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짝의 법칙에서의 짝의 의미입니다.
머리와 몸, 영혼과 육체, 어버이 자식, 남자 여자, 창조주와 피조물 등.
애초 "사람이 혼자 지냄이 좋은 것이 아니다"(창 2;18) 하신 그대로
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자 관계("아버지"와 "아들")로 계심처럼
(부자 관계라 해도 성별을 따름인즉 공평되게 "모자" 관계라 했으나,
인류의 대표 아담을 기준하되 아담이 나중에 남자가 되었으므로
남자(아담)를 중심하여 대표적으로 어버이 자식 관계를 나타내는 것)
인과, 주종(主從), 선후(先後), 대소 관계로서의 짝 즉 둘의 하나됨입니다.
이 둘의 하나됨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안정된
형태(형상), 구조입니다. 그래서 짝의 법칙을 만유의 법칙이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친히 계시는 모습을 따라 모든 창조를 진행하셨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메시야 주님께서는 이 둘의 하나됨을 "안에 있다"로 표현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요 10:38/14;10,11),
주님께서는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15;5).
그리하여 성부(聖父)께서는 성자(聖子)를 세상에 보내셨고
성자께서는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심을 "먹을 양식"(4:34)으로 삼으심이며
고로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신다"(14:10) 하셨으니
우리를 보내신 주님도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십니다 .
우리도 이와 같음은 성령을 받아 모심으로써 되는 것으로서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어
우리가 그에게 와 거처를 그와 함께 할 것"이라 하신 대로입니다(:23).
이 "우리"는 창세기 1:26, 3:22, 11:7의 "우리"와 같은 의미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에는 아직 아무 행위도 하기 전이나
우리의 회개를 보시고 다시 말해 하나님 뜻대로 행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을 수용하시고 그래서 마치 순종하는 자처럼 간주하시어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행 5:32)을 미리 주심입니다.
추수하는 일꾼에게 먹을 양식부터 먼저 주는 이치 그대로입니다.
순종은 내가 능력을 받아야 즉 주님과 둘이 하나되어야 할 수 있어
성령을 받음으로 그렇게 되니 성령부터 먼저 주심입니다.
쌍방이 다 믿음으로써이니 하나님께서도 나를 믿어 주심으로써,
나도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과 그 뜻을 믿음으로써 순종하게 됩니다.
이 성령께서는 주님 편에서 볼 때는 "내가 아버지께로서 보내는 성령"
아버지 편에서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의 이름으로> 보내시는
성령"(요 14:26)이 되시니 곧 아들께서 보내심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버지 친히 내게 오심이요 아들 친히 내게 오심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모심"(요한2서 1:9)이라 성경은 명시합니다.
(하나님 친히 당신 자신을 소재(素材)로 하여 자기 형상을 만드시니 아들.
물론 성자께서는 피조물이시나 일반 피조물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신
하나님 특성을 완비하신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골 1:15).
또 성부의 형상이시므로 성자로 인해 성부께서 만유 창조(히 1:2).
고로 우리가 인식하는 창조물 범주에 들지 않으시는 독생자 하나님.
유일하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짝을 이루실 수 있는 것.
따라서 헷갈릴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이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비로소 만물을 지으셨기 때문.
다시 말해 만물 창조의 창조주 하나님 위의 하나님이 성부이신 것.
짝의 법칙으로서의 "하나"(요 10:30)이시니, 같은 분으로 오해 말 것.
동일하실 수 없는 아버지 아들 관계시라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보다 크시다"(15;28) 하셨고, "아들도 천사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는"(마 24:36) 부분이 있음을 명확히 하신 까닭입니다.
마귀의 농간 때문이지, 성경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간단히 알 수 있는 관계를 단지 혼동시킴으로써 마귀는
"삼위일체"로 두고 지금까지 우왕좌왕하게 만든 것입니다.
내게 성령으로 오시되 따로따로 오심이 아니라 "하나"로 오심입니다.
