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8일 월요일

질문과 답변


질문:
노아의 대홍수로 지구상 인간을 모두 수장 시켰는데 인간이 타락해서라면
15세 이하 어린 아이들, 특히 영유아들은 부모가 타락해서 부모 탓에 죽은 것이 아닌가?


​답변: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개략적 기록만 남겨두고 있으니까 아래의 사실들을 유념해볼 수 있는 바
1. 당시 네피림의 후예들이 인간 중에 많이 섞여 있어 주류를 형성했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구원 자체가 불가능하고,
2. 인간(아담의 후예)의 구원은 미리 아심(인간의 자유 의지는 일절 간섭함이 없이)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억울하게" 영유아로 죽는 경우가 없도록 만반 조처를 취하셨을 것이며(가령 아예 태어나지 않도록 하신다든가노아 홍수가 일어났을 특정 시기를 전후로 잠시 한 때만 인간(네피림이 아닌 아담의 후예)이 생산되지 못하도록 주선하신다는 것은 창조주로서는 가능하신 일이니까),
3. 영유아만 아니라 성인이라도 그렇게 당시는 노아처럼 구원받지 못하고 죽었을지라도
나중에 회개하고 구원될 여지를 남기신 것(벧전 3:19,20).

단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노아 당시 사람(망자/亡者)들에게 구원의 말씀이 전파되었듯이
공자, 싯달다(불교의 부처),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사람들이 현세에서는 구원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어
믿음 없이 저승에 가더라도 구원 받을 기회는 있다고 하여 그렇다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원의 말씀 전달하는 일을 등한히 할 수 없으니, 평생에 단 한 번도 구원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어
비록 죽고 나서야 다행히 회개해서구원받을지라도 나는 내 임무(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전도의 일에 전념해야 하는)를
다하지 못한 악함 즉 불순종을 인하여 멸망하기 때문입니다(고전 9;16).

우리가 구원받아도 즉각 주님의 부활하신 몸처럼 영화로운 초자연계의 자유 분방한 육체로 변환되지 않고
여전히 초라하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이 죽음과 썩음의 몸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이 세상(믿기 전에는 실상을 몰라서 사는 데인 줄 알고 살기에만 열중했던 것) 여전히 살고자 함이 아니라
이제는 모든 실상을 알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되었으므로 주님의 보내심 받아
(주님 친히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똑같은 양상으로-요 20:21,22)
사람 구원하시는(재출생, 새 창조) 아버지 하나님의 일을 그 아들된 새로운 신분으로서
동참(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니까-고후 6:1)함으로써 <일하기> 위함, 오직 일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수고로이 일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무엇이라고 감히 천하태평으로 삶의 낙을 즐기며 놀 수 있나요.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하나님의 일이란 것은 새 생명 탄생시키는 일, 해산의 수고, 진통, 산통, 산고를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로 인한 하나님의 죽음, 저주, 진노의 질서를 따름이어서 이런 해산의 고통은 불가피, 필수입니다.
달리 길이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스스로 우리 몸에 기꺼이 자발적으로 채우는 것입니다(골 1:24).
예수님 죽인 것을 항상(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은) 짊어지는 이유입니다(고후 4:10-12).
왜 주님께서, 사형수가 사형 형구를 지고 사형장으로 가듯이 하라, 따라서 부모형제 아내남편 자식들을 모두 버리고
죽음 길로 떠나는 자들처럼 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내 스스로 죽는 길로 나가니까 자연 그들을 미워함이 되고 나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함이 되고
(왜냐면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그 길을 따름이니까 내 목숨도 미워하고
내 가족도 미워함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인즉)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림이 되는 것인즉
단단히 각오를 하고 그와 같이 우리 앞서 나아가신 주님을 따라오라는 경고가 눅 14:26-33입니다.
주님과 내가 한 몸(머리와 몸)되는 관계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머리께 대한 몸의 순종의 의미가 되므로
절대로 생략될 수도 없고 소홀히 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생명보다 더 진귀한 관계가 이 머리와 몸의 하나, 한 영됨입니다.
아니,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이 '머리와 몸 관계'를 떠나서는 향유될 수 없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한 때 고난을 기피하여 싫어하여(그래서 사랑이 모든 것의 핵심 열쇠라고 합니다ㅡ
사랑만 있고 보면 물이라고 불이라도 뛰어드는 법이니까) 몸을 사린다면, 모든 것은 법칙 즉 원리원칙대로
어김없이 되고 마는 것이니까, 실로 무자비하게 생명에서 탈락하고 낙오되어 영원 멸망만 자초하게 되는 것은
필연 중의 필연입니다.

죄 많은 세상이라 법을 어기기를 식은 죽 먹듯이 하니까 이런 법의 삼엄함을 몰랐지만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법의 엄정함을 배웠으므로(생명의 법칙을 따라
하나님 친히 우리 중 하나 곧 인간이 되시어 친히 고통과 치욕 속에 죽으시지 않고는 안되는 법의 엄정성)
모름지기 법(하나님의 모든 말씀, 계명 등) 준수가 생명임을 자나깨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법의 엄정성은 우리가 자연법칙을 통해서도 충분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한 치 오차 없이 그대로 진행되는 자연법칙. 무릇 모든 법칙의 속성이 그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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