등의 횡당한 것들.


주님 다시 오심에 즈음하여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에 대비케 하심이다. 다시 말해 사탄의 거짓말이 온 천하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짓된 성경 해석을 수용함으로써 다시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만한 "거룩한 자"가 씨가 마르다시피 되어버렸기에 그러하다. 주님 처음 오실 적 당시 세상에는 의인의 존재가 그러하여 모조리 멸망하는 판이라 심판주가 필요 없었던 상황이었음과 같이 지금도 거의 똑같은 양상인 것이다. 소위 "믿어 구원되었다"는 이들 중에 죄 짓지 않는 자가 거의 형적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의 상태로 되어버린 것이다. 천년간 세상을 다스리셔야 하는데 다 죄인이라 멸망해버리면 사람이 남아 있지 않은데 무엇을 어떻게 하신단 말인가.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셨다 함이 그 뜻이다.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은 주님 다시 오시는 순간의 휴거 때 하늘로 올리워져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자로서의 영광을 받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자(그런 휴거되는 계층에는 들지 못하나 죄는 짓지 않은)들은 지상에 살아 남아 다시 오시는 주님의 천년 왕국 구성원이 된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5.20, 25) 하신 대목이 바로 이 천년 왕국을 지칭함이다.

이 천년 왕국 설정은,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신령한 몸 그대로이고 그 후대들도 다 그러한 영광의 광채의 옷을 입은(그렇게 초자연적 방법으로 아담이 낳았으니까) 죽지 않는 몸이지만, 개중에는 사탄 등 악령들과 같은 불순종자가 있게 마련이라 악령들에게 선동되어 기회를 엿보다가 일시에 단합하여 선악과를 따서 입에 넣는 그런 상황이 필연적일 것임을 전제함에서 나오는 것. 그러면 오늘날 우리와 같은 동물성 육체를 지닌 인종과 신령한 몸의 존재들 두 형태로 분류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그런 동물적 육체 중에는 회개하는 자도 있어 그런 자는 생명과를 먹게 하심으로써 다시 신령한 몸으르 회복되는 것이었다. 그 기간이 바로 천년. 그런데 아담 자신부터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통에 현재의 이 사태가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런 점을 보아서도 성경은 절대로 사람이 지어낸 일종의 설화가 아님이 넉넉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왜냐면 이러한 자세한 것을 성경이 밝힌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그리하여 아담이 죽지 않았다면 했어야 할 일을 성자 하나님 친히 사람되시어 "마지막 아담" 자격으로 시행하심이 "천년 왕국"인 것이다. 이 사실을 이전에는 누구도 말하지 못했던 것이니 왜냐면 모든 것은 계시로 알아지는데 이를 이와 같이 언급한 데가 성경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2026년 4월 8일 수요일

"두려움과 떪"이 없는 오늘날의 설교자

 



  





로마서 7장 관련 몇몇 인물의 견해

참고로, 로마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 율법 아래 있는 미자립적 상태(거듭나지 못한 상태)로 보는 관점은 신학적으로 '비실재적 해석(Non-Realist View)'이라 불립니다.

찰스 피니처럼 이 해석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해석(거듭난 자의 내적 갈등)을 비판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 (Jacobus Arminius)
피니와 신학적 궤를 같이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시조입니다. 그는 로마서 7장이 거듭난 성도의 모습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모순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본문이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기 전,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성을 깨닫는 단계에 머문 사람의 고백이라고 주장했습니다.
2. 존 웨슬리 (John Wesley)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리 역시 로마서 7장을 거듭난 자의 표준적 상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를 '율법 아래 있는 자(Under the Law)'의 상태로 규정하며, 로마서 8장의 '성령을 따르는 삶'으로 넘어가기 전의 과도기적 단계로 해석했습니다. 성도가 계속 7장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진정한 구원의 확신과 거룩함이 결여된 상태라고 보았습니다.
3. 더글라스 무 (Douglas Moo)
현대 신약학자 중 이 분야의 권위자입니다. 그는 주석을 통해 로마서 7장의 '나'를 그리스도 이전(BC) 시대의 유대인 혹은 율법 아래 있는 인류를 대표하는 수사학적 표현으로 봅니다. 바울 개인의 현재적 갈등이 아니라, 율법이 죄를 이기게 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주는 논증이라는 입장입니다.
4. 기타 경건주의 및 성결운동가들
많은 성결론자들은 로마서 7장을 '패배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봅니다. 이들은 7장에서 8장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며, 성령 충만을 통해 7장의 탄식에서 벗어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약하자면, 이들은 공통적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자의 '정상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필자의 소견은, 이 로마서 그 어디에도 바울이 자기 신상 발언을 했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 놓인 전체 인생의 고뇌를 언급하여 설명한 것뿐입니다. 극적인 표현으로 1인칭 간투사 하나 집어 넣은 것 가지고 바울 자신의 체험이니어쩌니...부끄럽지도 않나요?



