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30일 월요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전 12:13)








2019년 9월 29일 일요일

성경 진실성(하나님의 말씀 및 대칭 아담) 자체 증명

초능력의 하루방이라도 못당하는
성경 진실성(하나님의 말씀 및 대칭 아담) 자체 증명












노자의 5천 마디 말(노자 도덕경) 중에서
음양론 관련이 단 25마디인데
이 3("3생만물")에 대해 일절 설명 없이
2천5백년간 손도 못댄 사실을 두고 하는 말
성경의 3위1체의 법칙(짝의 원리)으로 풀렸으니까.




21세기 초점(focus)

21세기 초점(focus)







에덴 동산 관련 지명 강명

에덴 동산 관련 지명 강명






2019년 9월 28일 토요일

자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자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






구원 받음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성경에 표현되는데










구원 받음은 과거, 현재, 미래 시제로 성경에 표현되는데
왜 그럴까 그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마귀는 그 속임수로써 과거로만 제멋대로 못박았는데
많은 사람이 무조건 그 거짓말에 따른 것입니다.
성경에 명백히 미래의 사실로도 나타내었음에도ㅡ.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함도 그 예입니다.
아담처럼 범죄함으로 그 생명(구원된)을 잃거나 빼앗길 수 있기 때문(눅 9:25).
이 경고 말씀은 불신자 상대가 아닙니다. 
메시야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교회 상대입니다.
모세 율법으로 상징된 <죄인 자각> 후 <메시야 영접>의 때를 표상하기 때문.
그래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을 처음에 거절하신 것입니다(막 7:27).
불신자는 "죽은 자"(마 8:22)인데 무슨 생명이 있나요. 
더군다나 "빼앗기거나" "잃을" 생명이 있다니요. 





자기를 위주하지 않고 남을 위주할 때 그것이 성인(saint)

자기를 위주하지 않고 남을 위주할 때 그것이 성인(saint)
성경의 "성인"이 우리말 번역으로는 "성도"라 되어 있는데
격을 낮출 이유가 없다 성경대로 살지 않아 자기 부인이 없다보니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이름만의 "거룩함"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는 삶의 법칙대로 하니까
당연히 그것은 거룩한 것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하신 그대로다











머리와 몸의 한 몸 관계로 살면
나는 나를 위하지 않는 대신에
모든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위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곧 '나'이니까
천국 인구가 가령 일억이면 
나는 일억명의 내가 존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삶의 법칙입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주님, 주님 한다

구원 받았으니까 주님, 주님 한다.
그러나 아버지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천국 차단이다
악령들도 다 영생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멸망인가
머리가 되시는 창조주의 뜻을 행치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기도와 전도는 우리의 매일 먹는 양식ㅡ아사(굶어 죽음) 상태를 면해야

사람들을 구원해내기 위한 기도와 전도는 우리의 매일 먹는 양식ㅡ아사(굶어 죽음) 상태를 면해야








2019년 9월 26일 목요일

아담은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범죄하고 인간 세계를 이렇듯이 진탕으로 만들었다




과학은 속이지 않는다ㅡ법칙은 거짓을 모른다ㅡ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말씀은 곧 법이요 법칙이다ㅡ모든 법(칙)은 하나로 귀일한다
그 귀일하게 되는 법이 다름아닌 만유의 법칙 즉 짝의 원리이다
그래서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다"
(사 34:16)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만유의 법칙 따라 
말씀하심이라 해석해도 무방할까, 아니면 만유의 법칙(짝의 원리)으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니 말씀 역시 그 법 테두리 내에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것이기에 그럴까. 
둘러치나 메어치나 내용은 마찬가지다. 만유의 법칙이 성경에서 나왔다는 것.






아무리 간추리고 정리해도 같은 내용뿐

아무리 간추리고 정리해도 같은 내용뿐





















2019년 9월 23일 월요일

마귀의 광란(거짓된 모방)과 성경적인 성령 역사

마귀의 광란(거짓된 모방)과 성경적인 성령 역사









위의 비디오는 인도(India)의 예로서
오늘날 전세계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소위 "성령 부흥"이라는 광란이다. 
여러 설명 필요 없이 한 마디로 <광란>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령의 역사는 당연히 이렇지 않았다.
왜 손을 머리에만 짚으면(그들은 이것을 "안수"라 한다)
길길이 뛰고 쓰러지고 바닥에 구르느냐ㅡ이것이 광란이 아니면 무엇인가.
말로만 "성령"이고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라니까 그냥 의심 없이 속는다.
참말 이것이 성령 부흥인가보다 하고.

