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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
1907년 한반도를 관통하신 성령의 생명 강(요 7.39)
WHEN THE SPIRIT'S FIRE SWEPT KOREA조너선 고포스(1859ㅡ1936)
제가 한국교회 부흥('1907년 대부흥'을 말함ㅡ본문 게시자) 관련 글을 쓰는 것은 제가 너무나 큰 영향을 받은 까닭입니다. 한국 교회가 이룩한 모든 희생을 생각하면 제가 주님 앞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새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중국 교회 형제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 주면 눈물을 흘리는 이가 많았습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값으로 사신 바 된"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이 한국에서의 복음의 승리를 듣고 진심 부끄러워 하고 겸비해짐을 느낄 것입니다. 대부흥이 일어난 1907년 저는 한국의 주요 선교지 여덟 곳을 돌아다녀 보았습니다. 중국에 돌아가 묵덴의 중국인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전하니 깊이 감동하고 있었습니다. 배대호에 가서 거기 선교사들 상대로 한국 교회에 베푸신 주님의 축복 이야기를 하자 선교사 몇몇이 눈물을 흘리며 중국에도 같은 은혜의 축복이 임하시도록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또 다른 요양지 치쿵샨에 초청받아 가서 한국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요일 저녁이었는데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싶어 이내 축복 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움직이지를 않아요. 죽음과 같은 정적이 흘렀거던요. 6, 7분 정도 지났을까 갑자기 청중들 사이에 억눌렸던 눈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죄를 고백하며 다툼, 화 낸 것 등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임이 끝난 것은 늦은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모두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나흘을 그렇게 기도하며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선교사들 간에 제가 경험한 중에 가장 놀라운 시간이었어요. 우리는 중국 교회가 부흥될 때까지 매일 오후 4시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였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심을 느끼기 시작했고 1908년 초부터 만주 및 다른 데에서도 같은 능력이 크게 번저감을 보았습니다.
부흥의 시작은 1903년 한국에서 처음 나타났습니다. 동부 해안 원산의 하디 박사는 선교사들 주최의 소규모 집회에 기도 관련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및 다른 성경 구절을 통해 강연 주제를 준비하는 동안 성령의 가르치심을 많이 받아, 기도 관한 강연을 했을 때는 모든 선교사에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연속해 한국 형제들에게도 강연을 했는데 역시 대단한 감명을 준 것이었습니다. 하디 박사는 한국 전역 열 곳의 선교 센터에서 같은 강연을 했고, 1904년 한 해 동안 1만 명이 하나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부흥은 1906년까지 강력한 영적 결실을 맺으며 지속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의 이 보다 크신 역사에 대해 평양의 스왈렌 씨는 1907년 6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906년 중반까지 누렸던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한국에서 보게 될 줄은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선교 결과는 중국, 일본 등 타 지역의 결과와 비교해 보아도 우리의 헌금 규모가 그 어떤 곳보다 훨씬 컸거던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받은 것보다 더 큰 축복을 하나님이 해 주실 리 없다고 나름 생각했지요. 그런데 1906년 9월 서울에서 뉴욕 하워드 애그뉴 존스턴 박사가 1905년에서 1906년까지의 인도 카시아 지방에 일어난 부흥 운동 관련 얘기를 해 주었을 때, 우리는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곳에서는 2년 동안 8,200명의 회심자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갈급한 심령이 되어 핑양으로 돌아왔지요. 평양에는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부 소속 20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므로 카시아 산지에서보다 핑양에서 더 큰 축복을 주실 리 없다고 생각되어 그래서 더 큰 축복이 임하실 때까지 정오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한 달쯤 기도 모임을 가진 후, 한 형제가 '한 달 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특별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처럼 복음전파의 일을 하면서 각자 편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합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주님께서 카시아에게 허락하신 것을 핑양에게도 허락하실 것이라 믿고 기도 모임을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기도 시간을 줄이는 대신 늘리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을 정오에서 오후 4시로 바꾸어 원한다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다른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누군가 격려가 될 만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으면 기도하는 동안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약 4개월간 기도했고, 그 결과 모두 감리교네 장로교네 하는 차별을 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만 의식했다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교회 연합, 무릎 꿇고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 연합이었고, 영원한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었습니다. 이 무렵 스왈렌 씨는 블레어 씨와 함께 시골 외딴 마을을 방문했는데, 평소처럼 예배를 인도하던 중인데 많은 사람이 울면서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스왈렌 씨는 이런 이상한 광경은 처음 본다며, 이 난데없이 사람들을 휩쓰는 감정적 파동을 잠재우기 위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여러 번 시도해도 소용이 없자 그는 "다른 분"께서 모임을 주관하시고 있음을 깨달아 경외심에 사로잡혀 이제는 최대한 자리를 피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기쁨으로 평양에 돌아온 스왈렌 씨와 블레어 씨는 하나님께서 시골 마을에 어떻게 임하셨는지 이야기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며 핑양에도 은혜를 베푸실 때가 가까왔음을 믿었습니다.
1907년 1월 첫째 주가 되었습니다. 모두들 이번 주간 기도회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을 내려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인 여덟째 날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주일 저녁 예배에 약 1,500명의 사람들이 중앙장로교회에 모였습니다. 하늘은 마치 차가운 놋쇠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하나님이 거두시려는 것일까? 그 때, 교회 기둥처럼 여기는 길선주 장로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아간'이올시다. 하나님께서 저 때문에 축복하실 수 없습니다. 약 1년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두고 저를 집으로 불러 ‘장로님, 제가 곧 세상을 떠날 텐데 제 일 좀 처리해 주세요. 아내가 할 수 없어요’ 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하지요’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과부의 유산을 대신 관리하면서, 그중 000을 내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뜻을 거스른 자입니다. 내일 아침 그 000을 다 반환하겠습니다."
