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5일 수요일

적그리스도 등장의 임박한 환난 대비책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마 19:12).
"결혼하지 않은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고전 7:8).
"주님의 자비하심을 받아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는 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다"(:26).
결혼하는 것이 "죄짓는 것은 아니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애 있을 것이니
나는 너희를 아낀다"(:26).
남녀 공히 결혼하지 않은 자는
"주님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 하되"
결혼한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해야 아내/남편을 기쁘게 할꼬 한다"(:33,34).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마음의 분산)이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려 함이다"(:35).

여기 "자기의 처녀 딸"(:36-38)은 오역으로서 
결혼하지 않은 자 자신의 동정/童貞(virginity)을 말합니다.
"자기의 동정을 결혼으로 바꾸어도 잘하는 것이지만
자기 동정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더 잘 하는 것이다"(:38).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님 안에서만 하고(주님의 뜻을 따라 하고)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을 것이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39,40).

"나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이 독신으로 지내라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 아니고
바울 사도의 개인적 소견이기는 하나
성령의 판단하심이나 자기의 판단이나 같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할 때 첫 마디에, 
"음행을 인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2) 한 후
"이것은 권고일 뿐 명령은 아니니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한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선물)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다"(:7) 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게 주신 바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은사, 선물, gift)은
결혼하는 데에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위의 바울 사도의 권고를 수용하는 것이 "더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과연 주님의 다시 오심이 눈 앞에 다다른 때입니다. 
결혼을 고려하는 이들은 이 점을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절제할 수 없으면"(:9) 결혼해야 득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마음을 굳게 하고,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라면(:37)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잘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경고를 교회에서 말한 적이 없습니다.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니 
각자의 동정이라는 의미를 난데없는 "자기의 처녀 딸"이라고
태연히 번역한 데에서도 완연히 드러납니다.  
59개 영역본을 대조해서 살필 수 있는 Biblegateway에서 
아래 두 군데에만 제대로 번역을 했을 뿐입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참한 수준입니다.
얼마나 인위적인 것이 작용하고 있는지 그 단적인 증거입니다.

세상에 자기 딸 자식의 결혼 의사를 좌지우지하는 부모가 어디 있다기에에
그런 막된 번역을 시도한다는 말입니까.
성경 내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 앞에서 본의아니게 악선전함인 줄도 모르는가요.
그래서 부모("딸"의 아버지)가 아닌 <약혼녀를 둔 약혼남을 다시 엉뚱하게
갖다 붙이는 번역도 다수 있지만 역시 제멋대로의 번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가 "그"라고 남성 대명사를 사용한 것은
(그래서 "딸"의 아버지 또는 약혼남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남녀 모두 같으나 대표적으로 남자의 동정(virginity)을 말했을 뿐입니다.
무조건 남녀니까 결혼해야 한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요.
주님께서 천국을 위하여 고자된 자도 있다고 선언하신 마당이 아닙니까.
받을 만한 자는 받으라 하신 것입니다. 
명령이 아니시지만 반 명령이시라 해도 무방합니다.
명령/계명이 아니시므로 수용 않는다고 죄는 되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은사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고로 "은사" 차원에서 확신이 없으면 "천국을 위함"인데 마다할 이유 있나요.
"천국을 위함"이 우리 구원이 아니라 "천국을 위해 일함"이지 않습니까.
바로 "세상 일을 염려함"과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심적 갈등 내지 분산을
바울 사도는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나요.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고 경고하지 않으면 그런다고 피동적이지 말고
개인 각자가 성령의 지시를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성경은 왜 있는 것인가요, 책장 꽂이 장식용으로 있는가요?
사랑은 그 특징이 주인의식, 주체의식이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문을 두드리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밝혀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을 것이다"(마 24:37,39).
이상 바울 사도를 통해 주시는 경고는 교회에 주시는 경고입니다. 


But if any one think that he behaves unseemly to his virginity, if he be beyond the flower of his age, and so it must be, let him do what he will, he does not sin: let them marry.
But if anyone feels he ought to marry because he has trouble controlling his passions, it is all right; it is not a sin; let him ma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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