적그리스도가 이제 곧 창조주 하나님 메시야라며 나서는 판인데
(이것을 계시록은 "참람된 이름들"로서 표현한다).
그들이 "성령", "하나님", "예수님"으로 자처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같은 패거리인데 어떻게 나올까,
즉 이제까지 예수님을 메시야라 했는데 적그리스도도 메시야라 할까?"
이런 상념은 불필요하다. 그 때 가서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는 일이다.
처음부터 거짓의 책동이니까 거짓말은 꾸며내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신다면 반드시 "교회"(자칭이든 타칭이든)의
죄부터 책망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임하시게 된다. 가장 먼저 오는 일순위다
이들 소위 "성령 운동"이 그런 "교회 회개"로 이어졌다는 소리 전혀 없다.
비디오에서 보는 바와 같이 뛰고 구르고 퍽퍽 쓰러지고 소위 "방언"하고ㅡ.
그뿐이다. 그러고서는 "성령 받았다"고 당자는 좋아하겠지만, 거짓이다.
교회가 회개하게 되면 지금까지 사랑 없어 냉랭하던 분위기부터 일순에 바뀐다.
가장 시급한 것이 이 사랑 없는 무서운 위선에 대한 자기 반성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게 아니었고 구원 받았다면서도 실제는 아닌
그런 모든 가면이 철저히 벗겨지는 것부터가 먼저이기 때문이다.
(후자는 구원 받지 않았는데도 몰라서 구원 받은 줄로 자기를 속인 경우이고,
전자는 구원은 받았으나 그동안 자아중심으로 타락해도 이를 감지 못했을 경우다).

그런 거룩한 역사가 일어났다는 기사는 그 어디에서도 접해본 적이 없다.
거룩하기커녕 "미쳤다"(고전 14:23), "어지럽다"(:33)는 소리만 안들어도
다행이다. 이런 것이 소위 그들의 행티다. 국내외를 통틀어 그렇다. 
그리고 그들의 말대로 "성령을 받으면" 그것이 곧 예수님 마음에 영접함이요
구원 받음인 고로 그 놀라운 은혜를 이웃에게 전파하기가 바쁘다
동시에,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한 애절한 중보 기도가 
교회 건물 안팎으로 노도처럼 휩쓸게 된다. 그런 역사를 오늘날 볼 수 있는가? 
  
그뿐만 아니다. 성령 충만한 말씀 전하던 스데반이 그 말씀 전달 끝나기가 무섭게
피로써 그것이 성령의 역사이심을 입증했듯이 핍박이 대대적으로 일어난다.
이는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의 섭리로 짜여져 있다.
고로 <대대적인 성령 역사>=<피 흘리는 핍박>의 등식이 어김 없이 성립된다.
마귀가 잠자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러한가?
같은 패거리이니까 탄압할 이유가 없다.  
두 눈 씻고 찾아볼려야 볼 수가 없다. 
이상 4가지가 오늘날 횡행하는 모든 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다.







  

세계에서 가장 큰 박해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독교인들



자기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자기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히 13:3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않는 자다
(열 형에게 이짚트로 팔려간 요셉)
아모스 6:6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7) ㅡ 내가 일부러(고의적으로) 짓지 않는 한 죄지을 수 없는 우리 구원의 구조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7) 
ㅡ 내가 일부러(고의적으로) 짓지 않는 한 죄지을 수 없는 우리 구원의 구조
주님을 위해 오로지 사는 삶이 구원 받은 삶인데
자아중심 즉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살면 그것은 고의적 범죄가 되어
히브리서의 "짐짓 범하는 죄"와 속성이 같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것은 오늘날 실제 구원 받지 않았으면서도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구원 받은 것으로 착각하는 이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짐짓 죄지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이제껏 바르게 믿어 구원 받은 사실이 없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확인한 후
다시 새롭게 출발하면 되는 것
즉 진정 회개하여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생활이 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 아래 주님,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는 매일이면 가하다









2019년 9월 22일 일요일

양자 역학과 반물질을 정의하면



양자 역학과 반물질을 정의하면
양자역학을 거시적으로 다루는 것이 "반/反물질",
"반물질"을 미시적으로 다루는 것이 양자역학입니다.
반물질계는 우주 어디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자연물질계와 쌍으로 다시 말해 짝을 이루어 
이 세계와 아주 밀접하게 즉 하나로서 존재합니다.
"양자 얽힘"의 이치로써 이해하면 바로 그대로입니다.
이 말은 이제 성경을 믿는 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되어 있습니다.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6) ㅡ 반/물질계를 증명한 성경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6) ㅡ 반/물질계를 증명한 성경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5) ㅡ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삶의 영원한 법칙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5) ㅡ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삶의 영원한 법칙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4)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4)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3)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3)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2)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2)