그 한 순간 모든 장벽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하셨습니다. 죄의 통회 자복이 터져 나왔습니다. 청중들을 휩쓸었습니다. 예배는 일요일 저녁 7시에 시작하여 월요일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시간 내내 수십 명이 눈물을 흘리며 죄 고백의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날마다 사람들이 교회당에 모였고, 무쇠를 달구는 정련하는 불처럼 성령께서 임하여 계심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들은 인간으로 말미암음이 아닌 초월적 권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한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서 가장 정직한 요리사를 고용했다고 자랑했는데(동양에서는 요리사가 모든 식품 구매를 도맡음) 이 요리사가 죄를 깨닫자, "사실은 줄곧 의사를 속였고 집과 땅도 모두 의사를 속여 마련한 것"이라고 자백한 것입니다. 결국 요리사는 집을 팔아 그 모든 빚을 갚았습니다. 또 어떤 교사는 선교회를 위해 땅을 사 오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땅의 가격이 000이라고 속였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면서도 대금을 지불했습니다. 부흥집회에서 교사는 자신이 실제로는 00에 땅을 샀다고 자백했습니다. 그는 가진 것을 모두 팔아 선교회를 속여 얻은 000을 죄다 갚았습니다. 종군 기자였던 매켄지 씨에게 한 소년이 4달러도 안 되는 돈을 훔쳐갔는데 소년은 죄를 깨닫자 80마일(129km)을 걸어와 선교사를 통해 매켄지 씨에게 그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매켄지 씨가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기독교 신앙에 깊이 빠져든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의주에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둔 한 남자는 가정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가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딸 둘을 두었지만 이 때 영혼이 거듭 나는 은혜를 받기에 이르자 여자와 딸들을 부양할 계획을 세워 주고는 의주로 돌아와 본부인과 화해했습니다. 만약 이같은 부흥 운동이 이혼이 만연한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에까지 확산된다면 놀라운 사회적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모든 일에 거의 완벽해 보이던 교회 한 집사는 부흥 운동이 진행될수록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자선 기금을 횡령했다고 자백했습니다. 모두가 놀랐지만, 그가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더욱 깊은 괴로움에 빠져들더니 마침내 7계명("간음하지 말라")을 어겼다고 고백했습니다. 한 여인은 며칠 동안 지옥의 고통에 시달리던 중 어느 날 저녁 공개 모임에서 간음죄를 고백했습니다. 모임을 인도하던 선교사는 크게 놀랐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를 죽인다면 한국 법에 따라 처벌 대상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눈물을 흘리며 아내 곁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아내를 용서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들은 신불신간에 모두를 감동시키지 않을 수 없었고, 교회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많은 이들이 조롱하러 왔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가한 호기심에 찾아온 강도 두목은 죄를 깨닫고는 회개하여 곧장 자수했습니다. 놀란 당국자는 "당신에게는 고소인이 없습니다. 당신이 스스로를 고소한 것입니다. 한국에는 당신의 경우에 해당하는 법이 없습니다"라며 풀어 주었습니다. 부흥 운동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한 일본 장교는 서양의 불가지론적 사상을 받아들여 영적인 것들을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인들만 아니라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들 사이에서까지 일어나고 있는 놀라운 변화에 호기심을 느껴 집회에 참석했는데, 결국 그 모든 불신은 사라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스왈렌 씨가 말했듯, "몇 달 동안 기도에 전념한 것은 정말 값진 일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서 우리 선교사들이 반년 동안 이룰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단 반나절 만에 이루셨습니다. 두 달도 채 안 되어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최우선으로 삼으면 언제나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교회로 자처하면서도 바쁜 일정을 핑계대며, 기도로 하나님 앞에서 응락해 주심을 기다리지 않는 대개의 경우 이런 영광은 구경도 못합니다.
