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5일 금요일

선하게 살고 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양심(창조시 장치하신 생명의 법칙)의 명령이라 모두가 이해하는데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이라니까 한낱 종교교리로만 인식되지

 



생명의 진리로서의 인상은 제로였으니

양심의 가책이 작동되지 않았기 때문.

고로 왜 하나님 아들의 죽으심이 내 구원이 되는지

그 이유가 안개 속에 가린 것처럼 선명해지지 않아서이다.

성경에 가르치는 대로의 "마지막 아담"이심을 몰라

아담 범죄의 결과가 현재의 죽음을 비롯한 인간고임을 

깨치지 못하니 하나님의 진노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아 

이와 대칭을 이루는 은혜의 구원도 존재감이 희박해진 것.

①"믿으면 구원"(행 16:31)은 ②거룩하신 위엄(:26,27)에 접한

이후 빌립보 간수가 회개하는 심정이었기에 가능했던 것.

오늘날은 ②는 생략하고 ①만 줄창 외쳐대니 <구원>은 간데없고

<종교>의 잡풀만 무성하여 차라리 복음을 안 전함만 못하다.

구원받은 줄로 자기를 속임으로써 "나는 구원받았노라"며

정작 진리로부터서는 자신을 차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인생이 구원(영생)을 바라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이 처음부터 죄 지어

그 대가로 죽음이 와(롬 5:12) 영원히 살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이 사건의 순서를 따라 밟아가야 함인데  사탄은 ②를

감쪽같이 감추어 옴으로써 구원의 도리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생각해보라, 영혼은 어디 가라고 육체만 죽고 썩게 창조하시겠는가.

그럼, 영원한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라인가, 땅으로 꺼지라인가.

이런 것 하나도 생각할 줄 모르는 신학자들, 고루하기 그지 없다.

사탄은 그렇게 인간들을 바보로 만드는 것이 식은 죽먹기보다 쉽다.

"교회" 신학자만 아니라 온 세상을 그렇게 미친, 바보로 만든다. 

이런 "미쳤다", "바보다" 하는 말은 성경에서 나왔다(전 9:3/시 14:1).

무궁세세 멸망의 고통을 앞두고도 이리도 태평으로 지내는 세상

사탄의 그런 무서운 거짓에 속아 지낸다는 단적 증거 중의 하나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틀렸고 보어는 몰랐다"고 광포(廣布)하는 것이다.

멋모르고 사탄의 장단 맞춰 춤추는 세상은 "과학"이라면 마치

진리의 대명사처럼 여기지만 과학자들은 실은 바보들이란 뜻이다. 

생사 가름하는 구원의 진리에 무식한 건 고사하고 경멸, 부정(否定)하여

정작 중요하기 짝이 없는 진리는 차 버리니 어찌 바보가 아닌가.

사물을 똑바로 인식하지 못하니 "틀린" 것이고 "모르는" 것이다.

뉴턴은 신학까지 연구하면서도 3위1체, 예수님 신성은 부정했다. 

아인슈타인은 무신론자는 아니라면서 성경보다 불경을 더 쳐주었다. 


지금까지 "마지막 아담"을 주제로 하여 그 어느 누구도

성경을 논한 역사가 없는 것은 사탄의 "바보" 만들기 작업 일환이다.

인간(아담)의 죽음이 범죄 때문인 비정상이 아니고 정상적이었다면

메시야를 "아담"이라 할 필요도 없거니와 "마지막"이란 수식어도

가당치 않은 것은 이후로는 하나님의 보정책(補正), 구제책이 다시는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즉 죽을 수 없는 아담이 죽었다는 뜻이요

이는 자연계 육체가 됨으로 인한 것이니 아담이 그 전에는 엄연히

초자연계 몸으로서 죽지 않고 썩지 않는 육체였다는 함의(含意)다. 

그래서 "최후"라는 <경고성 메시지>의 단어가 붙은 것이다.




교회 구성원을 보면 없는 자, 약한 자, 천한 자가 절대 다수라(고전 1:26)

"미리 아심"을 따라 구원 대상자를 그렇게 정하신 "미리 택하심"이라

보아도 하자는 없을 것인즉 고로 고상하고 유식한 말로써의 전도보다

장바닥의 장사꾼이든 벽지 산골 나무꾼이든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인 것이니 여기서 핵심 골자가 되는 것이 

아담의 범죄로 현재의 죽음이 왔다는 사실 숙지이다(롬 5:12). 

