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5일 화요일

내 마음 기쁘고 평안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내 마음 기쁘고 평안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주님의 평안과 기쁨을 내 것으로 하고 있으니까(요 14:27/15:11). 
그러나 주님의 순종을 내 것으로 할 수는 없다
왜냐, 내가 주님 위해 사는 것을 일컬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니까






사람은 이중 구조로 창조되었다. 육체와 영혼의 대칭성이다.
죽은 자가 된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독자, 독생자) 친히
영원히 사람이 되시니 하나님은 영이신데 
친히 사람의 육체를 입으시니까 역시 이중 구조가 되신 것.
사람의 영혼과 사람의 육체의 대칭이 아니라
성령(영혼 격의 주님)과 인간(그 육체 격인 나 자신)의 대칭.
이는 조물주(창조주)와 피조물의 대칭이다.
그러나 이중 구조의 성격은 같아야 하니까
주님께서 <성령+인간 육체>이시니 나 역시
<성령(아버지와 하나되신 예수님)+인간 육체(육체인 나)>.
즉 마지막 아담과 내가 "한 영"(고전 6:17)으로 둘이 하나됨의
이중 구조로서 새로이 창조되고 다시 출생
즉 성령으로 출생하는 것이다(요 3:5).

둘이 하나가 되어 있은즉 
남자 몸의 여자 것, 여자 몸은 남자 것인 한 몸의 이치와 같다.
즉 나는 주님 위해 존재하고 주님은 나 위해 존재하여
서로가 삶은 맞바꾸어 사는 짝으로서의 삶이다.
고로 죄를 지을 수가 없다. 
죄는 짓는다면 아담처럼 또는 악령들처럼
고의적으로 짐짓 죄 짓는 것이니 이는 용서 불가능(히 19:26).
요한 사도가 말한 죄(요일 1:7-2:2)는 형제 사랑과 관련된
부지부식간에 짓는 죄를 가리킴이다. 
말씀에 대한 총체적인 무식무지로 인해 여기서 많은 사람이
혼동을 하는데 명백하게 다짐해 둘 일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둘이 하나된 이중 구조에서
원천적으로 죄 짓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돼 있다.
자아중심이 아니라 항상 자기 부인으로 일관하기 때문.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데 어찌 자아중심이 가능한가. 
한 마디로,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벧전 4:8).
둘의 하나됨, 너는 나 위하고 나 너를 위하는 구조가 사랑이다.
머리이신 하나님을 상대로 몸으로서 그러하고
한 몸을 이룬 각 지체 사이인 이웃(믿음의 형제)과 그러하다.

다시 말해 내가 하나님을 선물로 받아 사랑으로 모시고 있으니
내가 무슨 욕심을 내리요. 욕심 낼 대상이 없다.
모두가 내 것으로서 주님과 함께 된 하나님 상속자니까(롬 8:17).
천상천하 무적. 적수가 없다. 내게 대해 혀를 놀릴 자가 없다.
그래서 너무나 막강한 자이므로 악령들과 전쟁을 해도
일부러 약한 자가 되어주어야 대등한 싸움이 된다(고후 12:9).
약한 자의 위치에서 불굴의 신념을 변치 않을 때 다시 말해
나의 신념을 악조건이라고 해서 굽히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것으로써 승패를 결하는 싸움인 것이다. 
어찌 보면, 사치스러운 전쟁이다.
그러나 지조를 변절시키면 곧장 멸망 길이니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내, 오래 참음을 강조, 또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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