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는 자"(계 21:8)가 천국에 못들어가는 이유다. 수줍어, 남 눈치 보느라 전도의 말 한 마디 못꺼내는 겁약한 자, 소심한 자(coward, timid)를 의미한 것이다. 사랑의 강함은 죽음과 맞먹는다(마 8:6) 사랑이 없어 약골이다. 그래서 이런 용기 없음이 자아중심으로 인식되는 까닭에 위의 대목에서 보듯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과 동일선상에 놓은 것이다. "믿음이 연약함"(롬 14:1)과 사랑 없음은 별개다. 짝의 법칙에서 이세상은 생명 아닌 죽음 및 그에 수반되는 고통이라 이 죽음의 세력을 움켜쥔(히 2:14) 사탄의 세상이요 따라서 어두움(진리 아닌 거짓과 속임수 일색)의 영역으로(행 26:18) 하나님께서 이미 아담의 범죄와 죽음으로 인해 폐기하신 곳이다. "세상을 사랑한다"(요 3:16) 하심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니 하나님의 창조의 선하신 의도가 아담의 죽음(자연계 몸)으로 완전히 소거(消去)됨을 인해 저주를 내리신 것이 그 증거다(창 3:17). 아담 범죄 후의 인간의 죽음으로 이 "6일" 창조는 일거에 괴멸 상태에 이른 것이니 오죽하면 성경이 "만유 회복"(행 3:21)이란 표현을 하겠는가ㅡ이런 세상 삶에 연연하는 자 그 끔찍한 대가를 치를 것은 불문가지이니 때 늦기 전에 "눈을 뜰"(26:18) 일이다. 밝지 않으면 어둡고 생명 아니면 죽음으로서 암흑과 사망, 거짓, 사탄 등 모두 같은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 이 세상을 사탄이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설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짝의 원리다. 만유는 둘로만 갈라질 수밖에 없다. 둘 다 취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강제 통치는 진정한 질서가 아니다. 고로 임시변통이다. 어느 순간에든 깨끗이 사라질 운명이다. 오직 인간 구원 위해 억지로 이세상을 붙들고 계실 뿐이다. 지혜는, 지금까지의 사탄의 모든 거짓을 털어 버림에 있다.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지혜(똑똑함)다. "마지막 아담" 안에 있지 않는 한 모두가 사탄의 포로인 것이다. 이세상을 대하시는 하나님은 "매일 분노"(시 7:11)뿐이시다. 진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방지해주는 것이 짝의 원리다. 오직 긍휼과 자비는 메시야 우리 주님의 십자가 및 그 보혈 흘려주신 데에서만 찾게 됨이니 주님 다시 오시기까지는 이세상에서 <정상적인> 것은 고통, 비애, 혼돈 등 그 외에는 없다. 검은 것을 희다 하고 흰 것을 검다고 하는 자에게 화가 있다. 이런 간단한 이치라 성경의 지시대로 180도 전환하여 반대쪽으로 돌아서서 그 방향으로만 달려가면 되는 것이다. 왜 뒤로 돌아보는지(눅 9:62)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닌가. 주님께서 그러므로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눅 17:32) 하신 것이다.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13:24)하셨다. 마귀는 이제까지 "은혜", "선물"만 강조하여 "힘씀"을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한 번 구원되었으니 태평이라는 속임수이다. 그렇게 태평이면 아담은 왜 범죄했고 악령들은 왜 생겨났나.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