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21일 토요일

"만물에 반드시 양면성이 있으니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전에 양면 모두 살피라"ㅡ이솝




이솝은 "만물에 반드시 양면성이 있으니 어느 하나에 집착하기 전에 양면 모두 살피라"는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이런 만고 보기 드문 지혜자도 출신은 노예였으니 진리는 항상 찾는 자에게만 해당되지 두드리고 찾지 않으면 간과해 버리기 쉬운 것 같습니다. 노예니까 천하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무시해 버렸고 따라서 그가 말한 진리에 가까운 삶의 지혜는 겨우 "이솝 동화" 정도로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우리 극동 아시아 문화권에서의 음양론과 맞먹는 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상 명구(名句)이지만 그의 사상도 단지 이 한 마디로만 전해져 올 따름입니다. 

양면성 다시 말해 짝으로 되어 있다는 뜻인데 이런 지극히 상식 수준의 사실 하나에도 사람들은 진작 눈 뜨지 못하고 이 세상 신(神, god)의 조종대로 움직여 고집스럽게도 일면에만 눈을 박고 있었으니 그 좋은 예가 기독교의 성경 해석입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에덴낙원이 초자연계라는 사실을 성경대로 성경이 설명해 주는 대로 주장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불교 역시 그 중심 교리로 삼는 무상 즉 덧없다는 것이 자연계에만 한정된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초자연계와 처음부터 맞선 상태로 만물이 굴러 오고 있는 줄 알았다면 싯달다가 절대로 이런 생멸전변인 "무상" 다시 말해 자연계만을 강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상은 한 순간도 동일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자연계에만 한정되는 특성일 뿐입니다. 초자연계는 이와 정반대입니다. 즉 상주불변(常住不變)입니다. 그런즉 불교 교리는 3위1체의 법칙 다시 말해 짝의 원리 하나만 들이대어도 허구임이 드러나니 동전의 양면이라야 화폐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한 면만 있는데 무슨 역할 무슨 진리 구실을 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이 대칭성 원리를 구사하여 불교도들을 그들의 허망한 데에서 구출해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도 앞에서 지적한 대로 별반 나을 것이 없습니다. 에덴낙원을 자연계로 착각해 온 것 말고도,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서도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가 값없이 구원 받았다는 성경의 설명을 일방적으로만 받아들여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인 것처럼 오해하고 사랑 일변도로만 하나님을 착각하는 아주 위험한 생각들을 보통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런 편견에 젖은 나머지 성경의 다른 동일한 엄중한 경고에는 아예 거들떠 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자살 행위인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아담을 처음부터 속임으로써 죽음에 이르게 한 악령 사탄이므로 역시 그 동일한 수법으로 인생들을 멸망시려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한 이러한 모든 현상이 그로부터 말미암은 것임을 쉽게 간파할 수 있습니다. 

양면으로 되어 있고 그 성질이 각각 정반대로 되어 있음을 알진대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오는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은 지금과는 정반대로 영원한 만큼 완성된 세계로서 그 성격은 이 세상에서 개인적으로 처한 상황과는 정반대로 나가므로 가령 지금 세상에서 호의호식 잘 사는 부자로 지냈으면 반드시 오는 세상에서 그 업보(불교 용어이든 말든 일반화되어 있으니까 이해하기 편한 대로 사용할 뿐)대로 나타나는 것이니 그래서 부자 되기를 극도로 기피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경고한 대로 부자가 되어도 그것을 자기 소유인 양으로 착각하지 말고 오직 공동의 소유로서 자기는 그 관리자 곧 청지기 역할뿐임을 자각하고 충실히 따르면 됩니다(딤전 6:17). 부자는 이미 "위로를 다 받아 버렸다"고 하신 무서운 경고가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의미는 무엇이냐. 오는 세상에서 본격적으로 살고(영생과 영광) 죽는(주야로 고통 고난밖에 없는) 그 영원한 운명을 각자 이 세상에서 
손수 스스로 정하는 의미ㅡ이것뿐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명시하시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함을 입어 사는 자가 되었으니 그 산 자로서의 당연히 지켜야 할 생명의 법칙대로 나가는지 여부로 자기 운명을 직접 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양자 선택한 결과를 따라 법 제정자, 집행자로서 집행하시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의사는 있었으나 그 의지대로 행할 능력이 없어서 "율법 행위"로는 구원얻지 못한다로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새 창조로 모든 힘(내 안에 계시는 대칭아담으로 인한)을 구비해 주셨으므로 얼마든지 행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비로소 "회개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음을 바울 사도는 그 전도 강연에서 분명히 밝혔습니다. 다시 말해 최후의 심판이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간에 행할 능력이 없는데도 심판하신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능히 선을 행할 수 있는데도 아니하니 심판 대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님을 위해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님을 위해 먹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위해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다. 우리가 살아도 주님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 위해 죽는 것이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소유)이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주)이 되려 하심이다"(롬 14:6-9) 한 대로, 우리가 거듭 명심할 것은 누구든지(믿음이 좋다고 스스로 생각하든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받았다고 스스로 여기든 기도 응답을 잘 받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든) 자기 스스로 판단해보아 자기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거든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며 구원받은 것도 아니요, 설혹 만의 하나라도 구원 받은 것으로 스스로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는"(히 6:6) 사선(死線, 어느 순간에든)에 위치해 있음을 자각할 일이요, 절대로 "자기를 속이지 말"(고전 3:18)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를 속이는 일이 너무나 허다합니다. 아무도 자기 지식을 자랑할지 말 것이니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야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18).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알지만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8:1) 경고를 명심해야 하며,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고전 8:2)이 있다는 증거가 됨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만이 덕을 세우는 것이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가 되는 것입니다(:1,3).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사는 것(롬 14:6-9)을 뜻합니다.