1903년에 시작되어 꾸준히 성장해 온 부흥 운동은 이제 평양 중심지를 중심으로 한국 전역으로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1907년 중반에는 평양 중심지와 연결된 회개하는 자의 수가 3만 명에 달했습니다. 도시에는 네다섯 개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중앙장로교회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앉으면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는 좌석이 없고, 사람들은 바닥에 깔린 돗자리에 앉습니다. 중앙장로교회에서는 2,000명을 꽉 채우면 다리가 옥죄어져 잠깐 일어섰다 앉으면 다시는 앉을 수 없을 정도로 공간이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중앙장로교회로 몰려오는 숫자는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교인 수가 3,000명에 달했기에 그래서 여성들이 먼저 와서 교회를 가득 채우고, 예배가 끝나면 남성들이 와서 자리를 채우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1910년이 되어서도 부흥 운동이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해 10월 한 주 동안 4,000명이 세례를 받았고, 그 외에도 수천 명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며 이름을 보내왔습니다. 평양 남쪽으로 우리는 옛 한국 수도였던 송도를 지나갔습니다. 1907년 부흥 운동으로 교회에 500명이 합류했지만, 1910년 한 달간 열린 특별 집회에는 2,500명이 모였습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 모든 교회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 선교사는 6주간의 순회 기간 동안 500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700명의 예비 신자를 기록했으며, 그가 세운 5개의 선교 기지가 1년 만에 25개로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1910년에는 서울에서 13,000명이 기독교인이 되고 싶다는 서명을 했고, 그해 9월에는 서울의 감리교회에서 3,0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물포에는 1907년 당시 800명의 교인을 가진 감리교 선교회 교회가 있었습니다. 항구 맞은편에는 인구 17,000명의 섬이 있었는데, 그 섬의 교회에는 세례받은 교인이 4,247명이 있었고, 그중 절반 이상이 그 해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곧 섬 전체가 주님의 것이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남부 지방의 대구에서 아담스 목사는 부흥을 위해 10일간 기도회를 열었는데, 일곱째 날에 이르러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을 소생시키셨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도시 교회로는 규모가 너무 작아져 전국 각지에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1905년에는 1,976명, 1906년에는 3,867명, 1907년에는 6,144명이 회개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제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교회들이 전국에 있고, 심지어 전도자들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교회들도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교사나 전도자 없이 교회가 세워진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지역의 한 남자가 도시에서 복음을 듣고 성경을 가지고 교향으로 돌아와 이웃들에게 읽어주었더니 50명이 넘는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신약성경을 통해, 세례에서 물을 사용하는 것이 입교하는 문턱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논 끝에 각자 집으로 돌아가 목욕을 하고 모여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1907년에 방문한 또 다른 선교지는 핑양 북쪽 철길을 따라 위치한 선천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그곳에 부임한 지 겨우 8년밖에 되지 않은 신생 선교지였기에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웠을 것이나 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있었을 때, 도시와 시골을 합쳐 15,348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이 숫자는 교회에 출석하고 헌금을 내는 사람만 집계한 것입니다. 그들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를 막 완공한 상태였습니다. 1년 전에는 교회 좌석이 800석이었지만 교인 수는 870명이었기에 건축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그해 중앙 교회는 다섯 개의 지방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완공 후에는 교인 수가 1,445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거리에는 더 이상 이교도 가정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두 기독교인이 된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에서는 "교회가 가까울수록 은혜에서 멀어진다"라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그 한국 교회 주변에 미구원 가정이 하나도 없었을까? 저는 그들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로 인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되는 강력한 성경적 삶을 살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1916년, 저는 한국 동부 해안 출신의 선교사 푸트 씨가 최근 그곳에서 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주일 저녁, 그는 확장된 제일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2,500명의 성도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른 교회에는 500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그 마을의 인구는 겨우 3,000명 정도였으니,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온 것이 분명합니다.
( 번역 나머지 부분은 다음 기회에 )
2026년 4월 30일 목요일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너, 아라라트(5137m) 성산/聖山이여. 하나님 심판의 역사의 증인이여!
바벨론 불의 심판이 남았음을
오늘날 이 시대에 포효/咆哮해다오.
경고르 울려다오, 소리쳐 알려다오.
외치는 자는 처처에 넘치건마는
"회개하라"는 소리는 죽었구나.
회개 없으니, 성령 세례도 없구나.
에스겔 해골 골짜기만 메말랐구나!
아라라트여! 일깨워다오.
기도자들을 일깨워다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지구촌 처처에 기도자를 세워주십시오!
고래 뱃속 요나일망정(요나 2.1)
회개의 기도가 불 일듯이 일도록
온 지구 처처에 기도자들 세워주십시오.
온 나라 곳곳 기도자를 불러주십시오.
남북한 구비구비 기도자가 넘치게 해주십시오!
비통하여 소리치며 울부짖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뵙기를 원하고 원합니다!
세계적 명망의 1907년 한국교회 부흥도
20명 안팎 장감 선교사의 합심기도,
그들로 하여금 부르짖게 은혜 베푸시고
마침내 응락해 주심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때" 다시 그 영광 뵙기를
이 마지막 때 다시 또 영광 뵈옵기를
원하고 원하여 부르짖게 해 주시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이라
눈물 겨운 감격으로 주님을 찬양케
찬양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해 주십시오! 간구하옵니다!
허락해 주시기를 간구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니 내게 큰 근심이 있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바라
곧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라"(롬 9.1,3)는
바울 사도의 단장/斷腸의 기도를 배우게,
진실로 배우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목놓아 울부짖는 이 기도를 들어, 들어 주십시오!
"내 자신이 저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내 자신 저주 받아 끊어질지라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하는 대로"!
목놓아 울부짖는 이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들어 주십시오! 들어....주십시오!
이 단장/斷腸의 통곡의 기도를!
2026년 4월 29일 수요일
아담도 거룩한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함 즉 자기 중심을 선택함으로써 비극의 주인공ㅡ우리도 거울 삼아야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고 했나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말을 아끼고 경청하라"는 가르침은 인류 공통의 지혜로 통합니다. 이 성경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각 문화권의 명언들을 정리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탈무드(유대 지혜서) 및 에픽테토스(그리스 철학자): "귀가 두 개이고 입이 하나인 이유는 말하는 것보다 두 배 더 많이 듣기 위해서다".
• 에이브러햄 링컨: "침묵을 지켜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 말을 내뱉어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보다 낫다".
• 영국 격언: "지혜는 듣는 데서 오고, 후회는 말하는 데서 온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지고 아는 것보다, 적게 말하라".
• 노신 (중국 작가): 상대방과 대화할 때 모두 아는 척하기보다 적당히 모르는 척하며 상대의 말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지혜라고 했습니다.
