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토지)를 버린 자는
이 세상에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
(막 10:29,30)
이 세상에서 "백배"나 받으면 애당초 버리지 말고
자기 것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다음의 주님 말씀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즉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 사랑하면 그 생명 잃는다"이다.
그러면 어느 쪽이 유효한가. 유효하기로 말하면 다 유효하다.
"백"은 충족 수/數이다.
다시 말해 백배나 받는다는 말씀은
내가 버린 그만큼 아니 그보다는, "충족하게" 도로 얻는다는 뜻.
더 필요 없을 정도로 더 요구할 것이 없도록
충분히 채워진다는 <생명의 법칙>을 말씀하심이다.
단,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자기 생명 사랑하지 말라는 것.
"백배"로 얻는 그것이 재물일 경우,
백배로 얻은 그 재물을 주님 말씀대로
"다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제자 베드로가 "우리가 주님 말씀대로 다 버렸으니
이제 우리가 무엇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까?" 여쭌데 대한
대답으로 주신 말씀이신 것이다(마 19:27).
그리고 혈육 곧 살붙이(보모 자식 형제)일 경우
아담이 애초 범죄하지 않았다면
아담 홀로 계속 자식 생산을 할 것인즉
모든 인간은 다 형제간이다. 이것이 혈육, 살붙이의 원 개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특별히 나만의 부모 자식 형제란 것이
있을 수 없으니 생명의 법칙에서 모든 내 이웃이 바로 나 자신의 분신.
거대한 나 자신을 형성함이니 바로 말 그대로의 대아/大我다.
"한 몸" 구조/체제에서 나 혼자만의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을 머리를 모신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어 있는 이런 무한대의 풍족함을 다 함께 누림이다.
삶 자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모든 인식,
고정 관념을 바꾸어야 하는 것.
왜냐면 아담 범죄로 야기된 폐단, 병폐가
지금까지 (메시야 오시기 전까지의) 왜곡된 모든 관념과 인식이었기 때문.
고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식구가 무작정 반대하여
혈육으로서의 의를 끊는 것으로 위협을 해온다면
이 경우 나는 그들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아담이 지금까지 범죄 않고 생존해 있다면
그리고 많은 자식들을 낳아 내가 그 중 하나일진대
개중에는 악한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어
의롭게 거룩하게 살기를 좋아하는 이들과는 원수지간이 될 것인즉
그들에게 더 이상 연연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백배"나 되는 여러 형제들이 내 주변으로 건재하여 차고 넘치니까.
기본 자세는 이렇게 정하고,
세부적으로는 내가 먼저 구원받았으니 당연히
나의 남은 가족이나 정든 친척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순서를 밟아 감이다.
눈을 뜬 자와 아직 눈을 감아 보지 못하는 자와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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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구원받아 산 자가 되어 있음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어 다시 산 자가 되신 대칭 아담으로
다시 출생하고 새로 창조되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칭 아담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짐"(고후 4:10)이 필연.
대칭 아담의 남은 고난 즉 이 죽음을 짊어짐은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나를 산 자로 만드신 <대칭 아담을 위함>인 것(:11/빌 1:29).
이렇게 여전히 대칭 아담께서 그 몸된 교회를 통해 죽음의 고난 가운데 계시니
아담의 원수 이 세상 지배자 사탄이 아직 "죽음의 권세를 쥐고"(히 2:14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도 맞물린다.
이 원수가 무저갱(bottomless pit)에 들어가야 그 권세를 비로소 빼앗기게 된다(계 20:3).
이 모든 것은 나머지 사람들의 구원을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 여부를 가려내기 위함이기도 하다.
우리도 아담의 범죄처럼 악령들의 멸망처럼 될 수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두렵고 떨림으로"-빌 2:12) 대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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