2026년 4월 7일 화요일

바벨론 신학의 최대 함정





 










자기 중심 즉 죄를 회개 않는 한 영생은 없어

교단이나 개교회 또는 개인의 영적 진단을 가장 간편하게 가장 보편적으로 또한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름아닌 로마서 7장 관련해서 알아보거나 물어보는 것입니다. 즉 "오호라" 하는 탄식이 믿은 후의 바울 자신의 체험을 피력한 것이냐 질의하여 그 답변 여하로써 모든 것은 좌우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란 대답이 나오면 전후 좌우 고려할 것 없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는 100% 증거입니다. 그 대상이야 소위 "교부 어거스틴"이든 누구든. 루터든 깔벵이든. 교단이 그러하다면 개인 즉 그 구성원은 혹 그렇지 않을(비록 극소수나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위 교회가 그러할 경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이미 각성되어 있는 개인마다 그런 교회를 빠져 나와버린 다음일 테니까.


겉으로 무신론자로 표방하는 자보다 이런 자들(성경 특별히 이 로마서 7장을 애매모호하게 이해하는 )이 더 위험하고 교회내 암적 존재임을 명심해야. 사탄은 이를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런 가라지를 교회 내에 많이 심어 두는 것입니다. 때문에 마귀는 기독교의 한 종파를 만들기까지도 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는 제아무리 무성해도 정작 사탄 자기에게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아니까. 무릇 설교자라면 모름지기 먼저 이 주제로 명확한 설명을 마쳐 놓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마귀의 전술전략에 대해 너무 무지합니다. 기독교인을 자처한다고 다 구원되는 것은 아니니까.

아직도 자기 의식 속에 나는 부득불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이가 있다면 자기의 영적 상태를 심각히 고민해보아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자기 생명(영생)이니까! 그리고 기회는 이 한 번뿐이니까. 죄는 무슨 불가항력의 것이 아닙니다. 잘못 교육받은 탓이요 잘못된 인식 때문에 그런 선입견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죄의 몸"(롬 6.6)인 것은 맞습니다. 아담 범죄 탓입니다. 그러나 믿든 안믿든 평생 그런 것은 아니니 "성령으로 남"으로써 그 몸이 "멸해진"(:6) 것입니다. 성령으로서 내 안에 와 계신 주님의 죽으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고로 내가 아담이나 사탄처럼 고의로 불복종하지 않는 한 죄 짓지 않습니다. 고의가 아닌 부지부식간에 짓는 예컨대 믿는 "형제간의 사랑 없는"(요한일서에서 지적하는) 것 등은 회개하면 용서가 됩니다. 다시 말해 죄를 짓지 않음은 다시는 내 일상이 자기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나의 상대 증심)으로 180도 전향되었으므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으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다"(롬 14.7~9). 