2019년 9월 21일 토요일

짝의 원리에 의한 창조




산이 있으니까 산에 가는 것뿐이다ㅡ여러 말 섞을 필요 없다












"만물에 반드시 양면성이 있으니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전에 양면 모두 살피라"ㅡ이솝




이솝은 "만물에 반드시 양면성이 있으니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전에 양면 모두 살피라"는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만고 보기 드문 지혜자도 출신은 노예였으니 진리는 항상 찾는 자에게만 해당되지 두드리고 찾지 않으면 간과해 버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노예니까 천하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무시해 버렸고 따라서 그가 말한 진리에 가까운 삶의 지혜는 겨우 "이솝 동화"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극동 아시아 문화권에서의 음양론과 맞먹는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상 명구(名句)이지만 그의 사상도 단지 이 한 마디로만 전해져 올 따름입니다. 

양면성 다시 말해 짝으로 되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지극히 상식 수준의 사실 하나에도 사람들은 진작 눈 뜨지 못하고 이 세상 신(神, god)의 조종대로 움직여 고집스럽게도 일면에만 눈을 박고 있었으니 그 좋은 예가 기독교의 성경 해석입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사실을 성경대로 성경이 설명해 주는 대로 주장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불교 역시 그 중심 교리로 삼는 무상 즉 덧없다는 것이 자연계에만 한정된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자연계와 처음부터 맞선 상태로 만물이 굴러 오고 있는 줄 알았다면 싯달다가 절대로 이런 생멸전변인 "무상" 다시 말해 자연계만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상은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연계에만 한정되는 특성일 뿐입니다. 초자연계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즉 상주불변(常住不變)입니다. 그런즉 불교 교리는 3위1체의 법칙 다시 말해 짝의 원리 하나만 들이대어도 허구임이 드러나니 동전의 양면이라야 화폐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한 면만 있는데 무슨 역할 무슨 진리 구실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이 대칭성 원리를 구사하여 불교도들을 그들의 허망한 데에서 구출해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별반 나을 것이 없습니다. 에덴낙원을 자연계로 착각해 온 것 말고도,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값없이 구원 받았다는 성경의 설명을 일방적으로만 받아들여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처럼 오해하고 사랑 일변도로만 하나님을 착각하는 아주 위험한 생각들을 보통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에 젖은 나머지 성경의 다른 동일한 엄중한 경고에는 아예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살 행위인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아담을 처음부터 속임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악령 사탄이므로 역시 그 동일한 수법으로 인생들을 멸망시려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한 이러한 모든 현상이 그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양면으로 되어 있고 그 성질이 각각 정반대로 되어 있음을 알진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오는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은 지금과는 정반대로 영원한 만큼 완성된 세계로서 그 성격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나가므로 가령 지금 세상에서 호의호식 잘 사는 부자로 지냈으면 반드시 오는 세상에서 그 업보(불교 용어이든 말든 일반화되어 있으니까 이해하기 편한 대로 사용할 뿐)대로 나타나는 것이니 그래서 부자 되기를 극도로 기피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부자가 되어도 그것을 자기 소유인 양으로 착각하지 말고 오직 공동의 소유로서 자기는 그 관리자 곧 청지기 역할뿐임을 자각하고 충실히 따르면 됩니다(딤전 6:17). 부자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아 버렸다"고 하신 무서운 경고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이냐. 오는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살고(영생과 영광) 죽는(주야로 고통 고난밖에 없는) 그 영원한 운명을 각자 이 세상에서 
손수 스스로 정하는 의미ㅡ이것뿐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명시하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함을 입어 사는 자가 되었으니 그 산 자로서의 당연히 지켜야 할 생명의 법칙대로 나가는지 여부로 자기 운명을 직접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양자 선택한 결과를 따라 법 제정자, 집행자로서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의사는 있었으나 그 의지대로 행할 능력이 없어서 "율법 행위"로는 구원얻지 못한다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 창조로 모든 힘(내 안에 계시는 대칭아담으로 인한)을 구비해 주셨으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비로소 "회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음을 바울 사도는 그 전도 강연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최후의 심판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간에 행할 능력이 없는데도 심판하신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능히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아니하니 심판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해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해 먹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소유)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주)이 되려 하심이다"(롬 14:6-9) 한 대로, 우리가 거듭 명심할 것은 누구든지(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생각하든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여기든 기도 응답을 잘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든) 자기 스스로 판단해보아 자기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거든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구원받은 것도 아니요, 설혹 만의 하나라도 구원 받은 것으로 스스로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히 6:6) 사선(死線, 어느 순간에든)에 위치해 있음을 자각할 일이요, 절대로 "자기를 속이지 말"(고전 3:18)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속이는 일이 너무나 허다합니다. 아무도 자기 지식을 자랑할지 말 것이니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18).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알지만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8:1) 경고를 명심해야 하며,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고전 8:2)이 있다는 증거가 됨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만이 덕을 세우는 것이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1,3).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롬 14:6-9)을 뜻합니다.


