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단지 십계명을 어기면 죄인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마 5:28).
여기서 주님은 삶(생명)의 법칙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를 위해 살면 음욕을 품는다.
즉 음욕 채우는 것을 마음에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삶, 의식, 자유 선택이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런 것이 머리에 파고 들어 올 여지가 없다.
마음에 눈길에 잠시라도 머물 공간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 "죄 짓지 못한다"(요일 3:9) 한 것이다.
나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서 산 자라 인식한다면
다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한 삶이다(고후 5:15).
(롬 14:7-9, 갈 2:20, 빌 1:21).
때문에 나의 언행 일체가 주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임을
성경은 아주 못박아버리고 있다(골 3:17).
먹든지 마시든지 모두가 하나님 영광 위주이다(고전 10:31).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으면 절대로 마시지도 먹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죄는 "생명의 법(칙) 위반"이다. 이것이 그 정의/定義다.
다시 말해 "불법/不法"(the transgression of the law__요일 3:4)을 말함이다.
자연법칙을 어기면 자연계가 존속 불가능이듯이
법칙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함을 명확히 지적하는 것이다.
생명 가동/稼動의 법칙, 따라서 이 법칙대로 않으면 생명은 없다.
움직이느냐, 정지하느냐, 있느냐, 없느냐의 양단간의 결과뿐이다.
그러면 어떤 원리로서의 법칙이냐.
몸은 머리 위하고 머리는 몸 위함의 '몸과 머리의 한 몸됨'이 그 원리다.
만유는 다 짝의 원리로 움직이는데 생명의 법칙도 예외가 아니다.
고로 말하는 요지는 내가 회개하는 것도 이 법칙 어김을 통렬히 뉘우침이요
향후로는 사생결단으로 이 법대로 하고 다시는 어기지 않겠다는 다짐이니
구원받은 증거도 바로 이 법칙 준수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
하면 하고 말면 말고─이것이 <법칙> 사고방식이다.
준수하느냐, 어기느냐 둘 중 하나이지 달리 무엇이 개재 않는다.
어기든 지키든 당연한 그 결과를 거둘 것이다.
이렇게 바로 알고 행동해야 영생에 들어가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만 속일 뿐 나중에 가서 후회해보아야 엎지른 물이다.
그냥 그저 믿는다는 표시로 교회에나 나가고 그래서 나는 믿으니까 영생한다고
자신하는 그런 것은 종교일 뿐이다. 사실에 근거한 확신일 수가 없다.
주님 나 위해 죽으셨으니 나도 그 본을(머리께서 보이신) 따라
주님 위해 목숨을 버림이, 주님께 나 자신을 바침이,
(주님께서 그 자신을 송두리째 내게 선물로 주셨으니까), 이상의 법 준수인 것이다.
보이시지 않는 하나님 사랑은 당연히 그 순서가
보이는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기에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한 것(요일 3:16).
주님께서 목숨 버려 사랑하신 형제이니 내가 주님 사랑한다면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사랑함은(요일 5:1) 당연 사리/事理이고 도리/道理다.
따라서 내가 주님을 위해 산다고(구원받았다고) 확신한다면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법칙을 따름이기에 <죄가 없다>.
이렇게 중심 가닥만 잡으면 소소하고 세세한 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지혜도 주시고 적절히 이끌어 가시며
때로는 회초리를 드시고 징계 등을 하시지만
그런 경우를 죄 짓는 것과는 결부시키지 않으니 차원이 다르기 때문.
나는 어찌하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일념뿐이면(고전 7:32/고후 5:9)
죄 없는 것이니, 우리의 의롭다 하심은 죄인임에도 그렇게 봐주심이 아니라,
이와 같이 실제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위해 사니까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주님 위해 사는 것을 의미) 바로 그것이 의인의 모습인 것.
딴에는 겸손인지 아니면 무식인지 "죄인, 죄인"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그 목적지가 영생이 아니라 자기 말대로 멸망인 줄 알아야 하는 것.
마귀는 죄를 막연한 알쏭달쏭 개념으로 뒤범벅을 만들어 죄짓게 획책한다.
무엇이 죄이고, 죄가 아닌지를 확연하게 구별해 보는 눈이 죄를 이기는 지름길의 하나다.