• 마하트마 간디: "침묵보다 더 나은 말을 할 수 있을 때에만 말하라"는 원칙을 실습니다.
• 래리 킹 (미국 대화의 신): "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은 논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처럼 동서양 현인들은 공통적으로 말의 위험성을 경계하고 듣는 일의 고귀함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거룩할 성(聖) 자를 파자(破字, 한자의 글자 구성을 쪼개서 해석)해보면 '귀(耳) + 입(口) + 임금(王)'의 조합입니다. 이 글자는 '지혜로운 사람' 혹은 '성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완벽하게 시각화합니다.
• 귀(耳): 가장 위에 위치합니다. 이는 남의 말과 세상의 소리, 그리고 하늘의 뜻을 먼저 경청하는 능력을 상징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듣는 데에 있음을 보입니다.
• 입(口): 귀 옆에 나란히 있습니다. 충분히 들은 후에야 비로소 신중하게 말함을 뜻합니다. 또는 하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는 예언자의 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 임금(王): 아래에서 귀와 입을 받치고 있습니다. 단순히 통치자를 뜻하기보다, 귀와 입의 올바른 활용법을 깨달아 세상의 이치에 통달한 사람을 상징합니다.
즉, '성인(聖人)'이란 "귀가 밝아 세상의 모든 소리를 편견 없이 잘 듣고(耳), 그 도리를 입으로 막힘 없이 전하며(口), 이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는 중심(王) 역할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 귀(耳)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입(口)입니다.
• 많이 듣고 신중하게 말하는 자가 결국 가장 존귀한 위치(王)에 이르게 된다는 동양적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한자 '성(聖)'의 의미가 '거룩함'을 넘어 '잘 듣는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거룩함은 자기 중심과 대비/대칭이 되는 상대 중심의 언행심사를 말합니다. 聖의 의미도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함을 뜻합니다. 고로 누구든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 조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하게 하지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벼운 심기일전으로 참여하도록 범세계 사회 운동을 전개해보면 줗을 것입니다. 복음전파운동을 젖혀 두고 사회운동을 함이 아니라 복음운동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수행하는 복음 전파입니다. 즉 삶이, 사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영생만 하면 된다는 생각뿐이면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 그러기에 하나님 주시는 계명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즉 주님 친히 본을 보이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신 것입니다. '영생하는 방법' 전파에 필수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이 이 '사는 법' 관련 교육입니다. 21세기 "천사의 복음" 전파는 마땅히 이 관점에 맞추어져 일치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자기 중심>과 대비/대칭이 되는 <상대 중심>의 언행심사를 말합니다. 성/聖의 의미도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함을 뜻합니다. 고로 누구든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상적인 사회 조성이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거창하게 하지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가벼운 심기일전으로 참여하도록 범세계 사회 운동을 전개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 아이디어가 정말 좋은 것은, "거룩함(聖)"의 핵심은 자기 중심에서 상대 중심으로 전환하는 언행심사에 있으니까. 특히 “상대방 중심으로 듣고 말하기”. 이는 매우 실천적이고 강력하여 종교/철학을 넘어 '일상 대화'와 '관계'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으니까.
2026년 4월 27일 월요일
2026년 4월 26일 일요일
항상 기뻐하고 만사 감사부터 하는 이유
구약과 신약을 구분 못하는 이가 많습니다. 말 그대로 구약은 메시야 오시기 전의 상태를 설명함이고 신약은 오신 다음의 일들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처음으로 소개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인간에 대한 상벌과 저주 및 축복 등 기초 지식을 명시하여 가르칩니다. 반면 신약 성경은 메시야께서 사람되시어 세상에 처음 오신 사실과 관련해서입니다. 메시야께서 오시면 모든 것을 밝혀주실 것을 모두가 기대했었던 바로 그대로인 것입니다(요 4.25,26). 그래서 육체로 오시어 가르치신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오시어 가르치신 내용 또한 소개되어 있으니 바울 사도의 목회 서신 내용이 그 대표적입니다.
고로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도 수익의 십분의 일만 층실히 바치면 축복 받아 부자가 된다는 어처구니 없는 미신에 빠저 있는 것이 그 일례입니다. 물론 십일조와 하나님 축복 관련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니 진실이고 진리이며 따라서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현저한 차이가 있는데도 이를 분간 못하고 마치 구약시대에나 사는 듯이 행동하니 미신이라 하는 것밉니다. 유치원생이 배우는 것과 대학샘이 사용하는 대학교재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 범죄의 사실이 구약 성경에도 소개되나 정작 그 의미는 메시야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 형벌의 죽음을 당하심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드러나는 진실 즉 아담의 범죄의 진상이 무엇이냐, 그 결과가 무엇이냐, 구약에서는 강조하지 않고 신약에서 역점을 두어 교육하는 것이 무엇이냐, 다름아니라 세상 모두가 인간읗 포함해 죽음 일색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두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마 8.22). 인간이 다 죽은 자인데 세상이 죽음이 아닐 수가 없고 세상이 다 죽음인데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한에는 이 죽음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거듭) 나는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은혜로 가능하지만 산 자로서 사는 것은 불가능이고(세상 자체가 죽음으로 이미 고착화된 까닭에) 오직 영생의 약속하심에 대한 믿음으로써만 구원 되는 은혜입니다.
