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 받음'이 '성령 받아 모심'에 앞선다(앞당겨져 있다). 본디는 성령 세례 받음으로 죄 사함 받음인데도. 이유는, 죄 있는 더러운 자리에 거룩하신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는 까닭. 이렇게 성령 세례와 "물로 주는 세례" 가 직결되는 만큼 믿음, 세례, 회개를 <동격>으로 보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구원 얻음", "회개함으로 구원 받음", "세례 받음으로 구원됨"이다. 세례 받음은 방금 설명처럼 <회개>의 세례임과 동시 <성령 세례> 받음의 표상화/表象化이기 때문. 세례 받지 않으면 죄 용서가 안되고 죄 용서가 안된 자리에는 성령께서 임하실 수 없고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내게 무의미가 되어버려 구원과는 영원 남남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사도행전 2.38의 취지다. "믿음으로 구원 받음"이 바울 서신에서 <강조되듯 보이는 것>은 사도 당시 교회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믿더라도 할례 등 모세 율법을 어느 정도 지키는 것이 옳다"는 식의 논조로 교회를 어지럽혔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함에서 나온 당시 교회 사정이라, 오늘날과는 전혀 무관한 것임에도 마치 바울의 모든 서신 내용이 어느 시대에나 통하는 영구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는 양 몰지각한 일부 무리들의 무의미한 갑론을박일 뿐인즉 일절 휘말려들 일이 아니다.
단 "내가 어떻게 구원 얻겠는가" 했을 때 "주님으로 예수님을 모시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 30) 했듯이 대표적으로 하는 말이 "믿으라"인 것. 믿으니까 회개도 세례 받음도 가능하기에. 우리 각자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나)와 함께 죽으시고 부활하신 몸으로 영(성령)으로서 내 안에 오시어 나와 "합해"(고전 6.17) "한 영"(:17)으로 "하나"(요 10.30)되시어 "교차/交叉 소유"에 의해 그 죽음과 부활이 문자 그대로 나의 죽음, 내 부활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친히 내 안에 오심으로 된 <실질적인> 나의 구원이지 "대신 죽음" 의 구원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 받아 모심이 곧 주님을 영접해 모심이요 성령 세례 이전에는 구원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주님과 합해 한 영"(:17)됨이 구원이니까. 따라서 이는 필연적으로 '교차 소유'가 그 핵심이니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음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다(우리가 "주님"이라 부르는 이유).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 소유주)가 되려 하심"(롬 14.7~9)이라 하였다. 이같은 은혜의 <교차 소유>는 자기 중심과는 영원 단절이니 과거의 동물적(아담 범죄로 인한) 속성의 본능 작용(자기 중심)은 그치고 비로소 이성적 판단의 인격성("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서의)이 정상적으로 자리잡음이다.
그러므로 단언하거니와 앞에서 인용한(롬 14.7~9)대바와 같이 무한 기쁨으로(왜냐면 이제 비로소 생명 가운데 있음이 입증되었으니까) 로마서 14.7~9을 말하지 못하는 이마다 아직 구원되지 못함을 스스로 고백함이니 지금 이 시간도 늦지는 않으니까 복음을 깨닫고 성령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보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는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니까! 진리에 서지 못했던(몰랐던 관계로) 과거를 회개하고 복된 "교차 소유"로 들어오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는 초창기라 성령 세례가 무엇인지 몰랐기에 성령 받은 증거로서 "방언(외국어)" 과 "예언"(행 19.6)도 했으나 지금은 그런 초기가 아니라 이미 기정사실화한 까닭에 그런 증거가 필요치 않고 필수적이지도 않다. 그저 받은 줄로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악령들이나, 모방이 아닌 진실처럼 속이기 위해 각종 초자연적 현상으로 그 "증거"랍시고 오늘날 나타내 려 조바심을 치지만. 성령 받은 중거는 지금까지 설명해온 교차 삶에서 뚜렷이 나타나게 마련이요 그것으로 충분하다.
아버지와 하나되시어 교차 삶의 본보기가 되시던 주님 친히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9~11) 하신 대로 우리도 나타내면 되는 것. 이것이 '3위1합(종전의 "삼위일체")'에서의 "1합"의 특색인 것이다.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모든 언동일진대(골 3.17) 이는 주님 친히 그와 같이 하신다(움직이신다)는 의미. 이와 같이 본을 보이신 대로 우리도 그와 같으니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골 3.17) 것이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함"(고전 10.31)이다.
이것이 진정 사람 사는 길이다. 이 길을 보이셨으니 그대여, 이 길읃 따라 걸으라. 좁든 험하든 길만 따르라. 그러면 모든 것은 보장된다. 길을 두고 뫼(산)로 가랴. 사람 따라 세상 따라 가지를 말고 오직 이 길만 따라 갈 것이다. "3위1합"의 길, "교차 소유"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되어 오셔서 우리 위해 본이 되시어 걸어가신 길, 그 유일의 길이다. "바벨론 탈출"(계 18.4)의 "천사의 복음" (14.6)의 영원 생명과 무한 영광의 길이다.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다"(사 3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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