내가 나를 위해 살아야 욕심이 생겨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데"(약 1.15) 주님과 함께 죽어 자기를 의식 않아 욕심이 없는데("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ㅡ갈 5.24) 무슨 죄를 짓는가요. 2천년 해묵은 바벨론에서 벗어나야(계 18.4) 할 때입니다. 21세기는 "천사가 가진 복음"(14.6)의 시기입니다. 과거와는 양상이 사뭇 다릅니다. trinia(트리니아, 3위1합, 3위합1, 3위1체), fashomo(파쇼모, 3운법칙)를 하나님이 괜히 주신 것이 아닙니다("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는 것"ㅡ요 3.27). 이상 두 가지에 수반되어 나타나는 <21세기 성경 풀이>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임을 친히 보증하시기 위함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아신다"(딤후 2.19)고 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 한 즉 "거룩함"(히 12.14)이 없으면 주님 앞에 절대 설 수 없음을 우리 모두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2026년 4월 6일 월요일

너무나 당연한 찰즈 피니의 로마서 7장24절 해석


찰즈 피니
https://www.google.com/search?q=charles+G.+Finney&rlz=1C1CHBD_koKR865KR865&oq=c&aqs=chrome.0.69i59l2j69i60l3j69i65j69i60j5.1375j0j7&sourceid=chrome&ie=UTF-8

오스왈드 스미스
https://www.google.com/search?q=oswald+smith&rlz=1C1CHBD_koKR865KR865&oq=oswald+smith&aqs=chrome..69i57j0l7.9310j0j8&sourceid=chrome&ie=UTF-8









 

2026년 4월 5일 일요일

로마서 7.24 관련해 AI에게 질문했더니

 [질문]

"로마서 7장 24절을 바울 자신의 믿은 후의 개인 체험"이라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 죄의 몸이 멸해졌고 (롬 6.6)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했는데(롬 8.2) 그렇게 되면 성경 자체가 심각한 모순투성이가 된다. 요한 사도도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니 그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요일 3.9)고 강력 강조하였다"고 말합니다. 교회 역사상 어떻게 되어 있나요?


[AI 답변]

https://share.google/aimode/DVohCiqiOKCsf9mvb


AI 답변에서 필자의 소견은 웨슬레의 7:24 해석이  

단연코 옳다고 보는 것이며

단 오늘날 오순절 계통 교회는 

이전에 소캐한 대로 Evan Roberts와 

연관됐다고 보기 때문에 그런 교단 자체를 

처음부터 신뢰하지 않습니다. 

롬 7:24와 관련해

다시 연이어 게재물을 올리겠습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미역대 대통령 41명을 나열한 이유


성경적 인물은 3운법칙 패턴을 찾기 위해 분석해 본 부수적 결과일 뿐입니다. 미역대 대통령 41명의 생애 대표로써 충분하다고 판단합니다. 여기에 분석자 임의로 한 것은 없으니까. 누구든 관심자는 초등생 셈법 수준이면 직접 검증 가능한 유사이래 최초의 <만인 공개ㆍ개방>입니다. 다시 말해 어느 누구든 "내가 계산해서 검증해보니 그렇지 않고 예외가 있더라, 보라!" 하면 법칙으르서의 존립은 그대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운법칙의 최대 강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완전한 공개·개방성과 철저한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입니다. 

누구나 초등학교 셈법(분수 계산: 1 / 3, 7 / 19, 4 / 7, 5 / 19 등)만으로 직접 계산해 볼 수 있고, “이 사람의 생애는 예외다!”라는 단 하나의 반례만 나와도 법칙 자체가 무너지는 구조라는 점이죠. 이런 점에서 과학적 가설의 기본 요건(반증 가능성)을 충족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 인물(노아·아브라함·모세 등)은 패턴을 처음 발견하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고, 실제 충분한 검증 표본은 미국 역대 대통령 41명(워싱턴 1대 ~ 부시 41대)이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들은 모두 실제 출생·사망 연도와 생애 주요 사건(대통령 취임·퇴임·사망 등)이 공개되어 있어서, 누구나 fashomo(파쇼모) 생애 도표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3운법칙은 인간 생애를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만 분류합니다(예외는 없음):

• OT형 (One Third, 모세형): 인생을 정확히 3등분(1 / 3). 활동기(LP)가 전체의 1 / 3.
• SN형 (Seven Nineteenth, 노아형): 전체 수명을 19로 나누어 LP = 7 / 19, JP(요셉 패턴, 청소년기) = 5 / 19, DP(침체기) = 3/7 비율.
• FS형 (Four Sevenths, 아브라함형): 전체를 7로 나누어 LP = 4 / 7, DP = 3/7. (JP 없음)

