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인 악한 자 악마가 인간 세상을 장악해도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닌 것은 아담 스스로 자기 통치권을
사탄에게 넘겨 준 것이기에 그렇고(눅 4:7) 이는 아담의 범죄로 된 것이라
범죄에 대한 형벌 차원에서도 당연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악인들을 걸러내는 함정 역할을 하고
(악을 행해도 당장 벌이 내려지는 세상 구조가 아니므로)
의인들을 연단시키고 그 진실성을 가려내는 시험 역할을 함이 돼
일종의 필요악으로서 존치되는 것이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이 세상은 끝납니다.
지금까지 악마 지배의 비정상 상태는 종료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아담("마지막 아담") 통치 시대가 오고
정상적인 반역 사태(무저갱에서 놓여난 사탄의 선동으로-계 20:7-9)
이후에 마지막 심판이 있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이르러
항구 불변으로 선과 악의 짝의 법칙대로 운영되어 갈 것입니다.
천년 통치 말의 사탄의 반역행위를 "정상"이라 하는 것은
아담이 범죄 않고 정상대로 다스리고 있어도 사탄을 비롯한 악령들이
초자연계 몸의 인간(악인)들과 공모하는 반역(아담에 대한)이
없지 않아 있을 것이기에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정상적인 아담 역할을 "마지막 아담"께서
마저 구현해 보이시게 되어 있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아담의 범죄는 일시적인 사고에 해당되고
정상적인 아담 아래 되어질 모든 과정은 그대로 실현되어야겠기에.
이와 같이 아담이 범죄로써 죽음을 인하여
아담의 정상적 역할이 일시 중단된 것을 성경이 여지없이 밝힘이니
이 역시 훌륭한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인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한 이유를 무굴 제국의 아크바르가 질문해도
기독교(천주교) 신부들이 전연 대답할 줄 몰랐던
아담의 범죄의 대가로서의 육체적 죽음(영적인 것이 아닌)이
여기서도 완연히 밝혀지는 것이니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을 요한의 계시록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이니(계시록이 있어도 이제까지 몰랐던 것처럼)
성경은 모든 사실을 낱낱이 설명해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당장 시급한 <구원> 외에는 가급적이면 생략해버리는,
그만틈 인간 구원, 재출생, 새 창조가 절박한 현안임을
120퍼센트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 다시 오심에 대한 해명을 못한 것은
아담의 "죽음"을 "영적"이라 속인 사탄의 거짓말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신약의 계시록만 이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 이사야서(제11장) 또한 잘 살피면 메시야의 다시 오심 즉
대칭성의 원리로 두 번에 나누어 세상에 오심을 확인하게 되는 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사 11:8),
"백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65;20)가 그러합니다.
이사야서 장절을 정할 때 65:17부터 새 장/章으로서 시작하여
11장처럼 '메시야 오심' 관련 장으로 설정했어야 옳습니다.
이미 노아홍수 이전에 오늘날의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이었는데
(때문에 노아 홍수 때 모든 동물을 한 배, 한 방 안에 수용 가능),
그리고 당시 모든 인간이 장수하여 천년 가까이 살았는데
그 시대가 다시 온다는 의미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이는 메시야 곧 "마지막 아담" 세상 오심이 기정 사실이기에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메시야 오심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 위해 죽으시는 일방적인 사실만 마음에 담아 두었을 뿐,
이와 짝이 되는 이치로 범죄 전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야 할 필연성은
까맣게 망각하여 "마지막 아담"이심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범죄 전 아담'과 '범죄 후 아담'은 하늘과 땅의 차이임에도.
전자는 "산 자"요, 후자는 "죽은 자"입니다.
메시야 우리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전자를 따름이시고
따라서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후자 곧 만왕의 왕으로서의 영광입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시니까" 구원이 아니라,
"마지막 아담"으로서 전자를 따라 자연계 몸으로 죽으시고
후자를 따라 초자연계 몸으로 부활하시니 이것이 구원인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니 비슷한 것 같지만 하늘과 땅 차이의 의미입니다.
<죽음>이라는 결과만 놓고 해결하려 해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원인을 추적하여 들어가 <원래의 생명>으로 "회복"(행 3:21),
인과 관계가 명확히 되어야 비로소 생명으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한낱 가상(假想)에 불과하고 허공의 뜬 구름 잡는 식입니다.