"마지막 아담"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5:43/10:25/17:12)
모든 것을 하시니 즉 아버지 친히 하시는 모습으로 하심입니다.
우리도 "말에나 일에나 <주님 이름으로> 함"(골 3:17)이니,
이는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함"(벧전 4:11)이라 함과 같습니다.
몸(의 각 지체)이 머리의 뜻을 따라 지시대로 움직임 그대로입니다.
즉 죽든지 살든지 주님 위해서만 사는 것이(롬 14:7-9/고후 5:15)
새 생명으로 새로 창조되어 새 사람된 자의 마땅한 삶의 법질서.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심문을 받는다"(마 12:36)
하심이 그 뜻이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룩 것"(5:18)이라 하신 경고에 유념해야.
자아중심은 "자기 이름으로 하는"(요 5:43) 모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고(그래서 탐욕은 우상 숭배-골 3;5/롬 1;25)
자기가 우주 중심이라 이러한 자들끼리일 때 전쟁뿐이고 공멸(共滅).
고로 어느 시대, 어느 경우에서든 사는 법은 한 몸(머리/몸) 체제의
너와 나의 하나됨, 한 몸됨 곧 공동체 의식 외에는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는 점에서 평등, "평균"(고후 8:13,14)입니다.
고로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존재한다"(눅 22:27)고
머리이신 주님 친히 선언하셨고 이를 확증하신 것이 "십자가" 사랑.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시면 나는 성령의 전 곧 하나님 성전(고전 6:19).
이와 같이 성부와 성자께서 하나로 계시므로
성자의 모습이 성부의 모습이시고 성자께서 성부의 형상이신지라
기도할 때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 기도를 이루어 주심은 성부이시기도, 성자이시기도 하므로
"너희 중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들 위해 이루게 하신다"(마 18:19),
그리고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할 것이니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해 영광 얻으시게 하려 함"(요 14;13)이라
하신 것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마지막 아담"의 이름으로 함입니다.
몸 따로, 머리 따로 놀지 않고 머리가 대표이고 몸은 머리에 딸린 것.
몸은 머리의 "형상" 역할이고 머리는 몸 없이 생존 불가입니다.
피차는 성질이 정반대이면서 피차의 생존에 절대 불가결입니다.
메시야 주님의 다시 세상 오심은 그 몸된 교회를 위해 오심이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히 9;28) 즉 "몸의 구속"(롬 8:23)입니다.
"다시 사들임, 되찾음, 몸값 주고 빼오기, 구조, 구출" 등 의미의
"구속(redemption)"이란 말 자체가 우리 몸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이 자연계 몸이 초자연계 몸이 되는 것이 영생인즉
이는 무엇을 정확히 의미하느냐 하면 아담의 애초 몸이
이같은 자연계 몸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몸의> 구속"이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이전 상태의 몸으로 회복됨을 말함인데
언제 우리 인간의 몸이 천사들처럼 신령한 몸이 되어본 적 있나요?
오직 아담이 범죄하기 전 그러했다는 그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아담"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이유임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건만 당시 천주교 신부들은 이 재림의 이유를
무굴 제국의 아크바르에게 답변하지를 못했습니다.
무조건 인간은 자연계 몸으로 죽게끔 창조됐다는 사탄의 맹목적
거짓말에 놀아난 탓으로서 사탄이 완전히 눈을 어둡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꼭 이 세상에 오셔야만 그런 몸의 변화가 가능한가 하겠는데
사람(아담)은 땅의 사람이지 그룹/스랍처럼 하늘의 존재는 아니니까
또 자연계 몸으로 일단 처음 세상에 임하셨으니까
그 때의 자연계 몸이 비정상 상태이지 정상 상태가 아니므로
본격적으로 완전 정상 상태로 재차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이같은 "육체 회복"으로 다시 오시기 전 성령으로 먼저 다시 오심으로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출생해 새로 창조된 상태에서 대기 중인즉
이 세상으로 오셔야만 제대로 순서를 따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세계에서 이치에 벗어나고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아예 존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로써도 확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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