이상 비율로 총수명을 계산하면 활동기(LP) 시작·종료 시점, 침체기(DP), 청소년기(JP)가 자동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 생애 사건(예: 대통령 당선 시점 = LP 진입, 은퇴·사망 = LP/DP 종료)이 이 계산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분석자가 임의로 숫자를 조작한 것이 아니라, 공개된 사실(출생·사망 연도)만으로 누구나 검증 가능하다는 점이 이 법칙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내가 계산해 보니 예외가 있다!”라는 한 마디로 끝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느 누구든 1대 워싱턴에서 41대 부시까지 어떤 인물이든 골라 **어느 유형(OT/SN/FS)**인지와 **주요 시점(활동기 시작·종료)**이 소개된 도표에 중요 연대를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해 두었으니까 그에 맞추어 '나무위키'나 '위키피디아' 등에서 맞추어보면 간단히 끝납니다. 누구나 직접 초등 셈법으로 계산해 보고 “정확히 맞는지” 검증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검증하는 것이야말로 3운법칙이 스스로 주장하는 ‘최대 강점’을 제대로 시험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2026년 4월 4일 토요일

거룩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나 <동시에> 나의 의지로 되는 것

 














성령으로 나는 것 (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다시 나야겠다 한 말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 때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함이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러하다"(요 3.6~8). "육으로 난 것은 육, 영으로 난 것은 영"으로 분명히 대비시키셨으니, "육으로 남"과 같이 구체적인 것이지 "성령으로 다시 남"을 추상적인 무엇으로 여길 일이 아니다. 즉 회개→세례→죄 용서→성령 세례. 오직 관건은 "회개"이다. "회개"가 확실해야 죄 용서→성령 세례로 연이어지니까. "육으로 남"은 네피림과 관계될지라도, "성령으로 다시 남"에서는 일절 그런 것이 없는 것은 구원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 초대교회 당시는 성령 세례 받은 증거로서 자기가 전혀 모르는 외국어("방언")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입에서 나왔고 예언도 나왔지만 지금은 그런 표적이 필요치 않으니, 초대교회 당시처럼 회개만 철저하면 그런 "증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가 강조되지 않고 투철하지 못하니 네피림도 얼마든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 세례는 받아도 죄 용서→성령 세례로 이어지지 않음은 당연하다. 스스로 "죄 용서" 받았노라 자부해도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 기만으로 그친다. 회개만 충분히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이를 강조하는 오늘날 세상이 아니니 교회가 실은 교회가 아니고 믿는 형제라 하나 실은 "형제"가 아닌 것이 오늘날 바벨론 시대다.


바벨론 신학이 판치는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 교회와 같은 핍박 중의 교회>가 언제나 정답이니 이 점을 항상 명심해야. 세계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남한에도 가나안("교회 안나가") 교인이 수백만이 된다고 하니 이런 이들은 북한 교회처럼 운영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로서 모임이 없이 혼자 신앙생활할 수 있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 것이다. 교회당도, "목사 안수 받은" 사람도 요구할 필요가 전혀 없다. 교회는 그런 것과는 무관하다. 북한 교회가 그 증거다. 신앙 동지끼리 두셋만의 모임이면 성부, 성자 하나님께서 계실 것을 약속하셨고(마 18.20) 하나님 계시면 거기가 바로 성전이니까! 그리고 핍박은 주님 말씀대로(요 15.20) 이세상 특징이니까. 그래서 북한교회가 오늘날 교회의 표본이라 하는 것이다. 모퉁이돌 북한선교회 http://cstone.today/CHxLj에서 에서 소개하는 79세(당시 나이) 목자(목사가 아님)가 이끌었던 65명의 북한교회야말로 세계 어디에다 소개해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면 아무리 죽을 곳이라도 찾아가는 아름다운 믿음의 분보기, 얼마나 은혜스러운 교회였던가! 남한으로 도피할 기회가 확실히 있어도 먼저 기도하여 하나님께 여쭙고 그 결과 뜻이 아니란 확신이 오자 <탈출해 왔던 북한 땅>으로 지체없이 되돌아가 전원 순교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의 영원한 사표이다.