내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지는 내 양심으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을 경우에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 스스로 알 수 있게"(:5)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는 경우 "너희가 버림 받은 자"(:5)라고 단정하고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된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이니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우리말 번역 "대신하여"는 잘못된 것)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는 잘못된 번역)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대신하여"는 잘못된 것)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4,15)이라 함과 같습니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 생활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구원 받음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 속으로 들어온 것임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위해 사는 것이니까 "머리의 뜻을 행하고" 머리께서 지시하시는 바 모든 분부를 따라 "머리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먹는 양식"(요 4:34)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지 살지 못함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의미를 이상과 같이(요 4:34) 묘사하셨으니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보내심 받은 의미가 우리의 구원 받은 목적이 됨을 명시하신 것입니다(요 20:21,22).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 2:4) 것이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뜻이므로, 바울 사도가 "내가 첫째로 권한다"고 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고"(딤전 2:1) "쉬지 말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믿는 형제들(saints, 聖人들)을 위하여 구하는(엡 6:18/살전 5:17) 제사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명령하신 대로, 이 뜻을 받들어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딤후 4:1) 대로, "말씀을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게"(:2)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롬 15:2,3) 힘씀은,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이에게나 그렇지 않은 이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2,33) 한 그대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대로 우리는 힘써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파송된 즉 보내심을 받은 것은 이 구차한 자연계 육체로 삶을 향유하라는 뜻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천부당 만부당의 일입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어느 순간에든 빠져들어가고 있는데 이들에게 경고해주어 살 길을 찾도록 하는 일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어느 여가에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데에 허송 세월을 할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이유가 그가 나의 모든 생명, 모든 시간을 소유하시는 나의 주인, 소유주라는 뜻이요 따라서 나를 위해서는 손톱만큼이라도 위할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위한다면 그것은 즉각 자아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되어 앞서 경고한 대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신 것은 내가 지은 죄 곧 내가 자아중심으로 삻으로써 빚어낸 죽음이라는 결과를 함께 짊어지심이니 즉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어 십자가에 못박은 원흉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다시" 그리스도를 못박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나를 위해 사시고 자기를 위해 사시지 않는 관계로써 즉 둘이 하나되는 것으로써 그 품에 나를 품어 구원이 되어주신 까닭입니다. 머리께서 친히 그 몸을 위해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선수범하신 마당에 몸은 단지 머리께서 본을 보이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입니다.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되어지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양면성으로 동시 작동입니다. 사랑이 원래 일방적이지 않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본을 보여주셨으니 몸된 나 또는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움직여야 다시 주님께서 움직이시게 됩니다.

이것이 동시성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으니(요일 4:19)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나타낼 것이다"(요 14:21) 하신 것입니다. "나도"ㅡ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할 것이다(마 10:32,33)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많은 사람이 오도되고 있으니 이 "나도(I also)"의 의미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생명이 멸망에 들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양면성과 동시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직접 읽을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오직 남이 해석해놓은 것에만 의존하려는 무임승차의 게으른 자세로는 주님의 약속대로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로 구원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지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사랑으로 직결되지 않는 한 교만으로 흘러 외려 멸망이 장본이 될 뿐) 사랑이 구원하는데 그런 자세로는 백년 가야 사랑이 생겨날 리 없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내게 영원한 선물로 하사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즉 나의 영원한 소유로 안겨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이다"(요 15:13,14)라고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이상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리요!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으로서 이 이상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어떻다기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사랑하기를 꺼리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해 못할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미친 마음"(전 9:3)이라 하고 "바보(fool)"(시 14:1)라 단정했습니다. 내일 어찌 될지 모르니 영원 무궁 참담한 세월 속에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니 하루바삐 아니 한 시도 급하게 이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일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 세상은 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으면 당연히 그 다음의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이 기회를 잡도록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 순리를 따르지 않을 때 역리(逆理) 곧 그 반대 현상 다시 말해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영원한 것만을 자초할 뿐입니다. 두렵고 떨 일이기에 성경은 두렵고 떨라고 하는 것입니다(빌 2:12). 이 역시 일방적이 아닙니다. 기회를 붙잡아 생명에 들어간 경우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이 동시에 작동됨이야 불문가지입니다. 


























































사정이 여의치 읺습니다.

 방해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몇 자 적을 수는 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