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7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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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천사가 다니엘에게 고한 "세상 끝" 예언은
2차에 걸쳐 연거푸 "봉함"되어 있음을 강조했고(단 12:4,9),
이 예언에서 천사의 괴이한 
표현의 언어 구사로서의
"한 때, 두 때, 반 때"도 2차에 걸쳐 연거푸 강조되고 있어
(7:25/12:7) 간단히 요약해 의미 심장한 
이 언어 유희는
다니엘서 12:4이 콕 집어서 지적한 20세기
(오늘날 20세기를 당해보니까 비로소 알게 되는) 이후에야
그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니 다음아닌
숫자로 표기된 
"짝의 법칙의 도식" 즉 1, 1×2, 1÷2.

1은 1시/始 곧 처음 하나에서 출발한 2원/元  짝이란 뜻으로
짝은 반드시 성질이 정반대라는 특징이 있어  1×2, 1÷2.
그러나 처음 1에서 시작했은즉 2가 도로 1로 돌아가 1을 구성,
따라서 현재 짝을 이룬 2와, 2가 1이 된 그 1이 합치면 3.
그리하여 "3위1체의 법칙(짝의 법칙)"이라 하는 바, 
이는
노자의 "3생만물
/
生萬物"(짝의 법칙의 또다른 표현)과 일치. 

신구약 성경의 터전은 아시아 대륙 위치상 세계 중심이나
복음 전파가 서쪽으로 향하여 동쪽으로 돌아 오는 형국이므로
"기독교는 서양 종교"라는 통념이 지배적이었기에
세계 인구의 절대 다수인 동양인에게 소외, 배척을 당했으나
이 노자의 도덕경이 그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니,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 운행의 기본 법칙이 다니엘 예언 무렵
거의 같은 시기 역시 20세기 이후 겨냥의 "봉함된" 예언으로
정체 불명의 노자로 인해 존재애 왔기 때문. 허나 존재는 하되
오늘날까지 "짝"이라는 것이 만유의 법칙됨을 몰랐었기에
(오늘날 21세기에 짝의 법칙이 발견됨으로써만 가능했기에)
그래서 다니엘 예언과 더불어 "봉함 예언서"라 하는 것.


노자가 설파한 "도/道"는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킴이니
"도생일/道生一"은 비로소 창조를 시작하신 그 시
점/時點
즉 홀로 존재하시다가 피조물과 관계를 이어가신 때를 말해
노자 주창/主唱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 함께 
노자를 인간이 아닌 천사의 
일시적 화신으로 보는 이유.
"무위자연"이든 "작위/作爲"든 창조주를 제외시키면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궤변, 횡설수설이기 때문.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인데, "작위" 없이 무슨 문명 발달인가.
야만인은 벌거벗은 채 샅만 가리고 천만년 살란 뜻이 아닌가.
고로 오직 창조주를 전제해야 창조하신 그대로 따르란 뜻으로
"작위"를 배제하라, "무위자연"을 따르라 역설할 수 있는 것.
여기서 "창조"란, 처음 창조든 새 창조든 두루 엮어지니까.


그렇다면 노자의 사명은 다른 그 어느 무엇에도 있지 않고
다니엘 예언의 "봉함"이 풀려지는 이 20세기 이후에서야
각광을 받을 다니엘 예언의 중요한 보조 역할에 있는 것.
다시 말해 짝의 법칙의 "예언"적 권위를 확립해 줌인 것.
양자역학,상보성 원리 등의 현대 물리학과 맞물려
가히 그 "예언적" 권위는 절대적이라 할 것.


그러나 노자의 도덕경이 이러한 주제를 가지고 논하면서도
"창조"니, "창조신"이니 하는 것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기에 
짝의 법칙이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는 21세기 지향의 
다니엘 예언과 관련시켜 "봉함 예언"이라 하는 것.
앞서 지적한 "서양을 상대한 성경"이란 오해 불식 차원에서도.
노자 도덕경은 짝의 법칙 관련해서만 유용하게 활용될 뿐,
그 외의 것은 오직 이를 위한 들러리 구실임을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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