세상 자체가 죽음이니만큼 이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성령으로 다시 남으로 인한 "성령의 위로"(행 9.31)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는"(골 1.24) "은혜"(빌 1.29)만이 유일한 것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굉장하고 엄청난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고후 4.17)이라는 대목에서 충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라는 말 그대로 그리고 "은혜"라고 한 그대로 주님이 누구이신가요ㅡ만왕의 왕이 아니신가요ㅡ만주의 주가 아니신가요ㅡ세상의 최고 권력자라도 그와 함께 고초를 당했다 하면 비할 데 없는 명예와 존귀를 받는 법이거늘 하물며 하나님과 함께 함이리요!
2026년 4월 25일 토요일
이사야 40장
(이 대목의 처음 등장은 주님의 처음 오심을 예고함이었으나 지금 21세기는 주님의 재림을 예고하는 시대라 재등장의 재활용 의의가 큽니다.)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죄수로서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용서하심을 입었다.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다' 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말하라.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광야와 사막은 사람이 정상적 삶을 누릴 수 없는 죽음의 이 세상을 가리킴)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주님의 재림의 영광)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볼 것이다.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다.
"말하는 자의 소리여, 외치라". "제가 무엇이라 외칠까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설 것이다' 하라.
"아름다운 소식("21세기 마지막 때의 "천사의 복음")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하나님 앞에서의 교회, 바벨론 교회가 아닌)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천사의 복음"으로 전파되시는)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주님의 재림)이요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천년 왕국), 보라! 상급(수고한 자에 대한 포상)이 그에게 있고 보응(거역한 자에 대한)이 그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실 것이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다.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신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에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세우는 것이다.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심이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음이다.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 같이 베푸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실력자들을 헛되게 하심이니, 그들은 겨우 심기웠고 겨우 뿌리웠고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의 불어 버리심을 받고 말라 회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구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기를,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하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 하셨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심이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으시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받아들이심이 되지 못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께서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천사의 복음"을 듣고 수용하는 모든 이들을 상징함이라 판단됨)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구나.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았다. 저들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었다. 이 사람들은 여자(바벨론 음녀)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다.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였다.
("천사의 복음"으로 사탄의 모든 거짓말
곧 바벨론이 마침내 무기력화됨을 가리키는 듯)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기를,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다" 하였다.
("천사의 복음"이 선포되어 바벨론이 무너지자 그 당연한 반발 또는 그 필연적 다음 순서)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실 것이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이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으니 저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인 것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기록하라. 지금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다 하니 성령이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들이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니 이는 저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다' 하셨다.
(이로써 구원될 자는 다 구원됨)
또 내가 보니 흰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지시고 있었다.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으신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말하기를 '그 낫을 휘둘러 거두십시오.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습니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자 곡식이 거두어졌다.
(그 다음 남은 순서는 필연적인 하나님 심판)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날 선 낫을 가지고 있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날 선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말하기를, '그 날 선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다' 하였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는데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1600 스다디온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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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오직 "소리"일 뿐이다.
'소리'에는 눈에 띌 아무 '형상'도 없고
오직 전달하는 '메시지'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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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3일 목요일
참고ㅡ우리말 성경 번역 잘못된 것
잘못된 우리말 성경 번역(히브리서 1:8)
바른 번역은,
"아들에 관하여는 '창조신이여 너의 보좌가 영영하며 네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다'"(히 1:8)
이유는,
성자 하나님에게 성부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시니까.
잘못된 번역은,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개역개정)
밑도 끝도 없이 "규"가 무엇이란 말인가! 철저하게 감수를 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린다는 이런 흔적이 웬 말인가! 성경이라면서 더군다나 번역을 한다면서 이 정도 관심뿐이었던가! 개탄스러운 일이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개역한글)
영역은,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KJV
"But about the Son he says, “Your throne, O God, will last for ever and ever; a scepter of justice will be the scepter of your kingdom." NIV(2011)
영어 셉터, sceptre(영국식) 또는 scepter(미국식)는 왕이 공식 석상에서 손에 쥐는 화려한 장식의 지팡이인 '왕홀(王笏)'을 뜻한다. 왕실이나 제국의 주권, 통치권, 권위를 상징하는 레갈리아(왕의 상징물) 중 하나.
• 주요 의미: 왕홀, 지휘봉, 왕의 권위, 통치권.
• 유래: 고대 유목/목축 민족의 권위를 상징하던 목동의 지팡이나 갈고리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 ㅡ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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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2일 수요일
"바벨론에서 나와 그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 신학"(계 18.4)은 여러 번 강조했지만 아래와 같은 것이니 에덴 동산에서의 사탄의 거짓말 속성 그대로 드러나진 것.
