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7일 화요일

주님처럼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라야 고난받아 새 생명의 탄생(이웃 구원)으로 연결되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필요불가결하게 주님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게 돼 있어(골 1:24)
이렇게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보내심 받아(요 20:21,22) 고난 받는 것인데
(초자연계 영광의 몸으로는 이런 죽음의 고난 받을 수 없어 그러면 영혼 구원도 불가능)
그런데도 이 세상 살고자 한다면 죽음의 고난 받으면서 고난 없는 편한 삶을 누리려 하니
이런 엄청난 모순 자가당착 속에 있으니 믿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사람들 보기에는 또 
자신이 보기에도 교회는 나가니 안믿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실상대로 말하면 말짱 남도 속이고 나 자신도 속이는 것밖에 없다.
더 이상 이런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지 말아야. 자살 행위밖에 더 되지 않으니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이다"(고후 13:5).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은 짝의 법칙 따라 둘이 하나됨으로 가능.
둘이 하나됨은 반드시 나는 너를 위해 살고 너는 나를 위해 사는 삶이 기본이자 철칙
그렇지 못하다면 둘이 하나됨이 아니라는 뜻.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음.
이것은 엄밀 엄격한 법칙 차원에서 이해하고 확신을 가져야.
결코 얼렁뚱땅, 대충대충이 통하지 않음을 알아야. 

여기서 산다는 말의 요점은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킴.
다시 말해 주님을 365일 24시간 뵈며 살아야. 지금은 주님을 볼 수 없지 않은가.
볼 수 없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살지 않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님.

달리 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어 내가 주님을 보는 순간
내 몸(자연계 썩는 육체 이 누더기 같고 걸레 같은, 보기도 징그러운
속에는 번들번들 물기 가득한 금방이라도 썩을 수 있는 본질의)이 비로소
휘황 찬란한 빛과 같은 영광의 몸(썩음의 물로 된 것이 아니고
즉 반/물질의 자유가 없는 물질의 법칙의  제약을 받는)으로 변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것.
그런 몸으로 사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 사는 것이지
이런 쓰잘데 없고 보잘것 없는 육체로 천년 만년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 차원에서 누구나 알 수 있고 판단 가능한 것.  

물론 지금 내가 성령으로 계시는 주님과 함께 생명의 법칙대로 사는 것도 사는 것이나
그것은 영적으로 사는 것이지 올바른 육체를 가져 육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영원한 영혼과 걸맞게 영원한 속성의 육체로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적인 삶의 의미로 말하면 죽어 무덤 속에 있는 것이 세례(물) 받음의 의미.
영과 아울러 육이 영원한 속성으로 살아나야 사는 것. 육으로는 아직 죽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지금 영광 중에 계심은 나도 그렇게 되리라는 산 소망의
근거가 되어 있기에 그 중요성은 막중하니 그래서도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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