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
하나님이 이 세상 살라고 하시더라도,
"아닙니다, 모든 인생이 멸망에 들어가는 급박한 이 시기에
나 혼자 살겠다고 이 악한 세상에서 덤비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구원 얻는 복음을 전하겠으며, 제사장 기도로써
얍복 나루에서의 씨름을(창 32;24) 하겠습니까" 해야 옳다.
하물며 명명백백히 명령하시기를, 계명을 주시기를,
"세상에서 자기 생명 사랑하면 잃느다"고 하셨음에랴(요 12:25)!
우리가 백년 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제한된 삶을 산다면 평생 살아도 아쉬울 정도로
시간이 모자랄 판에 그런 시간을 쪼개서
사람 살리는 기도와 전도에 할애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어불성설.
바울 사도가 혼자 지냄이 복이 있다 할 때
"마음이 나누어진다"(고전 7:33), "이치에 합함",
"분요함(내적 갈등)이 없이 주를 섬긴다"(:35) 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킴이다. 이는 상식선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일.
고로 산다는 생각을 아주 접어버리고
오로지 일구월심 사람들 구원해내겠다는 일념(롬 9:3)으로
일하지 않으면 "주의 일을 염려함"(;32)이 될 수가 없다.
"다 자기 일을 구하고 주 예수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빌 2:21)고
바울 사도가 탄식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함"(3:18)이라, "멸망"(:19)이기 때문.
바울의 "많은 눈물"(:18/고후 2:4/행 20:19,31)이 이 때문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일꾼의 이러한 "눈물"인 것이다.
"하나님"이시라니까 무턱대고 노예근성부터 앞선다.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 하는 피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주인의식>임을 항상 망각하지 말아야.
"천국은 침입하여 빼앗아 차지하지 않는"(마 11;12/눅 16:16) 한 못들어간다"
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라 하셨겠는가.
믿음 좋은 아브라함. 이는 다시 말해 하나님의 친구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믿음이 좋을 수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말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 살아도 된다" 하시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아닙니다" 할 줄 알아야
이것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인 것이다.
사랑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함이 많을수록 그 사랑은 많고 크고 깊다.
다른 말로 하면 의식생활에 뿌리 박힘이다.
주님 의식, 예수님 의식의 일상생활.
그래서도 "쉬지 말고 기도함"(살전 5;17)이다.
그 단적인 증거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킴"(고후 10:5)이다.
사람은 생각 없이는 삶의 영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말에든 일에서든.
그런데, "모든" 생각이다. 주님 의식 없이 그것이 가능할까?
주님과 더불어 엮어지는 일상생활의 행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에녹을 가리켜 "하나님과 동행했다(to walk with God) 한 것.
아브라함에게 "내 앞(면전에서)에서 행하라(Walk before Me.)" 하셨다.
모름지기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해야.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으니 그 (잊은) 날을 셀 수조차 없다"(렘 2:32).
이것이 타락의 시초이다. "멸망"(빌 3:19)에 이르는 첫 걸음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으라"(고전 16:22)고 한
본 뜻이다. 마음 깊이 아로새길 일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성경을 가까이하라는 이유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성령께서 "책망" 등의 일을 하실 수가 없다.
마귀가 "성령, 방언, 치유" 등을 빙자하며
멸망 길로 유도하는 줄도 모르는 이 세대여!
회개하여 하나님 말씀 성경으로 돌아오지 않고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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