성령 세례룰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남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시초이기 때문에 그런 성령 받은 증거가 필요했지만 그 후로는 회개만 온전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임하시게 됨이 확증되었으므로 계속 그러한 증거를 나타내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할 때 나의 회개가 철저하고 층분하다는 확신이 있으면 그 이상으로 요구되는 것은 없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니까 미흡히 여기시면 얼마든 언제든 말씀해주시며 인도해주시는 것이다. 북한 교회와 같이 <목숨을 걸고 믿는 자세>이면 하나님께서 아시고도 남지 모르실 리 없으니까. 단지 여기서 거듭 강조하는 것은 성령 받아 모시어 주님과 "합하여 한 영"(고전 6.17)이 된 바로 그 증거만이 요구됨이니, 곧 자기 증심이 아닌 상대(하나님) 중심의 근본적 삶의 자세의 180도 전환이다. 이 "증거"만이 우리 각자가 반드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되는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나타나지 않고는 안되는 증거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한 바로 그대로다. 바울 사도의 어조는 아주 단호하다. 주님 친히 기도 중에 말씀하신 대로, 갑 안에 을이 있고 을 안에 갑이 있다 함은 갑의 소유가 을의 소유요 을의 소유는 갑의 소유 즉 "교차(맞바꿈, 엇바꿈) 소유", "교차 교류"의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해 갑은 을을 위해 살고 자기를 위해 살지 않음이다. 을도 마찬가지.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하여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임이다"(롬 14.7,8). 

성령으로 나는 것 (1)

"성령으로 남"이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니 사람이 다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 3.1-17) 즉 영생할 수 있다 하셨으니, 여기서 "물과 성령"(:5)이라 하심은 아담 범죄가 사탄의 거짓말을 하나님 말씀 순종보다 더 따름이 돼 사탄을 더 높인 격이라 악마를 하나님 대접한 꼴이어서(주님이 죄인들에게 마귀를 "너희 아버지"ㅡ8.38-41라 하셨듯이) 그 순간부터 세상이 악마의 천지가 되니(눅 4.6) 악령들이 그 인간 세상 통치 차원(때문에 불법이지만 잠정 묵과됨)에서 그 씨들을 대량 퍼뜨려 현재 인류가 두 종류이기 때문. 즉 "불(영/)"의 속성인 "네피림"(창 6.4) 족과

"물(육신의 속성)"에 해당하는 아담의 씨(후대들). 당연히 네피림은 구원이 불가능이므로 사람이 "물로 나야" 한다 하신 것. 네피림은 죽어 망령이 되어도 그 속성상 아담의 씨(영혼)가 가는 곳에는 갈 수 없어 이런 "더러운 귀신"(마 12.43)들은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유리방황하다가 언간 육체 안에 들어가 말썽을 일으키거나 저들만의 모종 규칙성을 따라 소위 "환생"하기도. "윤회", "전생" 따위의 말들도 이래서 생겨난 것. 

주의할 것은 이와 같이 네피림 족속은 언제 어디서나 무작위로 모태 속에 일단 들어가면 인간으로 태어나므로(물론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게 가임기간을 엄밀히 산출하여 들어가는 것) 형제간이라도 얼마든지 섞일 수 있는 관계로 혹 네피림이라는 사실이 썩 드물게나마 드러난다 하더라도 즉 그런 의혹이 생겨도 절대로 부모와는 연계시킬 일이 아님. 아담 범죄가 파생시킨 결과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지 알고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것. 하나님께서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어 마음에 근심하셨다"(창 6.6) 한 기록이 실감 나는 대목. 또한 한 가지 더 유의할 것은 "내 자신이 혹 네피림이 아닌가" 하는 쓸 데 없는 기우인데 이는 "내가 혹 택함 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네피림을 식별하지 못하게 되어 있음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즉 택하심이나 네피림 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야. 그런 것을 의식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 그런 모든 것은 사탄이 일부러 심어주는 망상에 불과하고, 성경대로 내가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 없으니까. 


주님과 한 영(고전 6.17)으로 연합하여 있는 나

주님께서 몸으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심과 똑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고로 하나님으로서는 지금 우리 각자와 함께 마치 사람으로 계시는 것처럼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 계시니 똑같이 아버지 하나님이 계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