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16일 금요일

마음(생각)을 지키지 못하면 범죄자 아담도 되고 악령도 되고 파멸이 목전이다





 




마귀는 그동안 "온 천하를 꾀는"(계 12:9) 속임수로

(성경의 영역(領域)이라고 예외일 수 없어 아담 죽음을 "영적"이라 속임)

"계명 지킴"이라 하면 무조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러나 구원된 자의 특성을 성경은 단호히 규정하여

"계명 지킴"(고전 7:19/요일 2:3,4/계 12:17)이라 확정한 것임을 

누구나 글을 읽을 줄 알고 성경을 읽는 자마다.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주님 친히 확언해주신 바로서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요 14:15)이라 하셨고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할 것"(15:10)이라 하신 것이니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데 이 믿음의 본질이 사랑임을(갈 5:6)

바울 사도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믿음의 법을 역설한 바울 자신이

누누히 강조한 것으로서, 이 계명은 구약시대의 율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법칙 즉 주님 말씀하신 "새 계명"인 것이다. 


"온 선지자와 율법의 강령"으로서 내용은 같은데 왜 "새" 것인가.

주님 친히 십자가 죽으심으로 확증해 보이신 자기 부인이기 때문.

다시 말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요 13:34)

그림자 성격인 구약 시대에는 이 자기 부인의 말씀이 생략되었다.

그 때는 "마지막 아담"께서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영원불변의 생명의 법칙,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 위하는

바로 이 이치이므로 어려울 것도 없고 소화하기 힘든 것 일절 없다.

내가 몸으로서 머리를 위하지 않는데 어찌 머리께서 나를 위하시랴.

하나 즉 한 몸으로서의 구원됨이라 주님 나 위해 죽으심이 구원인데

이 사실 외면하고 무슨 "의롭다 하심"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몸으로서 머리를 오직 휘하고 자기를 위할 수 없게 되어 있으니까

법칙이고 (율)법이고 계명인 것이다. 바로 이 생명의 법칙을 가리켜

주님도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킨다"(15:10) 하신 것이다 

은혜와 율법 관계를 너무나 격 떨어지게 마귀는 그동안 

가르쳐 온 것이니 그래서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라 한 것. 



사탄의 죄의 본질은 교만이다(딤전 3:6). 모든 죄의 뿌리인 자아중심의 특징이다.

혹자는 "하나님을 만나면 교만을 척결한다"고 가르치는데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던가. 우리 주 예수님을 직접 뵙고(행 26:13)

아라비아 사막에 3년이나 있으면서 성령의 친히 가르치심을 받아

12사도들로부터 아무 것도 성경에 관한 한 물려받은 것이 없다.

성령으로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친히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고로 바울 이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럼에도 바울이 교만할까 하여 육체에 가시를 주신 것을 보라(고후 12:7).

내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상에서 죽었다(골 3:3)는 확신을 토대로 한 끊임 없는 자기 부인의 자기 편달만이 답이다(고전 9:27). 자기 부인 없으면 주님 제자가 못되니까. 즉 구원이 불가능이니까.

자기 부인은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믿어 구원될 때 이미 이뤄졌다. 그러나 그 이뤄진 상태로서의 처음 믿음, 처음 사랑을 지속시키는 것은 주님 은혜 가운데에서의 나의 사랑의 의지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내 의지, 이 둘은 항상 평행선이다. 이 레일 위로 달리는 열차가 우리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내 구원 완성시켜 놓으셔도 내가 이를 수용해 스스로 믿지 않는 한 그림의 떡일 뿐이니까.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인 것이다. 성경을 잘못 읽어 이 구분을 못하는 이가 너무나 많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 5:6)인데
사랑의 핵심은 각자의 자유의지이다. 이것이 자유의지를 주신 이유다.

바울 사도에게 베푸신 은혜에서 보듯이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좋은 것)을
이루게 하심이니(롬 8:28) 은혜 아닌 것이 없고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으니 은혜 일색이다.
우리의 창조부터가 선물이고 새 창조(구원)부터가 은혜로 시작한 것이기에.
사랑의 의지만은 나만이 좌우하고 하나님의 강제 간섭은 없으시다.
바울에게 교만하기 않도록 그런 은혜 베푸심은 간섭이 아니시다.
바울이 변함없이 주님 향한 일편단심을 지속했기에
주님께서도 그와 같이 긍휼을 베푸심이니, 사랑의 동시성의 양면성이다.

나 위해 십자가 죽으심을 당하심으로 주님의 내게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기에
나도 당연히 주님을 사랑한 것이다. 순서대로 되는 법칙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데 주님께서 자기를 다시 나타내주실 수 없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요 14:21) 약속하신 것으로써
확인되는 것이니 "계명을 지키지"(:21) 않으면 나타내실 수가 없는 것이다.
나타내시고 싶어도 하실 수가 없다. 모든 것은 법칙대로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의 관계를 지속해야
즉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되기를 힘써야"(고후 5:9)
"주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고전 7:32) 해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히 12:28) 
"힘써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스스로) 굳게 해야"(벧후 1:10)
"천국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심"(1:10) 다시 말해
바울에게 주심과 같은 은혜를 주시어 교만하지 않도록 하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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