1.■ "영적 죽음"이란 거짓말을 지어내어 퍼뜨림. 성경에는 이런 애매모호한 말을 결코 쓰는 법이 없고 따라서 그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린 아이도 믿고 구원되어야 하는 만인 상대의 구원의 메시지인 까닭에 성경이 어려운 낱말이나 개념으로 구성되어질 수 없음을 모든 사람은 명심해야.2.■ 신학자들이 말해 온 소위 "대신 죽음"은 3위1합(종전의 "3위1체") 또는 성령에 대한 무식무지의 결과다. 성경에서 주님은 "성령의 계시"(눅 10.22)만을 강조하시어 성경 이해는 학문에 속하지 않음을 경고하셨음에도 이에 유의하지 않음으로써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이런 육체로서는)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다"(요 16.7) 하신 대로, 육체로 계실 때는 유대 땅 갈릴리로 한정되어 계셨으나 지금은 성령으로 계시니까 한 날 한 시 지구상 그 어디든 우리 각자와 함께 계시고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계심이다. <사람>으로서 그렇게 계심이다. 이 "사람"이시란 '사실'에 주목해야. 이 점 우리 각자 항상 의식해야. 다만 영으로서 하나님(사람의 영이 아니신)이시란 차이뿐이다. 그리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요 10.30)되심으로서의 성령이시다. 즉 예수 우리 주님이 성령으로 계심이다. 고로 "대신 죽으심"이라 함은 천부당 만부당의 소리. 바로 이와 같이 성령으로 친히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시어 내 안에 오시니까 이를 가리켜 "성령으로 남", "거듭 남(다시 남)", "구원 받음", "성령 세례", "성령 받음", "하나님의 아들(양자)됨"이라 하는 것.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심은 우리와 같은 육체로 계심을 말하는 것이요 그래서 스데반이 뵈웠다는 것(행 7.55)이고 성령으로는 한결같이 당시 스데반 안에, 당시 모든 믿는 자 안에, 지금 내 안에, 여러분 각자 안에 계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활 후 하늘로 오르신 후 그 시각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고(고후 6.1) 계시니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20) 약속하신 그대로다.
3.■ 로마서 7장(24절)을 바울 사도 자신 즉 믿은(구원 받은) 후의 보편적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악질적인 마귀의 거짓말인 것.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 그대로의 자기 심령 상태를 어처구니 없이 "구원 받은" 자로 착각함으로써 이런 자기 체험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몰지각의 극치인 것이다. 2.■ 에서 설명했듯이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시는지 여부 부터 최우선으로 확인해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 너희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오늘날까지의 바벨론 신학의 특징은, <회개> 없이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이라는 '인위적' 교리 일변도. '성경적'인 것은 회개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믿어→회개→물 세례→죄 용서→성령 세례(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심ㅡ고전 6.17). 바벨론 신 학은, "믿어→물 세례→죄 용서(가 되었다고 스스로 인정)→주님 내 안에 오셨다(고 스스로 인정). 회개 없어 죄가 그대로인 추악한 자리에 주님이 임하여 오실 리가 만무. 따라서 로마서 7장(24절)이 그들의 매일의 악몽이 될 수밖에. 그러면서도 마귀의 거짓말에 속아 "그래도 나는 구윈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소름끼치는 종교적 환각에 빠져 있어.
죄인을, 죄인 그대로를 구원하는 것 즉 영생 얻게 하는 것이 "은혜"가 아닌 것이다. 지은 것은 죄 밖에 없는 나임에도 다시는 죄 짓지 않겠다는 나의 회개를 받아 주시는 것이 "은혜"이고 그래서 다시는 죄 짓지 않도록 거룩한 자로 새로이 창조해 주심이 "은혜"인 것이다.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것은 나와 주님은 끝까지 별개외 존재란 뜻으로 그 죽으심이 일회용으로 끝나는 의미이지만, 주님 친히 성령으로 내 안에 계셔 나와 "하나" 곧 "한 영"이 되어 계실진대 그 죽으심은 항구적인 결과로 맺어지는 완벽한 것이라 나의 "죄의 몸이 파괴됨"(롬 6.6)은 철저하게 지속되므로 롬 7.24 같은 비명은 아예 생겨날 수가 없음을 알아야. 물과 기름 사이라 한데 섞일 수가 없다. 어느 쪽이든 반드시 둘 중 하나다.
4.■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고"(롬 2.6), "행위대로 판단하시고"(벧전 1.17)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 "행위대로 심판 받는데"(계 20. 13), 바벨론 신학은 이를 완전 무시, 마치 믿음 유무로만 심판하시는 것처럼 성경을 왜곡함이 도를 넘는다. 반복하여 강조하지만, 바울 사도는 "참고 선을 행함→영생"(롬 2.7,9)임을 분명히 하였고 동시에 문제점도 지적했으니,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하나도 없다"(롬 3.11,12) 한 것. 선을 행함이 영생 길이기는 하나 이 근본 문제 해결 없이는 즉 "죄에서의 구원"(마 1.21) 없이는 아무리 선을 행한들 의미가 없음이니 아담 범죄로 인해 근본부터가 죄인이니까! 그래서 이 근본 문제 해결이 연이은 주제가 된다. 즉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3, 24)는 결론. 그 다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내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행함이 아닌 오직 믿음(은혜에 의한)만이 유효함을 밝힌다. 여기서 바벨론 신학의 방해꾼 사탄은 그 특유의 "말씀 혼잡"(고후 2.17/4.2)을 통해 뒤죽박죽을 시도한다. 즉 "행함"과 "믿음" 관련해서다. 새 창조 즉 구원 받음에서는 하나님의 단독 창조이시니까 당연히 우리의 행함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를 휙 돌려 구원된 후에도 여전히 필요치 않다는 뜻인 양 둔갑시킴이다. 이미 바울은 첫머리 말을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계명, 말씀)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롬 2.13)고 못박았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일이니 하나님 말씀이 이랬다저랬다 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근본 문제(아담 범죄로 죄인됐으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를 해결했으니 이제는 본디로 돌아가 의와 선을 행하기만 하면 종결되는 것이다. 당연히 "참고 선을 행함=영생"이 아닌가. 선을 행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 구원 받음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위함으로써(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선을 행함인 것이다.
