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아담"이신 우리 주님 오신 후로는
구약시대처럼 선지자들 즉 특별한 개인을 보내시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아들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일관된다(히 1:1,2).
사람들이 "지금은 성령 시대"라 함이 그 뜻이다.
즉 "성령"께서는 사람되신 "마지막 아담"이시나
단 항상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어 계시기 때문에
이를 "메시야 예수님"이시라 또는 성부 하나님이시라 할 수 없고
그래서 "성령"이시라는 "이름"(마 28:19)이시다.
지금껏 사람들은 "성령"의 뜻도 모르고 막연히 하나님이신 것으로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알아 왔으나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나면
실로 "은혜 위의 은혜"라, 더 없이 그득하고 든든하고 흐뭇하다.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어 나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그런 나를 두고 어디로 가시랴, 엄마가 그 위하는 아기를 떠나
어디로 가시겠는가. 항상 그림자처럼 함께 하시지 않겠는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라",
즉 모세가 하나님 보내심 받는 것과 같은 대목이(출 3:13)
스가랴서에 4:9, 6:15 두 군데인데 다 "성전 건축"과 유관하다.
메시야의 오심을 성전 건축과 관련시킨(슥 6:12,13) 것을 보면
"성령의 전"(고전 6:19) 다시 말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가리킴이다.
성령을 참으로 모셔야(즉 하나님 명하신 대로 회개해야ㅡ행 17:30)
각 사람의 마음에 성령 임하셔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니
메시야의 경우, 친히 우리 안에 성령으로 오심을 의미함이요(요 2:19,21)
스가랴서의 "스룹바벨" 또는 "먼 데 사람들"(슥 4:9/6:15)일 때는
이 성령 시대에 성령의 역사(役事)로 "성령의 전"이 건립됨을 뜻한다.
"성령의 전" 건립은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듣고 순종함)할진대 이같이 될 것이다"(6:15) 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 그 핵심임을 알아야.
다시 말해 죄를 지으면 그 성전은 훼파되고 무너져버린다.
성전 건립으로 결코 "범죄치 못하는데"(요일 3:9) 자아중심이 되어
죄를 지으니까 그런 것이니 자기 부인으로 일관해야 하는 것이다.
스가랴서의 위 내용을 "마지막 때"와 결부시키는 것은
요한 계시록에 "마지막 때" 예언의 다니엘서와 겸해서
"두 감람나무"로써 비교적 상세히 소개하고 있기 때문.
그런데 6장 15절, "먼 데 사람들"("they that are far off")이라 했는데
"영적인" 의미일 수는 없고 실제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말한다.
그러면 예루살렘을 기준한다면 극동(極東)의 한국교회밖에 더 있겠는가.
처음 인간(아담)이 죽은 자가 아닌 산 자 즉 영생자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로 죽어(육체적으로, "영적"이 아닌) 모든 인생이 죽는 존재가 된
이 비정상 상태를 정상으로 회복하심이 우리의 재출생, 새 창조일진대
이같은 성경의 진실이 마귀의 농간으로 천 수백년 동안 가려져 있다가
이제 그 모든 본디의 의미대로 만천하에 드러나진 것이 오늘날 21세기
3운법칙과 3위1체 법칙이 소개되면서부터의 이 한반도에서가 아닌가.
하나님의 영광의 구원의 말씀이 이제 제대로 나래를 달아 비상(飛翔)하기
시작함이 아닌가. 누가 이 이전에 아담이 영생하는 자였다고 말했던가.
아담 때문에 죽음이 왔다는 말은 두고 범죄 때문이란 말은 빼니(롬 5:12)
어찌 이것이 비정상이 아닌가. 참으로 주님의 경고대로, "돌이켜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않고는"(마 18:3) 그 누구도 이런 사탄의 속임수로 인해
"성령의 전"을 건립하지 못했던 것이니, 황폐된 얘루살렘 성전과 같다.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너희가 알라", 다시 말해 오늘날의 이 메시지가 21세기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신 줄 알라는 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계 2:7,11,17,29/3:6,13,22) 함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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