내가 과연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인지는 내 양심으로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문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 13:5) 한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여 의심하지 않을 경우에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신 줄을 내 스스로 알 수 있게"(:5)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는 경우 "너희가 버림 받은 자"(:5)라고 단정하고 있는 그대로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된 증거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심이니 생각컨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우리말 번역 "대신하여"는 잘못된 것) 죽으셨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니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대신하여"는 잘못된 번역)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위하여("대신하여"는 잘못된 것)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분을 위해 살게 하려 하심"(고후 5:14,15)이라 함과 같습니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를 위하는 삶, 생활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구원 받음은 하나님을 머리로 모시는 한 몸 체제 속으로 들어온 것임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위해 사는 것이니까 "머리의 뜻을 행하고" 머리께서 지시하시는 바 모든 분부를 따라 "머리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우리가 먹는 양식"(요 4:34)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지 살지 못함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의미를 이상과 같이(요 4:34) 묘사하셨으니 우리 또한 그리스도의 보내심 받은 의미가 우리의 구원 받은 목적이 됨을 명시하신 것입니다(요 20:21,22).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고"(벧후 3:9)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딤전 2:4) 것이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뜻이므로, 바울 사도가 "내가 첫째로 권한다"고 한 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고"(딤전 2:1) "쉬지 말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믿는 형제들(saints, 聖人들)을 위하여 구하는(엡 6:18/살전 5:17) 제사장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 명령하신 대로, 이 뜻을 받들어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한"(딤후 4:1) 대로, "말씀을 전파하되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게"(:2)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롬 15:2,3) 힘씀은,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이에게나 그렇지 않은 이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전 10:32,33) 한 그대로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대로 우리는 힘써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파송된 즉 보내심을 받은 것은 이 구차한 자연계 육체로 삶을 향유하라는 뜻일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천부당 만부당의 일입니다. 옆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여 영원한 죽음으로 어느 순간에든 빠져들어가고 있는데 이들에게 경고해주어 살 길을 찾도록 하는 일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어느 여가에 이 세상 살고자 하는 데에 허송 세월을 할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자기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라 부르는 이유가 그가 나의 모든 생명, 모든 시간을 소유하시는 나의 주인, 소유주라는 뜻이요 따라서 나를 위해서는 손톱만큼이라도 위할 근거가 없습니다. 만일 위한다면 그것은 즉각 자아중심이 되어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되어 앞서 경고한 대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위하여 죽으신 것은 내가 지은 죄 곧 내가 자아중심으로 삻으로써 빚어낸 죽음이라는 결과를 함께 짊어지심이니 즉 나의 죄가 그리스도를 죽게 만들어 십자가에 못박은 원흉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히 "다시" 그리스도를 못박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 친히 영원히 나를 위해 사시고 자기를 위해 사시지 않는 관계로써 즉 둘이 하나되는 것으로써 그 품에 나를 품어 구원이 되어주신 까닭입니다. 머리께서 친히 그 몸을 위해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솔선수범하신 마당에 몸은 단지 머리께서 본을 보이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3위1체 원리의 주종, 대소, 선후, 인과 관계입니다.

무엇이든 일방적으로 되어지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양면성으로 동시 작동입니다. 사랑이 원래 일방적이지 않음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본을 보여주셨으니 몸된 나 또는 우리는 그 본을 따라 움직여야 다시 주님께서 움직이시게 됩니다.

이것이 동시성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먼저 사랑했으니(요일 4:19)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나도 너를 사랑하여 너에게 나타낼 것이다"(요 14:21) 하신 것입니다. "나도"ㅡ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할 것이다(마 10:32,33)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잘못된 성경 해석으로 많은 사람이 오도되고 있으니 이 "나도(I also)"의 의미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이루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생명이 멸망에 들어가고 있는데도 이를 알지 못합니다. 구원의 양면성과 동시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직접 읽을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오직 남이 해석해놓은 것에만 의존하려는 무임승차의 게으른 자세로는 주님의 약속대로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므로 절대로 구원의 지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왜냐면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지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사랑으로 직결되지 않는 한 교만으로 흘러 외려 멸망이 장본이 될 뿐) 사랑이 구원하는데 그런 자세로는 백년 가야 사랑이 생겨날 리 없는 까닭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 내게 영원한 선물로 하사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게 선물로 즉 나의 영원한 소유로 안겨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이다"(요 15:13,14)라고 친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이 이상 우리가 더 무엇을 바라리요! 다시 말하거니와, 하나님으로서 이 이상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까. 무엇이 어떻다기에 하나님을 부정하고 사랑하기를 꺼리고 그러는 것입니까. 이해 못할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예 "미친 마음"(전 9:3)이라 하고 "바보(fool)"(시 14:1)라 단정했습니다. 내일 어찌 될지 모르니 영원 무궁 참담한 세월 속에서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르니 하루바삐 아니 한 시도 급하게 이 미망(迷妄)에서 벗어날 일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이 세상은 살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았으면 당연히 그 다음의 할 일은 다른 사람에게 이 기회를 잡도록 돕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일입니다. 이 순리를 따르지 않을 때 역리(逆理) 곧 그 반대 현상 다시 말해 생명과는 정반대되는 영원한 것만을 자초할 뿐입니다. 두렵고 떨 일이기에 성경은 두렵고 떨라고 하는 것입니다(빌 2:12). 이 역시 일방적이 아닙니다. 기회를 붙잡아 생명에 들어간 경우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함"(4:4)이 동시에 작동됨이야 불문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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