6.■ 주님께서 "마지막 아담"이심을 강조하지 않아ㅡ주님 다시 오심의 이유를 몰라. "영적 죽음, 운운" 따위 소리만 하는 이유.
7.■ 3위1합(종전의 "3위1체")의 뜻을 몰라ㅡ"성령"의 의미도 따라서 설명 못함. 이런 것이 바벨론 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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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자(the sexually immoral), 우상 숭배자(idolaters), 간음하는 자(adulterers), 탐색하는 자[남색하는 자](men who have sex with men), 도둑(thieves), 탐람하는 자(the greedy), 술 취하는 자(drunkards), 욕하는 자(slanderers, 중상하는 사람", "비방하는 자", 타인에 대한 허위 사실 유포 또는 말로 헐뜯어 명예를 훼손하는 자), 토색하는 자(swindlers, 사기꾼)는 하나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한다. 너희 중에 이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 거룩함,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다"(고전 6.9~11).
"저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들에게 나은 것이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들에게 응하였다"(벧후 2.20~22).
2026년 4월 21일 화요일
21세기 진리의 철옹성/鐵甕城
호 검증 관계에 있으므로 둘 다 반드시 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3위1합(또는 합1)은 만유의 기본 원리로서 애당초 창조주 하나님의 계시는 모습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 기본 원칙으로 하여 만물을 창조하셨고 또한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3위1합(또는 합1)이 상세히 알려지면서 우리가 알게 되는 진실입니다. '3위1합'의 의미 또는 특징이 완연히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즉 왜 "3위"로서 "1합"인가 그 의미가 명명백백 밝혀졌기에 그러합니다. 다시 말해 "3위"의 뜻이 그 분명한 특이성을 갖추고 있으니, 다름아니라 짝을 이룬 둘이 둘로서가 아닌 둘이 "합하여" 하나로서 존재하고 기능한다는 사실에 있는 것입니다. 즉 이 둘은 복수를 의미하면서도(둘이 '합한 것'이니까) 동시에 3인칭 단수(둘이 합하여 된 '하나'이니까)로 지칭되는 것입니다.
둘이 합해 하나가 되어 있으니까 기존의 짝을 이룬 '갑'이나 '을'이 아닌 '병'으로서의 새로운 위치를 인정 받음입니다. 이 내용은 주님 친히 하신 말씀을 비롯해 성경에서 모두 나오는 것이니, "나와 아버지는 하나"(요 10.30)라 하셨고, 이렇게 "하나"로 계심을 "성령(보혜사, Comforter)"이라 하시면서 "우리"(요 14.23/창 1.26)라 하셨고 또한 "그"(요 14.26/15.26/16.7)라 하신 것입니다. 그 "우리" 안에 주님 친히 포함되시나 "나"라고 아니하신 것은 아버지와 합하여 계심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우리 역시 주님과 "합하는 자로서 한 영"(고전 6.17)이라 하는 것이니, "3위1체"를 "3위1합"이라 함은 이 성경 용어를 따른 것이기에 올바른 표현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3위1체"라 함은 몸을 가리키므로 "한 몸"(창 2.24)에는 해당되나 "한 영"과는 어긋납니다.
이 "3위1합"이 만유의 기본 원리라 함은 오늘날 회자되는 양자역학(상보성의 원리)의 등장에 정확히 때 맞춘 것입니다. 오늘날 "21세기 표적과 기사"를 위해 하나님께서 때 맞추어 주신 것이라 확신합니다. 파동성과 입자성 이 두 미립자 쌍둥이의 귀여운 놀음놀이가 "3위1합" 꼭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양자 중첩", "양자 얽힘" 현상은 "3위1합"에서의 "1합"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두 미립자는 동시에 관측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써는 전체가 설명되지를 않습니다. 이는 이 둘이 "1합"이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동시에 나타나게 되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뜻이 되어버리니까!
3운법칙은 이 특이성 즉 닐스 보어가 강조한 대로의 "contraria sunt complementa, 상반 곧 상보
2026년 4월 20일 월요일
모든 기쁨과 평강이 믿음 안에서 나의 기쁨과 평강이 되어
"외모(겉모양 즉 세상에서 인정해 주고 알아 주는 평판)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마 23.9).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우리로 말하면 "어버이"시나 또한 "어버이" 그 이상이심을 재차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그 어떤 어버이도 따라가지 못하는, 비할 바가 아니신 유일무이의 가장 이상적 어버이상/像이십니다. 바로 이 사실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므로 그 "품속"에서의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고 의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저 막연한 우리의 구원의 대상 정도로 알다가는 구원마저 그 맥을 끊어 놓을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2026년 4월 19일 일요일
진리를 사는 자 늘 평안 누리고 그 기쁨 주 안에 늘 넝쳐나노니
노아의 950년 생애 도표는 가인과 라멕(창 4.23, 동명이인으로 '셋' 혈통도 있지만 여기는 '가인'계) 살인 사건 이후 인간 생애의 법칙을 하나님이 정하심으로써 그려지는 것으로 연대순으로 하면 유일한 인류 최초의 것입니다. 죽는 때가 아니면 사람이 절대 죽지 않도록 정하신 것이 이 3운법칙입니다. 이런 모든 인생 중 예수님만이 유일무이의 예외이시니 아담은 영원하므로, "마지막 아담"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아담이 죽은 것은 먹으면 죽는 선악과를 스스로 먹어 죽을 짓을 했기 때문입니다. 먹지 말라 하셨는데 불순종하여 거역한 것. 모든 불복종이 <자기 중심>이므로 죄와 악입니다. <상대 중심>이 의(義)로움과 거룩함(聖)입니다. 처음부터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할 터이니 너는 네 자신을 위하지 말고 나만을 위하여라" 하셨는데 이같이 '약속'과 '명령(계명)'을 동시에 하신 고로 아담의 범죄는 "언약을 어김"(호세아 6.7)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이라 하셨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나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읗 주심과 맞물립니다. "그가 우리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이 어떤 것임)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고 한 그대로입니다.