원인이 있으니까 결과가 있는데 결과만 붙들고 부질없이 논하니까
죽음이 왜 왔고 죄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것이 없으니
만날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고 방향도 없고 목적성도 없습니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는데도 죄는 거의 그대로 있으면서
"영생, 영생"만을 연발하게 만든 것이 사탄의 간악한 속임수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생명의 법칙을 어김으로써(요일 3:4) 죄 지어 죽으니
의(올바름)와 선(좋은 것)으로서의 영생은 생명의 법 준수에 있어,
생명의 영원한 법대로 하면 둘의 하나됨, 머리/몸의 한 몸됨이기에
"너는 내 것, 나는 너의 것이라 따라서 살든 죽든 너를 위함"이기에
나를 위하신 십자가 죽으심이 가능하여 유의미하여 내게 영생이요
이는 내가 영원히 주님의 것이라 살든 죽든 주님 위함이기에 그러하여
이러한 둘이 하나됨, 한 몸됨을 바탕으로 해 이뤄진 당연 사실입니다.
바로 이 법칙을 어기어(무너뜨림으로써) 아담이 범죄해 죽었으므로
다시 생명 즉 영생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법칙 준수
다시 말해 무너진 이 법칙을 일으켜 확립함에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둘의 하나됨을 근거로 하여 모든 일은 이뤄져야 합니다.
나를 소위 "대신하여" 죽으신다는 것은 무의미한 소리일 뿐입니다.
남을 대신하여 죽을 수도 없거니와 죽어지지도 않습니다.
각자는(인간이든 영물/靈物이든) 자기 죄 때문에 죽습니다.
다시 말해 둘의 하나됨을 어기고 머리이신 하나님 뜻에 불복하여
자아중심으로써 자기 욕심 따라 자행자지(自行自止)함으로써 멸망입니다.
아담이 그렇게 해서 죽었고, 악령들이 그래서 영원 멸망입니다.
바로 이러한 명백한 뜻이기에, "그가 우리 위해 목숨 버리셨으니
이로써 사랑을 알고 형제 위해 목숨 버림이 마땅하다"(요일 3:16)입니다.
머리이신 주님께서 그 형제를 위해 목숨 버리셨기 때문에
내가 오직 주님 위해 살고 죽는다면 그 형제 위해 나도 그러합니다.
"우리 중 아무도 자기 위해 살거나 죽는 자 없다"(롬 14:7-9)고 단언한 대로
"사랑은 서로 종 노릇함"(갈 5:13)에 있어 나는 모든 이에게 사랑의 종,
그 모든 이는 또 나에게 사랑의 종입니다. 머리이신 주님부터 그러하셔
나의 소유, 내 것, 내 종이 되시어(눅 22:27) 내 이름으로 십자가에 죽으시니
성경은 이를 내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롬 5:8)이라 했습니다.
이 생명의 영원한 진리의 바탕 위에서 나 위해 죽으신 것이므로
역시 그 부활하심도 <나 위해> 부활하심이 필연이라
왜냐면 머리이신 주님과 몸(의 각 지체, 각 부분)된 나와의
둘이 하나됨이 생명이므로 살아계셔야 나도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나 위해 사시기에> 사는 것이므로.
"대신해 죽는' 이치라면 영원히 죽어 계시고 부활은 불가능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겠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했을 것"(고전 15:14,17,18)이라고
성경에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소위 "대신 죽음"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확고한 기정 사실을 따르지 않고 자기 위해 욕심내고
자기 위해 살고 죽는 자아중심이 이 생명 세계에서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해지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구원 받았다고 외쳐보아야 자아중심인 한에는
허공에 뜬 메아리일 뿐이요 자기를 속임이요 멸망뿐입니다.
"영생, 구원"은 감히 입 밖에도 꺼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들이 포로, 눌린 자가 되어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눅 4:18).
죄에게, 죽음에게, 악령들에게 포로되어 있음을 알아야
"마지막 아담" 안에서의 자유 해방을 누리는 기쁨을 압니다.
자아중심이 그 포로된 상황을 여실히 입증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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