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9일 목요일

성경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써 예고했던 양자역학(미시세계에서의 짝의 법칙의 작용, 거시세계에서는 음양론, 상보성 원리 등으로 그 윤곽이 알려져 있으니까)

 



혹자는 이런 말을 한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이해한다>고 말하기보다 <특정 현상을 발견 혹은 정리해 놓은 것을 알고 있다> 정도로 말해야 옳다". 양자역학의 선구자 닐스 보어도 “양자론을 처음 접하고(양자역학을 연구하면서도) 충격 받지 않은(머리가 혼란스럽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뜻이다”라는 의미로 말을 했고,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며 양자전기역학의 재규격화 이론을 완성한 연구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1965년)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1918-1988) "지금까지 양자역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나 이 파인만이 "현대 물리학의 유용한 지식 중 겔만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극찬한 머리 겔만(Murray Gell-Mann, 1929-2019)은 ‘소립자’의 세계를 완벽하게 정리해서 ‘20세기의 멘델레예프’라는 명성과 함께 40살의 젊은 나이에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누린 천재 물리학자인데, "양자역학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과의 차이는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라 하겠고, 양자역학을 모르면 금붕어와 진배없다"란 말을 했으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모든 분야에서 현실적으로 활용되고 있으므로 양자역학을 알아두면 좋은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학도는 거의가 동의하는 편이다. 그런데, 왜 "양자역학을 제대로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파인만)는 것일까. 

 

이유는 예로부터 한중일 동양 3국에서 음양 이원론을 발전시켜 왔지만 그 뿌리를 이 우주 삼라만상을 주재하는 법칙으로는 이제껏 인식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 근저가 되는 짝의 법칙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이미 선언해두고 있는 짝의 법칙(3위1체의 법칙)의 미시세계에서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양자역학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이 음양론에서, "상반된 성질이 하나로 존재하는" 것까지는 알고 있는데 왜 하나인가 하는 핵심을 구명하지 못한 데에서 그와 같이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쪼개고 또 쪼개면서 들어가고 또 들어가면 마지막엔 결국 +,-전기 현상밖에 남는 게 없다"고 하는 이가 있는데 바로 그런 것으로서 그러나 어째서 그렇게 둘로 나누어져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지를 모르는 까닭이다.

 

불교에서는 이 양자역학을 두고 자기네 교리의 연기론(緣起論)과 닮았다 하여 "싯달다("부처")"의 "깨달음"이 과학적 근거에 의한 것이라고 의기양양해 하나 그런 주장의 치명적인 결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을 인과론이라 하지마는 인과 관계는 짝의 법칙에서 말하는 인과, 주종, 대소, 선후 관계로서 모든 현상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모든 현상은 독립 ·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것을 "연기"라고 그들은 말하는데 "현상적 사물이 모두 인(因: 직접원인)과 연(緣: 간접원인)에 따라 생긴다"고 보는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불교의 가장 중요한 중심사상이라 하는데 그런 <인>과 <연>이 진실이라면 그것 역시 일종의 결과일 뿐이요 그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그 최종, 최후 원인, 제1원인이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상(事象)은 항상 서로 관계되어 성립하기 때문에 불변적ㆍ고정적 실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공(空) 사상"이라고 그들은 말하지만, 그렇게 "모두 서로 연계되어 성립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결과일 뿐, 그것이 원인일 수는 없고 반드시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을 무슨 명칭으로 부르든 좋다. 그 원인을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 원인이 바로 "불변적, 고정적 실체"이고 따라서 그 결과도 역시 그러하다. 이를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은 그리 되면 리처드 파인만의 말을 빌려, "지금까지 인과론을 완전히 이해한 사람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가 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하는 것뿐이다. 진리와 진실에는 영구히 이르지 못한다. 불교의 연기론과 관련해 양자역학 운운하는 것은 아전인수(억지로 자기/己에게 이롭도록 꾀함)격에 불과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불교인들이 "불변적, 고정적 실체"라고 강조하듯이 말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킴이다. 인과론을 말하면서 최초 원인인 창조를 부정하는 것은 초등생이라도 알아채릴 수 있는 크나큰 모순이 아닌가. 


상반된 성질로서 서로 대립되어(상대성) 있으면 이것을 짝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반드시 모자 관계 즉 하나는 파생하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파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질이 다르면서도 하나될 수 있는 터이다. 본시 하나에서 둘로 갈라져 나온 것이니까. 양자역학은, 짝의 법칙이 만유의 법칙임을 제대로 이해함으로써만 풀어질 수 있는 "현상"임을 알아야. 20세기에 들어 짝의 법칙이 정립되면서(음양론이 역사는 오래되지만 그것을 법칙 측면에서 고찰된 예가 없고 단지 설/說로만 취급되어 왔으므로) 역시 같은 시기에 양자역학이 등장한 것은 때에 맞춘 것이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성경은 이를 다니엘 예언서를 통해 "한 때, 두 때, 반 때"(단 7:25/12:7/계 12:14)로써 예고했던 것이다. 이 "한 때, 두 때, 반 때"는 짝의 법칙의 구조 도식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한 것이고 또한 짝의 법칙을 모법으로 하는 대표적인 그 자법인 3운법칙이 절묘하게 그림 그리듯그 자체의 구조로써 나타내고 있음으로써 이 사실은 확고부동한 것이다.  


짝을 이룬 둘이 본질은 같으나(이 '같음'을 "한 때, 두 때, 반 때"에서는 하나 곧 1로서 나타내고 3운법칙에서는 FS형의 단축형인 JP로써 그려냄) 성질은 정반대인 것을 "한 때, 두 때, 반 때"에서는 "1X2"와 "1X2"로써 묘사하고, 3운법칙에서는 "19"라는 뚱딴지같은 숫자로 표시함이니 곧 "3X19=57", "19X3=57"로서 19와 3을 엇바꿈으로써 절묘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짝의 법칙 구조(構造)(圖式)에서 본질이 같아 하나가 되어 있음을 로, 성질이 정반대임을 ◐, ◑로 나타냄과 용하게 맞아떨어진다고 하겠다. 어린애 장난같은 유치한 설명이라 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이같이 정하심은 자연계 육체의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인생들에게 지식을 가르치고자 하심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하고자 하심이며  구원의 대상자로는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자연계 속성)를 따라 지혜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으며 출신 성분이 좋은 자가 많지 않다"(고전 1:26) 함과 같이 이런 계층에는 어린 애 정도의 무식자가 대부분이고 실제 어린 아이들도 구원의 대상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굳이 유식한 자의 편을 들어주실 필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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