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도 악인이고 악인도 죄인이지마는
성경에서 악인라 하면 자아중심을 선호하고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악령류/類를 말하는 것.
고로 세상에 넘쳐나는 악을 보고
인간은 거의 모두가 악하다고 할 것은 없으니
본디부터의 악으로 태어나는 네피림이 이세상에
얼마만큼 포진해 있어 악의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인데
사탄이 욕심껏 전체 인류의 90%가 되도록 만들었는지
혹은 다만 과반수로 그치는지 가늠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단지 군중심리에 압도되거나 다수에 휩쓸리거나
하는 일만 없다면 그렇게 심란해 할 필요는 없는 것.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빠져들어가는 죄인"이란 설교로
미국 제1차 교회부흥(1730~1750년대)의 중심인물이었던 장로교 목사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이 말은 유명하다.
(제2차 부흥은 1857년 정오기도회(Fulton street prayer meeting)
및 찰즈 피니를 중심으로 한 1790~1800년대의 영적 대각성)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을 모르고 배반하더라도
그래서 오직 한 사람만이 비록 남아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감연히 그 '한 사람'이 될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1703-58)의 당시 설교 원문:
https://www.ushistory.org/documents/sinners.htm
에드워즈 목사의 설교 도중 중단된 사례는 그 날이 유일했다.
중요한 것은 설교 내용이라기보다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심이었다.
그 날 설교 시작 전의 그의 3일 금식 기도의 결과였던 것이다.
에드워즈 목사는 힘이 없어 설교 원고를 그냥 읽기만 했었다.
그런데 얼마 못가 청중석 곳곳에서 통곡과, 비명소리가 터져
더 이상 설교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연합집회라 연석해 있던
여러 교회 목회자들이 나서서 이 별안간의 사태 수습에 바빴다.
주 예수님을 통한 은혜의 구원의 소식을 들려주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다른 데에서는 영적 대각성의 기미가 현저히 나타났으나
유독 그 곳만은 냉냉했고 경건미라고는 찾아볼려야 볼 수 없었는데
그 날(1741.7.8) 그와 같은 대역사가 이루어졌으니 1907년 한국교회
부흥도 장로/감리교 주한 선교사 20명의 4개월 여에 걸친
합심 기도가 이루어 낸 성령의 역사/役事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그 지시와 인도를 따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이나 어제나 영원히 종일하시다"(히 13:8).
사람들은 외양만 보기에 급급하여 정작 중요한 그 이면을 간과한다.
설교가 훌륭해서가 아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그 이면이다.
인물이 출중해서가 아니고 예수 우리 주님의 친히 개입하심이다.
주님을 멸시하는데 어찌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겠는가.
설교를 중시하고 기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니 그것이 성령 소멸이다.
무엇이든 한 쪽으로만 이지러지면(편향) 그것은 자아중심이니
자기 좋은 대로, 자기 현한 대로만 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이다.
여기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아무 것도 기대 않는 것이 좋다.
개인이든 교회사/史적 흐름으로든 기도 외에 달리
그 무엇이든 진행된 역사가 없다
(마 17:21에는 난외주/欄外註로 "기도와 금식").
※ Biblegateway 60개 영역본 중에서
"기도와 금식"으로 번역한 데가 31로서 과반수를 넘고 있다.
(1907년 한국교회 부흥에서는 금식 기도를 하지는 않았으나
개별적으로는 점심식사를 걸렀을 수도.)
처음 한 달간은 정오 때 한 시간만 기도했으나
다음 3개월 동안은 일제히 더 이상의 시간을 내어 기도했고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도 머물러 기도할 수 있었다.
1907년 한국교회부흥을 탄생시킨 선교사들의 매일 기도집회는
초대교회의 매일 모여 기도한(행 2:42,46) 본을 부지중 따른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개인적으로 매일 기도에 힘쓸진대
교회 전체로 합심 기도를 매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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