마귀의 농락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자아중심으로는 이 세상에서든 오는 세상에서든 일절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 증거가 ① 가인이 아베을 죽인 예이고 그리고 ② 3운법칙이다.
사람 나자마자 죽이기부터 먼저 하는 판이니 그래서 3운법칙으로 제동을 거신 것이다.
이 3운법칙이 인생들을 관장하지 않았다면 서로 죽이고 하여 세상을 벌써 끝났을 것.
모든 인간을 자기 죽을 때 죽도록 울타리를 쳐주시는 것이 3운법칙이라면
코흘리개로 죽고 10, 20대에 죽는 것은 어찌 된 일이냐, 사산/死産돼 나오는 인생도 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네피림 같은 반/半 사람도 있어서다.
그런 자들은 구원과는 무관하므로 태에서부터 죽어 나옴으로써
인생의 자연계 육체의 허무함을 일깨우시는데 활용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태에서부터 죽어 나오는 것을 모두 네피림족이라 단정할 것은 없다.
우리 피조물된 자들이 이것저것 따지는 것 자체가 합당한 자세는 아니다.
알 만한 것은 알아야 하겠지만 성경도 필요 없는 것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을 보라.
창세기 초두에 하나님의 "6일 창조" 시작 전 물부터 나온다.
땅은 또 물 속에 풀어져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 연유에 대해 성경은 일절 함구다.
알아서 득보다 해가 될 소지가 있으므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해 버린 것이다.
성경이 지어낸 인간의 거짓말이라면 절대로 이렇게 하지 않는다.
반드시 물은 어떻게 되어 생겼고 땅은 왜 물 속에 풀어 있는지 설명을 지어내게 돼 있다.
이런 것이 성경의 진실성의 자체 증명이다.
네피림의 생성은 하나님의 정하신 유전 법칙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옳다.
따라서 아담계/係의 남자와 아담계의 여자가 낳은 자식은 남자계 일색이지만
악령계의 남자와 아담계의 여자로 인한 자식들 중에
여자의 아담계가 작용할 수도 있어 개중에는 네피림이 아닌 사람(아담 혈통)도
있을 수 있다고 할 때 누가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고로 이런 것도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고 그냥 넘어가버려도 무방한 것 중 하나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 구원의 진리에 손상/차질이 오는 것도 아니니까.
네피림이라고 일찍 죽게 하시는 것은 또 물론 아니고
기타 등등의 이유가 있겠지만 현재로는 역시 우리의 이해 한계 밖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생략>의 의미가 이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자연법칙이 짝의 원리로 말미암아 운용되듯이
삶의 법칙도 같은 원리를 따라 어김 없이 진행되니까
여기서 낙오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 감이 현명할 것이다.
생명의 법칙은 둘이 하나되는 사랑의 법칙으로서
너는 나를 위하고 나는 너를 위함의
머리와 몸의 관계로 한 몸됨이 그 원리이므로
이제 내가 주님과 하나되어 구원되었은즉
내가 주님을 위하고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 한
나는 의인의 자리에 있지 죄인의 위치가 아니다.
이것을 새 창조 또는 다시 출생함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새로 창조하시는데
죄 짓는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또 육으로 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다시 나는데
성령으로 났으니 성령으로 살고 행령으로 행하는 것.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한 영됨으로서
한 몸됨은 남자 몸은 여자 것, 여자 몸은 남자 것임과 같이
나의 삶은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주님의 삶은 나 위한 것임을
주님은 이미 그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확증하신 것이다.
이제까지 구원받았다면서 자기 위해 살았다면
그 구원의 확신은 말짱 물거품이니, 나를 위해 산 것을
회개하여 죽든지 살든지 오직 마지막 아담이신 주님 위해
살기로 결심하면 당신도 얼마든지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을 떠나서는 인간일 수조차도 없는 사실을 명심해야.
인간으로 창조되었는데 인간이 아니라면 그 존재는 없다.
다시 말해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고 천사도 아닌
말 그대로 멸망 덩어리 고통과 비애의 화신/化身으로만 전락한다.
이를 갊과 슬피 욺의 화신. 영원한 화신. 영원성을 되새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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