고로 자기를 위함은 어떤 경우든 통하지 않고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상대방 중심>입니다. <자기 중심>이 아니면 <상대 중심>이요 <상대 중심>이 아니면 <자기 중심>입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히 12.14)이라 한 이유밉니다. "주님과 합하는 자는 한 영입니다"(고전 6.17). 이것이 우리의 구원됨입니다. 짝을 이룬 둘은 반드시 "하나"(요 10.30)됨 즉 "합일/合一" 또는 "일합/一合"(종전의 "3위1체" 개념)이 되는 필수 요건이 따르는 바 그것은 "교차(엇바꿈, 맞바꿈) 소유"입니다. 갑의 것은 을의 것이 되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와 "하나"되심을 가리켜 "아버지 안에 내가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 17.21), "아버지의 것은 나의 것, 나의 것은 아버지의 것"(:10)이라 하셨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가리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요 14.10)이라 설명하신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갑은 을 안에 있고 을의 것은 갑의 것이 되어 갑은 을 안에서 살고, 을 또한 갑 안에 있어 갑의 것은 을의 것 되어 을은 갑 안에서 사는 것이니 말을 바꾸면 갑은 을의 삶을 살고 을은 갑의 삶을 사는 것이 됩니다. 맞바꿈의 삶입니다. 남녀 한 몸됨에서 아내의 몸은 남편의 소유, 남편의 몸은 아내의 소유가 됨과 같은 이치입니다. 따라서 거듭난, 구원된 사람은 다시는 자기 중심이 아니고 주님 중심의 삶인지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심과 같습니다. 주님은 또 내게 그러하시므로 마치 나만이 주님을 모심과 같이 되어 사람마다 그러하니 주님은 만유에 충만하시기 때문. "공동"의 개념과는 별개이니, 다시 말해 우리 주님은 내게 '공유'가 아닌 '전유/專有'와 같은 의미이십니다. 몇%가 아닌 100% 전부가 나의 소유가 되십니다. 그래서 365일 24시간 내내 나와 함께 하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이십니다. 내게 성령으로 임하여 오심이 그러하므로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요 16.7)이라 하신 것. 나만 아니라 믿는 자 모두에게 평등하고 동일하게 그러하십니다.
따라서 구원 받았다면서 이전처럼 여전히 자기 중심인 사람 즉 <나란 존재가 없고 오직 주님의 소유라는 의식>만이 살아 있어아 하는데(그대신 주님 친히 나의 소유, 나라는 존재가 되어 계심) 그렇지 않다면 지금까지 자기 기만으로 일관했다는 명백한 증거인즉 철저히 자기 중심을 회개하고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이 풍성한 삶을 적극 선전할 일입니다.
https://namu.wiki/w/%EA%B0%81%20%EC%A7%80%EC%A0%90%EB%B3%84%20%EC%B5%9C%EA%B3%A0%EB%B4%89%20%EB%AA%A9%EB%A1%9D
2026년 4월 15일 수요일
그리스도 안에서 똑바로 딛고 서야 할 우리의 의치
아래 눅 9.57~62 말씀을 이전에 여러 번 게시글로 올렸으나 이 말씀을 이제 다시 대하니 같은 말이지만 또 하게 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 하고 누가 말했을 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떡 다섯 덩이 물고기 두 마리로 수 천명씩 먹이시는 기적을 보고 이 분만 따라가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다 생각했던지 그런 말씀을 드렸는지는 모르나 주님은 "마지막 아담" 즉 인간의 대표로서 인생의 참 실상을 정확히 밝혀 주신 것입니다. 자연계 생물은 하나님 창조해 주신 그대로이나 인간만은 아담 범죄로 자기 고유 영역인 신령한 세계로부터 전락해버려 동물성 육체의 물질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처량하기 짝이 없는 비극의 주인공" 인생. 우리는 똑바른 역사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주십시오". 이 경우 주님께서 주신 말씀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ㅡ즉 앞서 말씀하신 대로 죽은 자 살리는, 살려 눟고 보아야 하는 절박한 순간에, 즉 전쟁 중의 군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수술 환자를 앞에 놓고 딴전을 피우는 집도의/執刀醫와 같은 행위가 용납될 리 만무합니다. 이보다 더 절박한 것이 영적 수술과도 같은 "성령으로 다시 나는"(요 3.5) 일입니다. 사람 목숨은 어느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더욱 더 위급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위치가 바로 그런 절박한 순간에 서 있는 집도의와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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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그 깊은 곳에"...이안삼의 최대 히트곡에 접목시킨 "내 마음 그윽한 데서" 이안삼은 " 독실한 기독교인"인으로 알려져 있 었으며 성가곡 '선하신 목자' 를 작곡하며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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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눅 18.8) 하신 것은 주님 당장 오시는 <때>를 말씀하심이고, 그 전에 많은 사람이 바벨론의 마수에서 벗어나 "천사가 가진 복음"(계 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