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일 일요일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아직도 종교에 머물고 성령을 받지 못한(구원되지 못한, 거듭 나지 않은)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죄는 불복종이요 이는 하나님과 원수됨이기에(롬 8:7/약 4:4) 그러하다.

불복종과 "주님"은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 상극일 따름이다.

"주님"은 그냥 부르는 명칭이 아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다"(마 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않느냐"(눅 6:46) 하심과 같다.

철저한 노예이되, 단지 내 스스로 하는 사랑의 노예라는 것만 다르다.

그리고 또 다른 것은, 친구로서의 노예라는 것이다(요 15:15)

말씀하신 대로 행함, 그 뜻대로 행함이 없이 주님이라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사이가 원만하여 지금이라도 천국 가는 줄로 믿는다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으로서 자기 기만처럼 치명적인 것은 없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는 것은 겸손도 아무것도 아니다. 불신뿐이다.

말 그대로 죄인일 뿐이니 죄인 곧 불순종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 받은 것도 아니니 하나님의 명령대로 회개를 않았기 때문이다.

머리의 뜻(지시)대로 하지 않는 자가 어찌 그 몸의 각 지체, 각 부분이 되랴.

아버지의 뜻은 곧 아들의 뜻, 우리의 직접 머리가 되시는 분의 지시인데

이 지시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가 어찌 몸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겠는가.


마귀는 그 "바벨론" 신학으로 많은 종교인(기독교인)들을 양산했다.

이제는 감연히 떨치고 일어설 때이다. 명실공히 "마지막 아담"의 지체가 될 때다.

머리이신 우리 임금, 주인, 나를 소유하신 소유주 하나님(요 20:28)이신데도

"예수, 예수"ㅡ"님"자는 온데간데없이 행방불명이 된 지 오래다.

철없기는 영미/英美인도 마찬가지. 지저스(Jesus), 지저스(Jesus), 아이 이름 부르듯 한다.

친밀한 뜻에서 그렇게 한다지마는 득보다 실이 많은 잘못된 인식이다. 

바울 사도는 그의 목회 서신(히브리서를 포함해)에서 반드시 "주/主"란 명칭을 붙였다.

예외가 있다면, 진리의 설명 과정에서 한두 번 "예수"라고 한 적 외에는.

바울 사도는 우리보다 더 "친밀감"을 못느껴 그러했던가?


사랑 일변도의 하나님으로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꼿꼿한 충절의 절대 복종만이 요구되는 바, "소멸하는 불"(히 12:29/신 4:24)이시다.

마귀의 거짓말 농간으로 인해 지금껏 잘못 배우고 잘못 인식하는 것이다.  

령의 감동감화하심을 사모하며 성경을 직접 부지런히 읽는 것 외에는

이 2천 년 가까이 덕지덕지로 끼어 돌같이 굳어져버린 때를 씻어 내기가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이러한 상황을 지적해주는 이가 거의 없기(마귀에게 세뇌 당하여) 때문이다.

오직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친히 가르쳐 나타내 주시지 않고는ㅡ.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는 육체 인생들을 마귀가 철저히 거짓으로 통제한 때문.

이 마귀의 철통같은 지배를 뒤집는 일은 성령 안에서 성령으로 기도함(유 1:20/엡 6:18)

다시 말해 "마지막 아담"을 통한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이다.

찾는 자가 찾고, 구하는 자가 얻고,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다고 약속하셨다.

 

여러 번 시험에서 하나님의 두려우심과 그 진노를 보면서도 범죄함으로 인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장정의 수효가 60만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 우 둘.

이 사실이 상징하는 바에 유념하라고 바울 사도는 되풀이해 경고했었다.

하나님의 한량 없으신 은혜로 구원은 받았으니까 그래서 영생하는 자가 되었으니

아담처럼 범죄하지 않고 영물 중 악령들처럼 영원 멸망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험은 짧은 이세상으로만 한정된다.

이 세상은 바로 이 시험 기간으로서의 의미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 치더라도 그 후대들만은 영물들이 악령, 천사로 가름되듯

갈라지게 마련이므로 이런 시험의 때는 "마지막 심판"과 함께 불가피한 것이다.  

이 과정이 완료된 때부터 영원 생명의 세계와 영원 고난 고통의 세계 즉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의 세계와 그 반대인 하나님의 위엄과 진노의 세계로 대칭된다. 

사탄이 거짓말로 속였어도 아담의 경우처럼 자업자득이다. 누구 탓 아닌 내 탓이다.


처음 창조의 "옛 사람"은 홑(단/單)사람이니 나 홀로이다.

반면 새 창조로써 "마지막 아담"과 머리/몸 관계를 형성해 있는 "새 사람"은

영혼(성령 곧 주님)과 육체(나 자신)의 대칭으로 된 "한 영"(고전 6:17)이므로

겹(복/複)사람이니 영원히 주님과 <하나된 둘>(둘로서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령(아버지 하나님과 하나되신 "마지막 아담"-요 10:30) 곧

"아들과 아버지를 모시고"(요이 1:9) 있는 새로 창조된 존재인데  

어찌 그 몸이 "하나님의 성령"(고전 6:19)이 아닌가!


고로 "성령으로 살면 성령으로 행해야"(갈 6:25) 함이니

사이비 집단이나 성경대로 따르지 않는 소위 "기독교"마다 

십자가 지신 "마지막 아담"과는 동떨어진 세상의 부, 귀, 영, 화를 추구한다.

화려한 치장(천주교의 성당, 사제 복장), 웅장한 건물(교회당) 등등.

사이비 이단 "신천지교"의 행사에 교주의 차림새, 군대식 사열까지 받는 따위 등.

알아야 하는 사실은 지금도 "마지막 아담"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모습이시니

그 교회를 통하여 그러하시다. 머리 쪽은 하나님 우편에 계시나 

발바닥 쪽은 여전히 그 "남으신 고난"(골 1:24)을 통해 

이 세상에서의 그러한 모습이시라 할까.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뒤쫓으라(눅 9:23/14:27) 하신 것이다.  

현재 그러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형상이신 까닭이다. 


짝의 법칙에서 머리는 몸의 것이요 몸은 머리의 것이다.

몸으로 보면 몸이고 머리로 보면 머리이며 둘은 불가분이다.

머리이신 주심께서 하나님 우편의 영광 가운데 계시나 동시에 위치하신 곳은

이 세상에서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 가운데다. 

같은 이치로, 고난 받는 그 몸된 교회로서의 우리는 현재 

하나님 우편에 있어(엡 2:6) "마지막 아담"의 신부(新婦)로서 그 위세 막강하다.

현실적으로 그러하다. 단 "주님을 위한 고난 받음"(빌 1:29) 즉

그 "남으신 고난 내 몸에 채움"(골 1:24)은 "약한"(고후 13:4) 데에서 이루어지므로

현재까지의 교회 수난사(受難史)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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