즉 범죄로 현재의 모든 고난, 고통이 왔으니, 죄 회개, 죄 미워함이다.

죄 짓지 않음 곧 말씀(계명-마 19:17/롬 13:9/고전 7:19/요일 2:3/계 12:17/14:12순종이다. 

그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 사랑이 된다(요 14:15,23,24/요일 5:3).

따라서 나 위한 십자가 고난 받으심 보고서 하나님 사랑하여 

그 말씀 따라 순종하면 하나님이 이를 친히 아시므로(딤후 2:19)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면 되는 것이지 그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고로 이보다 간결하고 간명한 구원의 이치가 세상에 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이 인간의 죽음, 나약한 자연계 육체가 됐음을

감추고 진실대로 말하지 않는 경우 전체가 중심을 잡을 수 없어

허공에 뜬 메아리나 연기처럼 되어 종잡을 수가 없게 된다. 

"어려운 신햑적 해석"이 난무하니 이는 마귀가 노리는 바였다. 


이렇게 믿음에 들어오기는 지극히 단순 명료하나 그 이후가 문제다.

즉 건강하게 자라야 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필요성에서 초대교회는

매일 모인 것이니 구약율법시대의 안식일 지키기 차원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매시 아담의 육체를 대하고 있는 것처럼

새 창조에서는 성령으로 계시는 "마지막 아담" 주님을 똑같이 그렇게

의식하면서 <둘이 하나>로서의 동고동락 동거인 것이다. 고로 

말에나 일에나 주님 이름으로, 먹든 마시든 주님 영광 위해(골 3:17/고전 10:31)

함으로써 하나님께 충실한 충복(忠僕)으로서 주님을 섬기는 365일이다.  

왜냐ㅡ주님 친히 본으로서 나를 그렇게 섬기시기 때문이다(눅 22:27).


이성이 있고 자유의지가 있는 영적 존재에게는 "법, 계명"으로 통하니

요한이 죄를 정의하여 "법을 거스르는 일체의 행위"라 했다(요일 3:4).

이 법이 자연 만물을 상대해서는 <법칙>으로 통한다는 차이뿐이다. 

만물이 법칙대로 운행 안되면 파멸이다. 인간에게는 죽음, 멸망이다.

"죽음"의 개념은 오직 <인간의 자연계 육체로의 전락>에 있다. 

이 사실은 "멸망"을 계시록에서 "둘째 사망"이라 한데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아담으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오지 않았다면

죽음을 첫째, 둘째로 나눌 필요가 없다는 뜻(계 2:11/20:6,14/21:8)이다

그냥 악령들처럼 "멸망"으로써 표현하면 간단한 것이다. 

"천국"이라는 말도 아담의 죽음 즉 자연계 몸으로 전락한 때문이니

처음부터 세상이 이세상과 오는 세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던 것.

"천국"과 짝을 이룸은 '인간 세계'가 아니라 '마귀의 나라'이니

모두 아담의 범죄 때문에 생긴 돌발 사태가 그 원인인 것이다. 


우리가 유의하는 것은 초자연계 존재인 악마에 대한 우리의 

자연계 속성의 몸으로서의 일방적 열세다. 마치 사람 앞의 개미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 하면 천사의 능력이 능히 이를 상쇄시키나

그렇지 않을 때에는 처참한 개미(ant)의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주님과 나와의 하나됨을 자아중심 아닌 자기 부인으로 계속 유지하면

만유의 주인이신 "마지막 아담"이  바로 내 모습으로 계시기 때문에

원수들이 내 머리터럭 하나라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눅 21:18/마10:30).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요일 5:18)고 한 그대로다. 

  









이같이 아담의 범죄로 죽음이 오고 생명의 탄생(인간이 태어남)이

거의 초주검을 겪는 수준이다보니 덩달아 새 생명 탄생(인간 구원)도

똑같은 산고(産苦)를 거쳐야만 하므로 그래서 우리의 고난 받음이다.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고난, 그 몸된 교회의 고난이 필수불가결.

그래서 주님의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움이요(골 1:24)

그래서 이 고난을 주님을 위해서 받는 것이라 함이요(빌 1:29).

주님 위해 받는 모든 불이익이므로 "기뻐 뛰놀라"(눅 6:23) 하심이니

<주님과 함께 받는 영원한 영광>으로 

가까운 장래 변환되는 까닭이다(롬 8:17).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무거운 것을 우리에게 이루기"(고후 4:17) 때문.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